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5,126자) · 강윤재 · 8월 3일(화)
발령소
심도 (3차대전 3부작 제2부) · 네오
8월 3일 1200, 백 소령의 종이는 해도 위에 펼쳐진 채로 발령소 불빛을 받고 있었다.
전문 사본의 여백에 숫자가 세 줄 적혀 있었다. 진해까지 물속으로 가는 거리, 조용히 갈 때의 속력, 그리고 그 속력으로 전지가 버티는 날수. 기관장의 글씨는 작고 각이 졌다. 맨 아래 줄은 이랬다. 8.5 / 8.5. 두 번 동그라미를 친 것이 그 줄이었다.
“오늘 뜨면 맞는다. 딱 맞아.”
백 소령이 말했다. 그는 해도대 모서리에 두 손을 짚었다. 손톱 밑에 기름이 까맣게 끼어 있었다. 기관실의 기름은 비누로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백 소령은 그 손으로 아침마다 전지 함체의 온도를 짚었고, 짚은 숫자를 계기의 숫자와 맞춰 본 뒤에야 커피를 마셨다. 계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계기가 틀리는 날을 여러 번 봤기 때문이라고, 그는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다.
“하루 미루면 대한해협 앞에서 떠야 돼. 거기서 뜨면 누가 보는지 부장이 더 잘 알겠지. 이틀 미루면 동중국해 한가운데서 떠. 사흘 미루면 이 명령은 못 지키는 명령이 된다. 지키고 싶어도.”
“알고 있습니다.”
“알면 오늘 가.”
윤재는 대답하기 전에 종이를 봤다. 백 소령의 계산은 맞았다. 윤재도 아침에 같은 계산을 했다. 같은 숫자가 나왔다. 그는 그 숫자를 적지 않았다. 적으면 그 숫자가 명령이 될 것 같았다.
그때 지완이 손을 들었다. 손바닥 전체였다.
*
“북서쪽입니다. 선단입니다. 수송선 둘, 호위 하나. 호위가 능동으로 쏘면서 옵니다. 12노트입니다.”
발령소가 한꺼번에 조용해졌다. 조타장이 추진을 한 단 내렸다. 핑이 멀리서 왔다. 날카로운 소리가 선체에 닿았다가 힘이 빠진 채 흩어졌다. 아직 멀었다. 멀어도 핑이 오는 동안에는 모두 목소리를 낮췄다. 핑 사이사이에 다른 소리가 섞이면 저쪽 화면에 무엇이 그려질지 몰랐다.
백 소령과 윤재는 해도대를 사이에 두고 선 채였다. 둘 다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입술과 숨으로 말했다.
“명령이다.”
백 소령이 먼저 말했다.
“어뢰도 없다. 저기 오는 거 봐. 코앞으로 지나가는데 쏠 게 없잖아. 쉰셋을 살려서 데려가는 게 부장 일이다. 함장님이 부장한테 넘긴 건 이 배지, 이 바다가 아니야.”
“어뢰가 없어도 들을 수는 있습니다.”
윤재가 해도 위에 선단의 방위선을 그었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날까 봐 아주 천천히 그었다.
“들은 걸 보낼 수는 있습니다. 지금 지나가는 저 선단이 몇 척인지,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빠른지. 이 해협 안에서 그걸 아는 건 지금 우리밖에 없습니다.”
“보내서 누가 쓰나?”
백 소령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가 도로 내려갔다. 핑이 한 번 더 왔다. 이번에는 조금 가까웠다.
“진해는 우리를 미상으로 적어. 합참은 빠지라고 하고. 부장이 보낸 걸 받아서 누가 쏘는데? 대만이 쏘나? 우리가 보낸 걸로 대만이 쏘면, 그건 우리가 쏜 거야. 차장님이 그게 싫어서 빠지라는 거고.”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 소령의 말도 맞았다. 이 배가 듣고 보낸 것이 어디서 멈추는지 윤재는 알지 못했다. 진해 작전처의 해도 위 어디쯤에서 멈출 것이었다. 미상이라고 적힌 자석 옆에서.
“지완 하사.”
윤재가 불렀다. 지완이 헤드폰을 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선단 구성 불러 봐.”
지완은 곧바로 부르지 않았다. 한동안 헤드폰을 누르고 있다가 헤드폰 한쪽을 귀에서 뗐다.
“수송선 둘은 만재입니다. 호위는 054급입니다. 부장님, 저는 기관장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발령소의 몇이 고개를 들었다. 조타장이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쥐었다. 윤재는 지완을 봤다. 지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들은 걸로 일곱 척이 가라앉았고 한 척이 불탔습니다. 가라앉는 소리는 안 들었지만 들은 겁니다. 방위를 안 듣는다고 안 들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은 것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걸 이제 그만 듣고 싶습니다.”
말하고 나서 지완은 헤드폰을 다시 썼다. 그리고 선단의 방위를 불렀다. 거리와 속력과 침로를 불렀다. 불러야 하는 것을 다 불렀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윤재는 그 숫자를 받아 적었다. 받아 적는 손이 느렸다.
1240에 호위의 핑이 가장 가까이 왔다. 2킬로미터였다. 발령소 벽을 가는 소리가 쓸고 지나갔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1255에 핑이 멀어졌다. 수송선 둘의 둔한 스크루 소리가 머리 위를 지나 남동쪽으로 갔다. 대만 서해안 쪽이었다. 아무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창이 이 배에는 없었다.
1310에 윤재는 받아 적은 숫자를 보고 양식에 옮겼다. 접촉 시각, 방위, 구성, 침로, 속력. 양식에는 칸이 다섯이었고, 다섯 칸이 다 찼다. 칸이 다 차는 보고는 오랜만이었다. 그는 양식 맨 아래 발신란에 085라고 적었다. 받는 쪽에서 그 세 자리를 보고 무엇을 떠올릴지는 알 수 없었다. 진해 작전처 해도 위의 자석 하나일 수도 있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
1320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무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앉는 자리가 달라져 있었다. 기관실 사람들이 식당 오른쪽 식탁 둘에 모여 앉았고, 발령소와 어뢰실 사람들은 왼쪽에 앉았다. 늘 섞여 앉던 자리였다. 가운데 식탁 하나가 비었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다. 먼저 온 사람이 앉은 자리를 보고 다음 사람이 옆에 앉다 보니 그렇게 됐다.
오 하사는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똑같이 퍼 주었다. 김치찌개에 두부가 반만 들어 있었다. 국자로 뜰 때마다 두부가 몇 조각인지 세는 것 같았다. 오른쪽 식탁에 네 조각이 가면 왼쪽 식탁에도 네 조각이 갔다. 한 사람이 두부를 더 달라고 하자 오 하사는 국자를 들고 한참 그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은 두부를 더 달라고 하지 않았다.
최민석이 비어 있는 가운데 식탁에 혼자 앉았다. 식판을 내려놓고 한 번 양쪽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먹기 시작했다. 한참 뒤 조타장이 식판을 들고 와서 그 맞은편에 앉았다. 둘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먹었다.
1400에 윤재는 백 소령을 다시 불렀다. 발령소가 아니라 사관실이었다. 둘뿐이었다.
“하루 미루겠습니다. 내일 0400까지 정합니다.”
“하루 미루면 대한해협 앞에서 떠야 한다고 했지.”
“들었습니다.”
백 소령은 사관실 탁자 위를 한동안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두드리는 소리가 작았다. 이 배에서는 누구나 탁자를 작게 두드렸다.
“부장, 나는 잠수함을 스물두 해 탔다. 이 배가 셋째고. 명령을 안 지킨 배가 어떻게 되는지 봤어. 배는 괜찮아. 사람이 안 괜찮지. 명령을 안 지킨 부장은 돌아가서 그 이름이 제일 먼저 지워져. 그게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지워지는 이름이 쉰셋이 될까 봐 하는 말이야.”
그는 일어서서 사관실을 나갔다. 문을 닫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문을 끝까지 손으로 잡고 닫았다. 윤재는 혼자 남아 탁자 위 백 소령이 두드리던 자리를 봤다. 합판 탁자의 모서리가 거기만 조금 닳아 있었다.
*
1600에 윤재는 의무실에 갔다.
함장은 깨어 있었다. 침상에 기대 앉아 천장 배관의 번호를 보고 있었다. 윤재가 들어가자 눈을 돌렸다. 윤재는 전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함장도 묻지 않았다. 남 중사가 커튼 밖에서 이미 무언가를 들었을 것이었고, 함장은 남 중사에게서 들었을 것이었다. 그런 배였다.
윤재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있었다. 무엇을 물으러 온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함장은 윤재를 봤다.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가 닫혔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기로 한 사람이 눈을 감는 방식이었다. 이 배는 이제 이 사람의 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그것을 가장 먼저 지키고 있었다.
윤재는 일어나서 이불 끝을 한 번 당겨 함장의 발을 덮었다.
*
1700에 음탐실 문턱에서 윤재가 멈췄다.
지완은 당직을 넘기고도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헤드폰을 목에 건 채로 폭포수 화면의 오늘 낮 기록을 되감아 보고 있었다. 1240의 자리였다. 호위의 핑이 가장 가까이 왔던 때였고, 화면에는 가로줄 하나가 굵게 그어져 있었다. 지완은 윤재가 온 것을 알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낮에 한 말, 거둘 생각 없나?”
“없습니다.”
“그럼 내일 내가 남자고 하면, 방위를 부를 건가?”
지완은 그제야 돌아봤다. 한동안 윤재를 보다가 대답했다.
“부르라시면 부릅니다. 부르는 건 제 일입니다. 그만 듣고 싶다는 건 제 마음이고요. 둘은 따로입니다, 부장님.”
지완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앉았다. 윤재는 문턱에 조금 더 서 있다가 돌아섰다. 음탐실 벽에는 배소현의 기사를 오려 붙인 종이가 두 장 있었다. 한 장은 6월의 바르샤바 기사였고, 한 장은 날짜 넷만 남은 7월의 기사였다. 누가 붙였는지 윤재는 물은 적이 없었다.
*
2300에 부상했다. 18분이었다. 올라가기 전에 윤재는 발령소를 한 번 둘러봤다. 백 소령은 오지 않았다. 기관실에서 전지 출력을 쥐고 있을 것이었다. 부상하는 18분 동안 전지를 가장 많이 먹는 것은 안테나가 아니라 배를 수면 가까이 붙들어 두는 일이었다.
낮에 받아 적은 선단의 구성과 침로와 속력을 한 줄로 묶어 보냈다. 송신 표시등이 켜진 30초 동안 조타장은 초를 셌고, 지완은 전자 지원 화면을 봤다. 화면은 비어 있었다. 받은 요약의 마지막 줄 위에 사령부 판단이 있었다. D-10. 그 위에 새 줄 하나가 붙어 있었다.
제3제대, 8월 말 출항 추정. 구성 미상.
윤재는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이름이 붙은 선단은 처음이었다. 여섯 주 동안 저쪽의 선단은 번호도 이름도 없이 오고 갔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저쪽에게도 그 선단이 여느 선단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2340에 윤재는 네 시간 만에 처음으로 침상에 갔다. 커튼을 걷자 베개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박하사탕 두 알이었다. 기관실에서 당직 때 한 사람에 하루 두 알씩 나눠 주는 사탕이었다. 기관실 사람들은 그것을 아껴 먹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녹여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이었다. 누가 두고 갔는지 쪽지는 없었다. 윤재는 사탕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비닐 포장 끝이 손톱으로 한 번 비틀어져 있었다. 백 소령은 무엇이든 열기 전에 한 번 비틀어 보는 사람이었다.
윤재는 사탕을 까지 않았다. 두 알을 전문이 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단추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고, 주머니 속에서 사탕 두 알이 종이에 부딪혀 아주 작게 달그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