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36자)

진짜 왕관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금고지기 방 옆에는 빈 돌방이 하나 있었다⁠. 오래전 금고를 지키던 병사들이 쓰던 방이라 침상 하나와 등잔걸이 하나가 전부였다⁠. 이델라는 별궁을 내준 밤 돌방에 짐을 풀었다⁠. 짐은 옷궤 하나와 지도 묶음과 펜과 잉크병이었다⁠. 브리다는 하르벤의 상단 창고에서 직공들과 지내기로 했다⁠. 무 단지를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했다⁠.

밤새 벽 너머에서 호벤 영감이 코를 골았다⁠. 코 고는 소리가 돌벽을 타고 울려서⁠, 이델라는 영감이 정말로 귀가 어두운 것인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고 자는 사람이 제 소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새벽에 이델라는 소금 자루를 메고 쇠문 앞으로 갔다⁠. 호벤 영감이 벌써 일어나 등잔을 들고 있었다⁠.

“⁠영감⁠, 문 열어요⁠.⁠”

“⁠예⁠.⁠”

영감은 되묻지 않았다⁠. 두 열쇠가 나란히 돌고 빗장이 빠졌다⁠. 이델라는 돌방 한가운데 쇠궤 앞에 소금 자루를 내려놓고 왕관을 꺼냈다⁠. 소금 알갱이가 왕관 테두리에서 쏟아져 바닥에 흩어졌다⁠. 등잔 불빛에 진짜 금이 따뜻한 빛을 냈다⁠. 금고에 들어간 금화는 금고의 것이라고 재상이 말했다⁠. 이델라는 재상 말대로 했다⁠. 왕관을 쇠궤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영감⁠, 재상이 이 궤를 열라고 하면요⁠?⁠”

“⁠제 귀는 요즘 감독관님 목소리만 들려요⁠.⁠” 호벤 영감이 등잔을 들어 올렸다⁠. “⁠나이가 들어서 그래요⁠.⁠”

“⁠밤에 코 고는 소리는요⁠? 그것도 안 들려요⁠?⁠”

“⁠그건 감독관님이 고신 거 아니에요⁠?⁠”

이델라는 대답하지 않고 쇠궤의 자물쇠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호벤 영감이 등잔 뒤에서 이가 빠진 입으로 웃었다⁠.

*

대회의는 정오에 열렸다⁠. 본궁에서 가장 큰 방이었고⁠, 왕도의 귀족 집 가장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앉았다⁠. 귀가 어두운 공작은 맨 앞줄에서 시종을 둘이나 데리고 왔다⁠. 오스벨은 높은 자리에 앉았다⁠. 수염은 희끗한 채였다⁠. 물감 그릇은 어젯밤 처소 창밖으로 버렸다고 빨래터가 전했다⁠.

카스텐은 서서 말했다⁠. 화로를 곁에 두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

“⁠감독관이 페넬라 은행과 몰래 거래해 진짜 왕관을 사들였소⁠. 대가는 이혼한 왕비에게 내준 별궁이었소⁠. 왕실이 내준 집을 남의 나라 은행에 넘기고⁠, 왕실 물건을 제 손으로 들였소⁠. 그리고 이월 그믐 혼례를 막으려고 왕관을 금고 깊이 감추었소⁠.⁠” 카스텐은 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감독관은 그 전에 왕의 군대에 금화를 쥐여 주었고⁠, 병사들을 등짐꾼으로 부려 산 너머로 보냈소⁠. 한 사람이 금고와 군대와 왕관을 다 쥐었소⁠. 아르셀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은 없소⁠.⁠”

귀족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공작이 시종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시종이 귀에 대고 전 왕비가 왕관을 감췄다고 말했다⁠. 공작이 크게 외쳤다⁠. 반역이냐고⁠.

이델라는 탁자 곁에서 일어났다⁠. 호벤 영감이 뒤에서 쇠궤를 들고 들어왔다⁠. 이델라는 쇠궤를 열고 왕관을 꺼내 대회의 탁자 한가운데 올려놓았다⁠. 큰방의 모든 눈이 왕관으로 갔다⁠.

“⁠감춘 거 아니에요⁠. 금고에 넣은 거예요⁠. 두 해 동안 페넬라 상관에 있던 걸 금고로 옮겨 왔어요⁠. 재상께서 금고에 들어간 금화는 금고 것이라고 하셨죠⁠. 왕관도 금고 거예요⁠.⁠”

“⁠금고에 있으면 혼례에 써야 하오⁠.⁠”

“⁠쓰기 전에 하나만 달아 봐요⁠.⁠”

이델라가 손짓하자 호벤 영감이 금고의 작은 저울을 탁자에 올렸다⁠. 이델라는 품에서 나무 패를 한 움큼 꺼내 오른쪽 접시에 올렸다⁠. 패마다 「⁠대금은 봄 첫날⁠, 몬테가 은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페넬라 비단 꾸러미에 달려 왔던 패⁠, 포도주 통에 달려 왔던 패⁠, 춤 선생의 수업료 패⁠, 새 관의 주문 패⁠. 패 하나에 금화 반 상자씩이라고 이델라가 말했다⁠. 패들이 접시에 떨어지며 마른 소리를 냈다⁠.

“⁠이건 혼례가 진 빚이에요⁠. 이제 예물을 올려 볼게요⁠. 공작 각하⁠, 혼례 날 성당 계단에 무엇을 놓으실 거예요⁠?⁠”

공작이 시종에게 무엇을 묻느냐고 물었다⁠. 시종이 귀에 대고 예물이라고 말했다⁠. 공작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금화 스무 닢⁠!⁠”

큰방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델라는 진지한 얼굴로 왼쪽 접시에 금화 스무 닢을 세어 올렸다⁠. 금고에서 가져온 금화였다⁠. 다음은 백작이었다⁠. 백작이 헛기침을 하고 서른 닢이라고 했다⁠. 이델라가 서른 닢을 올렸다⁠. 다음 백작은 지난 두 해 흉년이 들었다며 열다섯이라고 했다⁠. 다음 남작은 아들 혼례가 있어서 열이라고 했다⁠. 남작 부인이 별궁에서 진홍색 드레스를 금화 열넷에 사 갔다는 것을 이델라는 기억했다⁠. 말하지는 않았다⁠.

귀족들이 하나씩 말할수록 왼쪽 접시에 금화가 쌓였다⁠. 쌓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마지막 귀족이 말을 마쳤을 때 저울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나무 패를 올린 접시가 탁자에 닿아 있었다⁠.

“⁠간택에 딸을 넣은 집에서 따로 낸 금화까지 더해도 이만큼이에요⁠.⁠” 이델라가 말했다⁠. “⁠혼례 하루가 혼례 하루보다 무거워요⁠.⁠”

큰방이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저마다 제가 부른 숫자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공작이 시종에게 저울이 왜 저쪽으로 기울었냐고 물었다⁠. 시종이 대답하지 못했다⁠.

*

카스텐은 저울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화로에 손을 댔다⁠.

“⁠저울은 맞소⁠. 감독관 저울은 늘 맞소⁠.⁠” 카스텐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혼례는 예물로 빚을 갚으려는 것이 아니오⁠. 칙허로 이자를 덮으려는 것이오⁠. 그 칙허가 내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말하겠소⁠.⁠”

카스텐이 서기에게 손짓했다⁠. 서기가 종이 한 장을 읽었다⁠. 베냐 소금밭 초소에서 올라온 보고였다⁠. 「⁠앞바다에 돛대 둘 달린 배 두 척⁠. 장삿배 깃발 없음⁠. 갑판에 창과 활⁠. 페넬라 말을 쓰는 사람들⁠.⁠」

“⁠몬테가 은행이 용병선을 부렸소⁠.⁠” 카스텐이 말했다⁠. “⁠칙허가 이월 그믐에 내리지 않으면 저 배들이 소금밭에 닿소⁠. 소금밭 둑에는 지금 병사 백과 소금 긁는 아낙들뿐이오⁠. 병사 삼백은 감독관 말대로 소금을 지고 산 너머에 있고⁠.⁠” 카스텐이 이델라를 보았다⁠. “⁠감독관 저울에는 용병선이 안 올라가오⁠. 서른 해 전 불탄 거리도 안 올라가고⁠.⁠”

귀족들의 얼굴이 하얘졌다⁠. 백작 하나가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귀가 어두운 공작도 이번에는 시종에게 묻지 않았다⁠. 용병이라는 말은 들렸다⁠.

오스벨이 높은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수염을 만지지 않고 무릎을 쥐고 있었다⁠.

“⁠이델라⁠, 재상 말에 대답할 수 있소⁠?⁠”

이델라는 저울에서 손을 뗐다⁠. 재상이 든 것은 하나도 거짓이 아니었다⁠. 둑에 병사가 백뿐인 것도⁠, 앞바다의 배들도⁠, 서른 해 전의 거리도 저울에 올라가지 않았다⁠. 이델라는 탁자 한가운데 왕관을 보았다⁠. 손끝으로 쓸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왕관 곁 탁자에 짚었다⁠.

“⁠칙허가 내리면 저 배들은 돌아가요⁠. 대신 삼십 년 동안 소금이 나갈 때마다 페넬라 배가 와요⁠. 삼십 년 동안 베냐 아낙들은 페넬라가 정한 품삯으로 소금을 긁고⁠, 아르셀 금고에는 금화가 안 들어와요⁠. 그러면 다음 봄에 또 빌려야 해요⁠. 다음 혼례로요⁠.⁠”

“⁠다음 봄은 다음 봄이오⁠. 나는 이번 봄을 넘겨야 하오⁠.⁠”

“⁠이번 봄은 제가 넘길게요⁠.⁠” 이델라가 말했다⁠. 큰방의 모두가 이델라를 보았다⁠. “⁠봄 첫날⁠, 남부 수비대 봉급을 금화로 한 닢도 덜 없이 맞추겠어요⁠. 병사 삼백이 지고 간 소금이 봄 첫날 전에 금화가 되어 돌아와요⁠. 용병선은 제가 베냐에 내려가서 상대할게요⁠. 못 맞추면 저를 감옥에 넣으세요⁠. 왕관은 그날 재상께 드리고요⁠. 칙허도 봄 첫날에 쓰시면 돼요⁠.⁠”

“⁠감옥이오⁠?⁠” 오스벨이 되물었다⁠.

“⁠금고 옆 방에서 감옥으로 옮기는 거예요⁠. 지금 방이랑 크기도 비슷해요⁠.⁠”

누군가 웃음을 참다 기침을 했다⁠. 카스텐은 웃지 않았다⁠. 재상은 이델라를 오래 보다가 귀족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혼례를 봄 첫날로 되돌리는 데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공작이 시종에게 무엇에 손을 드느냐고 물었다⁠. 시종이 귀에 대고 혼례를 미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작이 손을 번쩍 들었다⁠. 공작이 손을 들자 백작 둘이 따라 들었다⁠. 저울 왼쪽 접시에 금화를 적게 올린 집들이 차례로 손을 들었다⁠. 손이 다 올라갔을 때 큰방의 절반이 넘었다⁠.

카스텐은 손을 든 귀족들을 하나씩 보았다⁠. 그러고는 오스벨을 보았다⁠.

“⁠폐하⁠.⁠”

“⁠봄 첫날로 하오⁠.⁠” 오스벨이 말했다⁠. 오늘 마지막에 말한 사람은 귀족들이었다⁠. “⁠봄 첫날에 이델라가 봉급을 맞추면 칙허는 쓰지 않소⁠. 못 맞추면⁠…⁠…⁠.⁠” 오스벨은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못 맞추면 재상 뜻대로 하오⁠.⁠”

“⁠봄 첫날까지 열이틀이오⁠.⁠” 카스텐이 화로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 “⁠감독관⁠, 열이틀 뒤 감옥 방의 크기를 직접 재 보시게 될 것이오⁠.⁠”

귀족들이 하나둘 큰방을 빠져나갔다⁠. 카스텐은 저울 곁에 남아 오른쪽 접시의 나무 패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포도주 통에 달려 왔던 패였다⁠. 카스텐은 찬 손끝으로 새겨진 글자를 쓸었다⁠.

“⁠감독관⁠, 하나만 청하겠소⁠. 봄 첫날 봉급 탁자에서 금화를 세어 병사들 손에 놓는 손은 내 손이오⁠. 감독관이 맞춘 금화라도⁠.⁠”

“⁠병사들이 재상 손을 기억하게요⁠?⁠”

“⁠폐하의 손을 기억하게⁠. 내 손은 폐하의 손을 대신하는 것뿐이오⁠.⁠” 카스텐이 패를 접시에 도로 내려놓았다⁠. “⁠감독관이 이기면⁠, 병사들은 누가 이겼는지 몰라도 되오⁠. 금화만 받으면 되오⁠.⁠”

이델라는 카스텐의 손을 보았다⁠. 화로 곁에 서 있었는데도 손등이 하얬다⁠.

“⁠좋아요⁠. 재상 손으로 세세요⁠. 대신 한 닢씩 손끝으로 쓸어 보고 놓으세요⁠. 가벼운 게 섞이면 안 되니까요⁠.⁠”

“⁠내 손끝은 차서 무게를 못 느끼오⁠.⁠”

“⁠그럼 제가 옆에서 볼게요⁠.⁠”

*

해 질 녘 이델라는 벨라크 상단 창고 동쪽 칸으로 갔다⁠. 베틀 스물두 대가 소금 쌓던 칸에 줄지어 있었다⁠. 탁⁠, 탁⁠, 탁⁠. 솔베가 베틀 사이에서 직공들에게 띠와 숄의 무늬를 나눠 주고 있었다⁠. 브리다는 창고 구석에 무 단지를 모셔 두고 직공 아낙들과 절인 무 맛을 겨루고 있었다⁠. 하르벤은 창고 문간에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셌다⁠.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며⁠.⁠”

“⁠빨래터가 상단까지 와⁠?⁠”

“⁠이제 빨래터가 아니야⁠. 상단 창고에서 소식이 나가⁠.⁠” 하르벤이 손가락을 접었다⁠. “⁠숄이 하루에 마흔 장 나와⁠. 투르발 부인들이 숄 한 장에 금화 한 닢을 낸대⁠. 고개를 넘는 병사들 편에 실어 보내면 봄 첫날 전에 돌아와⁠.⁠”

“⁠그걸로 모자라는 거 메울 수 있어⁠?⁠”

“⁠반은⁠.⁠” 하르벤이 말했다⁠. “⁠나머지 반은 너 감옥 가는 거 구경하는 값으로 받아야지⁠.⁠”

솔베가 베틀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감독관님 감옥 가면 저희가 숄 짜서 감옥 창살에 걸어 드릴게요⁠. 따뜻하게요⁠.⁠”

“⁠고마워요⁠. 안 가게 짜 줘요⁠.⁠”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상단의 늙은 수레꾼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남쪽에서 말을 갈아타며 올라왔다고 했다⁠.

“⁠베냐 앞바다요⁠. 페넬라 배가 둘에서 다섯이 됐어요⁠. 오늘 아침에 닻을 내렸대요⁠. 소금밭에서 활이 닿는 거리에요⁠. 맨 앞 배에 은회색 망토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대요⁠.⁠”

베틀 소리가 하나씩 멈췄다⁠.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이델라는 허리에 남은 열쇠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별궁 열쇠들이 빠진 꾸러미에는 금고 열쇠 하나만 남아 있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열쇠가 차가웠다⁠.

“⁠오빠⁠, 제일 빠른 말 한 필⁠.⁠”

“⁠어디 가게⁠?⁠”

“⁠베냐⁠.⁠”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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