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97자)

가벼운 금화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금고의 쇠궤 위에 등잔을 올려놓고⁠, 이델라는 호벤 영감과 마주 앉아 상자를 셌다⁠. 봉인 없는 상자가 하나였다⁠. 투르발에서 첫 소금 값으로 받은 세 상자 가운데 진주와 봉급으로 나가고 남은 것이었다⁠. 곁에 작은 자루 하나가 있었다⁠. 칼데나 숄을 고개 너머로 먼저 보내 받아 온 금화였다⁠. 반 상자가 조금 못 됐다⁠.

“⁠남부 수비대 봄 봉급이 세 상자예요⁠.⁠” 이델라가 말했다⁠. “⁠여기 있는 게 한 상자 반이고요⁠.⁠”

“⁠나머지 한 상자 반은요⁠?⁠”

“⁠고개를 넘어오는 병사들 등에 있어요⁠.⁠”

호벤 영감이 손가락을 꼽다가 그만두었다⁠. 등잔 심지가 지지직 소리를 냈다⁠.

“⁠감독관님⁠, 제가 서른 해 동안 이 금고에 들어오는 걸 봤는데요⁠. 사람 등에 지고 들어오는 금화는 처음이에요⁠.⁠”

“⁠수레는 오빠가 거둬 갔어요⁠.⁠”

“⁠그럼 사람 등에 진 금화가 사흘 안에 고개를 넘어 이 방까지 와야 하네요⁠. 하나라도 늦으면요⁠?⁠”

“⁠감옥이요⁠. 이 방 옆 방에서 저쪽 지하 감옥으로⁠.⁠”

“⁠그 방은 제가 지키는 방이 아니라서 코 고는 소리가 안 들릴 거예요⁠.⁠” 영감이 말했다⁠. “⁠섭섭하네요⁠.⁠”

이델라는 봉인 없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상자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참나무가 차가웠다⁠.

*

나루의 큰 저울은 두 해 동안 페넬라 사람이 지켰다⁠. 사람 키의 두 배 되는 쇠기둥에 접시 둘이 매달려 있었고⁠, 아르셀 소금의 값은 늘 이 저울에서 정해졌다⁠. 춘분 사흘 전 아침⁠, 저울 둘레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짐꾼들⁠, 생선 장수들⁠, 강 건너 대장간 사람들⁠, 벨라크 상단의 수레꾼들⁠, 그리고 빨래터에서 소식을 듣고 내려온 하녀들⁠. 브리다가 맨 앞줄에서 무 단지를 안고 있었다⁠. 왜 단지를 들고 왔느냐고 하르벤이 묻자 사람 많은 데 두고 오면 누가 집어 간다고 했다⁠.

저울 곁에는 페넬라 상관의 푸른 조끼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푸른 조끼들 뒤로 페넬라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상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베냐 둑 위에서 있었던 일이 사흘 사이 나루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스벨은 낡은 사냥 망토를 입고 왔다⁠. 근위병 둘만 데리고 왔고⁠, 높은 자리 대신 대장간 사람들 곁에 섰다⁠. 수염은 희끗했다⁠. 카스텐은 화로를 앞세우고 저울 맞은편에 섰다⁠. 공작은 시종 둘을 데리고 와서 맨 앞줄에 의자를 놓게 했다⁠. 솔베가 숄 꾸러미를 안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시빌라는 맨 마지막에 상관 돌계단을 내려왔다⁠. 은회색 망토에 청어 얼룩은 없었다⁠. 반지는 하나도 끼지 않았다⁠.

“⁠감독관님⁠, 사람을 많이도 모으셨습니다⁠.⁠”

“⁠저울은 많이 볼수록 정확해져요⁠.⁠”

*

이델라는 자루 두 개를 저울 앞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왕실 금고에서 꺼낸 아르셀 금화 백 닢이었다⁠. 다른 하나는 베냐 둑에서 시빌라가 내놓았던 페넬라 금화 백 닢이었다⁠. 이델라는 아르셀 금화를 한 닢씩 손끝에 올려 테두리를 쓸고 왼쪽 접시에 올렸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셌다⁠. 하나⁠, 둘⁠, 셋⁠. 공작이 시종에게 몇 번째냐고 물을 때마다 시종이 귀에 대고 숫자를 말했다⁠. 백까지 가는 동안 공작은 서른 번쯤 물었다⁠.

이델라는 페넬라 금화도 한 닢씩 손끝에 올려 오른쪽 접시에 올렸다⁠. 손끝이 닢마다 같은 것을 말했다⁠. 가볍다⁠. 가볍다⁠. 마지막 백 번째 닢을 올리고 이델라는 손을 뗐다⁠.

쇠사슬이 삐걱였다⁠. 왼쪽 접시가 천천히 내려갔다⁠. 오른쪽 접시가 천천히 올라갔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페넬라 상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짧게 신음했다⁠. 짐꾼들이 웅성거렸다⁠. 생선 장수 하나가 제 주머니에서 페넬라 금화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 손바닥으로는 알 수 없었다⁠. 생선 장수는 금화를 깨물었다⁠.

“⁠깨물지 마⁠. 이 빠져⁠.⁠” 브리다가 무 단지를 안은 채 말했다⁠. 남부 수비대의 늙은 병사에게서 배운 말이었다⁠.

공작이 시종에게 크게 물었다⁠.

“⁠저울이 왜 저쪽으로 기울었느냐⁠?⁠”

시종이 이번에는 공작의 귀에 대고 말하지 않았다⁠. 나루의 모두가 들을 만큼 크게 말했다⁠.

“⁠페넬라 금화가 가볍답니다⁠, 각하⁠!⁠”

*

시빌라는 저울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걸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른쪽 접시에서 페넬라 금화 한 닢을 집어 들고 손끝으로 테두리를 쓸었다⁠. 이델라처럼⁠.

“⁠맞습니다⁠. 가볍습니다⁠.⁠” 시빌라가 말했다⁠. 목소리가 저울 쇠사슬보다 또렷했다⁠. 페넬라 상인들이 일제히 시빌라를 보았다⁠. “⁠몬테가 은행은 지난가을부터 금화를 깎아 찍었습니다⁠. 한 닢에서 아주 조금씩⁠. 손끝이 아니면 모를 만큼⁠.⁠”

“⁠왜요⁠?⁠”

“⁠아르셀 왕실이 빌려 간 서른여섯 상자가 두 해 동안 소금으로만 돌아왔으니까요⁠. 소금은 이자를 덮지만 금고를 채우지는 못합니다⁠. 페넬라 과부들이 예금을 찾으러 오면 줄 금화가 모자랐습니다⁠. 금화를 깎으면 모자라는 것이 안 보였지요⁠.⁠” 시빌라는 금화를 접시에 도로 내려놓았다⁠. “⁠제 금화가 가벼워진 것은 아르셀 빚이 무거워서입니다⁠, 감독관님⁠.⁠”

나루가 조용해졌다⁠. 카스텐이 화로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오늘 이 저울 이야기가 페넬라 항구에 닿으면 과부들이 은행으로 몰려옵니다⁠. 은행은 문을 닫고⁠, 과부들은 아무것도 못 찾습니다⁠. 청어 배는 소금이 없어 못 나가고요⁠.⁠” 시빌라는 이델라를 똑바로 보았다⁠. “⁠감독관님은 저를 이기셨습니다⁠. 그 대가는 페넬라 과부들이 치릅니다⁠.⁠”

이델라는 대답하기 전에 저울을 보았다⁠. 왼쪽 접시가 아래에 있었다⁠. 이긴 접시였다⁠. 이델라는 손바닥을 왼쪽 접시 테두리에 얹었다⁠.

“⁠사절님⁠, 약조를 다시 써요⁠. 오늘⁠, 이 저울 앞에서⁠.⁠”

“⁠무슨 약조요⁠?⁠”

“⁠칙허는 없어요⁠. 베냐 소금밭은 아르셀 거예요⁠. 대신 베냐 소금은 다시 페넬라 배로 가요⁠. 이 저울에서 제값으로 달아서요⁠. 금화 대신 소금으로 빚을 갚아요⁠. 달마다 이 저울에서 단 만큼 서른여섯 상자에서 깎아요⁠. 이자는 오늘부터 멈추고요⁠.⁠” 이델라가 말했다⁠. “⁠청어 배는 다음 주에 소금을 싣고 나가요⁠. 과부들은 청어 값으로 예금을 찾고요⁠.⁠”

“⁠금화가 가볍다는 소문은요⁠?⁠”

“⁠이번 철 한 번은 아르셀이 페넬라 금화를 제 무게대로 받을게요⁠. 소금 값으로요⁠. 이 저울 이야기가 페넬라 항구에 닿기 전에 페넬라 금화를 받아 주는 나라가 하나 있으면⁠, 과부들이 한꺼번에 몰려오지는 않아요⁠.⁠”

시빌라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페넬라 상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번에는 신음이 아니었다⁠.

“⁠아르셀이 가벼운 금화를 받으면 아르셀이 손해를 봅니다⁠.⁠”

“⁠한 철만요⁠. 그 대신 별궁은 사절님 거예요⁠. 저는 다시 사지 않을게요⁠.⁠”

시빌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빈손을 망토 안으로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반지가 없는 손가락 마디마다 반지 자국이 희게 남아 있었다⁠.

“⁠제 남편도 청어 배를 탔습니다⁠. 스무 해 전 봄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지요⁠.⁠” 시빌라가 말했다⁠. “⁠남편 몫을 몬테가 은행에 맡긴 첫 과부가 저였습니다⁠. 그래서 은행에 들어갔고요⁠.⁠”

“⁠그럼 과부들 얼굴을 다 아시겠네요⁠.⁠”

“⁠다 압니다⁠. 그래서 금화를 깎았습니다⁠.⁠”

*

“⁠감독관⁠.⁠”

카스텐의 목소리가 저울 맞은편에서 왔다⁠. 재상은 화로를 서기에게 맡기고 저울 앞으로 나왔다⁠. 손이 하얗게 맞잡혀 있었다⁠.

“⁠새 약조를 쓰기 전에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소⁠. 감독관은 이 저울 앞에서 이긴 사람으로 서 있소⁠. 감독관의 손이 깨끗한지 말하겠소⁠.⁠”

사람들이 카스텐을 보았다⁠. 하르벤이 무 단지를 안은 브리다 뒤에서 몸을 움츠렸다⁠.

“⁠베냐 소금을 산 너머로 나른 수레는 벨라크 상단의 수레였소⁠. 운반비는 열둘에 하나⁠. 감독관의 오빠 주머니로 들어갔소⁠. 칼데나 직공들은 지금 벨라크 상단 창고에서 숄을 짜고⁠, 숄은 상단이 투르발에 팔고 있소⁠.⁠” 카스텐은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관이 소금을 산으로만 보낸 이레 동안 아르셀 장터의 소금값이 두 배가 되었소⁠. 동쪽 어촌에서는 잡은 생선의 반을 버렸소⁠. 감독관의 저울에서 금화가 늘 때 아르셀 어부의 밥상에서 생선이 줄었소⁠.⁠”

나루가 술렁였다⁠. 생선 장수 하나가 그건 맞다고 소리쳤다⁠. 장터에서 소금 사려다 돌아섰다고⁠. 짐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넬라 상인들이 이번에는 아르셀 사람들을 보았다⁠.

이델라는 저울 앞에서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손바닥을 접시 테두리에서 뗐다⁠.

“⁠맞아요⁠.⁠”

나루가 다시 조용해졌다⁠.

“⁠오빠는 열둘에 하나를 받았어요⁠. 상단은 숄을 팔아요⁠. 장터 소금값은 두 배가 됐고요⁠. 소금밭 우두머리한테 혼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지금은 열 자루에 하나 반을 아르셀 장터로 돌려요⁠. 옛날 값으로요⁠.⁠” 이델라는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저는 왕비였던 마지막 두 해 동안 페넬라 빚을 반쯤 알았어요⁠. 알면서 아무것도 안 물었어요⁠. 왕비 자리가 편해서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오스벨이 대장간 사람들 곁에서 고개를 숙였다⁠. 카스텐은 이델라를 오래 보았다⁠.

하르벤이 브리다 뒤에서 앞으로 나왔다⁠. 상단주는 털모자를 벗어 쥐고 있었다⁠.

“⁠운반비 열둘에 하나는 받았소⁠. 받은 건 받은 거요⁠. 그 돈으로 수레꾼 예순 집이 겨울을 났소⁠.⁠” 하르벤은 하늘을 보지 않고 사람들을 보았다⁠. “⁠다음 철부터 투르발 길 운반비는 열다섯에 하나로 하겠소⁠. 동생이 깎은 것보다 더 깎소⁠. 동생한테 지기 싫어서요⁠.⁠”

짐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솔베가 숄 꾸러미를 흔들며 칼데나 숄도 장터 값을 내리겠다고 외쳤다⁠. 숨을 안 쉬고 외쳐서 끝이 들리지 않았다⁠.

카스텐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재상은 서기에게서 화로를 도로 받아 들었다⁠.

“⁠감독관 손은 깨끗하지 않소⁠. 내 손도 깨끗하지 않소⁠.⁠” 카스텐이 말했다⁠. “⁠그러니 저울로 정할 일이 아니오⁠. 폐하께서 정하실 일이오⁠.⁠”

*

모든 눈이 대장간 사람들 곁의 오스벨에게 갔다⁠. 오스벨은 사냥 망토 자락을 쥐었다⁠. 수염으로 가던 손이 중간에 멈췄다⁠. 왕은 저울을 보고⁠, 시빌라를 보고⁠, 카스텐을 보고⁠, 이델라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공작을 보았다⁠. 공작은 시종에게 폐하가 무엇을 정하시느냐고 묻고 있었다⁠.

“⁠지금 정하면⁠.⁠” 오스벨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서 앞줄만 들었다⁠. 오스벨은 목소리를 키웠다⁠. “⁠지금 정하면 나는 또 마지막에 말한 사람 말을 들을 것이오⁠. 오늘 마지막에 말한 사람은 재상이오⁠. 아까는 이델라였고⁠, 그 전에는 사절이었소⁠.⁠”

나루의 누군가가 킥 웃었다⁠. 오스벨은 웃음이 난 자리를 보지 않았다⁠.

“⁠봄 첫날⁠, 봉급날 광장에서 정하겠소⁠. 남부 수비대가 금화를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금화가 다 맞으면 이델라의 약조를⁠, 모자라면 재상의 칙허를⁠.⁠” 오스벨은 시빌라를 보았다⁠. “⁠사절⁠, 그날까지 용병선은 닻만 내리고 있으시오⁠.⁠”

“⁠닻은 내리고 있겠습니다⁠, 폐하⁠.⁠” 시빌라가 말했다⁠. “⁠봄 첫날 광장에 저도 가겠습니다⁠. 새 약조를 쓸 펜을 들고요⁠. 칙허를 받을 손도 같이 들고요⁠.⁠”

이델라는 저울에서 두 나라의 금화를 거두었다⁠. 아르셀 금화는 왼쪽 자루에⁠, 페넬라 금화는 오른쪽 자루에⁠. 손끝으로 마지막 닢을 쓸 때 사흘 뒤가 손바닥 위에 얹혀 있었다⁠. 산을 넘은 병사들이 사흘 뒤 아침까지 금화를 지고 광장에 닿아야 했다⁠. 하나라도 모자라면 칙허였다⁠.

저울의 쇠사슬이 빈 채로 흔들렸다⁠. 접시 둘이 마침내 같은 높이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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