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15자)

가계약

이혼 숙려 기간 · 여시결

월요일 아침 여덟 시 반⁠, 약국 셔터는 반쯤만 올라가 있었다⁠. 지애가 허리를 숙여 들어가자 소독용 알코올 냄새가 평소보다 진했다⁠. 약국장이 진열대를 닦고 있었다⁠. 이미 깨끗한 진열대였다⁠.

“⁠약사님⁠, 앉아요⁠.⁠”

약국장은 조제실 의자 두 개를 마주 놓았다⁠. 지애가 앉자 약국장도 앉았다⁠. 무릎이 거의 닿았다⁠. 약국장의 흰 가운 소매 끝이 실밥 하나 풀려 있었다⁠.

“⁠상가 주인이 조건을 걸었어요⁠. 1101호가 5월 7일까지 자기한테 팔리면 우리 약국 임대료는 동결이래요⁠. 안 팔리면 사십 퍼센트⁠.⁠”

지애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박하사탕 하나가 손가락에 닿았다⁠.

“⁠사십 퍼센트면 나는 못 버텨요⁠. 두 해 더 하고 접으려던 약국을 올여름에 접어야 돼요⁠.⁠” 약국장이 소매 끝 실밥을 손가락에 감았다⁠. “⁠약사님⁠, 그 집 그 여자한테 팔면 안 돼요⁠? 집은 어차피 파는 거잖아⁠.⁠”

“⁠안 돼요⁠.⁠”

“⁠왜⁠?⁠”

“⁠남편이랑 같이 정했어요⁠. 그 사람한테는 안 팔기로⁠.⁠”

약국장이 지애를 보았다⁠. 같이 정했다는 말을 지애의 입에서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약국장은 한참 실밥을 감다가 끊었다⁠.

“⁠그럼 약사님⁠, 이달까지만 해 줘요⁠.⁠”

지애는 숨을 멈췄다⁠. 약국장이 지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약사님이 여기 있으면 그 여자가 나를 안 봐줘요⁠. 약사님이 나가면 나는 그 여자랑 다시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 예순넷이에요⁠, 약사님⁠. 스물두 해 한 자리를 이렇게 접기 싫어요⁠.⁠”

약국장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지애는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더 아팠다⁠. 약국장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애가 지키려는 것과 약국장이 지키려는 것이 같은 자리에서 부딪혔을 뿐이었다⁠.

“⁠이달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지애는 일어나서 가운 단추를 풀었다⁠. 열한 해 동안 아침마다 채운 단추였다⁠. 가운을 벗자 안에 입은 연두색 니트가 드러났다⁠. 지애는 가운을 접어 조제실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묘진이 들어왔다⁠. 공기에 아무 냄새도 섞이지 않았다⁠. 묘진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가운을 보고⁠, 연두색 니트를 입은 지애를 보았다⁠.

“⁠그만두시는 거예요⁠?⁠”

“⁠안 팔아요⁠.⁠” 지애가 말했다⁠. “⁠남편이랑 같이 정했어요⁠.⁠”

“⁠같이 정하셨어요⁠?⁠” 묘진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좋네요⁠. 같이 정하면 같이 잃는다는 것도 아시죠⁠?⁠”

“⁠알아요⁠.⁠”

“⁠남편분도 같은 생각이실까요⁠?⁠”

지애는 대답하지 않고 묘진을 지나쳐 약국을 나왔다⁠. 셔터 밑으로 허리를 숙일 때 등 뒤에서 약국장이 박하사탕을 주워 드는 소리가 들렸다⁠.

*

오후 한 시⁠, 솔메향료 연구실에서 성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묘진의 번호가 떴다⁠. 성규는 시향지를 내려놓고 복도로 나갔다⁠.

“⁠아내분 약국 재계약이 오늘 정해져요⁠.⁠” 묘진의 목소리는 숫자를 말할 때와 같았다⁠. “⁠아침에 아내분이 약국장님 제안을 거절하셨어요⁠. 약국장님은 아내분을 붙잡고 싶어 하시고요⁠. 남편분 손에 달렸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가계약을 하시면 약국 임대료를 동결할게요⁠. 약국장님은 아내분을 붙잡으실 거고⁠, 아내분은 열한 해 일한 자리에 그대로 계세요⁠. 율비는 그 방에서 자고요⁠. 세 시까지 상가 2층에 계실게요⁠.⁠”

전화가 끊겼다⁠. 성규는 복도 창가에 등을 기댔다⁠. 창밖으로 공장 굴뚝에서 하얀 김이 올라갔다⁠. 딸기 향을 만드는 김이었다⁠.

성규는 지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다가 끊겼다⁠. 다시 걸었다⁠. 또 끊겼다⁠. 문자를 보냈다⁠. 「⁠약국 일 들었어⁠. 어떻게 됐어⁠?⁠」 답이 오지 않았다⁠. 지애는 정해지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하고 나서 알려 주는 사람이었다⁠. 성규는 열한 해 동안 그것을 알았다⁠.

같이 정한 것은 하나였다⁠. 숙려 끝나는 날까지 그분한테는 안 판다⁠. 성규는 이 약속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굴렸다⁠. 지애가 열한 해 서 있던 약국 조제실이 떠올랐다⁠. 여섯 해 전에 인수하지 못한 약국⁠. 집 하나 사려고 지애가 내려놓은 것⁠. 이번에도 집 때문에 내려놓게 할 수는 없었다⁠.

성규는 반차를 쓰고 회사를 나왔다⁠.

*

세 시⁠, 상가 2층 방에는 묘진과 법무사 사무실 직원 한 사람이 있었다⁠. 공기청정기 두 대가 돌았다⁠. 성규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은단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앉으세요⁠.⁠”

직원이 가계약서를 내밀었다⁠. 한 장짜리였다⁠. 매매가 5억 3천만 원⁠. 잔금 5월 7일⁠. 매도인에게 2년 임대⁠, 월세 150만 원⁠. 가계약금 1천만 원⁠. 묘진이 볼펜을 내밀었다⁠.

“⁠아내분 약국은요⁠?⁠”

“⁠오늘 저녁에 약국장님께 전화드릴게요⁠. 임대료 동결이라고⁠.⁠” 묘진이 볼펜 끝을 성규 쪽으로 돌렸다⁠. “⁠아내분은 아직 모르시죠⁠?⁠”

“⁠네⁠.⁠”

“⁠다들 그러세요⁠.⁠”

성규는 볼펜을 받았다⁠. 볼펜이 손안에서 미끄러웠다⁠. 공동 명의라 아내분 도장도 받으셔야 한다고 직원이 말했다⁠. 묘진이 직원의 말을 받았다⁠.

“⁠아내분 도장은 잔금 전에 받으시면 돼요⁠. 남편분이 먼저 하시면 아내분도 따라오세요⁠. 대개는⁠.⁠”

성규는 서명했다⁠. 열한 해 동안 지애가 먼저 도장을 찍은 서류 뒤에 서명만 해 왔는데⁠, 이번에는 성규가 먼저였다⁠. 처음으로 혼자 정한 것이었다⁠.

오 분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입금 10⁠,000⁠,000원 석묘진⁠」

“⁠잘 생각하셨어요⁠.⁠” 묘진이 가계약서를 서류철에 넣었다⁠. “⁠가계약을 깨시려면 받으신 돈의 두 배를 돌려주셔야 해요⁠. 아시죠⁠?⁠”

“⁠알아요⁠.⁠”

“⁠그럼 됐어요⁠.⁠”

*

희철은 사무실 유리문 너머로 상가 계단을 내려오는 성규를 보았다⁠. 성규의 손에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 손에 들린 종이가 무엇인지 희철은 이십 년 동안 수없이 보았다⁠.

희철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남편분⁠, 그거 뭐예요⁠?⁠”

성규가 종이를 보여 주었다⁠. 희철은 종이를 받아 들고 맨 아래 서명을 보았다⁠. 손이 떨려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사모님은요⁠?⁠”

“⁠모르세요⁠.⁠”

“⁠사모님 아침에 약국 그만두셨어요⁠.⁠” 희철이 종이를 성규 가슴에 도로 밀어 넣었다⁠. “⁠가운 벗고 나가셨어요⁠. 약국장님한테 다 들었어요⁠. 그 여자 조건 안 들어준다고⁠. 남편이랑 같이 정했다고⁠.⁠”

성규는 종이를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상가 복도에 약국의 소독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약국 유리문 안에서 약국장이 혼자 약을 세고 있었다⁠. 조제실 의자 등받이에 흰 가운 하나가 접혀 있었다⁠.

희철이 지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갔다⁠.

성규는 약국 유리문을 밀었다⁠. 종이 울렸다⁠. 약국장이 고개를 들었다가 성규를 보고 손을 멈췄다⁠. 알약 하나가 계수판에서 굴러떨어졌다⁠.

“⁠약국장님⁠, 저 방금 가계약했어요⁠. 2층에서⁠.⁠”

약국장이 계수판을 내려놓았다⁠. 성규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의자 등받이의 흰 가운을 보았다⁠.

“⁠그럼 임대료는 동결이겠네⁠.⁠” 약국장의 목소리에 기쁜 기색이 없었다⁠. “⁠약사님한테 다시 오라고 해야겠네요⁠.⁠”

“⁠오라고 하시면 오겠죠⁠?⁠”

“⁠남편분이 정한 거예요⁠, 약사님이 정한 거예요⁠?⁠”

“⁠제가요⁠.⁠”

약국장이 고개를 저었다⁠. 가운 소매 끝 풀린 실밥이 흔들렸다⁠.

“⁠그럼 약사님은 안 와요⁠. 열한 해 봤어요⁠. 그 사람은 남이 정해 준 자리에는 안 서요⁠. 자기가 정한 자리에서 나가는 사람이지⁠.⁠” 약국장이 바닥에 떨어진 알약을 주워 폐기통에 넣었다⁠. “⁠남편분⁠, 나는 오늘 약사님을 내보냈어요⁠. 남편분은 오늘 약사님 대신 정했고⁠. 우리 둘 다 약사님한테 같은 짓을 했네⁠.⁠”

성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약국장이 다시 약을 세기 시작했다⁠. 계수판 위에서 알약이 다섯 개씩 밀려났다⁠. 열한 해 동안 지애가 하던 일이었다⁠.

*

지애는 오후 내내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연두색 니트 위로 4월 끝의 햇볕이 따뜻했다⁠. 호수에서 비릿한 물풀 냄새가 올라왔다⁠. 오리 세 마리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여섯 통⁠, 문자가 두 개 와 있었다⁠. 성규와 희철이었다⁠. 부재중 전화 밑으로 소통방 알림이 쌓여 있었다⁠. 「⁠5동 급매 소식 들으신 분⁠?⁠」 「⁠12동도 내놨대요⁠」 「⁠다음 달 대출 규제 전에 다 털고 나가는 분위기⁠」 「⁠이러다 우리 단지 4억대 갑니다⁠」 단지 밖 뉴스도 같은 말을 했다⁠. 「⁠미국 금리 동결 장기화⁠… 수도권 급매 늘어⁠」 지애는 화면을 엎어 두었다⁠. 집에 가서 말하자고 정했다⁠. 약국을 나오면서부터 정했다⁠. 얼굴을 보고 말해야 같이 정한 것을 지킨 이야기가 되었다⁠.

옆 벤치의 할머니가 지애의 니트와 빈손을 번갈아 보았다⁠.

“⁠아가씨⁠, 회사 땡땡이 쳤어⁠?⁠”

“⁠그만뒀어요⁠.⁠”

“⁠잘했네⁠. 나도 마흔에 한 번 그만뒀어⁠.⁠” 할머니가 비닐봉지에서 뻥튀기를 꺼내 반을 지애에게 주었다⁠. “⁠그만두면 오리가 보여⁠. 일할 때는 오리가 안 보여⁠.⁠”

지애는 뻥튀기를 받아 한 입 깨물었다⁠. 오리가 지애 쪽으로 헤엄쳐 왔다⁠. 할머니가 뻥튀기를 부수어 던졌다⁠. 오리 세 마리가 서로 다투었다⁠. 지애는 웃었다⁠. 오늘 처음 웃은 것이었다⁠.

*

저녁 일곱 시⁠, 1101호 식탁에 머그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율비는 학원에 있었다⁠. 지애가 먼저 들어와 앉았고⁠, 성규가 뒤따라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둘 다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지애는 빈손을 무릎 위에 쥐었고⁠, 성규는 접힌 종이를 식탁 밑에서 쥐었다⁠.

“⁠나 먼저 말할게⁠.⁠” 지애가 말했다⁠.

“⁠응⁠.⁠”

“⁠나 약국 그만뒀어⁠. 약국장님이 그 여자 조건 들어주자고 했는데⁠, 안 된다고 했어⁠. 우리가 같이 정한 거니까⁠.⁠” 지애가 숨을 골랐다⁠. “⁠얼굴 보고 말하려고 전화 안 받았어⁠. 미안해⁠.⁠”

성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 밑에서 종이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당신은⁠? 할 말 있다며⁠. 문자 왔던데⁠.⁠”

성규가 종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펼치지 않았다⁠. 지애가 펼쳤다⁠. 맨 위 「⁠가계약서⁠」⁠, 맨 아래 성규의 서명⁠. 매매가 5억 3천⁠. 매수인 석묘진⁠. 가계약금 1천만 원⁠.

“⁠당신 약국 지키려고⁠.⁠” 성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분이 오늘 가계약 하면 임대료 동결하고 약국장님이 당신 붙잡을 거라고 했어⁠. 당신 전화 안 받아서⁠. 당신이 또 혼자 다 내려놓을까 봐⁠.⁠”

지애는 가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성규의 서명이 지애가 아는 어떤 서명보다 반듯했다⁠. 처음 혼자 정해 본 사람의 글씨였다⁠.

“⁠나는 우리가 같이 정한 걸 지키려고 약국을 그만뒀어⁠.⁠”

“⁠나는 당신 약국을 지키려고 같이 정한 걸 깼어⁠.⁠”

둘이 서로를 보았다⁠. 냉장고 모터가 돌았다가 멈췄다⁠. 식탁 위 머그잔 두 개에서 김이 다 빠졌다⁠.

“⁠또 혼자 정했네⁠.⁠” 지애가 말했다⁠. “⁠둘 다⁠.⁠”

성규가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 은행 문자가 떠 있었다⁠. 「⁠입금 10⁠,000⁠,000원 석묘진⁠」

“⁠천만 원 들어왔어⁠. 깨려면 이천⁠.⁠”

지애는 문자를 보았다⁠. 약국은 이미 나왔다⁠. 집은 이미 팔렸다⁠. 둘이 지키려던 것이 둘의 손으로 한꺼번에 빠져나가 있었다⁠. 현관에서 도어록 소리가 났다⁠. 율비가 학원 가방을 메고 들어오며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커피 냄새 안 나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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