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33자)

2호점 열쇠

이혼식 플래너 · 석다감

11월 8일 월요일 아침 일곱 시⁠, 밀과달 본점 주방 옆 창고 사무실⁠. 밀가루 포대가 벽을 따라 쌓여 있었고⁠, 포대 사이에 접이식 탁자 하나와 의자 넷이 끼어 있었다⁠. 창문 없는 방이라 오븐 열기가 문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주희는 정장 재킷을 벗어 무릎에 올렸다⁠. 서규환이 전화로 불렀다⁠. 계약은 아직 실장님이랑 있으니까 와 주셔야 한다고 했다⁠.

차건우가 먼저 와 있었다⁠. 오늘도 문 옆 의자였다⁠. 백명순은 떡 상자를 들고 들어와 직원들 몫이라며 주방에 내려놓고 돌아와 앉았다⁠. 상자에서 쑥 냄새가 났다⁠.

“⁠정리하겠습니다⁠.⁠” 건우가 서류철을 열었다⁠. “⁠식은 없어졌습니다⁠. 아내분은 영상을 못 얻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합의안을 내면 협상은 저희에게 유리합니다⁠. 이번 주 안에 내면 반달 카스텔라 레시피 몫을 얹어 주는 선에서 끝낼 수 있습니다⁠. 가게는 지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명순이 말했다⁠. “⁠잔치는 없던 걸로 하고⁠.⁠”

규환은 탁자 위에 놓인 자기 손을 보았다⁠. 엄지로 손등을 문질렀다⁠. 밀가루 포대 너머로 오븐 타이머가 울렸고⁠, 막내 제빵사가 “⁠2번 문이요⁠!⁠” 하고 외쳤다⁠. 규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식 할 거예요⁠.⁠”

명순이 고개를 돌렸다⁠. 건우의 볼펜이 멈췄다⁠.

“⁠카메라 있어도 할 거예요⁠. 원본 윤 변호사님한테 가도 돼요⁠. 인사도 할 거예요⁠.⁠”

“⁠서규환 씨⁠.⁠” 건우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가게 절반입니다⁠. 아내분 변호사가 원하는 말을 마이크까지 달아서 드리겠다는 겁니다⁠.⁠”

“⁠알아요⁠.⁠”

“⁠저는 반대합니다⁠.⁠” 건우가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미리 써 온 것이었다⁠. 「⁠의뢰인께 드리는 의견 — 이혼식 참석 및 감사 인사에 대하여⁠」⁠. “⁠제 반대 의견입니다⁠. 읽고 서명해 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렸다는 확인입니다⁠.⁠”

규환이 종이를 읽었다⁠. 천천히⁠, 끝까지⁠. 그리고 서명했다⁠. 서명하고 나서 종이를 건우에게 밀었다⁠. “⁠드렸어요⁠. 그래도 할 거예요⁠.⁠”

*

명순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밀가루 포대를 쳤다⁠. 하얀 가루가 바닥으로 흘렀다⁠.

“⁠그럼 내 일억 지금 내놔⁠.⁠”

“⁠어머니⁠.⁠”

“⁠내 돈으로 연 가게를 반 떼어 줄 거면⁠, 내 돈은 내가 먼저 가져가야지⁠. 남의 며느리 손에 들어가기 전에⁠.⁠” 명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가게 보증금⁠, 내가 떡집 적금을 깨서 줬어⁠. 그 적금은 내가 서른 해 동안 칼질해서 부은 거야⁠.⁠”

주희는 탁상종을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기획 회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명순의 말은 탓이 아니었다⁠. 돈 이야기였고⁠, 돈 이야기보다 오래된 이야기였다⁠.

규환이 고개를 들었다⁠. “⁠드릴게요⁠, 어머니⁠.⁠”

“⁠어디서⁠? 가게 돈 다 묶여 있잖아⁠.⁠”

“⁠연남점 넘길게요⁠. 사겠다는 사람 있어요⁠. 지난달에 물어 왔어요⁠.⁠” 규환이 말했다⁠. 평소보다 빨랐다⁠. “⁠2023년에 연 거니까 재산 목록에 있죠⁠, 변호사님⁠. 넘긴 돈은 어머니 빚 갚는 데 쓰고⁠, 영수증 다 드릴게요⁠.⁠”

건우는 한참 규환을 보다가 수첩을 꺼냈다⁠. “⁠넘기는 날짜와 금액⁠, 어머님께 드리는 날짜를 다 남겨 주십시오⁠. 아내분 변호사가 재산을 빼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하던 사람의 손이 벌써 다음 일을 적고 있었다⁠.

명순은 아들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나갔다⁠. 직원들에게 떡을 나눠 주는 소리가 들렸다⁠. 쑥떡이야⁠, 먹어⁠. 사장 먹이지 말고 너네 먹어⁠.

*

11월 12일 금요일 오전⁠, 연남동 밀과달 2호점⁠. 골목 안 이층 상가의 일층이었고⁠, 진열장은 벌써 비어 있었다⁠. 유리에 손자국만 남았다⁠. 주희는 규환이 같이 가 달라고 해서 왔다⁠. 오후에 갈 데가 있었고⁠, 거기에 주희가 있어야 했다⁠.

가게를 사는 사람은 서른 초반의 부부 제빵사였다⁠. 결혼한 지 두 달이 되었다고 했다⁠. 둘은 오븐 문을 번갈아 열어 보고⁠, 반죽기 스위치를 눌러 보고⁠, 진열장 유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았다⁠. 둘이 같은 동작을 할 때마다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규환이 열쇠 꾸러미를 내밀었다⁠. 열쇠 다섯 개에 「⁠밀과달⁠」 글씨가 반쯤 지워진 플라스틱 반달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남편 제빵사가 받으려다 말고 아내를 보았다⁠. 아내가 손을 내밀었다⁠. 둘이 같이 받았다⁠.

“⁠열쇠고리는 떼 갈게요⁠.⁠” 규환이 말했다⁠.

규환이 고리를 비틀어 떼어 냈다⁠. 플라스틱 반달이 규환의 손바닥에 남았다⁠. 규환은 반달 고리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려다 앞치마를 안 입고 왔다는 것을 알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아내 제빵사가 주희를 알아보았다⁠. “⁠방송에 나오셨죠⁠? 종 치시는 분⁠.⁠”

“⁠네⁠.⁠”

“⁠저희 결혼기념일 파티도 하세요⁠? 일 년 되면요⁠.⁠”

규환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주희는 명함을 건넸다⁠. 명함 뒤에 「⁠이혼식 · 그 밖의 끝과 시작⁠」이라고 솔지가 지난주에 새로 넣은 글귀가 있었다⁠. 아내 제빵사가 글귀를 소리 내어 읽고 남편에게 보여 주었다⁠.

*

오후 세 시 사십 분⁠, 망원동 초등학교 정문 앞⁠. 하교 시간이었다⁠. 노란 안전 조끼를 입은 녹색어머니회 엄마가 호루라기를 물고 있었다⁠. 남보란이 정문 옆 은행나무 아래 서 있다가⁠, 규환과 주희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규환 뒤에서 차건우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더 굳었다⁠.

“⁠변호사님은 왜 오세요⁠?⁠”

“⁠의뢰인이 상대방께 하시는 말은 제가 들어야 합니다⁠.⁠” 건우가 말했다⁠. “⁠반대 의견은 이미 드렸습니다⁠. 서명도 받았습니다⁠. 그건 말씀드려 둡니다⁠.⁠”

보란이 규환을 보았다⁠. 규환은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플라스틱 반달을 쥐고 있었다⁠.

“⁠연남점 넘겼어⁠. 오늘 아침에⁠.⁠”

“⁠뭐⁠?⁠”

“⁠어머니 일억 갚으려고⁠. 어머니 돈은 어머니 거니까⁠.⁠” 규환이 숨을 한 번 쉬었다⁠. “⁠녹화해⁠. 원본 윤 변호사님 드려⁠. 인사 할게⁠. 와 줘⁠.⁠”

은행잎 하나가 보란의 어깨에 떨어졌다⁠. 보란은 털지 않았다⁠.

“⁠왜⁠?⁠”

“⁠하늬 돌기 봐야지⁠. 솔지 씨가 그러는데 이제 엄마 발 안 밟는대⁠.⁠” 규환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그날 할게⁠. 지금 하면 또 고개만 숙일 것 같아서⁠.⁠”

보란은 대답하지 않고 건우를 보았다⁠. “⁠변호사님은 끝까지 반대하시네요⁠.⁠”

“⁠끝까지 하는 게 제 일입니다⁠.⁠”

“⁠식장에서도요⁠?⁠”

“⁠식장에서도요⁠.⁠”

정문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홍 책가방 하나가 아이들 사이에서 멈칫했다⁠. 하늬가 엄마와 아빠가 같은 은행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늬는 뛰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와서 엄마 손 하나⁠, 아빠 손 하나를 잡았다⁠. 셋이 한 줄이 되었다⁠.

“⁠토요일 연습 해요⁠?⁠”

보란이 하늬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내려다보았다⁠. “⁠해⁠. 엄마 갈게⁠.⁠”

*

이튿날 토요일⁠, 합정 연습실에서 하늬가 아빠에게 돌기를 가르쳤다⁠. 규환은 하늬보다 머리 두 개만큼 컸고⁠, 하늬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규환이 무릎을 굽혀 손 밑으로 기어들듯 돌았다⁠. 솔지가 바닥을 치며 웃었다⁠. 보란은 거울 앞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보다가⁠, 세 번째에 일어나 규환의 왼쪽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툭 올려 주었다⁠. “⁠팔을 높이⁠. 애 키에 맞추지 말고 내 키에 맞춰⁠.⁠”

규환이 팔을 높였다⁠. 하늬가 높아진 팔 밑으로 한 바퀴 돌았다⁠. 아빠 발을 밟지 않았다⁠. 주희는 클립보드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거울만 보았다⁠. 거울 속 세 사람 뒤 벽 시계가 오후 두 시를 가리켰다⁠. 식까지 두 주가 남아 있었다⁠.

*

11월 15일 월요일⁠, 연희동 언덕 꼭대기의 연희 유리홀⁠. 1990년대에 지은 결혼식장이었고⁠, 2025년 봄부터 결혼식을 받지 않았다⁠. 아치 모양 큰 유리창이 연회장 한 면을 다 차지했는데⁠, 유리마다 먼지가 앉아 햇빛이 뿌옇게 들어왔다⁠. 무대 위에 비둘기 새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비어 있었다⁠.

방도란은 예순셋이었다⁠. 주희가 스물다섯에 처음 웨딩 일을 배울 때의 실장이었다⁠. 은퇴하고 남편이 남긴 이 홀을 지키고 있었다⁠. 도란은 주희를 보자마자 머리의 만년필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아직도 꽂고 다니네⁠. 그거 내가 처음 진행 끝나고 준 거잖아⁠.⁠”

“⁠신부 어머님이 주신 거예요⁠, 실장님⁠.⁠”

“⁠신부 어머님 손에 쥐여 준 게 나야⁠.⁠” 도란이 웃었다⁠. 웃다가 물었다⁠. “⁠단톡방 소문은 들었다⁠. 네 잘못이냐⁠?⁠”

“⁠아니요⁠.⁠”

“⁠그럼 됐다⁠.⁠” 도란이 연회장 불을 켰다⁠. 샹들리에 전구 절반이 들어오지 않았다⁠. “⁠27일 토요일 두 시⁠. 써⁠. 대관료는 안 받는다⁠. 대신 조건이 있어⁠.⁠”

“⁠네⁠.⁠”

“⁠끝나면 유리창 다 닦고 가⁠. 너랑⁠, 네 변호사랑⁠.⁠”

“⁠제 변호사 아니에요⁠.⁠”

“⁠방송에 손 나온 그 사람⁠.⁠” 도란이 아치 창을 가리켰다⁠. 창은 열여섯 장이었다⁠. “⁠남의 끝을 차리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창을 닦아야 해⁠. 그래야 다음 사람이 밖을 보지⁠.⁠”

무대 구석에 1990년대식 연기 기계가 있었다⁠. 도란이 스위치를 눌렀다⁠. 하얀 연기가 쿨럭거리며 무대 바닥을 덮었다⁠. 비어 있는 비둘기 새장이 연기 위에 떠 보였다⁠. 주희는 웃음을 터뜨렸고⁠, 웃다가 눈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도란은 못 본 척 기계를 껐다⁠.

*

밤 아홉 시⁠, 건우가 유리홀에 왔다⁠. 주희가 무대 치수를 재고 있다는 문자를 받고 왔다고 했다⁠. 연회장에는 둘뿐이었다⁠. 샹들리에 절반이 켜져 있었다⁠.

“⁠식장 도면 받으러 왔습니다⁠.⁠” 건우가 말했다⁠. “⁠출구가 어디인지 봐야 합니다⁠.⁠”

“⁠변호사님 자리는 이미 출구 옆이에요⁠.⁠”

건우가 연회장을 한 바퀴 걸었다⁠. 걸음마다 바닥에서 오래된 왁스 냄새가 올라왔다⁠. 아치 창 앞에서 멈췄다⁠. 먼지 낀 유리에 둘이 흐릿하게 비쳤다⁠.

“⁠연 실장님이 말씀 안 하셨으면⁠, 저는 영상이 있는 줄 모르고 의뢰인을 식장에 보냈을 겁니다⁠.⁠” 건우가 유리를 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이제 제 의뢰인은 알고 갑니다⁠.⁠”

“⁠알고 가는 게 모르고 가는 것보다 나아요⁠.⁠”

“⁠법정에서는 아닙니다⁠.⁠”

“⁠여기는 법정 아니잖아요⁠.⁠”

건우가 돌아보았다⁠. 주희의 머리에 아까 창틀을 재다 묻은 먼지 뭉치 하나가 만년필 옆에 붙어 있었다⁠. 건우가 손을 들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가락 두 개였다⁠. 먼지를 떼어 냈다⁠. 손가락이 만년필에 닿았다가 멈췄다⁠. 빼 보시면 알아요⁠. 편의점 유리문 앞에서 한 말이 둘 사이에 남아 있었다⁠.

건우가 손을 내렸다⁠. “⁠내일부터 원고를 다시 보겠습니다⁠. 의뢰인이 정한 건 따르지만⁠, 원고는 제 일입니다⁠.⁠”

“⁠네⁠.⁠”

“⁠식장에서 원고에 없는 말이 나오면 저는 일어날 겁니다⁠.⁠”

“⁠네⁠. 그때 저는 다음 순서를 부를 거예요⁠.⁠”

*

11월 25일 목요일⁠, 규환과 보란은 서울가정법원에서 협의이혼 의사를 확인받았다⁠. 판사 앞에서 두 사람은 각자 “⁠네⁠”라고 한 번씩 말했다고⁠, 규환이 저녁에 문자로 알려 왔다⁠. 「⁠확인 받았어요⁠. 복도 자판기 커피 두 잔 뽑았어요⁠. 보란이 하나 마셨어요⁠.⁠」

다음 날 밤 열한 시⁠, 주희는 유리홀 신부 대기실 소파에 앉아 식순 일곱 줄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사무실 침대를 접어 두고 하루 일찍 와서 자는 길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차건우 변호사⁠」⁠.

「⁠내일 저는 하객으로 가지 않습니다⁠. 대리인으로 갑니다⁠. 원고에 없는 말이 나오면 일어나겠습니다⁠.⁠」

주희는 헤드셋을 집어 귀에 걸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헤드셋이었다⁠. 답장을 썼다⁠.

「⁠저는 헤드셋 끼고 있을게요⁠. 일어나시면 큐 부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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