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27자)

봄 첫날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성당 앞 광장에는 혼례 계단 대신 탁자 하나가 놓였다⁠. 봄 첫날 아침 해가 성당 지붕 위로 올라오자 탁자 위로 그림자가 짧게 줄었다⁠. 탁자 한쪽 끝에 카스텐이 화로를 끼고 앉았다⁠. 반대쪽 끝은 비어 있었고⁠, 가운데에 금고에서 나온 상자 하나와 칼데나 숄 값으로 받은 금화 자루가 놓여 있었다⁠. 한 상자 반이었다⁠. 봉급은 세 상자였다⁠.

광장 둘레로 사람들이 모였다⁠. 혼례를 보러 오려던 사람들이 봉급을 보러 왔다⁠. 브리다는 무 단지를 하르벤의 상단 창고에 두고 왔다고 했는데⁠, 앞치마 주머니가 불룩했다⁠. 절인 무 한 쪽을 싸 왔다고 했다⁠. 솔베는 직공 아낙들과 숄을 두르고 성당 계단 맨 아래 칸에 앉아 있었다⁠. 계단 위쪽에는 혼례를 올릴 뻔한 백작 집 딸이 수수한 회색 옷차림으로 어머니 곁에 서 있었다⁠. 어젯밤 혼례가 미뤄졌다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밥을 두 그릇 먹었다고 빨래터가 전했다⁠.

시빌라는 성당 기둥 곁에 섰다⁠. 서기 하나가 새 약조를 적을 양피지와 펜을 들고 있었고⁠, 다른 서기 하나는 소금밭 문장이 박힌 칙허 양피지를 들고 있었다⁠. 두 장 다 빈 종이가 아니었다⁠. 정오에 둘 중 하나를 버릴 것이었다⁠.

오스벨은 사냥 망토를 입고 탁자 곁에 서 있었다⁠. 높은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는데 오스벨이 거절했다⁠. 봉급을 받는 병사들과 같은 땅에 서겠다고 했다⁠. 수염은 다 희었다⁠.

“⁠정오 종까지요⁠.⁠” 카스텐이 말했다⁠. “⁠종이 울릴 때 금화가 세 상자에 모자라면 칙허요⁠.⁠”

“⁠알아요⁠.⁠”

이델라는 탁자의 빈 끝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손끝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참나무가 아침 냉기에 찼다⁠.

*

해가 한 뼘 올라가도록 북쪽 길에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광장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공작이 시종에게 병사들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시종이 모른다고 대답했다⁠. 공작이 광장이 울리도록 되물었다⁠. 모른다고⁠?

카스텐이 화로를 조금 밀어 탁자의 빈 끝 쪽으로 불을 보냈다⁠.

“⁠앉으시오⁠. 서 있어도 병사들은 빨리 안 오오⁠.⁠”

이델라는 카스텐 맞은편에 앉았다⁠. 화로의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카스텐은 화로 위에 두 손바닥을 띄워 두고 있었다⁠.

“⁠재상⁠, 금화가 모자라면 기쁘세요⁠?⁠”

“⁠기쁘지 않소⁠.⁠” 카스텐이 말했다⁠. “⁠칙허를 쓰면 삼십 년 동안 베냐 아낙들이 나를 욕할 것이오⁠. 칙허를 안 쓰고 봉급이 끊기면 서른 해 전 거리가 다시 탈 것이오⁠. 나는 무엇을 하든 욕을 먹소⁠. 욕은 오래 먹어서 괜찮소⁠.⁠”

“⁠거리는 안 타요⁠.⁠”

“⁠감독관이 그걸 어떻게 아시오⁠?⁠”

“⁠병사들이 소금을 지고 산을 넘었어요⁠. 제 봉급을 제 등에 지고요⁠. 제 등에 진 봉급을 들고 거리를 태우는 병사는 없어요⁠.⁠”

카스텐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의 숯 하나가 무너지며 불티가 올라갔다⁠.

성당 계단에서 백작 집 딸이 내려와 탁자 곁으로 왔다⁠. 어머니가 뒤에서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딸은 손을 뿌리쳤다⁠. 간택 큰방에서 끝까지 고개를 못 들던 얼굴이 오늘은 이델라를 똑바로 보았다⁠.

“⁠감독관님⁠, 저 류트 배우려고요⁠. 간택 때 줄 끊어진 언니한테요⁠. 혼례 준비하느라 못 했던 거예요⁠.⁠”

“⁠잘 생각했어요⁠.⁠”

“⁠줄은 끊어져도 끝까지 치면 된대요⁠.⁠” 백작 집 딸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계단으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딸의 등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소매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해가 한 뼘 더 올라갔다⁠. 성당 종지기가 종탑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정오가 가까웠다⁠. 오스벨이 탁자 곁을 서성였다⁠. 사냥 망토 자락이 탁자 다리를 스칠 때마다 상자가 흔들렸다⁠. 시빌라는 기둥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칙허 양피지를 든 서기가 양피지를 고쳐 쥐었다⁠.

“⁠감독관님⁠.⁠” 솔베가 계단에서 뛰어 내려왔다⁠. 이번에는 숨을 쉬었다⁠. “⁠북쪽이요⁠.⁠”

*

북쪽 길 끝에서 먼지가 올랐다⁠. 먼지 속에서 수레가 나왔다⁠. 수레 옆판에 벨라크 상단의 돛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수레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섯⁠, 열⁠, 열다섯⁠. 수레마다 갈색 군복의 병사들이 빼곡히 타고 있었고⁠, 병사들의 무릎 위에 묵직한 자루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맨 앞 수레의 마부석에 투르발 고개를 서른 번 넘었다는 늙은 수레꾼이 앉아 있었다⁠.

광장의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이델라는 탁자에서 일어나 하르벤을 찾았다⁠. 하르벤은 광장 가장자리에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오빠⁠.⁠”

“⁠수레를 거둔 건 거둔 거고⁠, 고개 아래 마을에 수레 열다섯 대를 세워 둔 건 세워 둔 거야⁠.⁠” 하르벤이 하늘을 본 채 말했다⁠. “⁠병사들이 걸어오면 사흘이고 수레를 타면 하루 반이야⁠. 내가 셌어⁠.⁠”

“⁠운반비는⁠?⁠”

“⁠열다섯에 하나⁠. 그저께 나루에서 그렇게 말했잖아⁠. 동생한테 지기 싫어서⁠.⁠” 하르벤은 마침내 고개를 내리고 동생을 보았다⁠. “⁠배 두 척은 아직 몬테가에 있어⁠. 새 약조 쓰면 소금 갚는 데 내 배도 끼워 줘⁠. 배 삯은 받는다⁠.⁠”

수레들이 광장에 들어와 멈췄다⁠. 병사들이 자루를 안고 뛰어내렸다⁠. 부사령관이 탁자 앞에 와서 경례했고⁠, 병사들이 자루를 하나씩 탁자 위에 올렸다⁠. 자루 입구를 풀자 금화가 쏟아졌다⁠. 투르발 금화였다⁠. 이델라는 맨 위의 한 닢을 손끝에 올렸다⁠. 테두리가 고르고 무게가 맞았다⁠. 손끝에서 금방 미지근해졌다⁠.

남쪽 길에서도 말 한 필이 달려 들어왔다⁠. 가르딘이었다⁠. 베냐 둑을 늙은 병사와 소금밭 아낙들에게 맡기고 이틀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고 했다⁠. 칼집은 비어 있었고⁠, 안장 주머니가 불룩했다⁠. 가르딘은 말에서 내려 탁자 앞의 금화 더미를 보고⁠, 이델라를 보았다⁠. 눈가가 움직였다⁠.

종탑에서 정오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

“⁠세시오⁠, 재상⁠.⁠” 이델라가 말했다⁠.

카스텐이 화로에서 손을 떼고 탁자 앞에 앉았다⁠. 병사들이 줄을 섰다⁠. 재상은 금화를 한 닢씩 집어 병사의 손바닥에 놓았다⁠. 이델라가 곁에 서서 재상의 손에서 금화가 떨어지기 전에 손끝으로 한 번씩 쓸었다⁠. 재상의 손가락이 차서 금화가 손에서 미끄러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델라가 받아 다시 재상의 손에 올렸다⁠.

정오 종은 열두 번 울리고 멈췄다⁠. 줄은 아직 길었다⁠. 종이 멈춘 뒤에도 카스텐은 세었다⁠. 병사 하나⁠, 둘⁠, 쉰⁠, 백⁠, 이백⁠, 삼백⁠. 늙은 병사 대신 줄에 선 젊은 병사가 금화를 받자마자 깨물려다가⁠, 브리다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절인 무를 꺼내 들어 보이자 입을 다물었다⁠. 광장에 웃음이 번졌다⁠.

줄 맨 끝 병사의 손바닥에 금화가 놓였다⁠. 베냐 둑에 남은 병사 백의 몫은 카스텐이 세어 가르딘의 안장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끈을 묶는 것까지 재상의 손으로 했다⁠. 탁자 위에는 빈 상자와 빈 자루와 금화 세 닢이 남아 있었다⁠. 세 닢이 남았다⁠.

카스텐은 남은 세 닢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한 닢씩 집어 이델라의 손바닥에 놓았다⁠. 찬 손끝이 이델라의 손바닥에 닿았다⁠.

“⁠맞소⁠.⁠” 카스텐이 말했다⁠. “⁠세 닢 남았소⁠.⁠”

*

오스벨이 탁자 앞으로 나왔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시빌라의 서기 둘이 양피지 두 장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오스벨은 소금밭 문장이 박힌 칙허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방 안을 돌지 않았다⁠. 수염도 만지지 않았다⁠.

“⁠혼례는 없소⁠.⁠” 오스벨이 말했다⁠. 목소리가 광장 끝까지 갔다⁠. “⁠이 칙허도 없소⁠.⁠”

오스벨은 칙허 양피지를 둘로 접어 화로에 넣었다⁠. 양피지 끝이 오그라들며 타올랐다⁠. 카스텐이 불을 보았고⁠, 막지 않았다⁠.

“⁠그런데 아르셀 왕은 봄 첫날 성당 앞에서 칙허 하나를 내리는 법이오⁠. 혼례가 없어도 봄 첫날은 왔으니 하나 내리겠소⁠.⁠” 오스벨은 이델라를 보았다⁠. “⁠동쪽 바닷가 어촌의 그물세를 올해 거두지 않소⁠. 소금이 두 배라서 생선을 반 버렸다고 들었소⁠. 버린 생선만큼 그물세를 깎소⁠.⁠”

광장 가장자리에서 소금밭 우두머리의 동생이라는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열다섯 해 전 이델라의 혼례 때 깎았던 그물세가 다시 깎였다⁠.

시빌라가 기둥 곁에서 걸어 나왔다⁠. 서기에게서 새 약조의 양피지를 받아 탁자 위에 펼쳤다⁠. 이델라가 나루의 저울 앞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칙허 대신 소금⁠, 달마다 큰 저울에서 단 만큼 서른여섯 상자에서 깎는다⁠, 이자는 멈춘다⁠, 이번 철 한 번은 아르셀이 페넬라 금화를 제 무게대로 받는다⁠, 별궁은 몬테가 은행의 것으로 둔다⁠. 시빌라는 펜을 들기 전에 장갑을 벗고 맨손을 양피지 위에 얹었다⁠. 반지 자국이 희게 남은 손이었다⁠.

“⁠감독관님⁠, 별궁 배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요⁠.⁠”

“⁠가지는요⁠?⁠”

“⁠다음 주에 칩니다⁠. 돌은 건드리지 않고요⁠.⁠”

시빌라가 서명했다⁠. 오스벨이 서명했다⁠. 펜이 카스텐에게 갔다⁠. 카스텐은 펜을 받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묵직한 놋쇠 도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재상의 도장이었다⁠. 사자 한 마리가 저울을 쥔 무늬가 닳아 있었다⁠.

“⁠봉급은 내 손으로 셌소⁠. 그것으로 되었소⁠.⁠” 카스텐이 말했다⁠. “⁠새 약조에는 새 재상이 도장을 찍으시오⁠.⁠”

“⁠재상⁠.⁠” 오스벨이 말했다⁠.

“⁠폐하⁠, 나루의 큰 저울은 두 해 동안 페넬라 사람이 지켰소⁠. 이제 아르셀 사람이 지켜야 하오⁠. 저울 곁에는 화로 하나 놓을 자리가 있소⁠.⁠” 카스텐이 화로를 들라고 서기에게 손짓했다⁠. “⁠내 손은 차서 무게를 못 느끼오⁠. 그래서 눈으로 보겠소⁠. 눈은 아직 밝소⁠.⁠”

*

오스벨은 탁자 위의 재상 도장을 집어 이델라 앞으로 밀었다⁠.

“⁠이델라⁠, 돌아오시오⁠. 재상으로든⁠, 왕비로든⁠. 당신이 고르시오⁠.⁠”

광장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솔베가 계단에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브리다가 앞치마 주머니를 꽉 쥐었다⁠. 하르벤이 하늘을 보았다⁠.

이델라는 도장을 내려다보았다⁠. 놋쇠가 햇빛에 따뜻해져 있었다⁠. 이델라는 도장을 손끝으로 한 번 쓸고⁠, 오스벨 쪽으로 도로 밀었다⁠.

“⁠돌아가지 않을게요⁠, 폐하⁠.⁠” 이델라가 말했다⁠. “⁠감독관으로 남을게요⁠. 금고 옆 방이요⁠. 호벤 영감 코 고는 소리가 이제 익숙해졌어요⁠.⁠”

오스벨이 웃었다⁠. 웃다가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손바닥은 검게 물들지 않았다⁠.

“⁠재상 도장은 누구한테 주오⁠?⁠”

“⁠폐하가 고르세요⁠. 마지막에 말한 사람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요⁠.⁠”

오스벨이 도장을 쥐었다⁠. 오래 쥐고 있었다⁠.

*

광장의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금화를 쥐고 빵집으로 몰려갔다⁠. 솔베는 직공들과 숄을 걷었고⁠, 백작 집 딸이 계단을 내려와 솔베에게 숄 한 장을 샀다⁠. 하르벤은 시빌라의 서기를 붙잡고 배 두 척 이야기를 시작했다⁠. 브리다는 늙은 병사가 없어서 섭섭하다며 절인 무를 혼자 먹었다⁠.

가르딘이 탁자로 왔다⁠. 안장 주머니에서 둥근 보리빵 하나를 꺼냈다⁠. 아직 따뜻했다⁠. 오는 길 마지막 마을 빵집에서 갓 꺼낸 것이라고 했다⁠.

“⁠봉급날이오⁠. 감독관 몫⁠.⁠”

이델라는 손바닥의 금화 세 닢을 탁자 위 빈 상자에 넣었다⁠. 금화가 상자 바닥에 떨어지며 맑게 울렸다⁠. 이델라는 빵을 받았다⁠. 빵을 둘로 갈라 반을 가르딘에게 내밀었다⁠. 가르딘이 받았다⁠. 빵을 건네는 손끝이 가르딘의 손바닥 흉에 닿았다⁠. 이번에는 둘 다 손을 움츠리지 않았다⁠.

광장 너머 북쪽 언덕 위에 별궁이 보였다⁠. 큰방 창가에서 페넬라의 저울 깃발이 펄럭였고⁠, 뒤뜰 담장 위로 배나무 꼭대기가 하얗게 피어 있었다⁠. 이델라는 빵 껍질을 손끝으로 뜯었다⁠. 손가락의 잉크 자국 위에 밀가루가 하얗게 앉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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