15화(5,37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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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커피 냄새가 먼저 안방 문틈으로 들어왔다⁠. 원두 가는 소리⁠, 뜨거운 물을 두 번에 나눠 붓는 소리⁠, 머그잔 두 개를 식탁에 내려놓는 소리⁠. 한 달 전 첫날 아침과 같은 순서였다⁠. 지애는 눈을 뜨고 한참 누운 채 소리를 들었다⁠. 같은 순서인데 다르게 들렸다⁠. 소리 하나하나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제는 알았다⁠.

2027년 5월 6일 목요일이었다⁠. 지애는 어깨에 닿는 머리를 낮게 묶고 금테 안경을 썼다⁠. 옷장에서 연두색 니트를 꺼냈다가 도로 넣고⁠, 다시 꺼내 입었다⁠. 가운 없이 입는 연두색 니트는 처음이었다⁠.

식탁 앞에 성규가 서 있었다⁠. 회색 후드 집업⁠, 덥수룩한 머리⁠, 손에 머그잔 두 개⁠. 성규가 하나를 지애 자리에 놓았다⁠. 이가 나간 손잡이가 지애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애는 머그잔을 보았다⁠. 받지 않았다⁠. 아직은⁠.

율비가 책가방을 메고 방에서 나왔다⁠. 엄마와 아빠와 머그잔을 차례로 보았다⁠.

“⁠오늘 법원 가⁠?⁠”

“⁠응⁠.⁠”

“⁠둘이 알아서 해⁠.⁠” 율비가 운동화를 꿰었다⁠. “⁠대신 둘이 같이 정해⁠. 하나가 정하고 하나가 따라가는 거 말고⁠.⁠”

“⁠그건 누구한테 배웠어⁠?⁠”

“⁠엄마 아빠한테⁠. 한 달 동안⁠.⁠” 율비가 현관문을 열다가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이혼하면 탕수육은 부먹으로 통일해⁠. 찍먹은 엄마밖에 없잖아⁠.⁠”

문이 닫혔다⁠. 성규가 웃음을 참느라 머그잔에 코를 박았다⁠. 지애는 웃지 않으려다 실패했다⁠.

*

차를 판 뒤라 버스를 탔다⁠. 단지 정류장에서 빨간 광역버스가 왔다⁠. 열두 해 전 지애가 아침마다 타던 번호였다⁠. 성규가 먼저 타고 지애가 뒤따랐다⁠. 지애는 창가 둘째 줄에⁠, 성규는 통로 건너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두 정거장을 지나서 성규가 일어났다⁠. 통로를 건너와 지애 옆자리에 앉았다⁠. 지애는 창밖만 보았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둘의 어깨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열두 해 전에 왜 안 깨웠어⁠?⁠” 지애가 창밖을 보며 물었다⁠.

“⁠깨우면 안 잘 거잖아⁠.⁠”

“⁠잤어야 했어⁠?⁠”

“⁠당신은 버스에서만 잤어⁠. 다른 데서는 안 자는 사람 같았어⁠.⁠” 성규가 앞좌석 등받이를 보며 말했다⁠. “⁠약리학 책 펴 놓고⁠, 형광펜 쥐고⁠. 두 정거장만 지나면 고개가 이렇게 넘어왔어⁠. 깨우면 다음 날부터 안 잘까 봐⁠.⁠”

지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가 자유로로 접어들었다⁠. 강물이 아침 햇빛에 하얗게 번쩍였다⁠. 밤새 잠을 설친 눈이 무거웠다⁠. 지애는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지애의 뺨이 성규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후드 집업 천에서 커피 냄새와 딸기 향료 냄새가 났다⁠. 금요일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지애는 고개를 들었다⁠.

“⁠나 잤어⁠?⁠”

“⁠두 정거장⁠.⁠”

“⁠침은⁠?⁠”

“⁠안 흘렸어⁠. 약리학 책이 없어서⁠.⁠”

지애가 성규의 팔을 주먹으로 쳤다⁠. 앞자리 할머니가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

법원 대기실 벽 화면에 번호가 떠 있었다⁠. 「⁠현재 14번⁠」 성규는 손에 쥔 번호표를 보았다⁠. 17번⁠. 대기 의자에 앉은 부부들은 저마다 한 칸씩 띄워 앉아 있었다⁠. 바닥 왁스 냄새와 자판기 커피 냄새가 났다⁠. 한 달 전 상담실 복도와 같은 냄새였다⁠.

맞은편 의자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치냉장고 노부부였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대답할 거야⁠.⁠”

“⁠같이 들어가는 거래⁠, 영감⁠.⁠”

“⁠그럼 내가 먼저 대답할 거야⁠.⁠”

“⁠판사님이 누구한테 먼저 물을지 어떻게 알아⁠?⁠”

할머니가 지애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애도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새댁⁠, 김치냉장고 어떻게 했어⁠?⁠”

“⁠장모님 드리기로 했어요⁠.⁠” 성규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그게 제일 깔끔해⁠.⁠” 할아버지가 무릎을 쳤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째려보았다⁠. 둘은 처음으로 같은 의견이 되었다가⁠, 바로 다음 순간 누가 먼저 대답하느냐로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화면이 「⁠16번⁠」으로 바뀌었다⁠. 지애가 일어나 복도 창가로 갔다⁠. 성규가 따라갔다⁠. 창밖으로 법원 주차장이 보였다⁠. 지애가 창틀을 쥐고 성규를 돌아보았다⁠.

“⁠당신 먼저 말해⁠.⁠”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열한 해 동안 지애가 성규에게 먼저 하라고 한 일을 성규는 하나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집도⁠, 대출도⁠, 율비 학원도⁠, 이혼 날짜도 지애가 먼저였다⁠.

“⁠판사님 앞에서⁠?⁠”

“⁠응⁠. 당신이 먼저⁠. 나는 듣고 말할게⁠.⁠”

“⁠내가 뭐라고 할지 안 물어봐⁠?⁠”

“⁠안 물어봐⁠.⁠” 지애가 창틀을 놓았다⁠. “⁠물어보면 내가 또 정하게 되잖아⁠.⁠”

화면이 「⁠17번⁠」으로 바뀌었다⁠. 직원이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

확인 법정은 지애가 생각한 것보다 작았다⁠. 판사석이 조금 높았고⁠, 판사석 앞에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판사는 쉰 살쯤 된 여자였다⁠. 서류를 넘기다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보았다⁠. 둘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 사이가 한 뼘쯤 떨어져 있었다⁠.

“⁠채지애 씨⁠, 마성규 씨 맞으시죠⁠?⁠”

“⁠네⁠.⁠”

“⁠네⁠.⁠”

“⁠숙려 기간이 끝났습니다⁠. 두 분 다 이혼할 뜻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판사가 지애를 보았다⁠. “⁠채지애 씨⁠, 이혼할 뜻이 있습니까⁠?⁠”

지애는 숨을 들이마셨다⁠. 법정에는 아무 냄새도 없었다⁠. 종이 냄새가 조금⁠, 그뿐이었다⁠. 지애는 무릎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

“⁠판사님⁠, 남편 대답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판사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지애를 보고 성규를 보았다⁠. 잠깐 무언가를 재는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마성규 씨⁠, 먼저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앞만 보고 있었다⁠. 맞잡은 손가락 끝이 하얬다⁠. 성규는 판사를 보았다⁠.

“⁠아니요⁠.⁠”

법정이 조용했다⁠. 성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가 곧 가라앉았다⁠.

“⁠저는 이혼할 뜻이 없습니다⁠. 다시 살아 보고 싶습니다⁠. 대신 이번에는 말하면서요⁠. 금요일에 어디 가는지⁠, 무엇을 갚는지⁠, 무엇이 싫은지⁠. 커피 내리는 대신 말하겠습니다⁠.⁠” 성규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내가 정하기 전에 제가 먼저 정하는 것도 하나씩 해 보겠습니다⁠. 오늘처럼요⁠.⁠”

판사가 지애를 보았다⁠.

“⁠채지애 씨는요⁠?⁠”

지애는 맞잡은 손을 풀었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저도 이혼할 뜻이 없습니다⁠.⁠” 지애가 말했다⁠. “⁠남편이 먼저 말하는 걸 처음 들었어요⁠. 열한 해 만에요⁠. 더 들어 보고 싶어요⁠.⁠”

판사가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났다⁠.

“⁠두 분 모두 이혼할 뜻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혼 의사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신청은 효력을 잃습니다⁠.⁠” 판사가 펜을 내려놓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두 분⁠, 다음에는 법원 말고 식탁에서 하세요⁠. 저도 점심 먹어야 돼서요⁠.⁠”

지애가 웃음을 터뜨렸다⁠. 성규도 따라 웃었다⁠. 판사는 웃지 않고 다음 서류를 집었다⁠. 다만 입꼬리 한쪽이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

법원 계단을 내려오며 성규는 휴대전화를 켰다⁠. 문자가 줄줄이 와 있었다⁠. 덕희가 세 통⁠, 희철이 두 통이었다⁠.

「⁠서방⁠, 어떻게 됐어⁠」 「⁠서방⁠, 전화 받아⁠」 「⁠서방⁠, 칼국수 반죽해 놨어⁠」

「⁠남편분⁠, 저 6월 말에 시장 골목으로 옮깁니다⁠. 간판은 그냥 방희철 중개라고 달았어요⁠. 물푸레는 그분 건물 이름이라서요⁠.⁠」 「⁠연 씨 부부 대출 서류 내일 은행 갑니다⁠. 손 안 잡고 가셔도 됩니다⁠.⁠」

성규는 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애가 성규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가져가 귀에 댔다⁠.

“⁠엄마⁠, 나야⁠. 안 했어⁠. 응⁠. 같이 정했어⁠.⁠” 지애가 한참 듣다가 웃었다⁠. “⁠부적 덕분 아니야⁠. 응⁠, 알았어⁠. 토요일에 갈게⁠. 칼국수는 내가 밀게⁠.⁠”

전화를 끊고 지애가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법원 앞 정류장 의자에 둘이 앉았다⁠. 버스가 오려면 십이 분이 남아 있었다⁠.

“⁠약국은 어떡할 거야⁠?⁠” 성규가 물었다⁠.

“⁠찾아볼게⁠. 새 동네에서⁠.⁠” 지애가 말했다⁠. “⁠약국장님이 어제 문자 보냈어⁠. 돌아오라고⁠. 미안하다고⁠. 안 간다고 했어⁠. 미안하다는 말은 받았어⁠.⁠”

“⁠전세는⁠?⁠”

“⁠같이 보러 가⁠. 이번에는⁠.⁠” 지애가 성규를 보았다⁠. “⁠당신이 하나 고르고 내가 하나 골라서⁠, 율비한테 고르라고 하자⁠.⁠”

“⁠율비는 탕수육 부먹인 집 고를 거야⁠.⁠”

“⁠그런 집이 어디 있어⁠.⁠”

“⁠찾아보면 있겠지⁠.⁠”

성규의 휴대전화가 한 번 더 울렸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였지만 누구인지 알았다⁠.

「⁠5동 가계약 정식 계약으로 바꿨습니다⁠. 5억 7천⁠. 9동⁠, 12동도 이번 주 안에 합니다⁠. 오늘 결과는 묻지 않을게요⁠. 석묘진⁠」

성규가 화면을 지애에게 보여 주었다⁠. 지애는 문자를 끝까지 읽고⁠, 한 번 더 읽었다⁠.

“⁠답장해⁠?⁠”

“⁠뭐라고⁠?⁠”

지애가 잠깐 생각했다⁠. “⁠수고하셨어요⁠.⁠”

“⁠그건 그분이 대리비 주면서 나한테 한 말이야⁠.⁠”

“⁠그러니까⁠. 숫자 말고 한 말도 돌려줘야지⁠.⁠”

성규는 그대로 쳐서 보냈다⁠. 답은 오지 않았다⁠. 버스가 왔다⁠. 둘은 이번에는 처음부터 나란히 앉았다⁠.

*

저녁 여덟 시⁠, 1101호 거실에 빈 이삿짐 상자가 다섯 개 접힌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잔금은 6월 말이었고⁠, 짐을 싸기에는 일렀다⁠. 지애가 오후에 동네 마트에서 얻어 온 상자였다⁠. 일찍 얻어 놓으면 마음도 일찍 준비된다고 지애가 말했고⁠, 성규는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대신 상자 하나를 펴서 베란다로 가져가⁠, 향료 병을 신문지에 하나씩 싸서 넣었다⁠.

율비는 식탁에서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지우개 가루를 모아 공을 만들면서⁠. 할머니가 싸 준 면 봉지가 식탁 끝에 놓여 있었다⁠.

성규가 부엌에서 커피를 내렸다⁠. 저녁에 커피를 내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두 가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율비가 연필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밤에 커피 마시면 잠 안 와⁠.⁠”

“⁠오늘은 안 자도 돼⁠.⁠” 성규가 말했다⁠.

“⁠왜⁠?⁠”

“⁠생각할 게 많아서⁠.⁠”

“⁠숙려 끝났잖아⁠.⁠”

“⁠끝나도 생각은 해⁠.⁠”

율비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연필을 잡았다⁠.

지애는 소파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법원 봉투가 있었다⁠. 「⁠5월 6일 오전 10시⁠」 날짜가 지난 봉투였다⁠. 지애는 봉투를 두 번 접어 소파 앞 낮은 탁자 위에 놓았다⁠.

성규가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왔다⁠. 소파에 앉지 않고 지애 앞에 서서⁠, 하나를 내밀었다⁠. 이가 나간 손잡이가 지애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김이 올라왔다⁠. 갓 내린 커피에서 볶은 콩 냄새가 났고⁠, 콩 냄새 밑으로 성규의 후드에 밴 딸기 향료 냄새가 났다⁠.

지애가 손을 뻗어 머그잔을 받았다⁠. 손잡이의 이 나간 자리가 엄지에 닿았다⁠. 열한 해 동안 같은 자리였다⁠.

성규가 지애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 쿠션은 없었다⁠. 지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머그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접힌 법원 봉투 위였다⁠. 뜨거운 잔 밑바닥이 종이를 눌렀다⁠. 성규도 자기 잔을 봉투 위 지애의 잔 옆에 내려놓았다⁠. 두 잔이 나란히 봉투를 누르고 있었다⁠.

베란다 상자 속에서 신문지에 싼 향료 병들이 서로 부딪혀 작게 쨍그랑거렸다⁠. 율비가 지우개 공을 손바닥에서 굴렸다⁠. 지애가 잔을 들자⁠, 하얀 봉투 위에 커피 자국 하나가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성규가 잔을 들자 바로 옆에 하나가 더 생겼다⁠. 두 개의 갈색 동그라미가 반쯤 겹쳐서⁠, 날짜가 지난 「⁠5월 6일⁠」 글씨 위로 천천히 말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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