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38자)

배액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화요일 아침⁠, 희철이 식탁에 원두 봉지를 내려놓고 앉았다⁠. 은단 통 대신 율비의 슬라임 통을 주머니에서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성규와 지애는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쿠션도 머그잔도 없었다⁠.

“⁠가계약금이 천이니까 깨려면 이천이에요⁠.⁠” 희철이 말했다⁠. “⁠받은 천을 돌려주고⁠, 천을 더 얹어서⁠. 금요일까지는 하셔야 돼요⁠. 그분은 주말 넘기면 정식 계약서를 들고 오실 거예요⁠. 그다음엔 깨는 돈이 훨씬 커져요⁠.⁠”

“⁠깨자⁠.⁠” 지애가 말했다⁠.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지애가 입을 다물고 성규를 보았다⁠. 이번에는 정해 놓고 알려 주는 말이 아니었다⁠. 정하자고 내미는 말이었다⁠.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깨자⁠.⁠”

“⁠이천 있으세요⁠?⁠” 희철이 물었다⁠.

둘 다 대답하지 않았다⁠. 희철이 슬라임을 꾹 눌렀다⁠. 슬라임이 손가락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통장 얘기는 제가 들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저는 가 보겠습니다⁠.⁠” 희철이 일어나다가 다시 앉았다⁠. “⁠아⁠, 그리고 연 씨 부부 가계약금 돌려드렸을 때 제가 수수료 받은 거 있잖아요⁠. 백오십⁠. 그거 돌려드릴게요⁠. 받으신다고 하시면⁠.⁠”

“⁠소장님⁠.⁠”

“⁠받으신다고 하시면요⁠. 안 받으시면 율비 슬라임 하나 더 사 줄게요⁠.⁠”

희철이 나가고 현관문이 닫혔다⁠. 성규는 은행 앱을 열었다⁠. 지애는 계산기를 꺼냈다⁠. 둘이 동시에 숫자를 찾다가 동시에 멈췄다⁠. 생활비 통장⁠, 율비 학원비⁠, 관리비⁠, 다음 달 대출 이자⁠. 이천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 팔게⁠.⁠” 성규가 말했다⁠.

“⁠당신 차잖아⁠. 열 해 탄 거⁠.⁠”

“⁠분유 냄새 나는 차⁠.⁠”

“⁠안 나⁠.⁠”

“⁠나⁠.⁠”

지애는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성규가 아끼는 것을 성규가 먼저 내놓겠다고 했다⁠. 지애는 내 것부터 내놓겠다는 말을 꺼내려다가 삼켰다⁠. 내 것부터라는 말도 결국 혼자 정하는 말이었다⁠.

“⁠같이 팔러 가⁠.⁠”

*

화요일 저녁⁠, 율비가 학원에서 돌아와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율비가 돼지 저금통 하나와 분홍색 통장 하나를 안고 나왔다⁠. 거실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 저금통 배의 마개를 뽑았다⁠.

“⁠이거 보태⁠.⁠”

동전이 거실 바닥에 쏟아졌다⁠.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 가끔 십 원짜리⁠. 동전 굴러가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율비가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에는 구십이만 원 있어⁠. 세뱃돈이랑 생일 돈⁠.⁠”

“⁠율비야⁠, 그건 안 돼⁠.⁠” 지애가 말했다⁠.

“⁠왜⁠?⁠”

“⁠그건 율비 돈이야⁠.⁠”

“⁠이 집도 내 집이잖아⁠.⁠” 율비가 통장을 꼭 쥐었다⁠. “⁠엄마 아빠가 같이 정한다며⁠. 나도 같이 정할래⁠. 나도 이 집에 살잖아⁠.⁠”

지애와 성규가 서로를 보았다⁠. 둘 다 할 말이 없었다⁠. 율비가 통장을 소파 위에 올려놓고 동전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그럼 동전만⁠. 동전은 아무도 세는 거 귀찮아하잖아⁠.⁠”

지애가 율비 옆에 앉았다⁠. 약국 조제실에서 하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동전을 다섯 개씩 밀어 모았다⁠. 손이 빨랐다⁠. 율비가 눈을 크게 떴다⁠.

“⁠엄마 동전 세는 거 왜 이렇게 잘해⁠?⁠”

“⁠열한 해 동안 알약 셌어⁠.⁠”

“⁠그럼 아빠는 뭐 잘 세⁠?⁠”

성규가 바닥에 앉았다⁠. 오백 원짜리 하나를 집어 코에 댔다⁠.

“⁠아빠는 냄새 세⁠. 이 동전은 떡볶이 냄새 나네⁠. 학원 앞 분식집⁠.⁠”

“⁠맞아⁠!⁠” 율비가 깔깔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율비 돈은 다 떡볶이 냄새 나⁠.⁠”

동전은 삼만 이천 칠백 원이었다⁠. 지애가 동전을 비닐봉지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천만 원 옆에 놓으면 보이지도 않을 돈이었다⁠. 셋 다 그것을 알았고⁠, 셋 다 동전 봉지를 오래 보았다⁠.

*

수요일 새벽 여섯 시⁠, 묘진은 상가 2층 창가에 서 있었다⁠. 공기청정기 두 대가 돌았다⁠. 지애가 팔았던 바탕 연고를 손등에 펴 발랐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묘진은 그것이 좋았다⁠.

창밖으로 4단지 아파트들이 새벽빛에 하나씩 드러났다⁠. 3동 702호 베란다에는 낯선 화분이 놓여 있었다⁠. 열다섯 해 전에 묘진이 신혼 살림을 들였던 집이었다⁠. 급매로 판 뒤 집은 주인이 세 번 바뀌었다⁠. 묘진은 그중 어느 때도 702호를 다시 사지 않았다⁠. 살 수 있는 값이 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도⁠.

휴대전화 화면에 해외 뉴스가 떠 있었다⁠. 「⁠미국 중앙은행⁠, 올해 금리 인하 없을 수도⁠」 바다 건너 한 줄이 이 단지의 급매를 하나 더 만들었다⁠. 묘진은 뉴스를 넘기고 가계약서 네 장을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쳤다⁠. 5동⁠, 9동⁠, 12동⁠, 그리고 1101호⁠.

1101호는 깨질 것이다⁠. 묘진은 그것을 화요일 아침에 알았다⁠. 방 소장이 열한 통의 문자를 읽지 않았을 때부터 알았고⁠, 마성규가 서명할 때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혼자 정해 본 적 없는 사람이 혼자 정한 것은 오래 못 간다⁠.

깨지면 1101호는 6억을 받으려 할 것이다⁠. 6억에 팔리면 5동과 9동과 12동은 묘진의 5억 2천을 거절하고 6억을 기다릴 것이다⁠. 5동 부부는 숙려가 끝나면 각자 전세를 구해야 하고⁠, 9동은 다음 달 대출 이자를 못 낸다⁠. 12동 남편은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는다⁠. 기다리다가 경매로 가면 은행이 먼저 가져가고 남는 것이 없다⁠. 묘진은 이 계산을 몇 번이고 다시 했다⁠. 틀린 데가 없었다⁠.

묘진은 노트북을 열어 소통방 글쓰기 창을 띄웠다⁠. 「⁠411동 주민⁠」처럼 이름 없는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공짜라서 믿을 수가 없다⁠. 묘진은 돈이 드는 말만 했다⁠. 이름을 걸면 돈이 든다⁠.

여섯 시 반⁠, 묘진은 휴대전화를 들어 어머니 집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다섯 번 가고 나서 딸이 받았다⁠. 열일곱 살의 목소리는 잠이 덜 깨 있었다⁠.

“⁠왜⁠?⁠”

“⁠학교 가니⁠?⁠”

“⁠가지 그럼⁠.⁠”

“⁠아침 먹고 가⁠.⁠”

“⁠엄마는⁠?⁠”

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침을 먹었느냐는 말을 딸에게서 들은 것이 몇 해 만인지 따져 보려다 그만두었다⁠. 딸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묘진은 꺼진 화면을 한참 보았다⁠. 화면에 비친 얼굴에 화장기가 없었다⁠.

마성규가 운정까지 운전하던 손이 떠올랐다⁠. 한 번도 브레이크를 세게 밟지 않았다⁠. 묘진은 글을 다 쓰고 저장만 해 두었다⁠. 노트북을 덮기 전에 한 번 더 읽었다⁠. 한 글자도 고칠 데가 없었다⁠.

*

목요일 오후⁠, 중고차 매입 업체 직원이 회색 승합차 운전석 문을 열었다⁠. 고개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더니 성규를 돌아보았다⁠.

“⁠사장님⁠, 이 차 아기 있었어요⁠? 분유 냄새 나는데요⁠.⁠”

성규가 지애를 보았다⁠. 지애는 직원 옆으로 가서 운전석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후 햇볕에 데워진 시트에서⁠, 아주 희미하게⁠, 달고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열 해 전 율비가 뒷좌석 카시트에 흘린 분유를 닦던 냄새였다⁠. 비 오는 날 창문을 닫으면 난다는 냄새는 햇볕에 데워져도 났다⁠.

“⁠나네⁠.⁠” 지애가 말했다⁠.

“⁠거봐⁠.⁠”

“⁠열 해 동안 안 난다고 했는데⁠.⁠”

“⁠열 해 동안 내가 맞았어⁠.⁠”

직원이 서류에 숫자를 적어 내밀었다⁠. 팔백오십⁠. 성규는 숫자를 보고 차 지붕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 율비를 처음 태워 집에 오던 날 운전대를 잡은 손이었다⁠. 지애는 성규의 손등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규가 서명했다⁠. 이번에는 혼자 서명한 것이 아니었다⁠. 지애가 옆에서 볼펜을 건넸다⁠.

집에 돌아오니 현관 앞에 덕희가 서 있었다⁠.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왔다고 했다⁠.

“⁠이거⁠.⁠”

덕희가 보자기를 풀었다⁠. 은행 봉투 열 개가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천만 원⁠. 적금 깼어⁠.⁠”

“⁠엄마⁠.⁠”

“⁠너 결혼할 때 못 준 돈이야⁠. 가게 할 때 다달이 부었어⁠. 결혼 선물로 주려고⁠. 근데 그해에 가게가 망해서 못 줬어⁠. 그 뒤로는 부끄러워서 못 줬고⁠.⁠” 덕희가 봉투 묶음을 지애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내 빚이야⁠. 서방이 여섯 해 동안 갚은 거⁠, 엄마가 이번 한 번은 갚을게⁠.⁠”

“⁠엄마 노후 돈이잖아⁠.⁠”

“⁠노후는 엄마가 정해⁠.⁠” 덕희가 지애의 손을 봉투째 감싸 쥐었다⁠. “⁠이번엔 네가 정하지 마⁠.⁠”

지애는 봉투 묶음을 내려다보았다⁠. 고무줄이 낡아서 끝이 끈적했다⁠. 열한 해 전 결혼식 날 덕희가 식장 구석에서 혼자 울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 지애는 봉투를 받았다⁠. 받는 것을 정한 사람은 지애가 아니었다⁠. 처음이었다⁠.

팔백오십⁠, 천⁠, 그리고 희철의 백오십⁠. 이천이었다⁠. 율비의 동전 봉지는 식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

금요일 오후 세 시⁠, 성규와 지애는 같이 상가 계단을 올랐다⁠. 계단 밑에서 희철이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양복 주머니가 슬라임 통으로 불룩했다⁠.

“⁠저는 여기 있을게요⁠. 제가 올라가면 그분이 숫자를 하나 더 부르실 거예요⁠.⁠”

“⁠소장님은 왜요⁠?⁠”

“⁠저는 그분한테 아직 삼천 빚이 있잖아요⁠.⁠” 희철이 웃었다⁠. “⁠빚진 사람이 옆에 있으면 빚 준 사람 목소리가 커져요⁠. 이십 년 봤어요⁠.⁠”

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래층 약국에서 소독약 냄새가 올라왔다⁠. 지애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열한 해 동안 맡던 냄새였고⁠,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으로 맡는 냄새였다⁠. 2층 문 앞에서 둘은 잠깐 멈췄다⁠. 지애가 성규를 보았다⁠. 성규가 문을 열었다⁠.

묘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둘이 들어오자 묘진은 놀라지 않았다⁠.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해지하러 오셨죠⁠?⁠”

“⁠네⁠.⁠” 지애가 해지 통보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천 보내 드릴게요⁠. 지금⁠.⁠”

성규가 휴대전화로 이체했다⁠. 묘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묘진은 화면을 확인하고 해지 통보서에 서명했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받았어요⁠.⁠” 묘진이 통보서를 반으로 접었다⁠. “⁠이제 누가 사요⁠, 이 집을⁠?⁠”

“⁠제값 주는 사람이요⁠.⁠”

“⁠제값이 뭔데요⁠?⁠” 묘진이 지애를 보았다⁠. “⁠두 분은 손님들한테 연기했잖아요⁠. 이혼 숙려 중인 집을 사이좋은 집이라고⁠. 저는 처음부터 숫자를 말했어요⁠. 5억 1천⁠, 5억⁠, 5억 3천⁠. 한 번도 꾸미지 않았어요⁠. 누가 정직해요⁠?⁠”

지애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성규가 먼저 말했다⁠.

“⁠연기는 했어요⁠. 근데 연기하면서 서로 못 들은 걸 들었어요⁠. 버스 이야기도⁠, 향수 회사도⁠, 약국도⁠. 손님들한테 보여 준 건 가짜였는데⁠, 저희가 들은 건 진짜였어요⁠.⁠”

“⁠그건 두 분 사정이죠⁠. 집 사는 사람 사정이 아니에요⁠.⁠” 묘진이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 주었다⁠. 소통방 글쓰기 창이었다⁠. 이미 써 둔 글이 있었다⁠. “⁠저는 이름 없는 글은 안 써요⁠. 이름 걸고 써요⁠.⁠”

「⁠411동 1101호는 이혼 숙려 중입니다⁠. 집을 보여 주는 날마다 사이좋은 부부를 연기해 왔습니다⁠. 매수 예정자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가 소유주 석묘진⁠.⁠」

“⁠지금 올리시려고요⁠?⁠” 지애가 물었다⁠.

“⁠두 분 앞에서요⁠.⁠” 묘진이 손가락을 들었다⁠. “⁠뒤에서 하면 소문이잖아요⁠.⁠”

묘진이 눌렀다⁠. 성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둘의 주머니 속에서 알림이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공기청정기 소리 사이로 진동 소리가 겹쳐 쌓였다⁠. 묘진은 노트북을 덮고 바탕 연고 뚜껑을 열어 손등에 한 번 더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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