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06자)

간택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이델라가 왕도로 돌아온 날 저녁⁠, 별궁 대문에 종이가 또 붙어 있었다⁠. 「⁠간택은 모레 정오 본궁 큰방에서 마친다⁠. 혼례는 이월 그믐⁠」 이번에는 풀을 한 번만 발랐는지 귀퉁이가 바람에 들려 있었다⁠. 이델라는 종이를 떼지 않았다⁠. 떼어 봐야 또 붙을 것이었다⁠.

밤이 깊어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브리다가 등잔을 들고 나갔다가 털망토를 뒤집어쓴 솔베를 데리고 들어왔다⁠. 솔베는 부엌 의자에 앉자마자 말을 시작했다가⁠, 이번에는 스스로 멈췄다⁠. 숨을 한 번 쉬고⁠,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가 모레 간택에서 제가 뽑히지 않으면 베틀을 다 잃는대요⁠. 뽑히면 몬테가가 빚을 반으로 깎아 주고요⁠. 저는 뽑히기 싫은데⁠, 뽑히지 않으면 직공들이 일자리를 잃어요⁠. 서른 집이에요⁠. 감독관님⁠, 어떻게 해야 돼요⁠?⁠”

“⁠그건 솔베 아가씨가 골라요⁠.⁠”

“⁠감독관님이 골라 주시면 안 돼요⁠?⁠”

“⁠제가 고르면 아가씨는 평생 제 탓을 해요⁠. 아가씨가 고르면 평생 아가씨 탓을 하고요⁠. 둘 중에 덜 억울한 건 아가씨 탓이에요⁠.⁠”

솔베가 실 꾸러미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이델라는 부엌 식탁에 지도를 펴 놓고 있었다⁠. 솔베가 지도를 힐끗 보았다⁠. 칼데나 골짜기를 지나 고개 동쪽 어깨로 넘어가는 잉크 선이 있었다⁠.

“⁠하나만 말해 줄게요⁠. 새 왕비의 관은 지난가을에 만들어졌어요⁠. 관 앞머리에 베냐 소금밭 문장이 박혀 있어요⁠. 혼례 날 폐하가 성당 계단에서 칙허를 내리면 베냐 소금밭 삼십 년이 몬테가 은행으로 가요⁠. 새 왕비가 관을 쓰는 날이요⁠.⁠”

솔베의 손에서 실 꾸러미가 멈췄다⁠.

“⁠그럼 저는 소금 문서에 찍는 도장이네요⁠. 사람 말고⁠.⁠”

“⁠도장도 사람이 들고 찍어요⁠.⁠”

솔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솔베가 말이 없는 것을 이델라는 처음 보았다⁠. 화덕의 불이 사그라질 무렵 솔베가 실 꾸러미를 털망토 소매에 도로 넣었다⁠.

“⁠감독관님⁠, 칼데나 직공들은 집마다 손베틀이 하나씩 있어요⁠. 아버지 공방의 큰 베틀이 아니라⁠, 겨울에 집에서 짜는 작은 거요⁠. 손베틀로는 혼례 비단은 못 짜도 투르발 부인들이 사는 띠나 숄은 짜요⁠.⁠”

“⁠무슨 말이에요⁠?⁠”

“⁠그냥요⁠. 그냥 말해 두는 거예요⁠.⁠”

*

간택 큰방에는 귀족들이 벽을 따라 늘어앉았다⁠. 한가운데 오스벨이 앉았고⁠, 곁에 카스텐이 화로를 끼고 앉았다⁠. 오스벨의 수염은 다시 반쯤 검었다⁠. 그저께 밤 처소에서 다시 물감을 칠한 흔적이었다⁠. 이델라는 감독관의 자리인 큰방 끝 기둥 옆에 섰다⁠.

후보는 다섯이 남아 있었다⁠. 첫 번째 후보는 류트를 들고 나와 노래를 불렀다⁠. 류트의 줄 하나가 노래 중간에 끊어졌고⁠, 후보는 끊어진 줄을 뺀 채로 끝까지 불렀다⁠. 귀가 어두운 공작이 박수를 쳤다⁠. 두 번째 후보는 제 집안의 조상을 열네 대까지 외웠다⁠. 열한 대에서 이름 하나를 틀렸고⁠, 뒤에 앉은 어머니가 기침으로 바로잡았다⁠. 세 번째 후보는 백작 집 딸이었다⁠. 스물넷이었고⁠, 큰방 한가운데로 나와 무릎을 굽힌 채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이 떨려서 치맛자락이 같이 떨렸다⁠.

네 번째가 솔베였다⁠.

솔베는 큰방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오스벨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털망토 대신 칼데나에서 짠 남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끝단 안쪽에 씨실을 두 번 꼰 결이 보였다⁠. 오스벨이 반쯤 검은 수염을 만지며 다정하게 물었다⁠.

“⁠솔베⁠, 할 말이 있소⁠?⁠”

“⁠있습니다⁠, 폐하⁠.⁠” 솔베가 숨을 들이켰다⁠. 큰방의 모두가 솔베가 숨을 쉬지 않고 말할 줄 알고 따라 숨을 들이켰다⁠. 솔베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왕비 말고 베틀을 고르겠습니다⁠.⁠”

벽을 따라 앉은 귀족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졌다⁠. 공작이 시종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시종이 공작의 귀에 대고 베틀이라고 말했다⁠. 공작이 크게 되물었다⁠. 베틀이 왕비가 된다고⁠?

“⁠폐하를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폐하는 춤출 때 씨실 날실을 잘 세십니다⁠.⁠” 솔베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새 왕비의 관은 지난가을에 페넬라에서 다 만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제 머리 치수는 아무도 안 쟀습니다⁠. 간택하기 몇 달 전에 관이 먼저 만들어졌다면⁠, 관을 쓸 사람은 아무라도 되는 거잖아요⁠. 저는 아무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큰방이 조용해졌다⁠. 오스벨의 손이 수염 위에서 굳었다⁠. 이델라는 기둥 옆에서 카스텐을 보았다⁠. 카스텐의 손은 화로 위에 그대로 있었다⁠.

“⁠관은 장인의 일이오⁠.⁠” 카스텐이 말했다⁠. “⁠장인이 언제 금을 녹이든 관을 쓰는 날은 혼례 날이오⁠. 후보 아가씨가 물러난다면 물러나시오⁠. 다음 후보⁠.⁠”

“⁠재상⁠.⁠” 이델라가 기둥 옆에서 말했다⁠. “⁠관이 가을에 만들어졌으면⁠, 간택은 누구를 위한 거예요⁠?⁠”

“⁠왕비를 위한 것이오⁠.⁠”

“⁠어느 왕비요⁠?⁠”

“⁠혼례 날 관을 쓰는 왕비⁠.⁠” 카스텐은 이델라를 보지 않고 세 번째 후보에게 손짓했다⁠. 무릎을 굽힌 채 떨던 백작 집 딸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백작 따님⁠, 앞으로 나오시오⁠.⁠”

“⁠재상⁠, 폐하께 먼저 여쭤야죠⁠.⁠”

카스텐이 오스벨을 보았다⁠. 오스벨이 솔베를 보았다⁠. 솔베는 무릎을 편 채 서 있었다⁠. 오스벨이 이델라를 보았다⁠. 이델라는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오스벨의 눈이 마지막으로 카스텐에게 돌아왔다⁠.

“⁠재상 말대로 하오⁠.⁠” 오스벨이 작게 말했다⁠. “⁠혼례는 이월 그믐이오⁠.⁠”

백작 집 딸이 앞으로 나왔다⁠. 무릎을 굽히다가 치맛자락을 밟아 휘청거렸다⁠. 솔베가 얼른 팔을 내밀어 잡아 주었다⁠. 둘은 잠깐 서로를 붙잡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방금 왕비 자리를 버렸고⁠, 한 사람은 방금 왕비 자리를 떠안았다⁠.

*

시빌라는 솔베의 말을 간택이 끝난 날 오후에 들었다⁠. 해가 지기 전에 몬테가 은행의 서기 넷이 칼데나 골짜기로 말을 몰았다⁠. 밤이 깊어 솔베 아버지의 공방에서 큰 베틀 열두 대가 해체되어 짐수레에 실렸다⁠. 맡긴 베틀이었으니 은행이 거둘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솔베의 아버지가 별궁 대문 앞에 와서 소리를 질렀다⁠. 술 냄새가 대문 안까지 넘어왔다⁠.

“⁠솔베⁠, 나와⁠! 베틀 열두 대가 날아갔다⁠! 할머니 때부터 돌린 베틀이⁠!⁠”

솔베가 대문 앞으로 나갔다⁠. 이델라가 뒤를 따랐다⁠. 솔베의 아버지는 딸을 보자 손가락을 들었다가⁠, 손가락이 떨려서 내렸다⁠.

“⁠네가 간택 자리에서 입만 다물었으면⁠.⁠”

“⁠입을 다물면 제가 소금 문서에 찍히는 도장이 돼요⁠, 아버지⁠.⁠”

“⁠도장이면 어때⁠! 도장이면 베틀은 남잖아⁠!⁠”

“⁠베틀은 남고 저는 안 남아요⁠.⁠” 솔베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빠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를 빚 반값에 내놓으셨잖아요⁠. 저는 반값이 싫어요⁠.⁠”

솔베의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하고 언덕길을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솔베가 대문 기둥을 붙잡고 오래 서 있었다⁠. 이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에 서 있었다⁠.

정오 무렵 언덕길로 손수레들이 올라왔다⁠. 칼데나 직공들이었다⁠. 서른 집에서 스물두 집이 왔다⁠. 손수레마다 작은 손베틀이 실려 있었고⁠, 실 꾸러미와 아이 손을 잡은 아낙들이 뒤따랐다⁠. 맨 앞 손수레를 별궁의 젊은 근위병이 끌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 직공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잡이를 잡았다고 했다⁠.

“⁠이것도 재상 각하께 혼나는 일입니까⁠?⁠” 근위병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손수레 끄는 법도는 없어⁠.⁠”

“⁠다행입니다⁠.⁠”

솔베가 대문 기둥에서 손을 떼고 직공들에게 달려갔다⁠. 직공들이 솔베를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이델라는 별궁 큰방의 문을 열었다⁠. 드레스 스물한 벌을 걸었던 커튼 봉 아래는 비어 있었다⁠. 창고 셋은 재상의 봉인으로 닫혀 있었지만⁠, 큰방은 봉인되지 않았다⁠.

“⁠브리다⁠, 큰방 비워⁠.⁠”

“⁠또요⁠? 드레스 팔 때도 비웠는데요⁠?⁠”

“⁠이번엔 베틀이야⁠.⁠”

해 질 녘에 별궁 큰방에는 손베틀 스물두 대가 줄지어 앉았다⁠. 북이 오가는 소리가 큰방을 채웠다⁠. 탁⁠, 탁⁠, 탁⁠. 브리다가 부엌에서 귀를 막았다가⁠, 직공 아낙 하나가 칼데나식 절인 무를 꺼내자 귀를 열었다⁠. 솔베는 베틀 사이를 돌며 실을 나눠 주었다⁠. 오늘은 숨을 쉬면서 말했다⁠.

해가 진 뒤 벨라크 상단의 짐수레 한 대가 언덕을 올라왔다⁠. 마부석에 투르발 고개를 서른 번 넘었다는 늙은 수레꾼이 앉아 있었다⁠. 수레에는 염색하지 않은 명주실 꾸러미가 가득 실려 있었다⁠.

“⁠상단 창고에서 묵던 실이에요⁠. 상단주가 보냈다고 하지 말래요⁠.⁠”

“⁠그럼 누가 보냈다고 해요⁠?⁠”

“⁠그것도 말하지 말래요⁠. 말 안 하면 누가 보냈는지 감독관님이 아실 거라고⁠.⁠” 수레꾼이 실 꾸러미를 내리며 덧붙였다⁠. “⁠운반비는 안 받는대요⁠. 대신 무화과는 열 개였다고 꼭 전하래요⁠.⁠”

이델라는 실 꾸러미 하나를 손끝으로 쓸었다⁠. 올이 고르고 가늘었다⁠. 벨라크 상단 창고에서 가장 좋은 실이었다⁠.

“⁠열한 개였다고 전해 줘요⁠.⁠”

*

시빌라는 사흘 뒤에 왔다⁠. 대문을 들어서자 베틀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큰방 문간에서 한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직공들은 은회색 털망토의 여자를 보고도 북을 멈추지 않았다⁠.

“⁠감독관님은 쫓겨날 때마다 무언가를 들이시는군요⁠. 이번엔 베틀이네요⁠.⁠”

“⁠사절님은 거둘 때마다 무언가를 보내 주시네요⁠.⁠”

시빌라가 웃었다⁠. 이번 웃음은 끝이 덜 차가웠다⁠. 시빌라는 장갑 낀 손으로 가까운 베틀의 날실을 쓸었다⁠.

“⁠솔베 아가씨가 간택 자리에서 관 이야기를 했다지요⁠.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재상 각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시지만⁠, 폐하는 흔들리십니다⁠. 폐하는 늘 흔들리시고요⁠.⁠” 시빌라가 손을 거두었다⁠. “⁠저는 흔들리는 칙허 하나에 은행의 서른여섯 상자를 걸어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 왕관을 원하시지요⁠. 왕관이 감독관님 손에 있으면 이월 그믐에 새 왕비는 관을 못 씁니다⁠. 아르셀 법도가 그렇다면서요⁠.⁠”

“⁠그래요⁠.⁠”

“⁠그럼 별궁을 주시지요⁠.⁠”

베틀 소리가 이델라의 귓속에서 멀어졌다⁠. 시빌라는 큰방의 맨유리 창으로 강 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 너머로 페넬라 상관의 지붕과 저울 깃발이 보였다⁠.

“⁠이 언덕에서는 나루가 한눈에 보입니다⁠. 창고 셋은 깊고⁠, 왕도 성벽 안이고요⁠. 페넬라 상관이 강가 돌집 하나로는 좁습니다⁠.⁠” 시빌라가 돌아섰다⁠. “⁠혼례가 서면 저는 소금을 갖습니다⁠. 혼례가 무너지면 저는 별궁을 갖지요⁠. 어느 길로 가든 몬테가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별궁은 제 집이에요⁠.⁠”

“⁠이혼하신 왕비께 내준 집이지요⁠. 칙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면서요⁠. 감독관님 것이니까 감독관님이 파실 수 있습니다⁠.⁠”

이델라는 큰방 창으로 눈을 돌렸다⁠. 창 아래로 뒤뜰이 내려다보였다⁠. 배나무 가지 끝에 아주 작은 망울이 맺혀 있었다⁠. 밑동 곁의 흰 돌 두 개는 녹은 눈에 젖어 반짝였다⁠.

“⁠생각해 보세요⁠. 이월 그믐까지 이레가 남았습니다⁠.⁠” 시빌라가 장갑을 고쳐 끼었다⁠. “⁠저는 상관에 있겠습니다⁠. 왕관도 상관에 있고요⁠.⁠”

시빌라가 나간 뒤에도 베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탁⁠, 탁⁠, 탁⁠. 솔베가 베틀 사이에서 이델라를 보고 있었다⁠. 이델라는 창가에 서서 배나무를 내려다보았다⁠. 손끝으로 맨유리를 짚자 유리가 찼다⁠. 손끝의 잉크 자국이 유리에 희미하게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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