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40자)

도금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브리다는 머리를 땋으며 세 번 잡아당겼다⁠. 한 번은 단단하게 하려고⁠, 두 번째는 어제 빨래터에서 들은 말을 전하려고⁠, 세 번째는 그냥 화가 나서였다⁠.

“⁠아파⁠.⁠”

“⁠폐하 앞에 가신다면서요⁠. 머리라도 단단해야죠⁠.⁠”

땋은 머리가 어깨 앞으로 넘어왔다⁠. 이델라는 군청색 드레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찼다⁠. 이빨 긴 열쇠가 빠져서 꾸러미가 가벼웠다⁠. 빈자리에는 어제 떼어 낸 간택 공고가 접혀 끼워져 있었다⁠.

본궁 위층 거울방 앞에서 근위병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손뼉 소리가 났다⁠.

“⁠하나⁠, 둘⁠. 폐하⁠, 왼발⁠. 하나⁠, 둘⁠. 폐하⁠, 그건 오른발입니다⁠.⁠”

문을 열자 오스벨 왕이 한쪽 발을 든 채 굳었다⁠. 마흔세 살의 왕은 페넬라에서 유행한다는 줄무늬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지가 다리에 붙어서 무릎을 굽힐 때마다 천이 비명을 질렀다⁠. 수염은 새카맸다⁠. 검은 정도가 아니라 아궁이 그을음 같은 빛이었다⁠. 곁에서 손뼉을 치던 페넬라 춤 선생은 발등을 한쪽만 감싸고 있었다⁠.

“⁠이⁠, 이델라⁠.⁠”

“⁠폐하⁠.⁠”

“⁠이혼하고 열흘이오⁠. 열흘 만에 처소에 쳐들어오는 법이 어디 있소⁠?⁠”

“⁠쳐들어온 거 아니에요⁠. 걸어 들어왔어요⁠.⁠” 이델라는 춤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발은 괜찮으세요⁠?⁠”

“⁠두 번 밟히셨습니다⁠.⁠” 춤 선생이 대답했다⁠. “⁠오늘은 아직 한 번입니다⁠.⁠”

오스벨이 수염을 만졌다⁠. 손가락 끝에 검은 물이 묻어 나왔다⁠. 오스벨은 손가락을 바지에 문질렀다가⁠, 줄무늬 바지에 검은 줄이 하나 더 생기자 얼른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시동들 말이 이 바지를 입으면 열 살은 젊어 보인다던데⁠.⁠”

“⁠시동들은 폐하께 열 살이 몇 번 들어 있는지 몰라서 그래요⁠.⁠”

춤 선생이 기침으로 웃음을 덮었다⁠. 오스벨이 춤 선생을 내보내려다⁠, 혼자 남으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도로 손을 내렸다⁠.

“⁠무슨 일이오⁠?⁠”

“⁠왕실 금고 감독관 자리를 주세요⁠.⁠”

*

카스텐은 이델라가 첫 문장을 마치기 전에 도착했다⁠. 빨래터 소식이 부엌을 거쳐 재상 집무실까지 가는 데는 한 시간이 채 안 됐다⁠. 서기가 화로를 거울방 한가운데 내려놓았고⁠, 카스텐은 늘 그렇듯 화로 위에 손을 폈다⁠.

“⁠감독관이라는 자리는 없소⁠.⁠”

“⁠만들면 있죠⁠. 금고 문을 열고 닫고⁠,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을 제 손으로 달아 보는 사람이요⁠. 열쇠 하나만 주시면 돼요⁠.⁠”

“⁠어제 돌려받은 열쇠 말이오⁠?⁠”

“⁠그거요⁠.⁠”

오스벨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열다섯 해 동안 왕은 이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었다⁠. 재상이 말하면 재상 말이 옳았고⁠, 왕비가 말하면 왕비 말이 옳았다⁠. 오스벨은 마지막에 말한 사람의 말로 마음이 기우는 왕이었다⁠.

“⁠재상⁠, 금고에 무슨 일이 있소⁠?⁠”

“⁠아무 일 없소⁠. 봄 첫날 혼례를 올리면 귀족마다 예물이 들어오오⁠. 그걸로 봉급을 내보내오⁠.⁠”

“⁠봉급은 나가요⁠.⁠” 이델라가 말을 받았다⁠. “⁠비단은 페넬라 외상이고⁠, 잔치도 외상이고⁠, 춤 선생도 외상이에요⁠.⁠”

모두 춤 선생을 보았다⁠. 춤 선생이 발등을 감싼 채 눈을 피했다⁠.

“⁠선생님⁠, 수업료는 언제 받으세요⁠?⁠”

“⁠봄 첫날에⁠.⁠” 춤 선생이 작게 말했다⁠. “⁠몬테가 은행에서요⁠.⁠”

오스벨이 수염을 쥐었다가 다시 검은 손가락을 등 뒤로 감췄다⁠. 카스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귀족의 예물은 외상이 아니오⁠. 혼례 날 아침 성당 계단에 금화 자루가 쌓이오⁠. 마마의 혼례 때도 그랬소⁠.⁠”

“⁠제 혼례 때는 왕관을 새로 맞추지 않았죠⁠.⁠”

“⁠왕비의 관은 새로 맞추는 것이 법도요⁠.⁠”

“⁠왕관 말고 관이요⁠? 그럼 진짜 왕관은 혼례 날 뭐 해요⁠?⁠”

“⁠폐하 머리에 있소⁠.⁠”

이델라는 거울방 창가의 붉은 방석을 보았다⁠. 춤 연습에 방해가 된다고 벗어 놓은 왕관이 방석 위에 있었다⁠. 오스벨이 대관식 날 썼고⁠, 열다섯 해 전 이델라의 머리에도 한 번 얹혔던 왕관이었다⁠. 아르셀 법도에서 왕비는 이 왕관을 머리에 한 번 얹어야 왕비가 되었다⁠.

“⁠폐하⁠, 잠깐 만져 봐도 돼요⁠?⁠”

“⁠이혼한 사람이 왕관을 만지는 법이 어디 있소⁠?⁠”

“⁠이혼하고 왕관 방석은 처음 봐서요⁠.⁠”

오스벨이 허락하기도 전에 이델라는 왕관을 들었다⁠. 무거웠다⁠. 무거운데 무게가 이상한 데 실려 있었다⁠. 테두리 안쪽을 손끝으로 쓸었다⁠. 진짜 금은 손가락이 닿으면 금방 체온을 받아 미지근해지고⁠, 손톱으로 누르면 아주 조금 물러난다⁠. 손끝 아래의 테두리는 차가웠고⁠, 손톱을 밀어 넣어도 딱딱하게 버텼다⁠. 이델라는 손톱 끝으로 안쪽 이음매를 살짝 긁었다⁠. 금빛이 벗겨진 자리에 붉은 구리 빛이 실낱만큼 드러났다⁠.

“⁠폐하⁠, 이건 도금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춤 선생이 발등을 감쌌던 손을 내렸다⁠. 오스벨이 왕관을 받아 들고 긁힌 자리에 눈을 바짝 댔다⁠.

“⁠도금이라니⁠. 내가 두 해 동안 이걸 쓰고 사냥도 가고 손님도 맞고⁠.⁠”

“⁠두 해요⁠?⁠” 이델라가 카스텐을 보았다⁠. “⁠두 해 전 봄이네요⁠. 금고 상자에 몬테가 봉인이 처음 찍힌 때⁠.⁠”

카스텐은 화로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진품은 강 나루 페넬라 상관에 있소⁠. 몬테가 은행의 금고에⁠. 담보로 맡겼소⁠. 왕관을 맡기지 않았으면 그해 봄에 봉급이 끊겼소⁠.⁠”

“⁠폐하께도 말씀 안 드리고요⁠?⁠”

“⁠폐하께 말씀드렸으면 폐하는 잠을 못 주무셨을 것이오⁠. 폐하는 잠을 주무셔야 하오⁠.⁠”

오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재상 말이 또 옳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

“⁠그럼 이렇게 합시다⁠.⁠”

오스벨이 왕관을 방석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결정을 내릴 때면 오스벨은 늘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줄무늬 바지 때문에 걸음이 종종걸음이 되었다⁠.

“⁠이델라는 금고가 걱정이고⁠, 재상은 혼례가 걱정이오⁠. 둘 다 옳소⁠. 내가 보기엔 둘 다 옳소⁠.⁠” 오스벨은 창가에서 멈췄다⁠. “⁠새해 전날까지 별궁 하나로 금화 한 상자를 만들어 금고에 넣으면⁠, 감독관 자리를 주겠소⁠. 못 넣으면 이델라는 별궁에서 혼례를 구경하고⁠.⁠”

“⁠금화 한 상자요⁠?⁠”

“⁠너무 많소⁠?⁠”

“⁠아니요⁠. 정확해서요⁠.⁠” 이델라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울방 창에서는 본궁 앞마당 너머 성문이 보였다⁠. 성문 곁에 빈 수레 한 대가 있었고⁠,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수레 끌채에 걸터앉아 빵을 뜯고 있었다⁠. 지나가던 짐꾼에게 무언가 묻는지 사내가 빵을 들어 보였다⁠. 짐꾼은 고개를 젓고 지나갔다⁠.

카스텐이 처음으로 화로에서 손을 뗐다⁠.

“⁠폐하⁠, 조건을 하나 붙이겠소⁠. 별궁에서 무엇을 하든 혼례는 그대로 가오⁠. 간택도⁠, 날짜도⁠.⁠”

“⁠좋아요⁠.⁠” 이델라가 먼저 대답했다⁠. “⁠혼례 이야기는 감독관이 된 다음에 다시 할게요⁠.⁠”

“⁠별궁에는 팔 것이 없소⁠. 별궁 창고의 물건은 왕실 물건이오⁠.⁠”

“⁠알아요⁠.⁠”

“⁠아시면 되었소⁠.⁠” 카스텐은 오스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폐하⁠, 하나만 기억해 두시오⁠. 벨라크 상단은 소금 뱃길을 두고 페넬라와 다투는 집이오⁠. 부인께서 금고를 쥐면 가장 먼저 웃는 사람은 부인의 오빠일 것이오⁠.⁠”

“⁠오빠는 제가 웃어도 안 웃어요⁠.⁠” 이델라가 말했다⁠. “⁠지참금부터 물어요⁠.⁠”

오스벨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카스텐의 얼굴을 보고 기침으로 바꿨다⁠.

카스텐이 서기에게 눈짓했다⁠. 서기가 화로를 들었다⁠. 나가던 카스텐이 문간에서 돌아보았다⁠.

“⁠폐하⁠, 수염은 다음부터 물감을 반만 쓰시오⁠. 회의 때 서기들이 웃음을 참느라 숨을 못 쉬오⁠.⁠”

오스벨이 수염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

성문 곁을 지날 때 빈 수레의 사내가 빵을 다 먹고 손바닥을 털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사내는 키가 문설주만 했고⁠, 털가죽 망토 아래 남부 수비대의 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칼집은 비어 있었다⁠. 사내가 이델라 앞을 막아서지는 않고⁠, 다만 길가에서 물었다⁠.

“⁠부인⁠, 오늘 왕도 빵값이 얼마입니까⁠?⁠”

근위병이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이델라가 손짓으로 막았다⁠.

“⁠보리빵 한 덩이에 동전 셋이요⁠. 지난달엔 둘이었고요⁠. 밀빵은 다섯이에요⁠.⁠”

사내가 처음으로 눈을 들어 이델라를 보았다⁠. 눈가가 먼저 움직였고⁠, 입은 그대로였다⁠.

“⁠열흘 동안 물어서 처음 맞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사내가 수레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 수레가 봄에 금화를 싣고 내려가야 남부 병사 사백 명이 빵을 삽니다⁠. 한 사람이 하루 두 덩이⁠. 동전 셋이면 봄까지 못 버팁니다⁠.⁠”

“⁠누구세요⁠?⁠”

“⁠남부 수비대 사령관 가르딘입니다⁠. 봉급 수레를 지키고 있습니다⁠. 비어 있어도 지킵니다⁠.⁠”

“⁠칼은요⁠?⁠”

“⁠지난가을에 팔았습니다⁠. 빵 사백 덩이였습니다⁠.⁠”

근위병이 이델라의 소매 곁에서 속삭였다⁠. 성문 앞의 미친 사령관이라고⁠. 이델라는 대답 대신 가르딘의 빈 칼집을 한 번 보고⁠, 언덕길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가르딘이 다음 짐꾼에게 같은 것을 묻는 소리가 들렸다⁠.

*

별궁에 돌아왔을 때 근위병 넷이 창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창고 문 셋의 이음매마다 붉은 밀랍이 덮여 있었고⁠, 밀랍에는 재상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브리다가 창고 문 앞에서 근위병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거기 제 절인 무 단지가 있다고요⁠. 절인 무가 왕실 물건이에요⁠?⁠”

“⁠창고 안의 물건은 전부 왕실 물건입니다⁠.⁠”

“⁠그 무는 제가 장에서 사 온 거예요⁠. 제 돈으로요⁠. 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봉인을 해요⁠?⁠”

근위병 중에 어제 차를 마시던 젊은이가 있었다⁠. 젊은 근위병은 이델라를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재상 각하 명이십니다⁠. 별궁 물건을 하나라도 내다 팔면 도둑으로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근위병은 목소리를 낮췄다⁠. “⁠무 단지는 제가 나중에 몰래 꺼내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도둑이야⁠.⁠”

“⁠아⁠.⁠”

이델라는 봉인된 창고 문 앞으로 갔다⁠. 은 숟가락 열두 벌과 은촛대와 겨울 양털 이불과 바닷길 지도 묶음이 문 안에 있었다⁠. 어제 저울에 올렸던 숟가락들이었다⁠. 손끝으로 밀랍을 눌러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방금 찍은 것이었다⁠.

브리다가 다가와 소매를 잡았다⁠.

“⁠마마⁠, 이제 어떡해요⁠? 별궁에서 금화 한 상자를 어디서 만들어요⁠? 팔 게 하나도 없잖아요⁠.⁠”

“⁠하나도 없지는 않아⁠.⁠”

이델라는 창고에서 돌아서서 위층 침실로 올라갔다⁠. 침실에는 창고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친정에서 혼수로 가져온 참나무 옷궤였다⁠. 열다섯 해 전 벨라크 상단의 배가 실어 온 옷궤에는 왕비가 되고 나서 입은 드레스들이 접혀 있었다⁠. 이델라는 뚜껑을 열고 맨 위의 진홍색 비단을 손끝으로 쓸었다⁠. 끝단 안쪽에 붉은 실 한 올이 섞여 짜여 있었다⁠. 벨라크 상단의 베틀에서 짠 비단에는 언제나 이 실이 들어갔다⁠.

혼인이 끝나면 지참금은 신부에게 돌아간다⁠. 이혼 칙서에도 지참금을 돌려준다는 줄이 있었다⁠. 이델라는 칙서를 불쏘시개로 썼지만⁠, 줄은 기억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젊은 근위병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마마⁠, 재상 각하께서 하나 더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별궁에서 팔려 나가는 물건은 무엇이든⁠, 대문을 나서기 전에 근위대가 열어 보겠답니다⁠.⁠”

이델라는 진홍색 드레스를 옷궤에서 꺼내 침대 위에 펼쳤다⁠. 겨울 햇빛이 비단 위에서 미끄러졌다⁠.

“⁠열어 보라고 해⁠. 열어 보고⁠, 사러 온 사람한테 길도 비켜 주라고 해⁠.⁠”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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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로하2026.11.01· 2화

    머리를 세 번 잡아당기는 이유가 하나씩 다른 브리다, 첫 등장부터 최애예요.

    • 진새온작가2026.11.01

      브리다는 화를 머리 땋는 손으로 내요. 이델라도 그걸 알아서 아프다고만 합니다.

도금 ·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