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02자)
빵 사천 덩이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브리다는 이델라보다 하루 먼저 베냐에 닿았다. 이델라가 소금밭 언덕을 넘었을 때 브리다는 둑 아래 초소 앞에서 소금밭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왕도 빨래터 소식과 베냐 소금밭 소식을 맞바꾸는 중이었다. 브리다가 공작 깃털 이야기를 하면 아낙들이 배를 잡고 웃었고, 아낙들이 사령관이 금화로 칼 대신 무엇을 샀는지 말하면 브리다가 손뼉을 쳤다.
“뭘 샀는데?”
브리다가 이델라를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아낙들이 일제히 딴 데를 보았다. 소금밭 우두머리만 갈퀴에 턱을 괴고 웃었다.
“감독관님이 직접 물어보세요. 저희는 입이 무거워요.”
“빨래터랑 소금밭이 입이 무거우면 아르셀에 무거운 입이 하나도 안 남아.”
초소 옆 말뚝에 늙은 병사가 기대어 서 있었다. 본궁 앞마당에서 금화를 깨물지 말라던 병사였다. 늙은 병사는 브리다와 눈이 마주치자 수염을 쓸어내렸고, 브리다는 앞치마 끈을 다시 맸다. 이델라는 둘 사이를 지나 초소로 들어갔다.
*
가르딘은 초소 안에서 지도를 펴 놓고 있었다. 브리다가 가져온 말을 이미 들은 얼굴이었다. 탁자 위에 빈 칼집이 놓여 있었고, 칼집 곁에 새 칼은 없었다.
“병사 사백이 빵 사천 덩이를 지고 산을 넘을 수 있냐고 물으셨소.”
“넘을 수 있어요?”
“빵은 가볍소. 소금은 무겁소.” 가르딘은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베냐에서 북쪽으로 왕도에 이르는 큰길이 있었고, 큰길 중간에서 동쪽 골짜기로 갈라지는 좁은 길이 있었다. “재상의 허락은 소금이 왕도 밖으로 나가는 길에 붙어 있다고 하셨소. 이 길은 왕도에 들르지 않소. 칼데나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투르발 고개 동쪽 어깨로 넘어가오. 수레는 못 가는 길이오. 사람과 노새는 가오.”
“병사들이 등짐을 져 줄까요?”
“병사들은 봉급을 지고 가는 줄 알 것이오. 맞는 말이고.” 가르딘은 손가락을 떼고 이델라를 보았다. “다만 감독관, 병사는 짐꾼이 아니오. 병사가 등짐을 지고 둑을 비우면 둑은 누가 지키오? 페넬라 배가 빈손으로 돌아간 뒤로 앞바다에 낯선 돛이 두 번 보였소. 장삿배 돛이 아니었소.”
“아낙들이요.”
“아낙들이 무섭기는 하오. 창은 못 드오.”
“창을 들 사람만 남겨요. 백 명.”
가르딘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빈 칼집의 테두리를 쓸었다. 이델라는 칼집을 쓰는 손가락을 보다가 지도로 눈을 돌렸다.
“삼백 명이 한 자루씩 지면 소금 삼백 자루. 노새가 마흔이면 여든 자루를 더 지오. 투르발에서 한 자루가 빵 열 덩이요.” 가르딘이 말했다. 손가락을 꼽지 않았다. “사천 덩이에 조금 못 미치오.”
“모자라는 건 비단으로 채워요. 칼데나 골짜기를 지나가잖아요. 솔베 아가씨네 직공들이 혼례 비단을 짜고 남은 자투리를 팔겠대요. 투르발 귀족 부인들은 아르셀 왕비 혼례 비단 자투리라면 금을 줘요.”
“혼례를 막으려는 사람이 혼례 비단 자투리를 파오?”
“혼례 비단은 혼례에 쓰여야죠. 자투리는 혼례에 안 쓰여요.”
가르딘의 눈가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입가도 조금 따라 움직였다.
“가겠소.” 가르딘이 말했다. “내일 아침, 왕실 물건 호위로.”
가르딘은 탁자의 빈 칼집을 집어 허리에 찼다. 칼 없는 칼집이 허리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호위하는 사람이 칼 대신 소금 자루를 지고 간다는 것을 둘 다 알았고, 둘 다 말하지 않았다.
*
초소 부엌은 좁았다. 화덕 하나와 나무 의자 둘이 들어가면 꽉 찼다. 밤이 깊어 병사들은 잠들었고, 바깥에서 소금밭을 쓸고 가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화덕 불빛이 흙벽에 둘의 그림자를 크게 키워 놓았다.
이델라는 지도에 내일 갈 길을 잉크로 긋고 있었다. 칼데나 골짜기에서 고개 동쪽 어깨까지 가는 선이 손끝에서 흔들렸다. 가르딘이 맞은편 의자에서 말없이 보고 있다가 손을 뻗어 지도 귀퉁이를 눌러 주었다.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와 지도가 들썩이고 있었다.
“손가락에 늘 잉크가 묻어 있소.”
“바닷길을 긋다 보면요. 상단 집 딸 버릇이에요. 아버지가 지도를 그으면서 배를 보냈어요.”
“왕비도 지도를 긋소?”
“왕비는 안 그어요. 열다섯 해 동안 안 그었어요.” 이델라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혼하고 첫날 밤에 다시 그었어요. 별궁 창고에서 옛날 지도를 찾아서.”
가르딘이 이델라의 손을 보았다. 이델라도 가르딘의 손을 보았다. 지도 귀퉁이를 누른 손등에 마디마다 흰 흉이 있었다. 이델라는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흉 하나를 쓸었다. 금화의 테두리를 쓸 때처럼. 흉은 매끈하고 조금 도드라져 있었다.
“이건 뭐예요?”
“열아홉 살에 처음 칼을 받았을 때. 칼집에 넣다가.”
“칼에 베였어요? 칼집에 넣다가?”
“처음엔 다 그렇소.” 가르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독관 손끝은 차갑소.”
“금화를 많이 만져서요.”
“금화는 따뜻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진짜는.”
이델라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화덕에서 장작이 갈라지며 작은 불티가 튀었다. 가르딘이 다른 손을 들어 이델라의 어깨 앞으로 늘어진 땋은 머리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아주 천천히, 풀어지지 않을 만큼만. 이델라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내쉬지 못했다. 소금기 밴 바람 냄새와 장작 연기 냄새 사이로 가르딘의 털옷에서 마른 풀 냄새가 났다.
“감독관, 싫으면 말하시오.”
“싫으면 손을 뺐겠죠.”
가르딘이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먼저 이델라의 이마에 닿았다가, 이델라가 고개를 들자 입술로 내려왔다. 거칠고 따뜻했다. 이델라의 손끝이 가르딘의 손등 흉 위에서 오므라들었다. 열다섯 해 동안 왕비였던 사람이, 이혼하고 두 달 만에, 소금밭 초소 부엌에서 사령관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빨래터가 알면 사흘 동안 다른 이야기를 안 할 것이었다.
부엌 문이 덜컥 열렸다.
“마마, 내일 아침 노새 몇 마리 빌리느냐고 우두머리가.” 브리다가 문간에서 굳었다. 뒤에 늙은 병사가 서 있었다. 늙은 병사도 굳었다. 넷이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새 마흔.” 가르딘이 이델라에게서 몸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네, 마흔이요.” 브리다가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늙은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노새 이야기나 하러 갈까?” 브리다가 늙은 병사의 옆구리를 치는 소리가 났다.
이델라는 이마를 가르딘의 어깨에 대고 웃었다.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이혼하고 처음이었다.
*
같은 밤, 큰길가 여관의 이층 방에서 카스텐은 화로를 무릎 사이에 끼고 앉아 있었다. 사흘째 말을 탄 허벅지가 굳어 일어설 때마다 무릎이 삐걱였다. 서기는 옆방에서 코를 골았다. 카스텐은 품에서 낡은 편지 한 장을 꺼내 화로 불빛에 비췄다. 지난가을 남부 수비대 사령관이 보낸 편지였다. 글씨가 크고 반듯했다. 「봉급이 또 끊기면 저는 병사들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칼을 팔아 빵을 샀으나 다음에 팔 칼이 없습니다.」
카스텐은 이 편지를 가을부터 품에 넣고 다녔다. 혼례 날짜를 정하던 날에도, 칙허의 문장을 쓰던 밤에도 꺼내 읽었다. 읽을 때마다 손가락 끝이 더 차가워졌다. 서른 해 전 겨울, 젊은 경비대장 카스텐은 왕도 남문 앞에서 봉급을 달라는 병사들과 마주 서 있었다. 병사들 앞줄에 카스텐이 직접 창 쓰는 법을 가르친 사내들이 있었다. 봉급을 달라던 밤 거리 셋이 탔고, 불을 끄러 뛰어다닌 카스텐의 손가락은 불타던 겨울 이후로 다시 따뜻해지지 않았다. 불을 지른 사내들 가운데 셋을 카스텐이 직접 붙잡았다. 셋 다 창을 처음 잡던 날 카스텐에게 고맙다고 했던 얼굴이었다.
혼례는 화려할 필요가 없었다. 성당 계단에 금화 자루가 쌓이고, 칙허 한 줄이 은행의 이자를 덮으면 되었다. 삼십 년 소금은 아르셀이 내주는 대가였다. 거리 셋보다는 싸다고 카스텐은 믿었다. 편지를 접어 품에 넣으며 카스텐은 화로에 손을 바짝 댔다. 손바닥이 데일 만큼 가까이 대야 겨우 따뜻함이 왔다.
*
이튿날 아침, 병사 삼백이 소금 자루를 등에 지고 큰길을 북쪽으로 올라갔다. 노새 마흔이 뒤따랐다. 반나절을 가자 큰길이 둘로 갈라지는 자리가 나왔다. 왕도로 가는 넓은 길과 동쪽 골짜기로 가는 좁은 길. 갈림길 돌무더기 앞에 말 세 마리가 서 있었다.
가운데 말에서 카스텐이 내렸다. 예순셋의 재상이 사흘 길을 말로 내려온 것이었다. 털옷 위에 두꺼운 망토를 둘렀는데도 입술이 파랬다. 서기가 다른 말에서 화로를 내리려다, 길바닥에 놓을 데가 없어 품에 안았다.
“사령관.” 카스텐이 말했다. 목소리는 사흘 길에도 갈라지지 않았다. “남부 수비대는 소금밭 둑을 지키는 군대요. 병사를 등짐꾼으로 쓰는 법도는 아르셀에 없소. 초소로 돌아가시오.”
“재상 각하, 법도에 왕실 물건을 호위하라는 말은 있소. 베냐 소금은 왕실 물건이오.” 가르딘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했다. “호위하려면 곁에 붙어야 하고, 곁에 붙는 김에 등에 지고 가는 것뿐이오.”
“말장난이오.”
“감독관에게 배웠소.”
카스텐이 이델라를 보았다. 이델라는 노새 고삐를 쥐고 있었다.
“부인은 왕의 군대를 등짐꾼으로 만들었소. 페넬라 앞바다에 용병선이 어른거린다는 보고가 왕도에 올라왔소. 둑에 병사가 백뿐이면 앞바다의 배들이 무엇을 보겠소?”
“병사 백과 아낙 삼백이요. 아낙들은 갈퀴를 들어요.”
“농담할 때가 아니오.”
“농담 아니에요. 아낙들이 병사보다 무섭다고 사령관이 그랬어요.”
카스텐이 입술을 깨물었다. 파란 입술에 핏기가 잠깐 돌아왔다. 카스텐은 병사들의 줄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소금 자루를 진 채 재상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자루를 내려놓지 않았다. 앞마당에서 금화를 받은 손들이 자루 끈을 쥐고 있었다.
“사령관, 명을 어기면 봄 첫날 사령관 표식을 거두겠소.”
“봄 첫날 봉급이 나간 뒤에 거두시오.” 가르딘이 말했다. “봉급이 나가기 전에는 이 병사들을 붙잡고 있을 사람이 나밖에 없소. 각하가 그러셨소. 봉급이 끊기면 병사를 붙잡을 수 없다고. 그 편지는 내가 썼소.”
카스텐의 얼굴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이델라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노여움이 아니었다. 오래 들여다본 편지를 다시 손에 쥔 사람의 얼굴이었다.
가르딘이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동쪽 좁은 길로 꺾어 들었다. 소금 자루가 등에서 출렁였고, 노새 방울이 골짜기 안쪽으로 울려 퍼졌다. 카스텐은 막지 않았다. 갈림길 돌무더기 곁에 서서 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보았다.
마지막 노새가 지나가자 카스텐이 이델라에게 몸을 돌렸다.
“고개를 넘는 데 열흘, 돌아오는 데 열흘이오. 봄 첫날에 맞추어 금화가 돌아오겠군.”
“맞춰서 돌아와요.”
“그럼 혼례는 열흘 당기겠소.” 카스텐이 말했다. 서기가 품에 안은 화로에서 연기가 가늘게 올라갔다. “봄 첫날이 아니라 이월 그믐. 금화가 고개를 넘어오기 전에 칙허가 내리오. 폐하께는 왕도로 돌아가는 대로 아뢰겠소. 폐하는 마지막에 말한 사람의 말을 들으시오. 오늘은 내가 마지막에 말하겠소.”
카스텐이 말에 올랐다. 늙은 몸이 안장에 오르는 데 두 번 미끄러졌다. 이델라는 노새 고삐를 쥔 채 서 있었다. 동쪽 골짜기에서 노새 방울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북쪽 큰길로는 재상의 말 세 마리가 왕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