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08자)

가을에 새긴 날짜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브리다는 서기들 방 앞 회랑에서 같은 홑이불을 다섯 번 빨았다⁠. 회랑에는 빨래터가 없어서 물동이를 들고 가야 했고⁠, 물동이를 든 시녀가 회랑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다들 무슨 벌을 받는 줄 알았다⁠. 지나가던 시종 하나가 측은하다며 빵 한 조각을 주고 갔다⁠. 브리다는 빵을 먹으면서 여섯 번째로 홑이불을 빨았다⁠.

“⁠칙허는 재상 각하가 직접 쓰셨대요⁠. 서기들한테 안 맡기고요⁠.⁠” 브리다가 별궁 부엌에서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 손가락이 퉁퉁 불어 있었다⁠. “⁠서기 하나가 그러는데⁠, 각하가 쓰시다가 소금이라는 글자에서 펜촉을 두 번 부러뜨리셨대요⁠. 손이 차서 펜을 세게 쥐신대요⁠.⁠”

“⁠소금이라고 했어⁠?⁠”

“⁠소금이요⁠. 그리고 하나 더요⁠. 폐하가 솔베 아가씨랑 춤 연습을 하신대요⁠. 춤 선생이 발등을 다 버려서 이제 간택 후보가 짝이래요⁠.⁠” 브리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솔베 아가씨가 춤을 추면서 쉬지 않고 베틀 이야기를 해서⁠, 폐하가 박자를 세다가 씨실 날실을 세신대요⁠.⁠”

이델라는 웃음을 참으며 진주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렸다⁠. 낡은 비단 끈을 어젯밤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진주알이 손바닥 위에서 서로 부딪혀 작게 울었다⁠.

*

회의실로 가는 길에 거울방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솔베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폐하⁠, 왼발이요⁠, 그리고 칼데나에서는 날실을 걸 때 왼쪽부터 거는데요⁠, 그게 할머니 때부터⁠, 아 폐하 그건 제 발이에요⁠, 괜찮아요⁠, 베틀 발판보다 덜 아파요⁠, 그래서 날실을 왼쪽부터 걸면 씨실이 오른쪽에서 들어오니까⁠.⁠”

“⁠씨실이 오른쪽⁠.⁠” 오스벨이 박자 대신 중얼거렸다⁠. “⁠날실이 왼쪽⁠. 하나⁠, 둘⁠.⁠”

오스벨은 솔베의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돌았다⁠. 솔베보다 열일곱 살 많은 왕이 진지한 얼굴로 씨실과 날실을 세고 있었다⁠. 문틈으로 이델라와 눈이 마주친 솔베가 춤을 추면서 눈썹을 두 번 들썩였다⁠. 아버지가 어젯밤에도 술을 마셨다는 뜻이었다⁠. 이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랑을 지나갔다⁠. 등 뒤에서 오스벨이 또 솔베의 발을 밟았고⁠, 솔베는 베틀 발판 이야기를 계속했다⁠.

*

회의실 탁자에는 오늘 귀족 셋이 더 앉아 있었다⁠. 왕도에서 가장 오래된 집안의 늙은 공작과 백작 둘이었다⁠. 공작은 귀가 어두워서 시종이 귀에 대고 회의 내용을 다시 말해 주었다⁠. 호벤 영감과 달리 공작은 정말로 귀가 어두웠다⁠.

카스텐이 화로 위에서 손을 비비며 말을 시작했다⁠.

“⁠어제 본궁 앞마당에서 감독관이 남부 수비대 병사들에게 금화를 손수 나눠 주었소⁠. 병사들이 감독관 앞에서 박수를 쳤소⁠.⁠”

“⁠전 왕비가 병사들 박수를 받았다고⁠?⁠” 공작이 시종에게 크게 되물었다⁠. 시종이 공작의 귀에 대고 맞다고 했다⁠.

“⁠왕의 군대 봉급은 왕의 이름으로 재상이 내보내는 것이 법도요⁠. 감독관은 금고를 지키는 사람이지 병사를 먹이는 사람이 아니오⁠. 왕비였던 사람이 병사들 손에 금화를 쥐여 주면⁠, 병사들은 금화를 쥔 손을 기억하오⁠.⁠” 카스텐은 화로에서 눈을 들었다⁠. “⁠다음에 그 손바닥이 칼을 쥘 때 누구 편에 서겠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백작 하나가 의자에서 몸을 뒤로 뺐다⁠. 이델라는 탁자 아래에서 손가락을 오므렸다⁠. 굳은살의 감촉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병사들은 빵 편에 서요⁠. 두 해 동안 빵을 못 사서 사령관이 칼을 팔았고요⁠.⁠”

“⁠그래서 감독관이 빵을 사 주었소⁠. 그 빵은 폐하가 사 준 빵이어야 했소⁠.⁠”

이델라는 대답을 고르다가⁠, 고르지 못했다⁠. 카스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앞마당에서 금화를 놓을 때 병사들의 눈은 왕이 아니라 이델라의 손을 보고 있었다⁠. 이델라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 손을 내밀었다⁠.

“⁠폐하⁠.⁠” 카스텐이 오스벨을 보았다⁠. “⁠봉급은 재상의 손으로 되돌리시오⁠. 감독관은 금고에서 금화를 내주기만 하오⁠.⁠”

오스벨은 공작 깃털 모자를 오늘은 아예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끝으로 탁자 모서리를 문질렀다⁠.

“⁠이델라⁠, 재상 말이 맞는 것 같소⁠.⁠”

“⁠맞아요⁠.⁠” 이델라가 말했다⁠. 오스벨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맞는데 하나만 물어볼게요⁠. 혼례 날 성당 계단에서 폐하가 내리실 칙허에 뭐가 들어가요⁠?⁠”

“⁠칙허⁠?⁠”

“⁠페넬라 사절이 그 칙허를 기다린대요⁠. 칙허가 내려야 서른여섯 상자가 편히 잔대요⁠.⁠”

공작이 시종에게 다시 물었다⁠. 시종이 귀에 대고 서른여섯 상자라고 말했다⁠. 공작이 크게 되물었다⁠. 서른여섯 상자가 뭐냐고⁠. 회의실의 모두가 공작의 질문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카스텐은 화로 위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칙허는 혼례 날 알게 되오⁠. 혼례 날 알게 되는 것이 칙허요⁠.⁠”

“⁠재상이 직접 쓰셨다면서요⁠. 소금이라는 글자에서 펜촉을 두 번 부러뜨리셨다고요⁠.⁠”

카스텐의 손이 화로 위에서 멈췄다⁠. 회의실 구석에 앉은 서기 하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카스텐은 서기를 한 번 보고 다시 이델라를 보았다⁠.

“⁠빨래터가 이제 회랑까지 올라왔소⁠?⁠”

“⁠회랑엔 빨래터가 없대요⁠. 그래서 물동이를 들고 갔대요⁠.⁠”

오스벨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나서 카스텐의 얼굴을 보고⁠, 탁자 모서리를 다시 문질렀다⁠.

“⁠봉급은 재상이 내보내시오⁠.⁠” 오스벨이 말했다⁠. “⁠칙허는⁠…⁠… 혼례 날 봅시다⁠.⁠”

*

회의가 끝나고 본궁 마구간 앞에서 가르딘이 말에 안장을 얹고 있었다⁠. 병사들은 남쪽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르딘은 이델라가 오는 것을 보고 안장 끈을 마저 조였다⁠.

“⁠봉급이 다시 재상 손으로 갔다고 들었소⁠.⁠”

“⁠빨리도 들었네요⁠.⁠”

“⁠빨래터 소식은 마구간까지 오오⁠. 말들도 아는 것 같소⁠.⁠” 가르딘은 안장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리빵 한 덩이였다⁠. 왕도 빵집에서 갓 산 둥근 덩이였다⁠. 빵은 아직 따뜻했다⁠. “⁠감독관 몫이오⁠. 어제 금화로 산 첫 빵이오⁠.⁠”

“⁠사령관 몫이잖아요⁠.⁠”

“⁠나는 이백 덩이가 있소⁠. 하나 빠져도 백아흔아홉이오⁠.⁠”

이델라는 빵을 받았다⁠. 빵 껍질이 손바닥에 따뜻하게 닿았다⁠. 가르딘의 손끝이 이델라의 손등을 아주 잠깐 스쳤다⁠. 이번에는 이델라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가르딘이 그것을 보고 눈가로 웃었다⁠.

“⁠봄 첫날에 다시 올라오겠소⁠. 봉급 수레를 끌고⁠.⁠”

“⁠빈 수레로요⁠?⁠”

“⁠감독관이 채워 주면 찬 수레로⁠.⁠” 가르딘이 말에 올랐다⁠. “⁠재상 손으로 나가든 감독관 손으로 나가든⁠, 금화만 진짜면 되오⁠.⁠”

말발굽 소리가 성문 쪽으로 멀어졌다⁠. 이델라는 따뜻한 빵을 들고 서 있었다⁠. 빵을 먹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마구간지기가 이델라를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녁이면 빨래터에서 빵 이야기가 돌 것이었다⁠.

*

해가 진 뒤 페넬라 상관에서 사람이 왔다⁠. 시빌라의 서기가 별궁 대문 앞에서 쪽지를 건넸다⁠. 「⁠감독관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 밤⁠, 상관 뒷방에서⁠.⁠」

이델라는 하르벤을 부르지 않았다⁠. 브리다가 따라오겠다는 것을 말렸다⁠. 진주 목걸이를 품에 넣고⁠, 열쇠 꾸러미의 소리를 손바닥으로 죽이며 혼자 나루로 내려갔다⁠. 강바람이 차가웠고⁠, 페넬라 배들의 돛대 끝에서 등불이 흔들렸다⁠.

상관 뒷방은 창이 없었다⁠. 벽에 촛대 넷이 박혀 있었고⁠, 가운데 탁자에 검은 우단을 씌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빌라는 장갑을 낀 채 상자 곁에 앉아 있었다⁠.

“⁠감독관님은 저를 이기려고 애쓰고 계십니다⁠. 소금을 산으로 보내고⁠, 비단을 칼데나로 돌리고⁠, 진주를 찾아가시고⁠. 그런데 감독관님이 싸우시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시빌라가 우단을 걷었다⁠. 금으로 된 가는 관이 촛불 아래 누워 있었다⁠. 왕관보다 작고 가벼운⁠, 왕비의 관이었다⁠. 앞머리 자리에 흰 법랑으로 네모 세 개와 물결 하나가 박혀 있었다⁠. 이델라는 무늬를 한눈에 알았다⁠. 베냐 해안 소금밭의 문장이었다⁠. 소금 자루마다 찍히는 무늬였다⁠.

“⁠만져 보셔도 됩니다⁠.⁠”

이델라는 관을 들었다⁠. 진짜 금이었다⁠. 손끝에서 금방 따뜻해졌고 손톱으로 누르면 아주 조금 물러났다⁠. 손끝이 관 안쪽 테두리를 따라 돌다가 멈췄다⁠. 안쪽 금에 가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델라는 관을 촛불 가까이 기울였다⁠.

「⁠아르셀의 새 왕비에게⁠. 왕국력 312년 가을⁠. 베냐의 소금과 함께⁠」

“⁠가을이요⁠.⁠” 이델라가 말했다⁠. 자기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가을 첫 달입니다⁠. 장인에게 주문이 들어온 날짜지요⁠.⁠” 시빌라가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밀어 놓았다⁠. 짧은 주문서였다⁠. 관의 치수는 옛 왕비의 관과 같게⁠. 대금은 몬테가 은행⁠. 맨 아래에 붉은 밀랍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자 두 마리가 방패를 받친 무늬⁠. 아르셀 왕의 도장이었다⁠. 열다섯 해 동안 이델라는 이 도장을 오스벨의 손가락에서 매일 보았다⁠.

“⁠이혼 칙서는 겨울에 왔어요⁠.⁠”

“⁠석 달 뒤였지요⁠.⁠” 시빌라가 장갑을 벗었다⁠. 반지들이 촛불에 반짝였다⁠. “⁠두 해 전 봄⁠, 몬테가 은행이 아르셀에 금화를 빌려 드릴 때 조건이 셋 있었습니다⁠. 왕관을 담보로 맡길 것⁠. 베냐 소금을 페넬라 배에 먼저 실을 것⁠. 그리고 지난가을⁠, 이자를 더는 못 내시게 되었을 때 조건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말해요⁠.⁠”

“⁠벨라크 집 딸이 왕비로 있는 한⁠, 베냐 소금은 페넬라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감독관님의 친정은 페넬라와 소금 뱃길을 다투는 집이니까요⁠. 그래서 왕비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새 왕비의 혼례 날⁠, 폐하께서 칙허로 베냐 소금밭 삼십 년을 몬테가 은행에 내려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서른여섯 상자의 이자는 덮어 드리고요⁠.⁠”

이델라는 관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을 떼는 데 손가락이 한 번 미끄러졌다⁠. 관이 우단 위에서 작게 굴렀다가 멈췄다⁠.

“⁠아이 때문이 아니었네요⁠.⁠”

“⁠아이도 이유였겠지요⁠. 폐하께는요⁠.⁠” 시빌라가 말했다⁠. 목소리에 조롱은 없었다⁠. “⁠다만 도장을 찍게 만든 이유는 소금이었습니다⁠. 재상께서 문장을 쓰시고⁠, 폐하께서 가을에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감독관님께 이혼 칙서가 가기 석 달 전에요⁠.⁠”

촛불 하나가 바람도 없이 기울었다⁠. 이델라는 탁자 모서리를 잡았다⁠. 나무가 손바닥에 찼다⁠.

“⁠이걸 왜 보여 줘요⁠?⁠”

“⁠감독관님이 싸우는 상대가 재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하니까요⁠. 감독관님을 내보낸 분은 폐하이십니다⁠. 폐하는 감독관님 편이 아닙니다⁠.⁠” 시빌라는 우단을 다시 덮었다⁠. “⁠그만두시지요⁠. 별궁에서 조용히 사시면 지참금은 제 은행이 먼저 챙겨 드리겠습니다⁠.⁠”

이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품 안에서 진주 목걸이가 가슴뼈에 닿아 차가웠다⁠. 열다섯 해 전 대관식 날 오스벨의 어머니가 걸어 준 목걸이였고⁠, 가을의 어느 날 오스벨의 손가락이 도장을 찍었다⁠. 같은 손가락이 겨울에는 이혼 칙서에도 도장을 찍었다⁠.

이델라는 우단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관의 모양이 천 너머로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사절님⁠, 이 관이 봄 첫날 성당 계단에 올라가려면 진짜 왕관이 먼저 올라가야 하죠⁠?⁠”

시빌라가 이델라를 보았다⁠.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이델라는 뒷방 문을 열고 나왔다⁠. 강바람이 얼굴을 쳤다⁠. 나루 건너 본궁 위층⁠, 왕의 처소 창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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