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07자)
의뢰인이 변호사를 이겼다
이혼식 플래너 · 석다감
9월 9일 목요일 오전 열 시, 서초동 법무법인 십사 층 회의실. 창밖으로 법원 건물들이 회색 상자처럼 줄지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생수 세 병과 서류철 하나, 그리고 주희가 가방에서 꺼내 놓은 놋쇠 탁상종이 있었다. 건우가 종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여기까지 들고 오셨습니까?”
“들고 다닌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은 기획 회의가 아닙니다. 아내분이 안 계십니다.”
“알아요. 그래서 종은 안 칠게요. 놓아두기만 해요.”
건우가 회의를 연 까닭은 하나였다. 월요일 밤 규환이 주희에게 전화한 일을 규환 본인이 화요일 아침에 건우에게 털어놓았다. 규환은 거짓말을 오래 들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생수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창밖만 보고 있었다.
“서규환 씨.” 건우가 서류철을 열었다. “아내분 변호사가 보낸 서면 초안입니다. 협의 중이라 아직 법원에는 안 냈습니다. 첫 장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건우가 목소리를 바꿨다. 낮고 또박또박, 남의 원고를 읽는 목소리였다.
“「청구인은 2018년 3월 9일 밤, 제과점 밀과달 개업 전날 대표 상품 반달 카스텔라를 처음 구웠고, 이후 매장 설계와 회계를 도맡았다. 사업자 명의는 피청구인이나, 제과점의 가치는 두 사람이 함께 이룬 것이다.」” 건우가 종이를 내렸다. “여기에 한 줄이 붙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피청구인 본인도 2027년 11월 27일 하객 앞에서, 가게를 함께 일궈 준 청구인에게 감사한다고 말하였다.」 이 한 줄이면 아내분 서면은 끝납니다.”
규환이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근데 그게 사실이잖아요.”
“사실이니까 문제입니다.”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법원에서 쓰일 말을 법원 밖에서 공짜로 주지 말라는 겁니다.”
주희는 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둘 사이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식에서도 신랑과 신랑 아버지가 축가 순서를 두고 다툴 때 플래너가 끼어들면 일이 두 배로 커졌다.
규환이 한참 만에 말했다. “변호사님. 결혼식 때 저는 인사를 안 했어요. 사회자가 하라는데 마이크 앞에서 아무 말도 안 나와서, 고개만 숙였어요. 보란이가 대신 했어요. 그게 십 년 내내 그랬어요. 가게 일도, 하늬 학교 일도, 장모님 생신도.” 규환은 손등의 오래된 화상 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마지막엔 제가 하고 싶어요. 변호사님은 제 변호사잖아요.”
건우는 서류철을 덮었다. 창밖의 법원 건물을 한 번 보고, 탁자 위의 종을 한 번 보았다.
“제가 막을 수 있는 데는 여기까지입니다. 의뢰인이 정하시면 저는 따릅니다.” 건우가 볼펜을 들었다. “대신 원고는 제가 봅니다. 한 글자씩 봅니다.”
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희는 클립보드를 꺼내 괄호를 지웠다. 서로에게 드리는 감사 인사. 줄이 살아났다. 건우가 고개를 돌려 되살아난 줄을 보았다.
“연 실장님. 오늘 종은 안 치셨네요.”
“변호사님이 지셨잖아요. 지신 분한테는 안 쳐요.”
*
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건우는 한 번도 주희를 보지 않았다. 일 층 편의점에서 건우가 바나나우유 하나를 샀다. 정장 차림의 변호사가 빨대를 꽂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서, 주희는 웃음을 참느라 헤드셋 줄을 만지작거렸다.
“의뢰인한테 지신 건 처음이세요?”
“이번 달 들어 두 번째입니다.” 건우가 빨대를 물었다. “한 분은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셨고, 한 분은 이혼식에서 인사를 하겠다고 하십니다.”
“둘 다 지셔서 다행이네요.”
“다행인지는 월요일마다 알게 됩니다.” 건우가 빈 우유갑을 납작하게 눌렀다. “연 실장님은 이겼다고 생각하시죠.”
“네.”
“원고를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편의점 유리문에 둘이 나란히 비쳤다. 건우의 눈이 유리 속 주희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만년필이었다.
“그 펜, 쓰시긴 합니까?”
“계약서에 서명할 때만요. 평소엔 머리 붙잡는 데 써요.”
“펜이 머리를 붙잡습니까?”
“빼 보시면 알아요.” 주희가 말했다가, 말을 뱉고 나서 귀가 뜨거워졌다. 건우는 대답 없이 납작한 우유갑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넣고 나서 한 번 더 유리문을 보았다.
*
이튿날 금요일 오전, 원고가 왔다. 규환은 가게 주문서 뒷면에 볼펜으로 썼고,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주문서 앞면의 「반달 카스텔라 20개 · 픽업 3시」가 뒤로 비쳐 보였다. 서초동 법원 앞 카페에서 건우가 원고를 출력해 탁자에 펼쳤다. 빨간 펜 뚜껑을 이로 물어 뽑았다. 주희와 규환이 맞은편에 앉았다.
「보란아. 고마웠어. 당신 덕분에 우리 가게가 생겼어. 반달 카스텔라는 당신이 만들었어. 나는 오븐만 봤어. 미안해.」
빨간 줄이 하나씩 그어졌다.
“‘당신 덕분에’는 안 됩니다. ‘당신과 함께한 동안’으로 하시죠.”
“그게 무슨 차이예요?” 주희가 물었다.
“덕분은 원인입니다. 함께는 시간입니다. 원인은 서면에 들어가고 시간은 안 들어갑니다.”
“‘우리 가게’는요?”
“‘가게’만 남기시죠. ‘우리’가 붙으면 공동 소유를 말한 게 됩니다.” 빨간 펜이 다음 줄로 갔다. “반달 카스텔라 문장은 통째로 뺍니다. 사건의 첫 장입니다.”
“‘미안해’는요?” 규환이 물었다.
건우의 펜이 멈췄다.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누구 잘못으로 혼인이 깨졌는지 다투는 사건은 아니지만, 아내분 변호사가 다른 데에 쓸 수 있습니다.”
빨간 줄이 그어진 원고에는 두 줄이 남았다. 「보란아. 고마웠어. 당신과 함께한 동안 가게가 생겼어.」
주희가 원고를 들어 올렸다. “변호사님, 이건 인사가 아니라 공문이에요.”
“공문이면 다음 달에 안 읽힙니다.”
규환이 남은 두 줄을 오래 보았다. 빨간 줄 밑으로 지운 글자가 그대로 보였다. 지운 글자가 남은 글자보다 많았다.
“‘고마웠어’는 살아 있네요.” 규환이 말했다.
“그건 제가 못 지웠습니다.” 건우가 펜 뚜껑을 닫았다. “고맙다는 말까지 지우면 인사를 하실 까닭이 없으니까요.”
카페를 나와 주희는 보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뢰인은 둘이었고, 한 사람에게 생긴 일은 다른 사람도 알아야 했다. 감사 인사가 식순에 돌아왔다고 하자 보란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사람이 한대요? 자기 입으로?”
“네. 원고는 변호사님이 보시고요.”
“다 지웠겠네요.” 보란이 웃었다. 웃음 끝이 빨랐다. “‘고마웠어’는 남았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사람은 그 말밖에 못 써요. 연애할 때 편지도 그랬어요.” 보란의 목소리 뒤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났다. 하늬를 데리러 학교 앞에 와 있다고 했다. 보란은 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실장님, 그날 영상은 제가 아는 데 맡길게요. 사촌 동생이 영상 일 해요. 돈 안 받는대요.”
주희는 견적서의 영상 칸을 떠올렸다. 가장 비싼 칸이었다. “좋아요. 변호사님한테도 말씀드려 둘게요. 누가 찍는지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럼요. 말씀드리세요.” 보란이 또박또박 말했다. “숨길 게 뭐 있어요.”
*
금요일 오후 다섯 시, 합정역 뒤 상가 지하의 춤 연습실. 솔지가 대학 방송댄스 동아리 후배에게서 한 시간에 만오천 원에 빌린 방이었다. 벽 한 면이 통거울이었고 바닥에서 고무 냄새와 오래된 땀 냄새가 났다. 하늬는 학교에서 입고 온 체육복 차림으로 거울 앞에 앉아 휴대전화로 영상을 틀었다.
십 년 전 결혼식 영상이었다. 흰 드레스의 보란과 검은 양복의 규환이 연회장 가운데에 서 있었다. 바이올린 한 대와 피아노가 느린 곡을 연주했다. 규환이 첫 걸음에 보란의 발을 밟았다. 보란이 웃었다. 영상 속 하객들도 웃었다. 하늬는 발 밟는 장면에서 멈췄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예요.” 하늬가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알려 줬어요. 영국 사람이 결혼할 사람한테 준 곡이래요.”
“몇 번 봤어?” 솔지가 물었다.
“스무 번 넘게요. 엄마 아빠는 몰라요.”
곡은 삼 분 이십 초였다. 하늬는 휴대전화 녹음 앱으로 곡 끝에 사십 초를 더 붙여 왔다. 아무 소리 없는 사십 초였다.
“이건 왜 붙였어?” 주희가 물었다.
“춤 끝나고 인사하는 시간이요. 영상에서는 춤 끝나자마자 사회자가 다음 순서 불렀어요. 엄마 아빠가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주희는 클립보드에 숫자를 적었다. 사 분. 솔지가 하늬 손을 잡고 거울 앞에서 상자 모양으로 발을 옮기는 걸음을 가르쳤다. 앞, 옆, 뒤, 옆. 하늬는 열 번 만에 박자를 맞췄고, 열한 번째에 솔지의 발을 밟았다.
“아빠 닮았어.” 하늬가 말했다.
“아빠한테 가르쳐 줄 수 있겠다.” 솔지가 말했다.
하늬가 거울 속 주희를 보았다. “선생님. 엄마 아빠 다시 결혼하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알아요. 그냥 마지막 장면이 싸우는 거면 싫어서요.”
주희는 하늬 옆에 쪼그려 앉았다. 치마가 무릎에서 당겼다. 열 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진행표에 없었다. 주희는 하늬의 휴대전화를 받아 사 분짜리 곡을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바이올린이 첫 음을 끌었고, 거울 속에서 열 살 하나와 서른여섯 하나가 같은 박자로 고개를 까딱였다.
*
일곱 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솔지가 비명을 질렀다. 결혼 준비 정보를 올리는 웨딩 계정 하나가 연플래닝의 반지 목걸이 사진을 퍼 갔다. 「이혼식에서 반지를 녹여 아이 목걸이로?」. 하트가 이천 개를 넘었다.
“실장님, 문의 일곱 건이요!”
주희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남편 몰래 이혼식 예약 가능한가요?」 「반려견도 하객으로 되나요?」 「이혼은 아직인데 식 먼저 해도 돼요?」 일곱 건 가운데 둘은 남편 몰래였다. 주희는 두 건에 같은 답장을 보냈다. 「두 분이 같이 들어오셔야 열리는 식입니다.」
솔지의 휴대전화에는 다른 알림도 와 있었다. 청담동 웨딩 플래너와 드레스 숍, 웨딩홀 실장들이 모인 단톡방 「청담 웨딩인」이었다. 누군가 같은 사진을 올려 두었다. 「이혼식이래요ㅋㅋ 청담 물 흐리네」. 밑에 웃음 표시가 열몇 개 붙었고, 한 사람이 「연주희 실장 아님? 큰 회사 나가더니」라고 달았다.
“나가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래요.” 솔지가 화면을 껐다.
“상관있지. 같은 동네에서 밥 먹는 사람들이야.” 주희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웨딩카 한 대를 보았다. 리본이 바람에 뒤집혀 있었다.
밤에 주희는 청담동 화이트벨홀의 신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웨딩 회사 시절 같이 일한 사이였다. 11월 27일 토요일 오후 두 시, 소연회장이 비어 있었다. 신 실장은 한참 말이 없다가 조건을 하나 달았다. “밖에서 보이는 데에는 이혼이라는 글자 쓰지 마. 같은 층에 신부 대기실이 있어.”
주희는 접이식 침대를 펴다 말고 숫자를 다시 보았다. 문의 일곱. 장소 하나. 클립보드의 식순 일곱 줄. 침대 다리가 딸깍 펴지는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연주희 씨요?” 나이 든 여자 목소리였다. 뒤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떡 써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규환이 엄마예요. 이혼을 잔치로 한다는 게 당신이요?”
“네, 어머님. 제가….”
“추석 다음 날 양가 다 모여요. 한정식집 잡아 놨어. 당신도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