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00자)

왕비가 입던 것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별궁 큰방에 드레스 스물한 벌을 걸었다⁠. 진홍⁠, 남색⁠, 잿빛 은색⁠, 겨자색⁠, 그리고 맨 끝의 흰 금빛 혼례복⁠. 열다섯 해 동안 이델라가 왕비로 입은 옷이었다⁠. 옷걸이가 모자라서 별궁의 커튼 봉을 떼어 걸었고⁠, 큰방 창은 맨유리로 남아 겨울 햇빛이 비단 위로 곧장 쏟아졌다⁠.

소식은 브리다가 돌렸다⁠. 브리다가 빨래터에서 한 마디를 하면⁠, 본궁 하녀가 부엌에서 한 마디를 하고⁠, 부엌 하녀가 장 보러 나가 귀족 집 하녀에게 한 마디를 했다⁠. 사흘 뒤 왕도의 귀족 집 마님들은 전부 같은 말을 알고 있었다⁠. 전 왕비가 입던 드레스를 별궁에서 판다⁠. 진짜를⁠.

봄 첫날 혼례에 갈 옷이 필요한 집이 왕도에 마흔이 넘었다⁠. 왕도 시장에도 페넬라에서 들어온 드레스가 있었지만⁠, 마님들 사이에서 그것은 ‘⁠시장 것⁠’이었다⁠. 전 왕비가 대관식 이듬해 성당 미사에 입었던 남색 드레스는 ‘⁠시장 것⁠’이 아니었다⁠.

“⁠밀지 마세요⁠, 한 분씩 대 보세요⁠.⁠” 브리다가 큰방 문에서 팔을 벌렸다⁠. “⁠백작 마님⁠, 그건 허리를 두 뼘 넓혀야 들어가요⁠. 이건 마마가 스무 살 때 입던 거라고요⁠.⁠”

“⁠내가 스무 살 때는 이보다 가늘었어⁠.⁠”

“⁠지금 마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백작 부인이 남색 드레스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남작 부인 둘이 겨자색 드레스의 소매를 하나씩 쥐고 서로 노려보았다⁠. 이델라는 창가 탁자에 작은 저울을 놓고 앉아 금화를 받았다⁠. 금화가 올 때마다 하나씩 손끝에 올려 테두리를 쓸고 저울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에서 무게가 맞으면 저울 바늘도 맞았다⁠.

“⁠마마⁠, 이 진홍색은 얼마예요⁠?⁠”

“⁠금화 열넷이요⁠.⁠”

“⁠시장에선 페넬라 비단 드레스가 다섯이던데요⁠.⁠”

“⁠시장 것은 다섯이죠⁠.⁠”

남작 부인이 입술을 깨물다 금화 열넷을 세어 내놓았다⁠. 이델라는 금화를 하나씩 손끝으로 쓸고 저울에 올렸다⁠. 열넷이 다 맞았다⁠.

*

오후에 하르벤이 왔다⁠. 벨라크 상단의 마차가 언덕길을 올라오는 소리만 듣고도 이델라는 오빠인 줄 알았다⁠. 하르벤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큰방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왕비 마마⁠, 아버지가 지은 혼수를 팔아⁠?⁠”

“⁠아버지는 팔라고 지어 주셨어⁠. 상단 집 딸 혼수는 급할 때 팔라고 비단으로 해 준다고 하셨잖아⁠.⁠”

“⁠그 말은 내가 들었는데⁠.⁠”

“⁠오빠는 엿들었고 나는 들었어⁠.⁠”

하르벤은 투덜거리면서도 금세 소매를 걷었다⁠. 마흔둘의 상단주는 동생보다 손이 빨랐다⁠. 겨자색 드레스를 두고 다투는 남작 부인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한 사람에게는 겨자색을⁠, 다른 사람에게는 비슷한 금빛 숄을 얹어 금화 넷을 더 받아 냈다⁠. 받아 낸 금화를 저울로 가져오며 하르벤이 작게 말했다⁠.

“⁠지참금 돌려받았냐고 편지 보냈잖아⁠. 답장은 왜 안 했어⁠?⁠”

“⁠지금 돌려받는 중이야⁠.⁠”

“⁠네 손으로⁠?⁠”

“⁠칙서가 그러라던데⁠.⁠”

하르벤이 말문이 막혀 금화만 내려놓았다⁠. 이델라는 오빠가 내려놓은 금화를 손끝에 올렸다⁠. 맞았다⁠.

*

해가 기울 무렵 대문에서 쇠붙이 소리가 났다⁠. 근위병 여섯이 큰방으로 들어왔고⁠, 맨 뒤로 카스텐이 화로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마님들이 일제히 드레스를 끌어안았다⁠.

“⁠이 방의 물건은 왕실 물건이오⁠. 판 것은 거두고⁠, 받은 금화는 돌려주시오⁠.⁠”

젊은 근위병이 남색 드레스를 쥔 백작 부인 앞에서 손을 뻗었다가⁠, 백작 부인의 눈빛에 손을 거두었다⁠. 이델라는 저울 앞에서 일어났다⁠.

“⁠재상⁠, 큰방의 드레스는 창고에서 나온 거 아니에요⁠. 제 옷궤에서 나왔어요⁠.⁠”

“⁠왕비로 입은 옷이오⁠. 왕비의 옷은 왕실 살림에서 나오오⁠.⁠”

“⁠그럼 보세요⁠.⁠”

이델라는 진홍색 드레스 하나를 커튼 봉에서 내려 카스텐 앞에 끝단을 펼쳤다⁠. 끝단 안쪽⁠, 손가락 한 마디 너비의 가장자리에 붉은 실 한 올이 날실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벨라크 상단 베틀에서 짠 비단에는 이 실이 들어가요⁠. 왕실 살림으로 산 비단에는 없고요⁠. 이 방에 있는 드레스 스물한 벌이 전부 이 실이에요⁠. 열다섯 해 전에 아버지가 배로 실어 보낸 거예요⁠. 지참금이요⁠. 지참금은 이혼하면 신부에게 돌아가고요⁠. 칙서에 쓰여 있었어요⁠.⁠”

“⁠칙서는 어디 있소⁠?⁠”

“⁠불쏘시개로 썼어요⁠.⁠”

카스텐의 눈썹이 한 번 올라갔다⁠. 카스텐은 화로에서 손을 떼고 진홍색 끝단을 제 손끝으로 쓸었다⁠. 찬 손끝이 붉은 실 위에서 멈췄다⁠. 오래 멈췄다⁠.

“⁠금고지기에게 물으면 왕실 살림으로 들인 비단 목록이 나오오⁠. 거기 이 드레스가 없으면 부인 것이오⁠.⁠”

“⁠호벤 영감은 묻는 말을 잘 못 들어요⁠.⁠”

“⁠나한테는 잘 들리오⁠.⁠” 카스텐은 근위병들에게 손짓했다⁠. “⁠물러서라⁠. 다만 오늘 받은 금화는 별궁을 나가기 전에 근위대가 세어 보고⁠, 그대로 금고로 가는지 내가 보겠소⁠.⁠”

“⁠세어 주시면 고맙죠⁠. 손이 모자랐어요⁠.⁠”

카스텐은 웃지 않았다⁠. 대신 큰방 문간에 화로를 두고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재상이 지키는 가운데 마님들의 흥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상이 보는 앞에서 깎을 수 있는 마님은 없었다⁠. 이날 오후 드레스 값은 한 닢도 내려가지 않았다⁠.

*

마지막 손님은 해가 진 뒤에 왔다⁠. 마차에서 내린 여자는 쉰이 넘어 보였고⁠, 은회색 털망토 안에 페넬라식으로 목이 높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장갑을 벗는 손가락 마디마다 가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문간의 카스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스텐이 누구 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델라는 처음 보았다⁠.

“⁠몬테가 은행 아르셀 사절⁠, 시빌라 몬테가입니다⁠. 전 왕비 마마⁠.⁠”

“⁠이델라라고 부르세요⁠.⁠”

“⁠직함이 편합니다⁠. 직함은 바뀌어도 사람보다 오래 남거든요⁠.⁠” 시빌라는 큰방을 한 바퀴 돌고 마지막 커튼 봉 앞에 멈췄다⁠. 흰 금빛 혼례복이 커튼 봉 끝에서 늘어져 있었다⁠. 열다섯 해 전 성당 계단을 올라갈 때 이델라가 입었던 옷이었다⁠. “⁠이건 얼마입니까⁠?⁠”

“⁠안 팔아요⁠.⁠”

“⁠걸어 두셨잖아요⁠.⁠”

이델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혼례복을 걸어 둔 것은 이델라였다⁠. 옷궤 맨 밑바닥에 접혀 있던 것을 꺼낸 것도⁠, 커튼 봉 맨 끝에 건 것도 이델라였다⁠. 남겨 둘지 팔지를 마지막까지 정하지 못해서⁠, 정하지 못한 채로 걸었다⁠.

“⁠금화 마흔⁠.⁠” 시빌라가 말했다⁠. “⁠이 방의 다른 드레스를 다 합친 것만큼 드리지요⁠.⁠”

방 안의 마님들이 숨을 들이켰다⁠. 하르벤이 이델라의 팔꿈치를 꾹 눌렀다⁠. 이델라는 혼례복의 소매를 손끝으로 쓸었다⁠. 열다섯 해 전 성당 계단의 바람이 소매 끝에서 다시 불어오지는 않았다⁠. 그냥 오래된 비단이었다⁠. 올이 조금 성겨졌고⁠, 소매 끝이 누렇게 바랬다⁠.

“⁠왜 사세요⁠?⁠”

“⁠혼례복은 혼례에 쓰여야지요⁠. 봄 첫날⁠, 새 왕비께 선물할까 합니다⁠.⁠”

시빌라의 서기가 금화 자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델라는 금화를 하나씩 손끝에 올렸다⁠. 서른여덟 닢은 맞았다⁠. 서른아홉 번째 닢이 손끝에 닿았을 때⁠, 손끝이 아주 조금 먼저 가벼움을 알았다⁠. 테두리의 톱니도 다른 닢보다 미세하게 얕았다⁠. 저울 바늘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이델라는 시빌라를 올려다보았다⁠. 시빌라는 장갑을 다시 끼고 있었다⁠. 이델라는 서른아홉 번째 닢을 다른 금화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시빌라의 마차가 떠난 뒤⁠, 하르벤은 부엌 화덕 앞에 다리를 뻗고 앉아 브리다가 내온 보리죽을 먹었다⁠. 상단주는 죽을 먹으면서도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셌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밥을 먹으면서 숟가락 수를 세고⁠, 아버지 배가 들어오면 돛 수를 셌다⁠.

“⁠몬테가 사람이 값을 더 얹을 때는 뭘 사는지 봐야 돼⁠.⁠” 하르벤이 숟가락으로 화덕을 가리켰다⁠. “⁠저 여자가 산 건 옷이 아니야⁠.⁠”

“⁠알아⁠.⁠”

“⁠뭘 샀는데⁠?⁠”

“⁠내가 옷을 걸어 두고 망설이는 걸 봤어⁠. 그걸 샀어⁠.⁠”

하르벤은 숟가락을 멈추고 동생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죽을 마저 먹었다⁠. 이델라는 오빠가 몬테가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숟가락을 한 번씩 놓친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늘 저녁에만 두 번이었다⁠.

“⁠오빠⁠, 상단은 괜찮아⁠?⁠”

“⁠괜찮지⁠. 왜⁠?⁠”

“⁠숟가락⁠.⁠”

하르벤은 숟가락을 바닥에서 주워 앞치마에 닦았다⁠. 브리다가 자기 앞치마라고 소리쳤다⁠. 브리다는 앞치마를 빼앗아 가면서 새 소식을 하나 내려놓았다⁠. 성문 앞의 남부 사령관이 이제 수레 밑에서 잔다고 했다⁠. 눈이 와서 수레 위에는 못 자고⁠, 수레를 두고 여관에 가면 수레를 못 지킨다는 이유였다⁠. 빨래터에서는 사령관이 수레와 혼인할 거라는 말까지 돌았다⁠.

“⁠수레가 사령관보다 낫지⁠.⁠” 하르벤이 말했다⁠. “⁠수레는 짐이라도 싣잖아⁠.⁠”

이델라는 웃지 않았다⁠. 손끝에 아직 서른아홉 번째 금화의 가벼움이 남아 있었다⁠.

*

새해 전날 저녁⁠, 금화 한 상자가 본궁 지하로 내려갔다⁠. 근위병 둘이 상자를 들고⁠, 카스텐이 화로를 앞세우고⁠, 오스벨 왕이 뒤따랐다⁠. 오스벨의 수염은 반쯤 검고 반쯤 희었다⁠. 재상 말대로 물감을 반만 쓴 결과였다⁠. 브리다는 빨래터에서 이를 두고 ‘⁠폐하의 수염에 겨울과 봄이 같이 왔다⁠’고 했다고 했다⁠.

쇠문 앞에서 호벤 영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가 돌방 안에 놓이자 오스벨이 뚜껑을 열어 보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상자가 맞소⁠. 이델라⁠, 약속은 약속이오⁠.⁠”

오스벨이 카스텐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스텐이 품에서 이빨 긴 열쇠를 꺼내 왕의 손에 올렸고⁠, 왕이 그것을 이델라의 손에 올렸다⁠. 손때로 둥글어진 열쇠가 다시 이델라의 손바닥에 왔다⁠. 이델라는 열쇠를 꾸러미에 끼우며⁠, 간택 공고가 끼워져 있던 자리를 비워 냈다⁠.

“⁠오늘부터 왕실 금고 감독관이오⁠.⁠” 오스벨은 감격한 얼굴로 말하고 바로 덧붙였다⁠. “⁠혼례는 봄 첫날이고⁠.⁠”

“⁠금고는 드리지요⁠.⁠” 카스텐이 말했다⁠. “⁠혼례는 내 일이오⁠.⁠”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푸른 조끼의 페넬라 서기가 바퀴 달린 판자를 끌고 왔다⁠. 서기는 오스벨에게 고개를 숙이고⁠, 카스텐에게 고개를 숙이고⁠, 이델라에게는 직함으로 인사했다⁠.

“⁠감독관님⁠. 새해 이자 한 상자를 받으러 왔습니다⁠. 재상 각하께서 새해 전날 저녁에 금고에서 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델라는 카스텐을 보았다⁠. 카스텐은 화로 위에 손을 펴고 있었다⁠.

“⁠가을에 그렇게 약조했소⁠. 새해 이자는 새해 전날에 내기로⁠. 감독관이 들어오기 전 약조요⁠.⁠”

“⁠금고에 남은 열두 상자는요⁠?⁠”

“⁠열두 상자는 봉인이 찍혀 있소⁠. 봉인 상자에서 이자를 낼 수는 없소⁠. 봉인이 없는 상자는 하나뿐이오⁠.⁠”

호벤 영감이 갑자기 귀를 감싸 쥐었다⁠. 서기가 이델라가 들여온 상자를 판자 위로 굴려 올렸다⁠. 상자는 별궁 큰방에 걸렸던 드레스 스물한 벌이었고⁠, 하르벤이 받아 낸 금화 넷이었고⁠, 시빌라의 마흔 닢이었다⁠. 마흔 닢 가운데 하나는 가벼웠다⁠.

“⁠제 상자예요⁠.⁠”

“⁠금고에 들어간 금화는 금고의 것이오⁠, 감독관⁠.⁠”

판자의 바퀴가 돌계단 턱마다 덜컹거렸다⁠. 서기가 판자를 한 칸씩 끌어 올렸다⁠. 오스벨이 무언가 말하려다 수염을 만졌다⁠. 손끝이 반쯤 검어졌다⁠.

이델라는 쇠문 앞에 서서 상자가 계단 위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델라의 손바닥 안에서 열쇠가 따뜻해져 있었다⁠.

“⁠재상⁠, 다음 상자는 들어오는 길보다 나가는 길을 먼저 막을게요⁠.⁠”

“⁠막아 보시오⁠.⁠” 카스텐은 화로를 들라고 서기에게 손짓했다⁠. “⁠나가는 길은 바다에 있소⁠.⁠”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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