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52자)

무화과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왕의 처소 문 앞을 지키던 근위병은 별궁에서 차를 마시던 젊은이였다⁠. 이델라가 회랑 끝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자 근위병은 창을 가로로 들었다가⁠, 들고 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다시 세웠다⁠.

“⁠마마⁠, 밤에는 안 됩니다⁠. 재상 각하께서⁠.⁠”

“⁠재상한테는 내가 밀고 들어왔다고 해⁠.⁠”

“⁠그럼 제가 혼납니다⁠.⁠”

“⁠막았는데 못 막았다고 해⁠. 그건 거짓말 아니잖아⁠.⁠”

근위병이 창을 세운 채 한 걸음 비켜섰다⁠. 이델라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열었다⁠.

오스벨은 잠옷 바람으로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 작은 붓을 들고 있었고⁠, 수염의 반이 다시 새카맸다⁠. 물감 그릇에서 쇳내 섞인 냄새가 올라왔다⁠. 거울 속에서 이델라를 본 오스벨이 붓을 떨어뜨렸다⁠. 붓이 잠옷 앞자락을 지나 바닥으로 굴렀고⁠, 흰 잠옷에 검은 줄이 길게 그어졌다⁠.

“⁠이델라⁠, 이건 그러니까 혼례 날까지만⁠.⁠”

이델라는 탁자 위에 진주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진주알들이 탁자에 부딪혀 짧게 울었다⁠. 오스벨이 목걸이를 보고⁠, 이델라를 보고⁠, 다시 목걸이를 보았다⁠.

“⁠어머니 목걸이요⁠. 페넬라 상관에서 찾아왔어요⁠. 금화 한 상자 주고요⁠.⁠”

“⁠찾아왔소⁠? 재상은 꿰는 중이라고 했는데⁠.⁠”

“⁠폐하⁠, 가을에 도장 찍으셨어요⁠?⁠”

오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손가락이 수염으로 갔다⁠. 아직 덜 마른 물감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새 왕비의 관 주문서요⁠. 가을 첫 달이요⁠. 치수는 제 관 치수로⁠. 폐하 도장이 찍혀 있었어요⁠. 저한테 이혼 칙서가 오기 석 달 전에요⁠.⁠”

방 안에서 물감 그릇만 냄새를 피웠다⁠. 오스벨이 오래 바닥의 붓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작게⁠.

“⁠재상이 그러지 않으면 봄에 봉급이 끊긴다고 했소⁠. 봉급이 끊기면 병사들이 서른 해 전처럼 왕도를 태운다고 했소⁠. 몬테가 사람은 당신이 왕비로 있는 한 돈을 더는 못 빌려준다고 했고⁠.⁠” 오스벨은 손을 비볐다⁠. 검은 물이 손바닥에 번졌다⁠. “⁠나도 아이가 갖고 싶었소⁠. 그건 거짓말이 아니오⁠. 열다섯 해였소⁠. 당신 뒤뜰 배나무 아래 돌이 둘이오⁠.⁠”

이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배나무 아래 돌 이야기를 오스벨이 입에 올린 것은 처음이었다⁠. 돌을 놓던 두 번의 봄에 오스벨은 사냥을 나가 있었다⁠.

“⁠그래서 도장을 찍었소⁠.⁠” 오스벨이 말했다⁠. “⁠둘이 같은 쪽으로 기울어서⁠. 재상 말도 맞고⁠, 나도 바랐고⁠.⁠”

“⁠저한테는 말 안 하고요⁠.⁠”

오스벨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물감 묻은 손으로 눈을 문지르자 검은 물이 눈 밑으로 번졌다⁠. 왕은 울면서 얼굴에 그을음을 바르고 있었다⁠.

“⁠당신도 알았잖소⁠.⁠”

“⁠뭘요⁠?⁠”

“⁠두 해 전 봄⁠. 내가 잠결에 페넬라에서 금화를 좀 빌렸다고 했잖소⁠. 당신은 듣고 있었소⁠. 숨소리가 바뀌는 걸 내가 들었소⁠.⁠” 오스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낮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당신은 안 물었소⁠. 금고 열쇠를 차고 계절마다 금고에 내려가면서도 안 물었소⁠. 봉인을 못 봤다고 해도⁠, 금화가 안 느는 건 당신 손끝이 제일 먼저 알았을 거요⁠.⁠”

이델라는 탁자 모서리를 잡았다⁠. 시빌라의 뒷방에서 잡았던 탁자처럼 나무가 찼다⁠.

“⁠물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았소⁠. 당신은 상단 집 딸이라 숫자를 알면 가만있지 못하오⁠. 가만있지 못하면 재상과 싸우고⁠, 재상과 싸우면 왕비 자리가 흔들리고⁠.⁠” 오스벨이 말을 멈췄다⁠. “⁠당신도 자리가 편했소⁠. 나처럼⁠.⁠”

“⁠반쯤 알았어요⁠.⁠” 이델라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왔다⁠. “⁠반쯤 알고 반은 모르는 척했어요⁠. 모르는 척하는 게 아침마다 쉬웠어요⁠.⁠”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스벨이 잠옷 소매로 얼굴을 닦으려다 검은 줄을 늘렸다⁠. 이델라는 창가의 커튼 끝을 잡아 오스벨에게 내밀었다⁠. 오스벨이 커튼으로 얼굴을 닦다가 멈췄다⁠.

“⁠이 커튼 칼데나 거요⁠?⁠”

“⁠페넬라 거예요⁠. 외상⁠.⁠”

오스벨이 커튼을 얼른 놓았다⁠. 커튼 끝에 검은 얼룩이 남았다⁠.

“⁠폐하⁠, 칙허를 쓰지 마세요⁠. 혼례는 하셔도 돼요⁠. 칙허만 쓰지 마세요⁠.⁠”

“⁠재상이⁠…⁠…⁠.⁠”

“⁠재상 말고 폐하요⁠.⁠”

오스벨은 수염을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감이 배어 나왔다⁠. 오스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왕이었다⁠. 이델라는 목걸이를 다시 집어 품에 넣었다⁠. 왕실 물건이니 내일 금고로 가야 했다⁠. 문을 나서기 전에 이델라는 한 번 돌아보았다⁠. 오스벨이 거울 앞에서 검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수염은 흰 게 나아요⁠.⁠”

“⁠솔베도 그렇게 말했소⁠. 날실 씨실 같다고⁠.⁠”

“⁠솔베 말이 맞아요⁠.⁠”

*

이튿날 아침 이델라는 진주 목걸이를 금고에 넣으러 내려갔다⁠. 쇠문 앞에 화로가 먼저 와 있었다⁠. 카스텐이 화로 곁에 서서 호벤 영감과 함께 이델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폐하 처소에 밀고 들어갔다고 들었소⁠. 근위병이 막았는데 못 막았다고 하더군⁠.⁠”

“⁠거짓말은 아니죠⁠.⁠”

“⁠거짓말은 아니오⁠.⁠” 카스텐은 이델라가 품에서 꺼낸 진주 목걸이를 보았다⁠. “⁠상관 뒷방에도 갔다고 들었소⁠.⁠”

“⁠가을 날짜도 봤어요⁠.⁠”

호벤 영감이 갑자기 등잔 심지를 돋우기 시작했다⁠. 카스텐은 화로 위에 손을 폈다⁠. 지하 돌방의 냉기 속에서 손이 평소보다 하얗게 보였다⁠.

“⁠조건의 문장은 내가 썼소⁠. 벨라크 집 딸이 왕비로 있으면 소금은 페넬라로 못 간다⁠. 그건 몬테가가 한 말이 아니라 내가 몬테가에게 한 말이오⁠.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열다섯 해 동안 보았으니까⁠.⁠” 카스텐은 목소리를 바꾸지 않았다⁠. “⁠폐하는 내 문장에 도장을 찍었을 뿐이오⁠. 원망은 나한테 하시오⁠. 폐하께 할 원망까지 내가 받겠소⁠.⁠”

“⁠왜요⁠?⁠”

“⁠폐하는 봄 첫날 성당 계단에 서야 하오⁠. 원망을 지고는 계단을 못 오르오⁠. 나는 계단을 안 올라가도 되오⁠.⁠”

이델라는 진주 목걸이를 쇠궤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손끝이 쇠궤 뚜껑의 찬 테두리를 따라갔다⁠.

“⁠재상⁠, 원망은 나눠 지는 거 아니에요⁠. 각자 제 몫이 있어요⁠. 폐하 몫은 폐하가 지고⁠, 재상 몫은 재상이 지고⁠, 제 몫은 제가 져요⁠.⁠”

“⁠감독관 몫이 무엇이오⁠?⁠”

“⁠두 해 동안 모르는 척한 거요⁠.⁠”

카스텐이 처음으로 화로에서 눈을 떼고 이델라를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서기에게 화로를 들라고 손짓했다⁠. 계단을 오르던 카스텐이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 몫까지 알고 있으면⁠, 부인은 나보다 오래 버틸 것이오⁠. 그래도 봄 첫날은 오오⁠.⁠”

*

같은 날 정오 무렵 강 나루에 페넬라에서 온 작은 배가 닿았다⁠. 배에서 내린 전령이 벨라크 상단 창고로 곧장 갔다⁠. 해가 기울기 전에 빨래터에는 소식이 퍼져 있었다⁠. 몬테가 은행이 페넬라 항구에 들어가 있던 벨라크 상단의 배 두 척을 붙잡았다⁠. 맡긴 배였으니 은행이 붙잡을 수 있었다⁠. 은행이 하필 이번 주에 붙잡은 것이 문제였다⁠.

하르벤은 해 질 녘에 별궁 부엌으로 쳐들어왔다⁠. 마차를 언덕 아래 두고 뛰어 올라왔는지 숨을 몰아쉬었고⁠, 털모자 위에 내려앉은 눈이 녹아 이마로 흘렀다⁠. 상단주는 모자도 벗지 않고 식탁에 두 손을 짚었다⁠.

“⁠그만해라⁠.⁠”

“⁠무슨 소리야⁠?⁠”

“⁠소금을 산으로 돌리고⁠, 비단을 칼데나로 돌리고⁠, 진주를 찾아오고⁠. 그만하라고⁠. 몬테가가 우리 배를 잡았어⁠. 너 때문에⁠. 네가 소금 길을 건드려서⁠.⁠” 하르벤은 식탁을 손바닥으로 쳤다⁠. 브리다가 화덕 앞에서 냄비 뚜껑을 떨어뜨렸다⁠. “⁠배에 탄 선원이 서른이야⁠. 선원들 집이 서른이고⁠. 남은 배 세 척도 페넬라 항구를 드나들어⁠. 다음엔 그 세 척이야⁠.⁠”

“⁠오빠가 배를 맡겼잖아⁠.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너는 왕비였잖아⁠! 왕비한테 오빠가 은행에 배를 맡겼다고 말해⁠? 그럼 너는 뭐라고 했을 건데⁠? 재상이랑 싸웠겠지⁠. 싸우면 너 자리가 흔들리고⁠.⁠”

이델라는 대답을 멈췄다⁠. 어젯밤 오스벨이 같은 말을 했다⁠. 같은 말을 두 남자에게 하루에 두 번 들었다⁠.

“⁠오빠⁠, 수레 마흔 대로 산을 넘어서 금화 세 상자를 벌었어⁠. 오빠도 열둘에 하나 받았어⁠.⁠”

“⁠받았지⁠. 받은 운반비로 배 두 척을 못 찾아⁠. 배 한 척이 금화 몇 상자인지 알아⁠?⁠” 하르벤이 털모자를 벗어 식탁에 내리쳤다⁠. “⁠너는 어릴 때도 그랬어⁠. 아버지 배가 페넬라에서 무화과를 실어 온 날⁠, 바구니에 하나 남은 걸 내가 집었는데 네가 내 손을 깨물었어⁠. 마지막 걸 끝까지 안 놓았어⁠. 여덟 살이⁠.⁠”

“⁠오빠는 열두 살이었고 앞에 열한 개를 먹었어⁠.⁠”

“⁠열 개야⁠.⁠”

“⁠열한 개야⁠. 내가 셌어⁠.⁠”

브리다가 냄비 뚜껑을 주우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서른 해 전 무화과 하나를 두고 마흔둘과 서른여덟이 싸우고 있었다⁠. 하르벤의 손등에는 이빨 자국이 아직 희게 남아 있었다⁠. 하르벤이 손등을 문질렀다⁠.

“⁠어쨌든 수레는 거둔다⁠.⁠” 하르벤이 말했다⁠. 목소리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남은 배 세 척이랑 수레꾼 예순 집이 있어⁠. 너 편 들다가 그거 다 날리면 아버지 얼굴을 못 봐⁠. 무덤에서도 못 봐⁠.⁠”

“⁠수레 없으면 봄 봉급을 못 맞춰⁠.⁠”

“⁠그건 재상 일이야⁠. 재상이 혼례로 맞춘대잖아⁠. 너는 이혼했어⁠. 이혼한 사람이 왜 남의 나라 봉급을 맞춰⁠?⁠”

“⁠남의 나라 아니야⁠.⁠”

“⁠그럼 누구 나라인데⁠? 너를 내보낸 나라야⁠.⁠”

부엌이 조용해졌다⁠. 화덕에서 장작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하르벤은 털모자를 집어 쓰고 문으로 갔다⁠. 문간에서 한 번 돌아섰다⁠.

“⁠몸은 괜찮냐⁠?⁠”

편지에서처럼 두 번째 줄이었다⁠. 이델라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괜찮아⁠. 오빠 손등은⁠?⁠”

하르벤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가⁠, 대답하지 않고 나갔다⁠. 마차 바퀴 소리가 언덕 아래로 멀어졌다⁠.

*

저녁에 재상 집무실의 서기가 별궁에 종이 한 장을 두고 갔다⁠. 「⁠봄 봉급은 재상의 손으로 내보낸다⁠. 베냐 소금이 왕도 밖으로 나가는 길은 재상의 허락을 받는다⁠.⁠」 수레를 거둬 간 날 저녁에 길까지 막혔다⁠.

브리다가 부엌 식탁에 보리죽을 내려놓았다⁠. 이델라는 숟가락을 들지 않고 지도를 펼쳤다⁠. 베냐 해안에서 북쪽 산맥까지 지난번 수레가 간 길이 잉크로 그어져 있었다⁠. 이델라는 손끝으로 길을 따라갔다⁠. 소금밭⁠, 둑⁠, 왕도로 올라오는 길에서 갈라져 동쪽 골짜기⁠, 투르발 고개⁠.

“⁠마마⁠, 수레가 없으면 소금을 어떻게 옮겨요⁠?⁠”

“⁠사람이 지지⁠.⁠”

“⁠소금 마흔 수레를요⁠? 누가요⁠?⁠”

이델라는 지도의 베냐 해안을 손끝으로 눌렀다⁠. 소금밭 둑 위에 남부 수비대 초소가 작게 그려져 있었다⁠. 재상의 허락은 소금이 왕도 밖으로 나가는 길에만 붙어 있었다⁠. 왕도에 들르지 않고 베냐에서 곧장 동쪽 골짜기로 빠지는 길은 종이 어디에도 없었다⁠.

“⁠브리다⁠, 내일 남쪽으로 가⁠. 사흘 길이야⁠.⁠”

“⁠제가요⁠?⁠”

“⁠빨래터 소식이 남쪽 소금밭까지 가는 데 사흘이 걸리잖아⁠. 네가 가면 하루야⁠.⁠” 이델라는 지도를 접었다⁠. 손끝에 잉크가 새로 묻었다⁠. “⁠사령관한테 전해⁠. 병사 사백이 빵 사천 덩이를 지고 산을 넘을 수 있는지⁠.⁠”

“⁠빵이요⁠? 소금이 아니고요⁠?⁠”

“⁠사령관은 빵으로 말해야 알아들어⁠.⁠”

브리다가 앞치마를 벗어 접었다⁠.

“⁠그 늙은 병사도 남쪽에 있나 몰라⁠.⁠”

브리다가 접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델라는 못 들은 척 보리죽을 한 숟가락 떴다⁠. 식은 죽이 혀에 짰다⁠. 소금을 너무 넣었다⁠.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