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5,374자) · 강윤재 · 8월 24일(화)
쉰셋
심도 (3차대전 3부작 제2부) · 네오
8월 24일 0030, 윤재는 항해일지의 새 쪽을 펴고 가장자리에 작은 네모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줄에 열 칸씩, 여섯 줄이었다. 마지막 줄에는 세 칸만 그렸다. 칸 하나는 한 사람이었다. 발령소 벽의 잔량 표시는 하루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상은 내일 새벽 0200이었다. 그때까지 스물다섯 시간 반 안에 쉰세 칸을 채워야 했다.
조타장이 손잡이를 쥔 채 곁눈질로 쪽을 훔쳐봤다.
“출석부입니까, 부장님.”
“출석부는 아니다.”
윤재는 맨 위 칸에 볼펜을 댔다. 그 칸은 자기 몫이었다. 묻는 사람이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물을 자격이 없었다. 그는 한 줄을 적었다. 0034 강윤재, 남는다. 어뢰가 오면 쏜다. 민간선이 섞인 선단에서 무엇을 쏠지는 그때 정한다. 적고 나서 그는 네모 하나를 연필로 칠했다.
“오늘 모두에게 한 번씩 묻겠다. 한 사람씩 직접 간다. 대답은 이 쪽에 한 줄로 적는다. 명령이 아니니까 거절해도 된다.”
“거절도 줄로 적으시는 겁니까?”
“거절도 적는다.”
발령소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조타장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손잡이를 더 단단히 쥐었다. 윤재는 일지를 덮지 않은 채 발령소를 나섰다. 펼쳐 둔 쪽이 해도대 위에서 환풍기 바람에 한 번 들썩였다.
*
0610에 기관실에서 백 소령이 온도 기록지를 넘기고 있었다.
최민석은 그 곁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바닥에는 반창고가 여러 겹 붙어 있었다. 여드레 전에 핸들을 놓은 손이었는데, 아직 주먹이 끝까지 쥐어지지 않았다. 윤재가 들어가자 그는 일어서려다 의자 팔걸이에 반창고 낀 손이 걸려 비틀했다.
“앉아 있게. 한 가지만 묻겠다. 선단이 온다. 어뢰는 아직 없다. 남아서 듣고, 어뢰가 오면 쏜다. 그렇게 할 것인가.”
“예. 남겠습니다.”
“한 줄로 적을 건데,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
“전지는 하루 남았습니다. 아끼면 하루 반까지 늘려 보겠습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가겠습니다.”
윤재가 쪽에 적었다. 0612 최민석 하사. 남는다. 전지는 맡겠다. 민석이 반창고 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서명 대신이었다.
백 소령은 기록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재가 다가서자 그는 볼펜을 내밀었다.
“내 것은 내가 적는다.”
그는 일지를 받아 무릎 위에 놓고 한 줄을 적었다. 글씨가 작고 각이 졌다. 0615 백 소령, 남는다. 이견은 그대로. 적고 나서 그는 줄 끝을 한 번 손가락으로 훑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손가락이 번질 만큼 세게 훑은 것이 아니었다.
“남지만 이견은 그대로야. 이게 이 배에서 제일 어려운 말이다. 부장이 알았으면 좋겠군.”
“알고 있습니다.”
“알면 됐다.”
*
0930에 어뢰실에서 어뢰 담당 중사가 빈 거치대 앞에 쪼그려 앉아 고정 띠를 한 줄씩 닦고 있었다.
그 곁 바닥 매트에서는 수병 하나가 모포를 덮고 자고 있었다. 빈 거치대 옆에 매트를 깔고 자던 수병이었다. 윤재가 들어가자 중사가 일어서 경례했다. 윤재는 손짓으로 그를 앉혔다.
“쏠 게 없는데 남느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쏠 게 오면 쏘는 사람에게 묻는다.”
“쏠 게 오면 쏩니다. 안 오면 거치대를 닦고 있겠습니다. 닦는 건 제 일입니다.”
“민간선이 섞여 있다.”
중사는 띠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기름이 묻어 있었고, 그 손으로 그는 이마를 한 번 훔쳤다. 이마에 검은 줄이 하나 생겼다.
“그걸 쏠지 말지는 어뢰를 장전하는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발사관이 열리라고 하면 열고 닫으라면 닫습니다. 그래서 편합니다. 부장님은 안 편하시겠지만요.”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중사는 잠시 후 덧붙였다.
“그래도 제가 누구를 향해 장전하는지는 알고 하고 싶습니다.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윤재가 적었다. 0937 어뢰 담당 중사. 남는다. 무엇을 향해 장전하는지 알려 달라. 매트에서 자던 수병이 모포 밑에서 눈을 뜨고 윤재를 봤다.
“저도 줄 하나 받습니까?”
“받는다.”
“남습니다. 자던 중이라 길게는 못 합니다.”
0940 수병, 남는다. 자던 중이라 길게는 못 한다. 수병은 이미 눈을 감았다.
*
1015에 오 하사는 조리실에서 국을 끓이고 있었다.
윤재가 문 앞에 서자마자 지완의 목소리가 벽 스피커에서 내려왔다. 낮고 급했다. 위에서 능동 핑이 온다고 했다. 헬기였다. 가는 소리가 선체를 한 번 쓸고 갔다. 오 하사가 얼어붙었다. 국솥의 뚜껑이 그 핑에 맞춰 달그락 소리를 낼 것 같았다. 오 하사는 행주를 집어 뚜껑 손잡이에 감고 두 손으로 눌렀다.
윤재는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남을 건가.”
오 하사는 소리 없이 대답했다. 남아요, 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고, 한 번 더 천천히 덧붙였다. 국 끓으면 안 돼요. 핑이 두 번째로 왔다. 뚜껑 밑에서 국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오 하사는 불을 껐고 뚜껑을 쥔 두 손에 힘을 더 줬다. 눈짓으로 윤재에게 일지에 적으라고 했다. 윤재는 쪽을 펴 한 줄을 적었다. 입으로 말하지 않은 줄이었다. 1019 오 하사, 남는다. 국이 끓으면 안 된다.
오 하사가 뚜껑을 쥔 채 일지를 곁눈질로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핑은 그 뒤로 오지 않았다. 국솥 밑에서 불이 꺼지는 소리가 가늘게 났고, 뚜껑은 두 손 밑에서 끝내 달그락거리지 않았다.
*
1300에 식당은 점심때였다.
발령소와 기관실의 식탁이 다시 섞여 있었다. 윤재는 식판을 들고 식탁 사이를 돌며 한 사람씩 짧게 물었다. 대답은 거의 같았다. 남는다. 남습니다. 남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밥을 먹다 말고 일어서서 대답했고, 어떤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끄덕임도 줄이 됐다. 윤재는 쪽에 한 줄씩 적었고 칸이 하나씩 칠해졌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셋.
어뢰실의 선임 수병 하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처음 보는 바다라서요, 라고 했다. 윤재는 그 말을 그대로 한 줄로 적었다. 1301 선임 수병, 모르겠다. 처음 보는 바다라서.
조타장은 식판에 두부를 두 조각 얹은 채 윤재를 올려다봤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윤재는 볼펜을 멈췄다.
“부장님이 물으시기 전에 저는 이미 남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물으시니까 모르겠습니다. 물으시면 정해야 하니까요. 정한 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되면 나중에 못 도망갑니다.”
“도망가고 싶나.”
“가고 싶습니다. 가서 손잡이는 쥐겠습니다.”
윤재가 적었다. 1304 조타장, 모르겠다. 손잡이는 쥔다. 조타장은 그 줄을 어깨 너머로 읽고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거면 됐습니다. 정확합니다.”
식탁 맨 끝에서 수병 둘이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스무 살 남짓이었다. 한 사람은 갑판에서 일하는 수병이었고 한 사람은 전기실 하사였다.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갑판 수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올라가고 싶습니다.”
“저도요.”
식당에서 숟가락 소리가 멎었다. 윤재는 두 사람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둘이 잘못한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지에 적었다. 1311 갑판 수병. 올라가고 싶다. 1311 전기실 하사. 올라가고 싶다. 둘 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갑판 수병이 말했다.
“이유를 안 적으십니까?”
“말하고 싶으면 말해라. 적는다.”
“무섭습니다.”
“적는다.”
그는 적었다. 무섭다. 한 줄 뒤에 칸이 둘 칠해졌다. 식당에 다시 숟가락 소리가 났다. 조타장이 두부를 한 조각 덜어 갑판 수병의 식판에 옮겨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1540에 음탐실로 들어가자 지완이 헤드폰을 쓴 채 돌아앉았다.
윤재가 묻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남습니다. 들은 걸 보내는 건 제 일입니다. 그만 듣고 싶다는 건 제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름 있는 배를 듣습니다. 푸캉 3호요. 신양 7호요. 이름을 알면 소리가 다르게 들릴까 봐 무섭습니다. 같은 스크루인데 다르게 들릴까 봐.”
지완이 말을 맺기도 전에 헤드폰 스피커에서 핑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가까웠다. 소리가 선체를 쓸었고, 음탐실 벽의 계기 바늘이 한 번 떨었다. 지완은 손바닥을 들었다. 윤재가 입을 닫았다. 핑은 한 번 더 왔고, 이번에는 선체에 닿는 소리가 분명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1549에 핑이 멎었다. 지완이 헤드폰을 한쪽 귀에서 뗐다.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남습니다.”
“한 줄로 적는다.”
“한 줄이면 됩니다.”
윤재가 적었다. 1552 최지완 하사. 남는다. 이름을 알아도 소리를 똑같이 듣겠다. 지완은 그 줄을 읽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헤드폰을 도로 썼다. 쪽에는 이제 쉰 칸이 칠해져 있었다.
*
1900에 윤재는 의무실의 의자에 앉았다.
함장은 침상에 반쯤 기대 있었다. 얼굴의 부기는 거의 빠졌고 눈이 맑았다. 말은 아직 느렸지만 한 문장을 한 번에 끝냈다. 남 중사가 커튼 밖에서 약병을 정리하다가 손을 멈췄다. 이 방에 윤재가 들어올 때마다 그는 그렇게 멈췄다.
윤재는 의무실 문턱에서 남 중사에게 먼저 물었다. 남 중사는 약병 정리를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남습니다, 함장님이 안 내리시니까요. 1855 남 중사, 남는다. 함장님이 안 내리신다. 그것이 쉰두 번째였다.
“쉰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 한 칸이 남았습니다.”
“그 칸이 저입니까?”
“예. 첫 칸은 제 몫으로 적었습니다.”
함장은 한동안 천장의 배관을 봤다. 번호를 읽는 눈이었다. 한참 뒤에 눈을 윤재에게로 돌렸다.
“부장님 배입니다.”
그 말뿐이었다. 윤재는 볼펜을 쥔 채 기다렸다. 함장은 더 말하지 않았다. 윤재는 처음으로 그 말이 대답이 아니라 건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맡긴 배를 돌려받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는 일지에 적었다. 1907 함장, 부장님 배입니다.
마지막 칸을 칠했다. 연필심이 부러졌다. 칸은 모두 찼다. 윤재가 일어서려는데 함장이 말했다.
“커피는 드셨습니까?”
“오늘은 아직입니다.”
“제 잔은 안 씻으셔도 됩니다. 아직 갈색 줄이 몇 겹인지 세어 보지 못했습니다.”
윤재는 웃지 않았다. 웃음이 나오려다 입 안에서 멎었다.
*
2200에 윤재는 발령소에서 쪽 전체를 마지막으로 읽었다.
쉰세 줄이었다. 남는다가 마흔일곱, 이견이 그대로인 남는다가 하나, 모르겠다가 둘, 올라가고 싶다가 둘, 부장님 배입니다가 하나였다. 칸은 모두 칠해졌고 줄은 더 적을 자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 일지에는 규정에 없는 줄이 아홉 있었다. 아홉 줄은 윤재가 혼자 적은 줄이었다. 이 쪽의 쉰세 줄은 쉰세 사람이 한 줄씩 말한 것이었다. 그는 이 줄을 숨기지 않을 것이었다. 규정에 칸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쪽 맨 아래, 칸 밖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쉰셋.
“0200에 부상한다. 18분이다.”
조타장이 손잡이를 쥔 채 대답했다.
“예, 부장님. 손잡이는 쥐고 있습니다.”
윤재는 볼펜 뚜껑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작았다. 해도대 위에 일지가 펼쳐진 채 환풍기 바람에 쪽 끝이 천천히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