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17자)

대역은 발을 밟는다

이혼식 플래너 · 석다감

10월 2일 토요일 오전 열 시⁠, 합정역 뒤 상가 지하 연습실⁠. 통거울 앞에 바닥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표솔지가 화이트벨홀 소연회장 도면을 보고 무대 너비와 케이크 탁자 자리를 그대로 옮겨 붙인 것이었다⁠. 노란 테이프 네모가 무대⁠, 빨간 테이프 동그라미가 케이크였다⁠. 하늬는 빨간 동그라미 옆에 쪼그려 앉아 휴대전화 음악을 고르고 있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오전에 규환⁠, 오후에 보란⁠. 둘 다 같이 연습하는 것은 싫다고 했다⁠. 규환은 토요일이 가게가 제일 바쁜 날이라 아침 일곱 시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고⁠, 보란은 같이 연습하면 첫 박자에서 싸운다고 했다⁠. 그런데 규환은 일곱 시에 오지 않았다⁠. 「⁠오븐 2번 문이 또⁠…⁠」라는 문자만 왔다⁠. 아홉 시에 한 번 더 왔다⁠. 「⁠줄이 길어서⁠…⁠」⁠.

주희는 연습실 의자에 앉아 은행 앱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음 주에 사무실 월세가 나갔고⁠, 그다음 주에 솔지 월급이 나갔다⁠. 계약금 삼백만 원은 화이트벨홀 대관 계약금으로 벌써 빠져나갔다⁠. 반지 목걸이 게시물을 퍼 간 웨딩 계정 덕에 문의는 열한 건으로 늘었지만⁠,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다들 첫 이혼식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고 싶어 했다⁠.

“⁠실장님⁠, 동선은 오늘 꼭 잡아야 돼요⁠.⁠” 솔지가 테이프 끝을 손톱으로 눌렀다⁠. “⁠홀 조명 감독님이 다음 주에 큐 시트를 달라고 하셨어요⁠. 두 분이 어디서 손을 잡고 어디서 도는지 알아야 핀 조명을 따라가요⁠.⁠”

“⁠그럼 누가 서⁠?⁠”

솔지가 거울 속 주희를 보았다⁠. 그다음 연습실 문을 보았다⁠. 문이 열리고 차건우가 들어왔다⁠. 토요일인데도 짙은 회색 정장이었고⁠,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지난주 주희가 문자로 알린 영상 업체 이름을 확인하러 들른 길이었다⁠.

“⁠아내분 사촌 동생이 하는 업체가 「⁠필름봄⁠」 맞습니까⁠? 사업자 등록을 보니⁠…⁠.⁠”

“⁠변호사님⁠.⁠” 솔지가 건우의 말을 끊었다⁠. “⁠잠깐 대역 좀 서 주세요⁠.⁠”

*

건우는 거절했다⁠. 세 번 거절했다⁠. 네 번째에 하늬가 휴대전화를 내리고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아빠가 어디서 엄마 발을 밟는지 알아야 안 밟게 하잖아요⁠.⁠”

건우가 서류 봉투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의뢰인 동선은 제가 알아 두는 게 맞겠습니다⁠.⁠”

솔지가 박수를 한 번 쳤다⁠. “⁠실장님이 사모님⁠, 변호사님이 사장님이요⁠. 노란 네모 왼쪽 끝에서 같이 들어오세요⁠.⁠”

주희는 구두를 벗을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식 당일 보란은 굽 있는 구두를 신을 테고⁠, 굽이 있어야 걸음 폭이 맞았다⁠. 건우가 주희 앞으로 왔다⁠. 키 차이가 한 뼘 반이었다⁠. 솔지가 건우의 왼손을 들어 주희의 오른손에 얹고⁠, 건우의 오른손을 주희의 등허리에 갖다 댔다⁠. 건우의 손이 닿는 자리에서 정장 천이 한 번 구겨졌다⁠.

“⁠힘 빼세요⁠, 변호사님⁠. 계약서 넘기는 거 아니에요⁠.⁠”

“⁠계약서는 이렇게 안 넘깁니다⁠.⁠”

하늬가 음악을 틀었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 바이올린이 느리게 첫 음을 끌었다⁠. 솔지가 셌다⁠. “⁠앞⁠, 옆⁠, 뒤⁠, 옆⁠.⁠”

건우도 셌다⁠. 소리 내어⁠. “⁠하나⁠, 둘⁠, 셋⁠, 넷⁠.⁠” 박자마다 다음 걸음을 조항 읽듯 또박또박 밟았다⁠. 세 번째 박자에서 건우의 구두 앞코가 주희의 오른발을 밟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하늬 아빠는 세 번이었어요⁠.⁠”

“⁠그럼 저는 두 번 남았군요⁠.⁠”

두 번 남은 줄 알았던 건우는 다섯 번을 더 밟았다⁠. 하늬가 빨간 동그라미 옆에서 손가락을 접어 가며 셌다⁠. “⁠일곱 번⁠. 아저씨⁠, 아빠보다 못 춰요⁠.⁠”

솔지는 웃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희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는데⁠, 건우의 셔츠 깃에서 다림질한 풀 냄새가 올라와서 웃음 대신 다른 것이 목을 막았다⁠. 거울 속에서 건우의 손이 주희의 등허리에 얹혀 있었다⁠. 진주 귀걸이가 건우의 넥타이 매듭 높이에서 흔들렸다⁠. 둘은 거울을 보지 않고 바닥 테이프만 보았다⁠.

열 번째에 건우는 한 번도 밟지 않았다⁠. 마지막 박자에 솔지가 외쳤다⁠. “⁠돌아요⁠!⁠” 건우가 손을 들어 주희를 한 바퀴 돌렸다⁠. 치마 단이 둥글게 퍼졌다가 내려앉았다⁠. 음악이 끝나고⁠, 하늬가 붙인 사십 초가 흘렀다⁠. 아무 소리도 없는 사십 초 동안 둘은 손을 놓는 것을 잊었다⁠.

“⁠사십 초는 인사하는 시간이에요⁠.⁠” 하늬가 말했다⁠. “⁠두 분은 인사 안 해요⁠?⁠”

건우가 먼저 손을 놓았다⁠. 솔지가 바닥에 앉은 채 큐 시트에 적었다⁠. 「⁠돌기 — 곡 끝 직전⁠, 핀 조명 하나로 모음⁠」⁠.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큐 시트 귀퉁이에 하트를 하나 그렸다가 볼펜으로 까맣게 칠했다⁠. 주희는 하트를 못 본 척했다⁠. 건우는 보았는지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

*

연습실 앞 편의점 벤치⁠. 건우가 바나나우유 두 개를 사 와서 하나를 주희에게 내밀었다⁠. 주희는 오른발 구두를 반쯤 벗고 발가락을 움직였다⁠. 아팠다⁠.

“⁠바나나우유 좋아하세요⁠?⁠”

“⁠가정법원 복도에서 많이 마셨습니다⁠. 버릇이 됐습니다⁠.⁠”

“⁠변호사 되시고요⁠?⁠”

“⁠열두 살 때요⁠.⁠” 건우가 빨대를 꽂았다⁠. 꽂고 나서 한참 마시지 않았다⁠. “⁠2001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갈라서기로 하시고 마지막으로 가족 외식을 했습니다⁠. 동네 갈빗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소주를 두 병 드시고⁠, 어머니한테 이 집은 당신이 다 일군 거라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이 좋았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거든요⁠.⁠”

주희는 우유를 내려놓았다⁠.

“⁠석 달 뒤에 어머니 변호사가 그 말을 서면에 썼습니다⁠. 갈빗집 사장님이 증인으로 나왔고요⁠. 소송은 삼 년 걸렸습니다⁠. 저는 학교 끝나면 어머니 따라 가정법원에 가서 복도 의자에 앉아 바나나우유를 마셨습니다⁠.⁠” 건우가 드디어 한 모금 마셨다⁠. “⁠집은 어머니가 가져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뒤로 누구한테도 고맙다는 말을 안 하십니다⁠. 저한테도요⁠.⁠”

“⁠그래서 감사 인사를 지우셨군요⁠.⁠”

“⁠그래서 그 일을 합니다⁠.⁠” 건우가 납작해진 우유갑을 손에 쥐었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하는 말은 다 증거가 됩니다⁠. 말한 사람만 그걸 모릅니다⁠. 두 분은 지금도 서로 인사를 안 하십니다⁠. 제 졸업식에도 따로 오셨습니다⁠.⁠”

주희는 오른발을 구두에 도로 넣었다⁠. 할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2024년 겨울⁠, 남의 결혼식 진행을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 와 있던 문자 한 통⁠. 주희는 문자 이야기를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저는 끝에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을 알아요⁠.⁠”

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주희는 바나나우유를 쭉 빨아 마셨다⁠. 빨대가 빈 갑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은 증거가 없어서 다행이었겠네요⁠.⁠” 건우가 말했다⁠.

“⁠아니요⁠. 다행인 게 하나도 없었어요⁠.⁠”

*

벤치에서 일어나기 전에 주희가 말했다⁠.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안녕의 기술⁠」이요⁠. 준비 과정을 찍고 싶대요⁠. 식 당일까지⁠.⁠”

건우의 얼굴에서 아까의 표정이 한 번에 걷혔다⁠. “⁠안 됩니다⁠.⁠”

“⁠두 분 얼굴은 가려 준대요⁠.⁠”

“⁠얼굴을 가려도 목소리가 남고⁠, 목소리가 안 남아도 자막이 남습니다⁠. 식장 영상 하나도 위험한데 방송은 전국에 남는 기록입니다⁠. 지운다고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방송 한 번이면 이혼식이 뭔지 사람들이 알아요⁠. 문의가 열한 건이 아니라 백 건이 돼요⁠.⁠”

“⁠연 실장님 문의가 백 건이 되는 동안 제 의뢰인 서면은 열 장이 늘어납니다⁠.⁠”

주희는 일어나서 건우를 내려다보았다⁠. 건우는 앉은 채 올려다보았다⁠. 둘 사이에 납작한 우유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변호사님 말씀이 다 맞아요⁠. 그래도 저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알겠습니다⁠.⁠” 건우가 일어났다⁠. “⁠그럼 저도 제 일을 하겠습니다⁠.⁠”

*

오후 두 시⁠, 보란이 연습실에 왔다⁠. 십 분 뒤 규환도 왔다⁠. 오븐을 고치고 가게를 막내에게 맡기고 왔다고 했다⁠. 하늬가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은 하늬의 휴대전화 화면에 남아 있었다⁠. 「⁠아빠 2시⁠. 엄마 와 있음⁠. 안 오면 나 삐짐⁠」⁠.

둘은 따로 들어왔다⁠. 주희는 둘을 다시 복도로 내보냈다⁠. 규환과 보란이 연습실 문 앞에서 서로를 보았다⁠. 보란이 먼저 손잡이를 잡았고⁠, 규환이 문을 밀었다⁠. 둘이 같이 들어왔다⁠.

“⁠법원에서 부모 교육 받을 때 영상에서 그러더라고요⁠.⁠” 규환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이 앞에서 싸우지 말라고⁠. 아이가 보는 데서 서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그 영상 나도 봤어⁠. 당신 졸았잖아⁠.⁠”

“⁠안 졸았어⁠.⁠”

“⁠코 골았어⁠. 옆 사람이 쳐다봤어⁠.⁠”

딩⁠. 주희가 가방에서 꺼내 놓은 탁상종을 하늬가 쳤다⁠. 둘이 동시에 하늬를 보았다⁠. 하늬가 종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탓하는 말이잖아요⁠.⁠” 솔지가 헤드셋도 안 낀 채 주희를 보았다⁠. 주희는 하늬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솔지가 테이프 위에 둘을 세웠다⁠. 건우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보았다⁠. 하늬가 음악을 틀었다⁠. 규환이 첫 걸음에 보란의 발을 밟았다⁠. 보란이 “⁠아⁠” 하더니 웃었다⁠. 결혼식 영상 속 웃음과 같은 웃음이었다⁠. 하늬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음악이 멈췄다⁠.

“⁠다시⁠.⁠” 보란이 말했다⁠. “⁠처음부터⁠.⁠”

둘은 세 걸음을 추었다⁠. 앞⁠, 옆⁠, 뒤⁠. 네 번째 걸음에서 규환이 멈췄다⁠. 보란도 멈췄다⁠. 둘은 손을 잡은 채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둘은 십 년 전 영상보다 조금 넓게 떨어져 있었다⁠. 솔지가 등을 돌리고 코를 훌쩍였다⁠.

연습이 끝나고 보란이 가방을 메다가 주희에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실장님⁠, 그날 영상은 무대 정면에서 찍어 주세요⁠. 인사할 때 그 사람 얼굴 잘 나오게⁠. 사촌 동생한테 말해 둘게요⁠.⁠”

“⁠네⁠. 인사 장면은 원래 정면에서 찍어요⁠.⁠”

“⁠그렇죠⁠.⁠” 보란이 웃었다⁠. 또박또박⁠. “⁠그날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의자에서 건우가 일어났다⁠. 팔짱을 풀고 보란 앞으로 왔다⁠. “⁠아내분⁠,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촬영 원본은 누가 갖습니까⁠?⁠”

“⁠하늬 거죠⁠.⁠” 보란이 하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건우를 보았다⁠. “⁠애가 크면 보라고요⁠.⁠”

“⁠원본이 몇 부 나옵니까⁠?⁠”

“⁠그건 사촌 동생한테 물어보세요⁠. 저는 잘 몰라요⁠.⁠” 보란이 가방끈을 어깨에 고쳐 멨다⁠. “⁠변호사님은 정말 다 증거로 보이시나 봐요⁠.⁠”

“⁠첫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보란이 웃으며 나갔다⁠. 규환이 뒤따라 나가다 문 앞에서 멈췄다가⁠, 보란이 이미 계단을 올라간 것을 보고 혼자 나갔다⁠. 같이 들어온 둘은 따로 나갔다⁠. 주희는 클립보드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건우는 의자에 둔 서류 봉투를 집어 들고 봉투 모서리로 손바닥을 한 번 톡 쳤다⁠.

*

밤 열한 시⁠, 주희는 접이식 침대에 앉아 발목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있었다⁠. 냉동실에 있던 것이 얼음주머니가 아니라 솔지가 사다 둔 냉동 만두였다⁠. 만두 봉지가 발목 모양대로 휘었다⁠. 주희는 국승현 피디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했다⁠. 「⁠준비 과정만⁠, 식 당일 제외⁠, 얼굴 가림⁠」⁠. 보내기 버튼 위에서 엄지가 멈춘 채 휴대전화가 먼저 울렸다⁠.

「⁠차건우 변호사⁠」⁠.

「⁠방송 계약을 하시면 제 의뢰인은 식에 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들어와야 열리는 식이라고 하셨죠⁠.⁠」

주희는 오른발을 내려다보았다⁠. 엄지발가락 위가 붉게 부어 있었다⁠. 일곱 번 밟힌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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