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67자)

식순에 없는 말

이혼식 플래너 · 석다감

11월 27일 토요일 오전 아홉 시⁠, 연희 유리홀⁠. 아치 창 열여섯 장 가운데 여덟 장이 반짝였다⁠. 어제 방도란이 혼자 닦아 둔 창이었다⁠. 나머지 여덟 장은 끝나고 닦는 조건이었다⁠. 닦인 창으로 든 늦가을 햇빛이 연회장 바닥에 긴 네모를 여덟 개 그렸다⁠.

표솔지가 사다리 꼭대기에서 현수막 끈을 묶고 있었다⁠. 크림색 천에 붉은 글씨였다⁠. 「⁠HAPPY DIVORCE⁠」⁠.

한글로 하려고 했다⁠. 「⁠축 이혼⁠」은 축하 인사로 읽혔고⁠, 「⁠행복한 이혼⁠」을 보더니 규환이 변호사 사무실 광고냐고 물었다⁠. 「⁠두 분의 새 출발⁠」은 써 놓고 보니 청첩장 문구였다⁠. 솔지가 영어로 한 장을 뽑아 오자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명순은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않고 “⁠글씨 예쁘네⁠” 했다⁠.

“⁠실장님⁠, 왼쪽 조금 내려갔어요⁠?⁠”

“⁠들려⁠, 솔지 씨⁠. 사다리 위에서도⁠.⁠” 주희는 헤드셋 마이크를 입가로 당겼다⁠. “⁠왼쪽 손가락 하나만 올려⁠.⁠”

유리문에 주희가 비쳤다⁠. 높게 틀어 올린 검은 머리에 만년필⁠, 진주 귀걸이⁠, 세이지 그린 투피스⁠, 금 손목시계⁠. 왼손에 클립보드⁠. 맨 위에는 여전히 하늬의 크레파스 그림이 끼워져 있었다⁠. 접이식 침대에서 자지 않은 첫 아침이었는데⁠, 신부 대기실 소파도 침대만큼 등이 배겼다⁠.

열한 시⁠, 서규환이 케이크를 실은 승합차에서 내렸다⁠. 흰 크림을 바른 2단 케이크가 처음부터 반으로 잘려 있었다⁠. 자른 면 안쪽에 얇은 판이 들어 있어 크림이 무너지지 않았고⁠, 두 반쪽은 은빛 받침 위에서 손바닥 하나 너비만큼 떨어져 있었다⁠. 규환이 무대 위 탁자에 케이크를 올리고 한참 각도를 맞췄다⁠. 반쪽이 서로를 보게 놓았다가⁠, 하객석을 보게 돌렸다가⁠, 다시 서로를 보게 돌렸다⁠.

열두 시 반⁠, 차건우가 왔다⁠. 연회장 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고 출구 표지판부터 올려다보았다⁠. 초록 불이 들어오는 낡은 표지판이었다⁠. 주희가 클립보드를 든 채 다가갔다⁠.

“⁠출구 확인하셨어요⁠?⁠”

“⁠두 곳입니다⁠. 뒷문하고 주방 옆 문⁠.⁠” 건우가 넥타이를 만졌다⁠. 매듭이 조금 비뚤었다⁠. 주희는 클립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손을 뻗어 매듭을 바로잡았다⁠. 건우가 숨을 멈췄다가⁠, 매듭이 다 맞춰진 뒤에 내쉬었다⁠.

“⁠오늘 일어나실 거예요⁠?⁠”

“⁠원고에 없는 말이 나오면요⁠.⁠”

“⁠나올 거예요⁠.⁠”

“⁠압니다⁠.⁠” 건우가 서류 가방을 고쳐 쥐었다⁠. “⁠그래서 일찍 왔습니다⁠. 일어날 자리를 미리 봐 두려고요⁠.⁠”

주희는 웃지 않으려 했는데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 건우는 출구 옆 의자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먼지를 털고 앉았다⁠. 연회장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하객이었다⁠.

*

오후 한 시⁠, 하객이 들어왔다⁠. 주희가 짠 자리표대로 망원시장 상인회 옆에 사진 동호회가⁠, 보란의 대학 동기 옆에 규환의 군대 동기가 앉았다⁠. 밀과달 직원 열두 명은 C 탁자였다⁠. 필름봄의 카메라 두 대가 자리를 잡았다⁠. 하나는 뒤에서 넓게⁠, 하나는 무대 정면에 고정⁠. 정면 카메라 옆 마이크 스탠드에 무선 마이크 하나가 따로 꽂혀 있었다⁠.

보란의 변호사 윤 변호사는 쉰쯤 된 여자였고⁠, 맨 앞 탁자에 앉아 정면 카메라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건우는 출구 옆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정장⁠, 서류 가방은 무릎 위⁠. 오 분 뒤 백명순이 떡 상자 이백 개를 상인회 사람들 손에 들려 들어왔다⁠. 명순은 자리표를 보지도 않고 출구 옆으로 와서 건우 옆 의자에 앉았다⁠.

“⁠어머님 자리는 저 앞인데요⁠.⁠” 건우가 말했다⁠.

“⁠변호사 양반⁠, 출구 자리는 원래 내 거야⁠. 돈 얘기 나오면 나간다고 했잖아⁠.⁠” 명순이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가방 속주머니에 손수건으로 싼 반지가 있었다⁠.

하늬는 남색 원피스를 입고 무대 옆 계단에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화면에 「⁠사랑의 인사 + 40초⁠」 파일을 띄워 놓았다⁠. 솔지가 하늬 옆에 쪼그려 앉아 “⁠엄지 준비⁠” 하고 속삭였다⁠.

*

두 시 정각⁠. 주희가 헤드셋에 말했다⁠. “⁠입장 큐⁠.⁠”

연회장 뒷문이 열렸다⁠. 규환과 보란이 같은 문으로 같이 들어왔다⁠. 규환은 짙은 남색 양복⁠, 보란은 연한 회색 원피스였다⁠. 둘은 팔짱을 끼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맞췄다⁠. 연습실에서 하늬가 세던 박자였다⁠. 보란의 아버지가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찰칵⁠.

하객께 드리는 인사⁠. 둘이 같이 고개를 숙였다⁠. 망원시장 상인회 탁자에서 누군가 “⁠딩⁠!⁠” 하고 외쳤다가 옆 사람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반지⁠. 무대 위 탁자에 유리 접시가 놓여 있었다⁠. 보란이 반지를 빼서 접시에 넣었다⁠. 금이 유리에 부딪쳐 맑은 소리를 냈다⁠. 규환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반지는 명순의 가방에 있었고⁠, 규환이 꺼낸 것은 플라스틱 반달이었다⁠. 연남점 열쇠 꾸러미에서 떼어 낸⁠, 「⁠밀과달⁠」 글씨가 반쯤 지워진 열쇠고리⁠. 규환이 반달을 반지 옆에 놓았다⁠.

출구 옆에서 건우의 손바닥이 반쯤 올라갔다가 멈췄다⁠. 플라스틱 반달은 재산 목록에 들어갈 물건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천천히 내려갔다⁠. 맨 앞 탁자에서 하객 몇이 웃었다⁠. 명순의 손이 가방을 더 꽉 쥐었다⁠.

케이크는 감사 인사 뒤였다⁠. 주희가 클립보드를 넘겼다⁠. 오후 두 시 이십 분⁠.

“⁠감사 인사 큐⁠.⁠”

*

규환이 마이크 앞으로 갔다⁠. 정면 카메라의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무선 마이크가 규환의 목소리를 따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규환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건우가 지난주까지 다섯 번 고친 원고였다⁠.

“⁠보란아⁠.⁠” 규환이 읽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고마웠어⁠. 당신과 함께한 동안 가게가 생겼어⁠.⁠”

원고는 두 줄이었고⁠, 거기서 끝이었다⁠. 연회장이 조용했다⁠. 누군가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사진 동호회 한 사람이 셔터를 누르려다 멈췄다⁠.

규환이 종이를 접었다⁠. 한 번⁠, 두 번⁠.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원고는 여기까지예요⁠. 변호사님이 다 지우셨어요⁠.⁠”

하객석에서 웃음이 났다⁠. 출구 옆에서 건우가 눈을 감았다⁠.

“⁠반달 카스텔라는 보란이가 만들었어요⁠. 2018년 3월에⁠, 가게 문 연 날 아침에⁠, 오븐 2번에서요⁠. 저는 오븐만 봤어요⁠. 십 년 동안 오븐만 봤어요⁠.⁠” 규환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우리 가게는⁠…⁠.⁠”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건우가 일어나 있었다⁠.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무대를 향했다⁠.

“⁠잠깐만요⁠.⁠”

연회장의 모든 고개가 출구 옆으로 돌았다⁠. 주희의 헤드셋에서 솔지가 속삭였다⁠. “⁠실장님⁠, 변호사님 일어나셨어요⁠. 이거 큐 시트에 없는데요⁠.⁠”

“⁠알아⁠.⁠” 주희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헤드셋을 낀 채 건우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변호사님⁠, 식순에 없는 순서예요⁠.⁠”

“⁠압니다⁠.⁠” 건우가 말했다⁠. 손바닥은 내리지 않았다⁠. 건우는 규환을 보았다⁠. 무대까지 스무 걸음이었다⁠. 건우는 출구 옆 자리에서⁠, 연회장 끝까지 들리게 말했다⁠.

“⁠서규환 씨⁠. 지금 하시는 말씀은 월요일에 법원에서 그대로 읽힙니다⁠. 마이크가 따로 달려 있습니다⁠. 저는 반대합니다⁠. 지난주에 서면으로 드렸고⁠, 지금 한 번 더 드립니다⁠.⁠”

규환이 건우를 보았다⁠. 마이크를 쥔 손이 하얬다⁠.

“⁠그래도 하시겠다면⁠.⁠” 건우가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정확하게 하십시오⁠. 반달 카스텔라를 처음 구운 날은 문 연 날 아침이 아닙니다⁠. 2018년 3월 9일 밤입니다⁠. 문을 연 건 이튿날이고요⁠. 아내분 서면 첫 장에 그렇게 있습니다⁠. 틀리게 말씀하시면 그것도 읽힙니다⁠.⁠”

연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다른 조용함이었다⁠. 맨 앞 탁자에서 윤 변호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무대 위에서 보란이 건우를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얼굴이었다⁠.

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3월 9일 밤이요⁠. 그날 밤에 보란이가 구웠어요⁠. 우리 가게는 우리 둘이 만들었어요⁠.⁠”

*

명순이 일어났다⁠. 조건대로라면 나가야 했다⁠. 명순은 나가지 않았다⁠. 출구 옆에서 무대를 향해 소리쳤다⁠.

“⁠그 가게 보증금 내 돈이야⁠! 일억⁠, 내가 떡 썰어서 모은 거야⁠!⁠”

사진 동호회 탁자에서 보란의 아버지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내 딸 손목은⁠! 반죽하다 수술한 손목은 누가 갚는데⁠!⁠”

윤 변호사가 몸을 반쯤 돌려 정면 카메라를 보았다⁠. “⁠계속 찍으세요⁠.⁠” 필름봄 사촌 동생이 카메라 뒤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C 탁자의 직원들이 서로를 보았다⁠. 막내 제빵사가 고개를 숙였다⁠. 망원시장 상인회 탁자에서 누군가 “⁠아이고⁠” 했다⁠. 무대 위에서 규환과 보란이 한 걸음씩 떨어졌다⁠. 둘 사이 탁자 위에서 반으로 잘린 케이크가 손바닥 너비만큼 벌어져 있었다⁠.

주희의 헤드셋에서 솔지 목소리가 떨렸다⁠. “⁠실장님⁠, 다음 순서 케이크인데요⁠. 지금 이거⁠…⁠.⁠”

무대 옆 계단에서 하늬가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고 있었다⁠.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하늬는 울지 않았다⁠. 할머니를⁠, 외할아버지를⁠, 엄마와 아빠를 차례로 보았다⁠. 연습실에서 어른들 눈치를 보던 얼굴이었다⁠.

*

주희는 헤드셋을 벗었다⁠. 10년 동안 식장에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헤드셋을 클립보드 위에 올려놓고 무대로 걸어갔다⁠. 구두 굽이 대리석을 쳤다⁠. 규환에게서 마이크를 받았다⁠. 탁자 위 탁상종을 한 번 쳤다⁠. 딩⁠. 연회장이 멈췄다⁠.

“⁠식순에 없는 말 하나만 할게요⁠.⁠”

주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아치 창까지 갔다⁠.

“⁠저는 이혼식을 못 했어요⁠. 2024년 12월에⁠, 남의 결혼식 진행을 마치고 나왔더니 문자가 와 있었어요⁠. 「⁠서류 보냈어⁠. 도장 찍어서 부쳐 줘⁠.⁠」 그게 다였어요⁠. 아무도 같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도 같이 나가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도 제 결혼이 언제 끝났는지 몰라요⁠. 문자가 온 날인지⁠, 도장 찍은 날인지⁠, 그 전 어느 날인지⁠.⁠”

출구 옆에서 건우가 서 있었다⁠. 내린 손바닥이 허벅지 옆에서 주먹이 되었다가 펴졌다⁠.

“⁠어머님 일억도⁠, 아버님 따님 손목도 다 맞는 말이에요⁠. 월요일에 법원에서 하세요⁠. 거기가 그 말을 하는 데예요⁠.⁠” 주희가 무대 옆 계단을 보았다⁠. “⁠지금부터 사 분은 하늬 거예요⁠. 하늬가 곡 끝에 사십 초를 붙여 왔어요⁠. 춤 끝나고 엄마 아빠가 인사하는 시간이래요⁠. 결혼식 영상에서는 그 시간이 없었대요⁠.⁠”

주희는 정면 카메라를 보았다⁠. “⁠사 분만 꺼 주세요⁠.⁠”

윤 변호사가 일어났다⁠. “⁠원본은 저희 의뢰인의 권리입니다⁠. 실장님이 정할 일이 아닙니다⁠.⁠”

“⁠네⁠. 제가 정할 일 아니에요⁠.⁠”

무대 위에서 보란이 움직였다⁠. 원피스 자락을 한 손으로 쥐고 무대 계단을 내려와⁠, 정면 카메라 앞까지 걸어갔다⁠. 사촌 동생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보란이 오른손을 들었다⁠. 손목 안쪽의 하얀 자국이 햇빛에 드러났다⁠. 보란은 손바닥으로 렌즈를 덮었다⁠.

“⁠꺼⁠. 사 분만⁠.⁠”

사촌 동생이 버튼을 눌렀다⁠. 빨간 불이 꺼졌다⁠.

보란은 손을 렌즈에서 떼고 무대로 돌아갔다⁠. 규환이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하늬가 계단에서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들고⁠, 엄마를 보고⁠, 아빠를 보았다⁠. 그리고 엄지로 화면을 눌렀다⁠.

바이올린이 첫 음을 길게 끌었다⁠. 규환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해 있었다⁠. 보란이 내민 손을 보았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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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빵2026.11.06· 9화

    식순에 없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도 억지 같지 않았어요. 주희가 마이크를 잡는 데서 울었고, 하늬가 음악 트는 마지막 줄이 오래 남네요.

    • 석다감작가2026.11.06

      준비한 식순이 다 무너진 자리에서 사람들이 진짜 말을 꺼낸 날이에요. 식이 끝난 뒤 이야기는 마지막 화에 있습니다.

식순에 없는 말 · 이혼식 플래너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