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94자)

열쇠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은 숟가락 열두 벌이 저울 접시에 올라가자 바늘이 오른쪽으로 반 눈금 기울었다⁠. 이델라는 숟가락 하나를 집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손끝으로 무게를 가늠했다⁠. 혼수로 가져온 숟가락이었다⁠. 열다섯 해 전 친정 벨라크 상단의 은장이가 두들겨 만든 것이라 손잡이 끝에 작은 돛 무늬가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어깨 앞으로 늘였는데⁠, 땋은 끝이 접시에 닿을까 봐 등 뒤로 넘겼다⁠. 군청색 모직 드레스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지난밤 바닷길 지도에 뱃길을 긋다 엎지른 잉크가 아직 검지에 남아 있었다⁠.

“⁠마마⁠.⁠”

창고 문틈으로 시녀 브리다가 얼굴을 디밀었다⁠. 별궁까지 따라온 시녀는 브리다 하나였다⁠. 쉰 살이 넘었고⁠, 궁 안 소식이라면 별궁 빨래터에서 본궁 부엌까지 한 시간이면 돌렸다⁠.

“⁠이제 마마 아니야⁠.⁠”

“⁠그럼 뭐라고 불러요⁠? 전 마마⁠?⁠”

“⁠이델라⁠.⁠”

“⁠입에 안 붙어요⁠. 그냥 마마 할게요⁠. 근위병이 또 올라와요⁠. 오늘 세 번째예요⁠.⁠”

이델라는 숟가락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이혼 칙서가 별궁에 온 지 열흘이었다⁠. 「⁠왕비 이델라 벨라크는 열다섯 해 동안 후사를 잇지 못하였으므로⁠」로 시작하는 칙서였다⁠. 이델라는 칙서를 두 번 읽고 접어 화로 옆에 두었고⁠, 사흘째 되는 날 불쏘시개가 모자라 썼다⁠. 칙서에는 별궁에 살라는 말과 왕실 살림을 맡던 열쇠를 돌려 달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현관에는 볼이 언 젊은 근위병이 서 있었다⁠. 처음 왔을 때 이델라는 차를 내주고 장작 한 짐을 부엌까지 날라 달라고 했다⁠. 두 번째에는 차를 내주고 우물 도르래에 기름을 쳐 달라고 했다⁠. 근위병은 이번에도 투구를 겨드랑이에 끼고 침을 삼켰다⁠.

“⁠열쇠를⁠, 재상 각하께서⁠, 오늘은 꼭⁠.⁠”

“⁠차부터 마시고⁠.⁠”

“⁠차를 마시면 일을 시키시잖습니까⁠?⁠”

“⁠눈치가 늘었네⁠. 오늘은 일 안 시켜⁠. 본궁까지 같이 내려가⁠.⁠”

근위병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델라는 허리에 찬 놋쇠 열쇠 꾸러미를 손바닥으로 눌러 소리를 죽였다⁠. 별궁 창고 열쇠 셋 사이에 이빨이 유난히 긴 열쇠가 하나 끼어 있었다⁠. 왕실 금고의 열쇠였다⁠. 돌려주기 전에 꼭 봐야 할 것이 있었다⁠.

*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근위병은 이델라보다 세 걸음 뒤에서 걸었다⁠. 앞서 걸으면 호송이 되고 나란히 걸으면 모시는 꼴이 되어서⁠, 어느 것도 아닌 거리를 고른 것이었다⁠. 본궁 뒷마당을 지날 때 빨래를 널던 하녀들이 일제히 손을 멈췄다⁠. 이혼한 왕비가 근위병을 달고 본궁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이델라가 지하 계단에 닿기도 전에 부엌에 가 있을 것이었다⁠. 이델라는 하녀들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하녀 둘이 얼떨결에 무릎을 굽혔다가⁠, 굽혀야 하는지 몰라 반쯤에서 멈췄다⁠.

본궁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스물아홉 칸이었다⁠. 계단 끝 쇠문 앞에서 금고지기 호벤 영감이 등잔을 들고 졸고 있었다⁠. 영감은 서른 해째 금고를 지켰고⁠, 귀가 어두웠다⁠. 정확히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오면 귀가 어두워졌다⁠.

“⁠영감⁠, 문 좀 열어 줘요⁠.⁠”

“⁠예⁠?⁠”

“⁠문⁠.⁠”

“⁠재상 각하께서 마마는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방금 귀 어둡다면서요⁠.⁠”

호벤 영감이 등잔을 내려놓고 한참 이델라를 올려다보다가⁠, 품에서 제 열쇠를 꺼냈다⁠. 쇠문에는 열쇠 구멍이 둘이었다⁠. 금고지기의 열쇠와 왕실 살림을 맡은 왕비의 열쇠가 함께 돌아야 빗장이 빠졌다⁠. 열다섯 해 동안 계절마다 한 번씩⁠, 이델라는 영감과 나란히 서서 이 문을 열었다⁠. 근위병은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서서 어디까지 따라가야 하는지 몰라 투구만 만지작거렸다⁠.

빗장이 빠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문 안은 돌벽에서 배어 나온 냉기로 서늘했고⁠, 등잔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참나무 상자의 쇠테가 번들거렸다⁠. 이델라는 상자 사이를 걸으며 하나씩 손바닥을 얹었다⁠. 열둘이었다⁠. 첫눈 오기 전에 내려왔을 때도 열둘이었다⁠.

뚜껑 이음매마다 손톱만 한 붉은 밀랍이 덮여 있었다⁠. 밀랍 위에는 저울을 실은 배 한 척이 찍혀 있었다⁠. 이델라는 엄지 끝으로 무늬를 더듬었다⁠. 바다 건너 상업 도시국가 페넬라의 몬테가 은행 봉인이었다⁠. 상단 집 딸이라면 열 살에 아는 무늬였다⁠.

“⁠영감⁠, 이 봉인 언제부터 찍혔어요⁠?⁠”

“⁠예⁠?⁠”

“⁠봉인⁠.⁠”

“⁠두 해 전 봄부터요⁠. 하나씩⁠, 하나씩요⁠.⁠” 호벤 영감은 이번에는 바로 알아들었다⁠. “⁠재상 각하가 페넬라 사람을 데리고 내려와서 찍고 가셨어요⁠. 마마께는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고요⁠.⁠”

두 해 전 봄이라는 말에 이델라는 손을 멈췄다⁠. 봉인이 처음 찍히던 봄 어느 밤⁠, 오스벨이 잠결에 페넬라에서 금화를 좀 빌렸다고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이델라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묻지 않았다⁠.

이델라는 상자 하나의 뚜껑을 손톱 너비만큼 들어 올렸다⁠. 금화가 빽빽이 누워 있었다⁠. 맨 위의 한 닢을 집어 손끝에 올렸다⁠. 테두리의 톱니가 고르고⁠, 쥐는 순간 손바닥의 열을 받아 금방 따뜻해졌다⁠. 진짜였다⁠. 진짜인데 남의 봉인 아래 있었다⁠. 봉인이 찍힌 상자는 아르셀의 것이면서 아르셀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었다⁠.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몰려 내려왔다⁠. 짐꾼 넷이 둘씩 짝을 지어 길쭉한 꾸러미를 지고 왔다⁠. 맨 뒤에 페넬라 상관의 푸른 조끼를 입은 서기가 따라왔다⁠.

“⁠어디에 둘까요⁠? 결혼식 비단입니다⁠.⁠”

호벤 영감이 대답하기 전에 이델라가 꾸러미 하나의 끈을 풀었다⁠. 푸른 비단이 등잔 빛을 받아 물처럼 흘렀다⁠. 손끝으로 올을 쓸었다⁠. 날실이 가늘고 촘촘해서 손끝이 걸리지 않고 미끄러졌다⁠. 페넬라 남쪽 섬에서 짜는 비단이었다⁠. 한 필이면 소금 한 수레 값이었다⁠.

“⁠값은 치렀어요⁠?⁠”

서기가 웃었다⁠. “⁠봄 첫날에 받기로 했습니다⁠.⁠”

꾸러미 끈에는 작은 나무 패가 달려 있었다⁠. 「⁠대금은 봄 첫날⁠, 몬테가 은행⁠」 짐꾼들은 비단을 상자들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페넬라에서 빌린 금화로 이자를 내고⁠, 페넬라에서 외상으로 산 비단으로 잔치를 하려는 것이었다⁠.

*

“⁠열쇠를 쥐고 금고에 들어오는 일은 왕비의 일이었소⁠. 부인께서는 이제 왕비가 아니오⁠.⁠”

카스텐의 목소리가 계단에서 먼저 내려왔다⁠. 재상은 마른 몸에 검은 털옷을 두르고 있었고⁠, 서기 하나가 작은 화로를 들고 뒤를 따랐다⁠. 예순이 넘은 카스텐은 손이 늘 차서⁠, 겨울이면 어디를 가든 화로가 먼저 갔다⁠. 카스텐은 비단 꾸러미 곁에 화로를 내려놓게 하고 불 위에 두 손을 펴 들었다⁠.

“⁠재상⁠, 몬테가 봉인 열둘이에요⁠.⁠”

“⁠세셨으면 되었소⁠.⁠”

“⁠빚은 몇 상자예요⁠?⁠”

“⁠알아서 무엇 하시겠소⁠?⁠”

이델라는 손끝의 금화를 상자 안에 도로 넣었다⁠. 금화가 다른 금화 위로 떨어지며 맑게 울렸다⁠.

“⁠페넬라 배는 철마다 베냐 소금을 싣고 나가면서 금화 한 닢도 내려놓지 않아요⁠. 소금이 이자로 나가는 거죠⁠. 한 철 소금 배 다섯 척이면 금화 한 상자 값이에요⁠. 철마다 한 상자씩 이자를 받는 빚이면⁠, 이 방에 든 금화로는 어림도 없어요⁠. 틀렸으면 다시 세 볼게요⁠.⁠”

카스텐은 화로 위에서 손을 비비다가 멈췄다⁠. 호벤 영감이 갑자기 상자 쇠테의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근위병은 계단 중간에서 숨을 참았다⁠.

“⁠서른여섯이오⁠.⁠”

등잔 불꽃이 한 번 흔들렸다⁠. 이델라는 상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열둘⁠. 서른여섯⁠. 금고에 든 금화의 세 배를 아르셀이 바다 건너 은행에 빚지고 있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야 다음 말이 나왔다⁠.

“⁠그래서 결혼식이에요⁠?⁠”

“⁠그래서 결혼식이오⁠. 봄 첫날 새 왕비를 맞으면 귀족마다 예물을 들고 오오⁠. 딸을 간택에 넣고 싶은 집은 넣는 값을 따로 내고⁠. 그 금화로 봄 봉급을 내보내오⁠.⁠” 카스텐은 비단 꾸러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남부 수비대 사령관이 빈 봉급 수레를 끌고 성문 앞에서 열흘째 앉아 있소⁠. 사령관 말이⁠, 봉급이 또 끊기면 병사들을 붙잡을 수 없다고 하오⁠.⁠”

“⁠비단은 외상이고 잔치도 외상이에요⁠. 새 왕관도 페넬라에서 맞추겠죠⁠. 예물이 들어오기도 전에 빚이 먼저 늘어요⁠.⁠”

“⁠부인은 상단 집 딸이라 저울만 보시오⁠. 나는 서른 해 전 봉급이 끊긴 겨울을 보았소⁠. 굶은 병사들이 왕도 거리 셋을 태웠소⁠. 나는 그때 경비대장이었고⁠, 불을 끄지 못했소⁠.⁠” 카스텐의 목소리는 끝까지 높아지지 않았다⁠. “⁠열쇠를 주시오⁠.⁠”

이델라는 꾸러미에서 이빨 긴 열쇠를 빼냈다⁠. 열다섯 해 동안 손바닥에 닿아 손때로 둥글어진 열쇠였다⁠. 빼내는 데 손가락이 한 번 미끄러졌다⁠. 카스텐은 열쇠를 받아 화로 불빛에 비춰 보고 품에 넣었다⁠. 받는 손이 이델라의 손끝에 닿았고⁠, 정말로 얼음처럼 찼다⁠.

“⁠한 가지만 물어요⁠. 귀족들 예물이 결혼식에 든 비용보다 적으면요⁠?⁠”

“⁠적지 않소⁠.⁠”

“⁠세어 보셨어요⁠?⁠”

카스텐은 대답 대신 화로를 들라고 서기에게 손짓했다⁠. 계단을 올라가다 한 번 돌아보았다⁠.

“⁠별궁에서 구경하시오⁠. 봄 첫날 언덕에서 성당 지붕이 잘 보이오⁠.⁠”

*

별궁 대문에는 해가 지기 전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새 왕비 간택을 알림⁠. 혼기에 이른 귀족 집안의 딸은 새해 보름까지 이름을 올릴 것⁠. 혼례는 봄 첫날⁠」 붙인 자리가 하필 이혼한 왕비가 사는 집 대문이었다⁠.

“⁠재상 각하 짓이에요⁠.⁠” 브리다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씩씩거렸다⁠. “⁠빨래터에서 그러는데요⁠, 이 종이를 왕도 대문마다 붙였는데 여기만 풀을 두 번 발랐대요⁠.⁠”

“⁠빨래터는 풀 바른 횟수도 알아⁠?⁠”

“⁠빨래터는 다 알아요⁠. 폐하께서 수염을 검게 물들이셨대요⁠. 흰 털이 세 가닥 나서요⁠. 그리고 페넬라 춤 선생을 들이셨는데⁠, 첫날 선생 발을 두 번 밟으셨대요⁠.⁠” 브리다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남부 사령관이요⁠. 성문 앞에서 빈 수레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오늘 빵값이 얼마냐고 묻는대요⁠. 다들 미친 사람인 줄 알아요⁠.⁠”

이델라는 대문 앞에 서서 종이 귀퉁이를 손끝으로 만졌다⁠. 풀이 아직 덜 말라 손가락에 끈적하게 묻었다⁠. 잉크 자국 위에 풀이 덮였다⁠.

부엌 식탁에는 오빠 하르벤의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혼 소식이 벨라크 상단에 닿은 날 쓴 편지였다⁠. 첫 줄이 「⁠지참금은 돌려받았냐⁠?⁠」였고⁠, 두 번째 줄이 「⁠몸은 괜찮냐⁠?⁠」였다⁠. 순서가 하르벤다웠다⁠.

부엌 창으로 뒤뜰의 배나무가 보였다⁠. 잎을 다 떨군 가지에 눈이 얹혀 있었고⁠, 밑동 곁의 흰 돌 두 개도 눈에 덮여 둥근 언덕이 되어 있었다⁠. 이델라는 창에서 눈을 떼고 식탁의 지도를 끌어당겼다⁠. 아르셀의 해안선과 강줄기와 산맥이 있었고⁠, 베냐 해안에서 페넬라까지 바닷길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소금이 나가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그어져 있지 않았다⁠.

“⁠브리다⁠, 내일 아침에 머리 다시 땋아 줘⁠. 단단하게⁠.⁠”

“⁠어디 가세요⁠?⁠”

“⁠폐하께⁠.⁠”

“⁠이혼하고 열흘 만에요⁠? 빨래터가 뒤집어지겠네요⁠.⁠”

이델라는 다시 대문으로 나갔다⁠. 해가 강 너머로 넘어가며 나루의 페넬라 상관 지붕을 붉게 물들였다⁠. 이델라는 간택 공고를 손끝으로 천천히 떼어 냈다⁠. 종이는 풀 때문에 두 갈래로 찢어지며 떨어졌다⁠. 대문에는 네모난 풀 자국만 남았다⁠.

언덕 아래 길에서 근위병이 올라오고 있었다⁠. 열쇠는 이미 재상에게 갔는데도 근위병은 습관처럼 올라왔다⁠. 이델라는 찢어진 종이 두 장을 겹쳐 접었다⁠.

“⁠내일 폐하 처소까지 같이 가 줘⁠.⁠”

“⁠열쇠는 드렸잖습니까⁠? 또 무슨 일로 가십니까⁠?⁠”

“⁠금고를 달라고 하러⁠.⁠”

근위병의 입이 벌어졌다⁠. 이델라는 접은 종이를 허리띠의 열쇠 꾸러미 사이에 끼웠다⁠. 이빨 긴 열쇠가 빠진 자리였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열쇠 ·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