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5,365자) · 강윤재 · 8월 25~26일
빠지지 말라
심도 (3차대전 3부작 제2부) · 네오
8월 25일 0152, 신채호함은 심도 20에서 안테나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수면에 닿은 것은 8월 12일 보급 때였다. 그 뒤 열사흘 동안 이 배는 아래에서 숨만 쉬었다. 발령소의 시계가 0200을 가리켰다. 조타장은 초시계를 눌렀다. 지완 대신 음탐을 선 하사가 전자 지원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은 비어 있었다.
“18분입니다. 0218에 내려갑니다.”
윤재는 송신 단말 앞에 서 있었다. 보낼 것은 한 줄이었다. 위치 유지, 전지 하루, 보급 요청. 송신은 40초가 걸렸고, 40초 동안 전지 잔량 표시가 한 칸 내려갔다. 보내고 나서 수신 표시등은 초록으로 바뀌었다. 합참의 전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줄씩 느리게 올라오는 글자를 윤재는 서서 읽었다.
0204에 첫 줄이 찍혔다. 다음 줄은 한참 오지 않았다.
0209에 전자 지원 화면에서 가는 선 하나가 올라왔다. 수색 레이더였다. 아주 먼 곳에서 해면을 쓸고 있었고,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선이 조금 굵어졌다. 음탐을 선 하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방위 310. 항공기입니다. 레이더가 넓습니다. 전자정찰기(상대의 전파를 엿듣는 비행기)입니다. 한 바퀴에 20초입니다.”
“수신은.”
“여덟 줄 가운데 다섯 줄 왔습니다.”
윤재는 시계를 봤다. 0211이었다. 7분이 남아 있었다. 전문이 끝까지 들어오려면 몇 분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안 온 세 줄이 가장 중요한 세 줄일 수 있었다. 레이더는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이쪽으로 선을 굽혔다.
“4분만 더 기다린다.”
조타장이 숨을 들이켰다. 규정은 레이더가 이쪽을 향하면 즉시 내려가라고 했다. 윤재는 규정을 알고 있었다. 4분 안에 레이더가 이쪽으로 닿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전문을 한 번 더 받으려면 열이틀을 기다려야 했고, 전지는 하루였다.
0213에 선이 한 번 굵어졌다. 0214에 한 번 더 굵어졌다. 0215에 여섯 번째 줄이 들어왔다. 0216에 일곱 번째 줄이 들어왔고, 선이 이 배의 방위에서 멈췄다. 레이더 한 바퀴가 이쪽에서 길게 머물렀다.
“조사입니다! 이쪽을 잡았습니다!”
“마지막 줄이 안 왔다.”
“부장님!”
“줄이 안 왔다.”
0217에 마지막 줄이 찍혔다. 윤재가 안테나를 내리라고 말하기 전에 조타장이 이미 침로를 숙였다. 배가 앞으로 기울었다. 수면이 머리 위에서 닫혔다. 0218에 윤재는 단말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다.
*
0221에 심도 120에서 소노부이(물에 떨어뜨려 소리를 듣는 장치) 하나가 해면을 갈랐다.
정찰기가 던진 것이었다. 소리가 머리 위에서 쿵 하고 가라앉으며 선체를 한 번 스쳤다. 두 번째, 세 번째가 이어졌다. 이쪽의 방위를 알려는 것이 아니라 올라온 자리를 알려는 것이었다. 윤재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기만기 하나. 심도 200, 좌현으로 천천히.”
사출관에서 통이 나갔다. 기만기가 이 배의 소리를 흉내 내며 서쪽으로 갔다. 0224에 부이 하나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0231에 정찰기가 서쪽으로 선회했다. 0240에 레이더 선이 가늘어졌다.
“기만기 남은 것은 둘입니다.”
“적어 둔다.”
윤재는 방금 받은 전문을 해도대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글과 서명을 빼면 두 줄이었다. 합참 작전본부 명의였다.
현 위치 유지. 동해로 빠지지 말라.
그 아래에 보급 일정이 한 줄 붙어 있었다. 8월 26일 2200, 우군 해역 끝자락. 품목은 산소, 수소, 식량. 탄약이라는 말은 없었다. 윤재는 전문을 두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같은 두 줄이었다. 이 배에 동해로 빠지라고 한 사람이 같은 이름으로 빠지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없는 것이 이유를 붙인 것보다 오래 남았다.
조타장이 어깨 너머로 읽고 코로 숨을 내쉬었다.
“빠지라고 하시더니 이젠 빠지지 말라고요. 뭐 하나 정하셨습니까, 거기서는.”
“정한 거겠지.”
“정하는 데 3주 걸렸군요.”
발령소의 누군가 웃음을 삼켰다. 백 소령이 발령소 해치로 들어서다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전문을 받아 한 줄씩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견은 그대로야. 지금도 어뢰는 없다.”
“예.”
“그런데 이유 없는 명령이 이유 있는 명령보다 무섭다. 이유가 있으면 틀렸는지 알아볼 수 있어. 이유가 없으면 누가 정했는지부터 알아야 해.”
그는 전문을 도로 내려놓았다. 윤재는 일지를 펴지 않았다. 칸이 모두 찬 일지였다.
*
8월 25일 0900, 사세보 항 제3부두의 크레인 운전석에서 모리타는 부두 바닥의 나무 상자 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새 비가 내렸다. 방수포는 젖어서 검게 가라앉았고 그 위에 노란 분필 글씨가 남아 있었다. 비에 번져 한 획이 지워졌지만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글씨는 내일이라는 글자로 시작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부두에서 모리타 하나였다. 그가 쓴 글씨였다. 다섯 주 전에 쓴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아침 부두에 나와 방수포 모서리의 밧줄 매듭을 만져 봤다.
0910에 방위성의 연락관이 서류철을 들고 부두로 걸어왔다. 이름표에 하세가와라고 적혀 있었다. 서른 중반의 사람이었고, 그는 이 부두의 모든 짐에 도장 칸이 비어 있는지 아닌지를 아침마다 확인했다. 오늘 아침 그는 서류철을 든 채 나무 상자 곁에 서서 한참 있다가 모리타를 올려다봤다.
“반장님, 오늘 아침에도 서류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국 군수지원함은 1300에 출항합니다. 오늘 못 싣고 나가면 다음 배는 열흘 뒤입니다.”
“열흘 뒤에도 서류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안 싣는 겁니다.”
하세가와는 서류철을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에 반박하는 기색은 없었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규칙이 자기 대신 말하게 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모리타는 그 얼굴을 한동안 봤다.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한 달 전의 자기였다.
문 대위가 군수지원함 쪽에서 걸어왔다. 그는 부두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7월에도 그랬다. 요청하지 않는 것이 이 사람이 알아낸 요청하는 법이었다.
모리타는 크레인 운전석의 일지를 폈다. 칸이 있는 자리에 오늘의 하역 계획을 적었다. 산소, 수소, 식량. 그 아래 한 줄이 비어 있었다. 모리타는 볼펜을 쥐고 잠깐 서류철의 빈 칸을 내려다봤다. 인주가 스며 부푼 칸들 사이에서 그 칸 하나만 종이 결이 매끈했다. 다섯 주 전부터 그랬다. 도장은 한 번도 그 칸을 눌러 보지 못했다.
그는 적었다. 1000 적재. 서류 미도착. 책임 모리타. 이름 석 자를 한 획씩 정확히 썼다.
하세가와가 일지를 올려다봤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모리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크레인의 레버를 잡았다. 방수포를 벗기지 않았다. 방수포째 상자 넷을 한 묶음으로 걸어 올렸다. 방수포 위의 분필 글씨가 햇빛에 한 번 번쩍였다. 글씨가 위로 올라가다가 바다를 향해 한 바퀴 돌았다. 한국 수병 둘이 갑판에서 거치대 모서리를 붙들고 기다렸다. 상자가 갑판에 닿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모리타는 레버를 놓고 손목의 힘을 뺐다.
1200에 부두 정문으로 방위성 차량이 들어왔다. 연락관 하나가 서류를 들고 뛰어내렸다. 도장이 찍혀 있었다. 탄약 4. 결재 시각은 1147이었다. 문 대위가 서류를 받아 모리타 앞에 내밀었다. 모리타는 서류를 받지 않았다. 그는 크레인 운전석에서 서류의 도장을 한동안 내려다봤다. 도장 인주가 마르지 않아 가장자리가 번져 있었다. 2시간 전이었다. 1000에 그가 한 일이 1147에 법이 됐다. 이 2시간 사이의 모든 책임은 모리타 하나의 이름 석 자였다.
“반장님.”
문 대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상자 위의 글씨는 지우시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지우지 마십시오. 글씨도 같이 가는 짐입니다.”
*
8월 26일 2200, 우군 해역 끝자락에서 군수지원함의 검은 선체가 수면에 낮게 누워 있었다.
윤재는 함교탑에 올라 있었다. 이번에는 바람이 서늘했다. 군수지원함에서 호스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소와 수소가 먼저 넘어왔다. 발령소 벽의 잔량 표시가 한 칸씩 올라갔고 백 소령이 기관실에서 숫자를 불렀다. 하나, 둘, 셋. 이번에는 사이가 일정했다.
문 대위가 고무보트에서 올라와 윤재 앞에 섰다. 그는 경례를 하려다 손을 내리고 말했다.
“부장님, 어뢰 넷입니다.”
윤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류는 어제 정오에 왔습니다. 부두 반장이 서류가 오기 2시간 전에 실었습니다. 방수포는 그대로입니다. 그 위에 글씨가 있는데, 지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글씨인가.”
“저도 모릅니다. 일본어입니다. 다만 부두 반장이 그 글씨도 짐이라고 했습니다.”
수면 위로 크레인이 어뢰 상자를 하나씩 내렸다. 어뢰 담당 중사가 갑판 해치 아래에서 상자를 받았다. 상자는 방수포에 싸여 있었고, 방수포 위에 비에 번진 노란 글씨가 있었다. 중사는 그 글씨를 읽을 줄 몰랐다. 그는 허리를 숙여 글씨 앞에서 한동안 보더니 손가락으로 번진 획을 한 번 짚었다. 짚은 자리에서 노란 가루가 묻어났다.
2215에 지완이 헤드폰을 쓰지 않은 채 함교탑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프로펠러 소리입니다. 작은 것입니다. 북쪽 20킬로미터입니다.”
“무인기인가.”
“예. 이쪽으로 옵니다.”
군수지원함 갑판에서 누군가 외쳤다. 호스를 끊을지 묻는 소리였다. 어뢰는 세 발이 내려왔고 마지막 한 발이 크레인에 걸려 갑판 위에 떠 있었다. 윤재는 문 대위를 봤다. 문 대위는 이미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호스를 끊으면 마지막 한 발은 공중에서 되돌아가야 했다. 어뢰는 다시 사세보까지 가야 하고, 그러면 이 배는 세 발로 선단을 만난다.
“90초 더 기다린다.”
“무인기가 6분 안에 옵니다.”
“90초면 된다.”
윤재는 시계를 봤다. 초침이 한 칸씩 움직였다. 크레인이 어뢰를 한 번 흔들었다가 해치 위로 내렸다. 중사가 몸을 던지듯 상자 모서리를 받았다. 해치로 들어가는 어뢰의 머리가 불빛에 번쩍였다. 90초가 다 지나기 전에 어뢰의 꼬리가 해치 안으로 들어갔다. 호스가 풀렸다. 무인기의 프로펠러 소리는 아직 4분을 남기고 있었다. 신채호함은 그때 이미 잠항을 시작했다.
*
2300에 신채호함은 심도 20에서 안테나를 올려 18분을 썼다.
요약은 짧았다. 사령부 판단은 D-4였다. 그 위에 한 줄이 새로 붙어 있었다. 윤재는 그 줄을 서서 읽었다. 읽는 동안 안테나가 수면 위에서 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제3제대 8월 27일 출항 확인.
어뢰실에서는 어뢰 담당 중사가 네 발을 거치대에 눕히고 고정 띠를 한 줄씩 감고 있었다. 오래 비워 둔 자리였다. 띠를 감을 때마다 손가락이 어뢰의 차가운 동체에 닿았다. 마지막 거치대 위, 어뢰가 누운 자리의 벽에는 방수포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비에 번진 노란 분필 글씨가 어뢰실의 형광등 아래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