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72자)

소금 수레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새해 첫날 금고는 조용했다⁠.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였다⁠. 이델라는 감독관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쇠문을 혼자 열었다⁠. 호벤 영감의 열쇠와 제 열쇠를 나란히 돌리자 빗장이 빠졌고⁠, 돌방 안에는 봉인 찍힌 상자 열둘과 외상 비단 꾸러미들이 어제처럼 놓여 있었다⁠. 어제 나간 상자 자리에는 바닥 먼지에 네모난 자국만 남아 있었다⁠.

“⁠영감⁠, 이 방에 금화가 들어오는 길이 몇 개예요⁠?⁠”

“⁠예⁠?⁠”

“⁠들어오는 길⁠.⁠”

호벤 영감은 이번에는 귀를 감싸지 않았다⁠. 감독관에게 귀가 어두운 금고지기는 쫓겨난다는 것을 영감은 알았다⁠.

“⁠하나요⁠. 베냐 소금이요⁠. 세금은 귀족 나리들 손에서 다 녹고⁠, 남는 건 소금이에요⁠.⁠” 영감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그런데 소금은 금화가 되어 들어오지 않아요⁠. 나루의 큰 저울에서 페넬라 사람이 소금을 달고⁠, 그만큼 이자를 깎아 줘요⁠. 그걸로 끝이에요⁠.⁠”

“⁠약조 원본은 어디 있어요⁠?⁠”

영감이 벽 쪽 쇠궤를 열어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두 해 전 봄⁠, 카스텐과 몬테가 은행이 맺은 소금 약조였다⁠. 이델라는 등잔 곁에서 양피지를 펼쳤다⁠. 문장은 짧았다⁠. 「⁠바다로 나가는 베냐 소금은 몬테가 은행의 배에 먼저 싣고⁠, 값은 나루의 큰 저울로 정한다⁠.⁠」

이델라는 같은 줄을 손끝으로 두 번 짚었다⁠. 바다로 나가는⁠. 베냐 소금이 바다로만 나가야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감⁠, 투르발에서 소금 한 자루가 얼마인지 알아요⁠?⁠”

“⁠산 너머요⁠? 거긴 바다가 없잖아요⁠.⁠”

“⁠그러니까요⁠.⁠”

*

“⁠수레를 빌려 달라고⁠?⁠” 하르벤은 벨라크 상단 창고 앞에서 동생의 말을 듣자마자 하늘부터 보았다⁠. 상단주는 곤란하면 하늘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마흔 대를⁠? 산을 넘겨서⁠? 겨울에⁠?⁠”

“⁠투르발 고개는 새해 들고 두 주면 눈이 녹아⁠. 아버지가 그때 넘었어⁠.⁠”

“⁠아버지는 서른 살이었고 나는 마흔둘이야⁠.⁠”

“⁠오빠가 넘으라는 거 아니야⁠. 수레꾼들이 넘지⁠.⁠”

하르벤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셌다⁠. 수레 마흔 대⁠, 말 여든 마리⁠, 수레꾼 마흔 명⁠, 고개를 넘는 열흘⁠, 돌아오는 열흘⁠. 셀 때마다 입술이 움직였다⁠.

“⁠운반비는 받는다⁠.⁠”

“⁠받아⁠.⁠”

“⁠열에 하나⁠.⁠”

“⁠열에 하나는 페넬라 몫이야⁠. 오빠는 열둘에 하나⁠.⁠”

“⁠동생이 왕비였을 때는 이렇게 안 깎았는데⁠.⁠”

“⁠왕비였을 때는 오빠한테 일을 안 줬지⁠.⁠”

하르벤이 졌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이델라가 손을 잡았다⁠. 오빠의 손바닥은 장사꾼답게 말랑했고⁠, 손등에는 어릴 때 이델라가 깨문 자리가 아직 희게 남아 있었다⁠. 무화과 하나 때문이었다⁠. 둘 다 무화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

베냐 해안까지는 사흘 길이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눈이 비로 바뀌었고⁠, 사흘째 아침에는 비가 그치고 바람만 남았다⁠. 언덕을 넘자 땅 끝에서 바다까지 하얀 판이 펼쳐졌다⁠. 소금밭이었다⁠. 얕은 물을 가둔 네모난 못들이 바둑판처럼 이어졌고⁠, 못마다 아낙들이 긴 나무 갈퀴로 소금을 긁어모았다⁠. 바람이 바다 냄새와 함께 쓴 소금기를 실어 와 입술이 금세 따끔거렸다⁠. 이델라는 수레에서 내려 소금 무더기에 손끝을 넣었다⁠. 알갱이가 굵고 말랐다⁠. 손가락을 빼자 잉크 자국 위에 흰 가루가 앉았다⁠.

소금밭과 바다 사이에는 높은 흙둑이 있었다⁠. 둑 위에 갈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남부 수비대였다⁠. 수레 마흔 대가 둑 아래 길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둑에서 내려와 길을 막았다⁠. 맨 앞에 키가 문설주만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성문 앞에서 빵값을 묻던 사내였다⁠. 새해를 앞두고 빈 수레를 끌고 내려왔다는 소문은 브리다에게서 들었다⁠.

“⁠감독관이 오신다는 기별은 받았습니다⁠.⁠” 가르딘이 말했다⁠. 칼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재상 각하 명령도 같이 받았습니다⁠. 베냐 소금은 한 자루도 페넬라 배가 아닌 데로 나가지 않는다⁠.⁠”

“⁠재상 명령은 약조를 지키라는 거죠⁠. 약조는 바다로 나가는 소금만 말해요⁠. 이 수레는 산으로 가요⁠.⁠”

“⁠산으로 가면 무엇이 됩니까⁠?⁠”

“⁠투르발에서 금화가 돼요⁠. 거긴 바다가 없어서 소금이 귀해요⁠. 여기서 한 자루 값이면 거기선 여섯 자루 값을 받아요⁠.⁠”

가르딘은 대답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이 둑 위와 길가에 서 있었다⁠. 젊은 병사의 군복 팔꿈치는 기운 자리를 또 기웠고⁠, 늙은 병사의 장화 앞코는 벌어져 있었다⁠. 가르딘이 다시 이델라를 보았다⁠.

“⁠감독관⁠, 소금 한 수레가 투르발에서 빵 몇 덩이가 됩니까⁠?⁠”

이델라는 머릿속으로 수레 하나를 투르발 시장에 내려놓고⁠, 금화로 바꾸고⁠, 금화를 왕도의 보리빵 값으로 나누었다⁠.

“⁠이백 덩이 남짓이요⁠. 왕도 값으로⁠.⁠”

“⁠마흔 수레면 팔천 덩이⁠. 병사 사백 명의 열흘 빵입니다⁠.⁠” 가르딘은 손가락을 꼽지 않고 말했다⁠. “⁠봄에 금화가 온다는 말을 지난 두 해 동안 여섯 번 들었습니다⁠. 재상에게서 넷⁠, 폐하께 둘⁠. 여섯 번 다 오지 않았습니다⁠. 감독관 말이 일곱 번째입니다⁠.⁠”

“⁠일곱 번째는 달라요⁠.⁠”

“⁠여섯 번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둑 위에서 갈퀴질하던 아낙 하나가 소리쳤다⁠. “⁠사령관님⁠, 그 부인 예쁘네요⁠. 빵 말고 다른 것도 좀 세어 보세요⁠.⁠”

아낙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가르딘의 귀가 붉어졌다⁠. 눈가가 움직였는데⁠, 웃는 것인지 곤란한 것인지 이델라는 가늠하지 못했다⁠.

“⁠소금밭 아낙들입니다⁠.⁠” 가르딘이 헛기침을 했다⁠. “⁠병사들 아내가 반입니다⁠. 남편들이 봉급을 못 받으니 아내들이 소금을 긁습니다⁠. 소금을 긁어도 품삯은 페넬라 배가 정한 값으로 나옵니다⁠.⁠”

“⁠그럼 소금이 산으로 가면 아낙들 품삯도 올라요⁠.⁠”

“⁠올라갑니까⁠?⁠”

“⁠제가 올려요⁠.⁠”

가르딘이 이델라를 한참 보았다⁠. 바람이 둘 사이로 소금기를 실어 날랐다⁠. 이델라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손가락의 잉크 자국 위에 앉은 소금 가루가 바람에 날렸다⁠.

*

수레에 소금을 싣는 동안 이델라는 소매를 더 걷어 올리고 못 안으로 들어갔다⁠. 아낙들의 우두머리는 손등이 소금에 터서 붉게 갈라진 쉰 줄의 여자였다⁠. 우두머리가 이델라에게 갈퀴 하나를 내밀었다⁠.

“⁠감독관님⁠, 품삯 올려 준다면서요⁠. 한번 긁어 보세요⁠. 얼마짜리 일인지 손으로 아셔야죠⁠.⁠”

이델라는 갈퀴를 받아 얕은 물 바닥을 긁었다⁠. 물이 발목까지 찼고⁠, 모직 치맛단이 금세 무거워졌다⁠. 갈퀴 끝에 흰 결정이 엉겨 붙었다가 물 밖으로 나오자 바람을 맞고 바로 말랐다⁠. 열 번을 긁자 어깨가 뻐근했고⁠, 스무 번을 긁자 손바닥 가운데가 화끈거렸다⁠. 우두머리가 갈퀴를 도로 받아 갔다⁠.

“⁠하루에 이걸 해 질 때까지 해요⁠. 페넬라 배가 주는 품삯이면 저녁에 보리빵 한 덩이에 절인 생선 꼬리 하나예요⁠. 생선도 페넬라 거고요⁠. 우리 소금으로 절인 생선을 우리가 사 먹어요⁠.⁠”

“⁠투르발에서 금화가 오면 품삯을 두 배로 올릴게요⁠.⁠”

“⁠두 배요⁠?⁠” 우두머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로 하는 두 배는 바람이 가져가요⁠. 사령관님이 지켜보시면 믿을게요⁠.⁠”

“⁠사령관이 그렇게 믿을 만해요⁠?⁠”

“⁠세 해 전 겨울에 열병으로 아내를 잃고⁠, 아내 무덤 앞에 놓을 꽃 살 돈으로 병사들 장화를 기워 준 사람이에요⁠. 칼은 지난가을에 팔았고요⁠.⁠” 우두머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아직 혼자예요⁠. 감독관님은 혼자세요⁠?⁠”

“⁠한 달 전부터요⁠.⁠”

“⁠어머⁠, 딱 좋네⁠.⁠”

둑 위의 아낙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델라는 젖은 치맛단을 짜며 못 밖으로 나왔다⁠. 둑 위에서 가르딘이 이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귀가 아직 붉었다⁠.

*

정오가 지나 바닷가에서 종이 울렸다⁠. 둑 너머 부두로 큰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돛에 저울을 실은 배가 그려져 있었다⁠. 몬테가 은행의 소금 배였다⁠. 배는 부두에 붙자마자 판자를 내렸고⁠, 붉은 털모자를 쓴 선장이 내려와 둑을 성큼성큼 올라왔다⁠.

“⁠소금은 어디 있습니까⁠? 지난번엔 부두에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수레에 있어요⁠.⁠” 이델라가 말했다⁠.

선장은 수레 마흔 대를 훑어보고 웃었다⁠. “⁠그럼 수레째 부두로 내려 주시면 됩니다⁠.⁠”

“⁠이 수레는 산으로 가요⁠.⁠”

선장의 웃음이 멈췄다⁠. 선장은 가르딘에게 몸을 돌렸다⁠.

“⁠사령관⁠, 재상 각하의 명을 받았지요⁠? 베냐 소금은 몬테가 배에 먼저 싣는다⁠.⁠”

“⁠바다로 나가는 소금은요⁠.⁠” 이델라가 대신 대답했다⁠. “⁠약조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몬테가 은행에서 쓴 문장이에요⁠. 은행이 쓴 문장은 은행이 제일 잘 지키겠죠⁠.⁠”

“⁠감독관님⁠, 배가 빈 채로 돌아가면 페넬라의 청어 배들이 소금 없이 바다에 나갑니다⁠. 잡은 청어가 사흘이면 썩습니다⁠.⁠”

“⁠다음 소금은 부두로 가요⁠. 이번 마흔 수레만 산으로 가요⁠.⁠”

“⁠이번 마흔 수레가 문제지요⁠. 한 번 산으로 간 소금은 다음에도 산으로 갑니다⁠.⁠” 선장은 둑 아래의 수레꾼들을 내려다보았다⁠. “⁠벨라크 상단 수레군요⁠. 감독관님 친정이고⁠. 아르셀 소금이 왕실 금고가 아니라 벨라크 상단 주머니로 가는 길이라고 보고하겠습니다⁠.⁠”

수레꾼들이 웅성거렸다⁠. 이델라는 대답을 고르는 사이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하르벤의 운반비는 열둘에 하나였다⁠. 선장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가르딘이 선장과 이델라 사이로 한 걸음 들어섰다⁠. 둑 위의 병사들이 사령관을 보았다⁠.

“⁠선장⁠, 보고는 마음대로 하시오⁠.⁠” 가르딘이 말했다⁠. “⁠다만 재상 각하께 보고하는 김에 하나 덧붙여 주시오⁠. 남부 수비대는 지난 두 해 동안 페넬라 배에 실려 간 소금으로 빵 한 덩이도 사지 못했소⁠.⁠”

“⁠사령관⁠, 명령은요⁠?⁠”

“⁠명령은 베냐 소금이 페넬라 배 아닌 데로 나가지 않게 막으라는 것이었소⁠. 바다로는 한 자루도 안 나가오⁠. 내가 보오⁠.⁠”

가르딘은 둑 위를 올려다보고 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길에서 물러나 둑 양옆으로 갈라섰다⁠. 수레 마흔 대가 지나갈 만큼의 길이 열렸다⁠. 선장이 붉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리쳤다⁠.

“⁠이 일은 몬테가 사절께서 들으실 겁니다⁠.⁠”

“⁠들으시라고 해요⁠.⁠” 이델라가 말했다⁠. “⁠사절께서 혼례복 값으로 주신 금화 하나가 가벼웠다는 것도 같이요⁠.⁠”

선장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이델라는 설명하지 않았다⁠.

*

수레들이 소금밭을 떠나기 전에 가르딘이 이델라의 말 곁으로 왔다⁠. 가르딘은 털가죽 망토를 벗어 말안장 뒤에 묶고 있었다⁠. 빈 칼집 대신 소금 긁는 갈퀴 하나를 등에 메고 있었다⁠.

“⁠수레는 내가 호위하겠소⁠. 병사 서른을 데리고⁠.⁠”

“⁠초소는요⁠?⁠”

“⁠초소엔 아낙들이 있소⁠. 아낙들이 병사보다 무섭소⁠.⁠” 가르딘이 말했다⁠. “⁠투르발에서 금화가 나오면 금화는 내 눈앞에서 상자에 들어가고⁠, 상자는 왕도까지 내 병사들 손에 들려 가오⁠. 왕도에 닿으면 밀린 봉급부터 나가오⁠. 감독관이 약속하시오⁠.⁠”

“⁠약속해요⁠.⁠”

“⁠여섯 번째도 그렇게 말했소⁠.⁠”

“⁠여섯 번째는 수레를 같이 끌자고 안 했잖아요⁠.⁠”

가르딘의 눈가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이델라도 알았다⁠. 웃은 것이었다⁠. 가르딘은 말 등에 올라 수레 행렬 맨 앞으로 갔다⁠.

부두에서는 빈 페넬라 배가 판자를 거두고 있었다⁠. 선장이 갑판에서 무언가를 소리쳤지만 바람에 흩어져 들리지 않았다⁠. 이델라는 말을 몰아 수레 행렬 뒤를 따랐다⁠. 소금 마흔 수레가 하얀 판을 등지고 북쪽 산맥으로 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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