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5,451자) · 구재현과 차민경 · 8월 21일(토)
자석
심도 (3차대전 3부작 제2부) · 네오
8월 21일 0412, 진해 작전처 상황실의 전자 해도에서 우리 상선 점 하나가 한꺼번에 서른 해리를 건너뛰었다.
점은 제주 남쪽에서 사라졌다가 서쪽 바다 한가운데에 다시 떴다. 그 점의 침로 선은 중국 해경이 지키는 구역을 곧게 가리키고 있었다. 당직 중위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대위님, 태광 5호입니다. 화물선입니다. 어제 저녁에 제주 남쪽 항로로 나갔습니다.”
“점이 틀린 거야, 배가 틀린 거야.”
민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제 회선의 송수화기를 들었다. 전시에는 해군이 상선의 항로를 통제했고, 선장은 번호를 대면 응답해야 했다. 세 번째 호출에 선장이 받았다. 지친 목소리였다. 뒤에서 엔진 소리가 깔렸다.
“태광 5호 선장입니다. 현재 위치 GPS로 마라도 남동 12마일, 침로 정상입니다.”
“선장님, 지금 레이더에 잡히는 가장 가까운 육지나 구조물의 방위와 거리를 불러 주십시오.”
“마라도가 12마일이면 북서쪽에 에코가 하나 있어야죠.”
송수화기 너머에서 선장이 뭔가를 눌렀다. 한참 말이 없었다. 엔진 소리만 이어졌다.
“…없습니다.”
“없습니까?”
“마라도가 없습니다. 정서쪽에 큰 에코가 하나, 7마일입니다. 사각형입니다. 이어도 기지(바다 한가운데 세운 한국의 해양과학기지) 같은데요. 그게 왜 여기 있습니까?”
민경은 해도대 위의 종이 해도로 몸을 돌렸다. 컴퍼스를 집었다. 이어도 기지에서 7해리, 선장이 부른 방위의 반대쪽으로 점을 찍었다. 점은 전자 해도가 보여 주는 위치와 40해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리고 그 점의 서쪽 20해리에 해경이 지키는 선이 있었다. 이 배는 시속 14노트로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선장님, 지금 당장 침로를 바꾸십시오. 방위 090으로 돌리십시오. 배의 GPS는 틀렸습니다. 레이더만 보십시오.”
“GPS가 틀렸다니, 그건 한 번도.”
“틀렸습니다. 한 시간 안에 이 선을 넘으면 저쪽이 올라탑니다. 40분입니다.”
선장은 대답 대신 키를 잡는 사람을 불렀다. 송수화기에서 목소리가 멀어졌다. 침로를 부르고, 복창하는 소리가 났다. 0429에 선장이 돌아왔다.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돌렸습니다. 배가 돕니다.”
“레이더 에코를 계속 보면서 가십시오. GPS는 끄시지 마시고, 믿지만 마십시오.”
*
0441에 선장이 다시 송수화기를 잡았다. 이번에는 숨이 거칠었다.
“해경입니다. 중국 해경선이 영어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네 관할 수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스피커로 돌리십시오.”
상황실의 스피커에서 영어가 흘러나왔다. 기계 같은 발음이었다. 귀 선박은 중화인민공화국 관할 수역에 진입하고 있다. 즉시 침로와 의도를 밝혀라. 반복한다. 민경은 해도대 위의 종이 해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컴퍼스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선장이 영어로 답했다. 서툴렀다. 우리는 항법 장애를 겪고 있다. 우리는 침로를 돌렸다. 우리는 한국 상선이다.
“해경선이 따라붙습니다. 3마일입니다.”
“속력을 올리십시오. 방위 090 그대로.”
0447에 해경선이 1마일 거리까지 붙었다. 스피커의 영어가 한 번 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선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엔진 소리가 높아졌다. 0452에 영어가 멎었다. 같은 시각 전자 해도의 태광 5호 점이 서른 해리를 도로 건너 이어도 기지 곁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교란 스위치를 내린 것이었다. 배가 돌아서는 것을 저쪽도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0455에 선장이 말했다.
“선을 돌았습니다. 해경선이 안 따라옵니다.”
당직 중위가 숨을 내쉬었다. 상황실의 누군가가 손뼉을 치려다가 멈췄다. 민경은 컴퍼스를 해도대 위에 내려놓았다. 컴퍼스 다리가 해도 위에서 한 번 기울어져 쓰러졌다.
*
0640, 제주 초계기 대기실에서 재현은 보고 서식을 열었다.
접촉 위치 칸에는 8월 19일 1319에서 1331 사이의 12번 부이의 방위와 거리를 넣었다. 접촉 성격 칸에는 늘 쓰던 말이 있었다. 우군, 적성, 미상. 그는 미상을 지우고 그 자리에 쓸 말을 찾았다. 서식에는 없는 말이었다. 서식의 칸은 추정을 담지 않았다. 추정은 판단 칸에 넣으라고 했다.
판단 칸에 한 줄씩 적었다. 50헤르츠 발전기 선, 축 음향 없음, 층 아래 정지. 6월 3일 접촉과 주파수 편차 패턴 동일. 그리고 마지막 줄을 오래 쳐다봤다. 자기 손으로 처음 써 보는 말이었다.
085 추정.
그 위에 근거가 있었고 그 아래에 책임이 있었다. 추정이라는 말은 틀리면 그만큼 자기에게 돌아오는 말이었다. 6월에 그는 8시간을 듣고 모르겠다고 적었다. 오늘은 6월보다 더 오래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적었다. 여덟 사람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부이가 그 아래의 선 하나를 같이 들었다. 같은 바다에서 한쪽은 부서졌고 한쪽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숨을 죽인 쪽을 모른다고 쓰는 것이, 이제 그에게는 떨어진 쪽의 소리를 모른 척하는 일로 느껴졌다.
보내기를 눌렀다. 보고는 세 단계를 거쳐 갔다. 유 상사가 대기실 문틀에 기대 있었다.
“소령님, 처음이십니다.”
“압니다.”
“위에서 뭐라고 할 겁니다. 근거 부족이라고.”
“그럼 부족한 만큼 책임지겠습니다.”
유 상사는 더 말하지 않고 대기실 커피 머신에서 종이컵 둘을 뽑았다. 하나를 재현의 책상 모서리에 놓았다. 커피는 마시지 못할 만큼 뜨거웠고, 재현은 보고 화면의 보냈음 표시를 보며 컵이 식기를 기다렸다.
*
0715에 민경 앞에 그 보고가 도착했다.
접촉 성격 칸이 비어 있었다. 판단 칸의 마지막 줄에 085 추정이 있었다. 민경은 그 줄을 오래 봤다. 8월 이전의 모든 보고에서 재현은 그 칸에 미상이라고 적었다. 처음으로 다른 말이 들어와 있었다. 보고 한가운데에는 좌표가 있었고, 좌표 옆에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전 호출부호 별첨.
그때 전산 담당 성 소령이 상황실로 들어왔다. 눈이 붉었다. 밤을 샌 사람의 눈이었다.
“차 대위, 해도 체계 로그를 열어 봤다. 어제 상선 일 때문에.”
“GPS 교란입니다.”
“교란이 아니야. 교란은 전체를 흔들어. 이건 골라서 건드렸어.”
성 소령이 자기 노트북을 해도대 위에 놓았다. 화면에 표가 떠 있었다. 날짜와 시각과 이름이 한 줄씩이었다. 맨 오른쪽 줄 이름이 모두 같았다. 085.
“085 아이콘이 열한 번 움직였어. 지난 사흘 동안. 매번 식별 코드 수신 칸을 통해서. 6월 말에 반려한 그 줄과 같은 길이다.”
“누가 우리 배 위치를 해도 위에서 옮기고 있었다는 겁니까?”
“옮기고 있었다기보다 그리고 있었어. 있지도 않은 자리를. 사람이 안 보면 아무도 몰랐을 거야. 이천 건씩 도는 자동 갱신이니까.”
민경은 말없이 해도대 앞으로 갔다. 085 자석은 6월 3일 이후의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한 번 움직인 아이콘과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자석이 한 화면 안에 나란히 있었다. 두 개를 맞추면 어디서 틀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성 소령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체계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자석을 손으로만 옮긴다고 하는 걸, 고집이라고 생각했고.”
“고집입니다.”
“고집이 맞았네.”
민경은 대답하지 않고 아이콘이 움직인 열한 곳을 해도 위에 연필로 찍었다. 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점 가운데 어느 것도 재현의 좌표와 겹치지 않았다. 점들은 일부러 먼 곳을 가리켰다. 누군가 진짜 위치를 감추려고 가짜 점을 뿌린 것이었다. 가짜 점 속에서 진짜 하나가 오늘 처음으로 사람의 손에서 올라왔다.
*
1100에 민경은 085 자석을 집었다.
자석은 손바닥만 했고 뒷면에 오래된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다. 6월 3일부터 두 달 반 동안 한 자리에서 해도에 붙어 있었다. 떼어 낼 때 해도의 철판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상황실에서 가장 컸다. 당직 중위가 일어나다가 도로 앉았다.
민경은 재현의 좌표를 컴퍼스로 짚었다. 자석을 거기에 붙였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자석이 철판에 붙을 때는 늘 작게 한 번 철컥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철컥 소리가 안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는 났고, 민경이 듣지 못한 것이었다. 손이 시렸다. 이 자석은 이제 추정이었다. 틀리면 해도를 보는 모든 사람이 틀린 자리를 사실로 읽을 것이었다. 이 자리는 오늘부터 그녀의 이름이 붙은 자리였다.
그녀는 보고서 사본 위에 한 줄을 적었다. 085 자석 이동. 근거 구 소령 보고 추정. 서명을 하고 날짜를 적었다.
작전처장이 어깨 너머로 그 줄을 읽었다.
“처음이군.”
“처음입니다.”
“사령부 판단은 오늘 D-5로 올라왔다. 위에서도 이 해역에 시간이 없다고 본다. 자석을 안 옮기던 사람이 옮기면 위에서 이유를 묻는다. 뭐라고 하지.”
“추정을 쓴 사람이 있어서 옮겼다고 하겠습니다.”
작전처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나가면서 해도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쳤다. 민경은 그 소리가 허락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전자 해도의 085 아이콘이 한 번 깜빡이더니 자석과 같은 자리로 옮겨 왔다. 사람이 입력한 좌표를 체계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열한 번 헛걸음하던 점이 처음으로 맞는 자리에 앉았다. 성 소령이 화면을 한참 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저 아이콘, 이제 안 믿겠다. 자석 쪽만 본다.”
*
1205에 재현의 책상 전화가 울렸다. 진해 번호였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한 박자 늦게 귀에 댔다.
“구 소령입니다.”
“진해 작전처 차민경입니다. 보고 받았습니다.”
“근거 부족이라고 하실 겁니까?”
“자석을 옮겼습니다.”
재현은 수화기를 쥔 채로 한동안 말을 못 했다. 6월부터 그가 올린 보고마다 같은 칸을 같은 말로 채웠고, 같은 사람이 그 보고를 받아 자석을 안 옮겼다. 두 사람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서로 아는 것은 목소리와 문장의 버릇뿐이었다.
“그럼 책임은 같이 집니까?”
“각자 몫만 집니다. 소령님은 추정을 쓴 몫, 저는 옮긴 몫입니다.”
“몫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전화가 먼저 끊긴 것은 진해 쪽이었다. 재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책상 모서리의 종이컵을 들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고 한 모금을 마시자 쓴맛이 입 안에 오래 남았다.
*
1830에 상황실이 한가해졌다. 주간 당직이 떠나고 야간 당직이 오기 전의 시간이었다. 민경은 해도 앞에 혼자 서 있었다.
085 자석 옆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자석이 붙어 있었다. 6월 말에 붙인 것이었다. 미상이 하나 더 있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오늘 085가 추정으로 올라오면서 그 흰 자석이 무엇을 표시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흰 자석이 085와 같은 것이라면 이제 둘을 합쳐야 했다. 다른 것이라면 해도 위에는 우리 배 외에 또 하나, 이름 없는 것이 바다 밑에 있다는 뜻이었다.
민경은 흰 자석을 손가락으로 집어 해도에서 떼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에 든 자석은 앞뒤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한참 서 있었다. 붙일 자리가 어디에도 없었고, 서랍에 넣을 자리도 정하지 못했다. 해도의 철판에는 방금 자석을 떼어 낸 자리만 조금 밝은 사각형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