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07자)

배나무

쫓겨난 왕비가 왕실 금고를 쥐었다 · 진새온

배나무 가지 끝의 망울이 어제보다 조금 부풀어 있었다⁠. 왕비가 된 이듬해 친정 마당에서 묘목으로 옮겨 온 나무였다⁠. 열다섯 해 사이 별궁 지붕만큼 자랐다⁠. 이델라는 아침 일찍 뒤뜰로 나가 밑동 곁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만 한 흰 돌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서른 살의 봄에⁠, 하나는 서른세 살의 봄에 놓은 돌이었다⁠. 돌 아래에는 아무것도 묻혀 있지 않았다⁠. 묻을 것이 없을 만큼 일렀다⁠. 그래도 이델라는 봄마다 돌을 닦았다⁠.

이델라는 손끝으로 돌의 이끼를 긁어 냈다⁠. 녹은 눈에 젖은 이끼가 손톱 밑으로 들어갔다⁠. 돌 두 개를 다 닦고 나서 이델라는 오래 앉아 있었다⁠. 무릎이 저려 올 때까지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부엌 문간에서 브리다가 보고 있었다⁠.

“⁠마마⁠, 파시는 거죠⁠?⁠”

“⁠어떻게 알았어⁠?⁠”

“⁠마마는 무언가를 팔기 전에 꼭 닦으세요⁠. 드레스 팔 때도 밤새 솔질하셨잖아요⁠.⁠” 브리다가 앞치마를 쥐어짰다⁠. “⁠제 절인 무 단지는요⁠? 아직 창고에 봉인돼 있는데요⁠. 페넬라 사람한테 무까지 넘어가요⁠?⁠”

“⁠무는 찾아 줄게⁠.⁠”

“⁠무만 찾으면 뭐 해요⁠? 무 담을 집이 없는데⁠.⁠”

이델라는 대답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지도가 펴져 있었다⁠. 이델라는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왕관이 내 손에 있으면 이월 그믐에 새 왕비가 관을 못 써⁠. 관을 못 쓰면 왕비가 안 되고⁠, 왕비가 안 되면 혼례가 안 서고⁠, 혼례가 안 서면 칙허가 안 내려⁠. 칙허가 안 내리면 베냐 소금밭은 아르셀에 남아⁠.⁠”

“⁠그러려고 집을 파세요⁠?⁠”

“⁠집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거야⁠.⁠”

브리다가 앞치마로 눈가를 꾹 눌렀다⁠. 그러고는 눌렀던 앞치마를 펼쳐 탁 털었다⁠.

“⁠그럼 짐 싸요⁠. 마마 짐은 적어서 금방 싸요⁠. 제 짐이 많아요⁠.⁠”

*

정오가 되기 전에 언덕길로 수레들이 올라왔다⁠. 맨 앞 수레를 모는 사람은 하르벤이었다⁠. 상단주가 직접 고삐를 쥔 것은 아버지 장례 이후 처음이었다⁠. 수레 여섯 대가 별궁 마당에 줄지어 들어왔다⁠.

“⁠별궁을 판다며⁠.⁠”

“⁠빨래터가 상단까지 가⁠?⁠”

“⁠상단 하녀가 별궁 빨래터에 이모가 있어⁠.⁠” 하르벤이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베틀 스물두 대를 어디로 옮길 건데⁠? 직공들 데리고 길바닥에 앉을 거야⁠?⁠”

“⁠생각 중이었어⁠.⁠”

“⁠생각하지 마⁠. 상단 창고 동쪽 칸을 비웠어⁠. 소금 쌓던 칸인데⁠, 요즘 소금이 산으로 가서 비었거든⁠.⁠” 하르벤은 손바닥으로 수레 바퀴를 탁 쳤다⁠. “⁠운반비는 안 받아⁠. 창고 세는 받고⁠.⁠”

“⁠얼마⁠?⁠”

“⁠무화과 하나⁠.⁠”

이델라가 오빠를 쳐다보았다⁠. 하르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곤란할 때 하늘을 보는 버릇이었다⁠. 손등의 흰 이빨 자국이 햇빛에 드러났다⁠.

“⁠오빠⁠, 배는⁠?⁠”

“⁠배는 배고⁠. 몬테가가 붙잡은 두 척은 은행이 갖고 있어⁠. 남은 세 척은 이번 달에 페넬라 항구를 안 들어가게 돌렸어⁠. 남쪽 섬 항구로⁠.⁠” 하르벤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셌다⁠. “⁠돌아가는 뱃길이라 이문이 반으로 줄어⁠. 반이면 수레꾼 예순 집은 먹어⁠.⁠”

“⁠나 때문에 반이 됐네⁠.⁠”

“⁠너 때문에 반이 남은 거야⁠.⁠” 하르벤이 고개를 내리고 동생을 보았다⁠. “⁠무화과 이야기 다시 하는데⁠, 열한 개 맞아⁠. 나도 셌어⁠. 열한 개 먹고 하나 남은 거 집었어⁠. 네가 깨물 만했어⁠.⁠”

이델라는 대답 대신 오빠의 손등 이빨 자국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하르벤이 손을 빼며 투덜거렸다⁠. 다 큰 동생이 손등을 왜 만지냐고⁠. 하르벤은 곧장 큰방에 들어가 직공들에게 베틀 다리를 접으라고 소리쳤다⁠.

오후에는 재상의 서기가 근위병 둘을 데리고 왔다⁠. 창고 셋의 봉인을 떼고 왕실 물건을 금고로 옮긴다고 했다⁠. 은 숟가락 열두 벌⁠, 은촛대⁠, 양털 이불⁠, 바닷길 지도 묶음⁠. 서기가 하나씩 꺼낼 때마다 이델라는 손끝으로 쓸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맨 마지막에 서기가 단지 하나를 들고 나와 머뭇거렸다⁠.

“⁠이건 목록에 없습니다⁠.⁠”

“⁠제 무예요⁠!⁠” 브리다가 단지를 낚아챘다⁠. 뚜껑을 열자 시큼한 냄새가 마당에 퍼졌다⁠. 근위병 하나가 코를 막았고⁠, 다른 하나가 침을 삼켰다⁠. 브리다는 단지를 끌어안고 하르벤의 수레 맨 앞에 실었다⁠. “⁠무는 왕실 물건이 아니에요⁠. 은행 물건도 아니고요⁠.⁠”

서기는 단지를 놓친 손을 어색하게 내리고⁠, 품에서 쪽지를 꺼내 읽었다⁠.

“⁠재상 각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관이 금고 밖에 머물면⁠, 누구 손에 있든 도둑의 손이다⁠.⁠」⁠”

“⁠재상은 왕관이 두 해 동안 페넬라 상관에 있을 때도 그렇게 말했어⁠?⁠”

서기가 대답하지 못하고 쪽지를 접었다⁠. 하르벤이 수레 위에서 큰 소리로 웃었고⁠, 근위병 둘이 하늘을 보았다⁠.

*

해가 기울 무렵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근위병 넷 사이로 오스벨이 말에서 내렸다⁠. 페넬라 깃털 모자도⁠, 줄무늬 바지도 아니었다⁠. 낡은 사냥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수염은 물감을 다 씻어 내 희끗했다⁠. 씻다가 덜 씻긴 자리가 턱 밑에 검게 남아 있었다⁠.

오스벨은 마당의 수레들을 보고⁠, 베틀 다리를 접는 직공들을 보고⁠, 무 단지를 끌어안은 브리다를 보았다⁠.

“⁠이델라는 어디 있소⁠?⁠”

브리다가 턱으로 뒤뜰을 가리켰다⁠.

오스벨이 뒤뜰로 들어섰을 때 이델라는 배나무 아래 서 있었다⁠. 오스벨은 이델라에게 다가가다가 밑동 곁의 흰 돌 두 개를 보고 멈췄다⁠. 왕은 한동안 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었다⁠. 사냥 망토 자락이 젖은 흙에 닿았다⁠.

“⁠두 번 다 나는 사냥을 나가 있었소⁠.⁠”

“⁠알아요⁠.⁠”

“⁠돌아와서 돌을 봤는데⁠, 묻지 않았소⁠. 묻으면 당신이 울 것 같아서⁠. 당신이 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보게 될까 봐⁠.⁠” 오스벨이 손을 뻗어 돌 하나를 만졌다가 금방 거두었다⁠. “⁠파는 거요⁠? 별궁을⁠? 이 돌까지⁠?⁠”

“⁠돌은 못 가져가요⁠. 배나무 뿌리가 감고 있어서⁠.⁠”

“⁠팔지 마시오⁠.⁠”

“⁠왕관을 사야 돼요⁠.⁠”

오스벨이 일어섰다⁠. 무릎에 흙이 묻어 있었다⁠. 왕은 이델라 앞에 섰다⁠. 키가 이델라보다 반 뼘 컸고⁠, 열다섯 해 동안 반 뼘 위에서 이델라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내려다보지 않고 눈높이를 맞추려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돌아오시오⁠.⁠”

“⁠어디로요⁠?⁠”

“⁠왕비로⁠. 이월 그믐 혼례를 당신과 다시 올리면 되오⁠. 새 관도 필요 없고⁠, 당신은 옛 관이 있고⁠. 진짜 왕관은 재상한테 어떻게든 찾아오라고 하겠소⁠. 별궁도 팔 필요 없고⁠.⁠” 오스벨은 말이 빨라졌다⁠. 솔베에게서 옮은 말버릇이었다⁠. “⁠칙허는⁠…⁠… 칙허는 그물세를 깎으면 되오⁠. 당신 혼례 때처럼⁠.⁠”

“⁠몬테가는요⁠? 벨라크 집 딸이 왕비로 돌아오면 서른여섯 상자를 오늘 당장 내놓으라고 할 거예요⁠.⁠”

“⁠그건 재상이⁠.⁠”

“⁠재상이요⁠.⁠” 이델라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담담했다⁠. “⁠폐하⁠, 제가 돌아가면 폐하는 또 마지막에 말한 사람 말을 들으실 거예요⁠. 아침엔 제 말⁠, 저녁엔 재상 말⁠, 밤엔 몬테가 말⁠. 저는 다시 금고에 내려가서 금화가 안 느는 걸 손끝으로 알면서 모르는 척하겠죠⁠. 폐하 곁에 있으면 그게 제일 쉬우니까요⁠.⁠”

오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돌아가지 않을래요⁠.⁠” 이델라가 말했다⁠. “⁠폐하가 싫어서가 아니에요⁠. 폐하 옆에 있던 제가 싫어서요⁠.⁠”

배나무 가지에서 녹은 눈이 한 방울 떨어져 오스벨의 희끗한 수염에 맺혔다⁠. 오스벨은 그것을 닦지 않았다⁠. 대신 이델라의 어깨 앞으로 늘어진 땋은 머리를 보았다⁠. 손을 들었다가⁠, 들어 올린 손을 망토 자락에 문질렀다⁠. 손바닥에 흙이 묻어 있었다⁠.

“⁠당신 머리를 땋은 걸 처음 보오⁠. 열다섯 해 동안 늘 올리고 있었소⁠.⁠”

“⁠올리려면 시녀가 넷 필요해요⁠. 지금은 브리다 하나예요⁠.⁠”

오스벨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다가 턱 밑의 덜 씻긴 물감 자국을 만졌다⁠. 손끝이 검어졌다⁠. 오스벨은 손끝을 내려다보고⁠, 이번에는 바지에 문지르지 않았다⁠. 그냥 쥐었다⁠.

“⁠칙허는 내가 쓰지 않겠소⁠, 라고 말하고 싶소⁠.⁠” 오스벨이 말했다⁠. “⁠그런데 내일 아침에 재상을 만나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나도 모르겠소⁠.⁠”

“⁠알아요⁠. 그래서 왕관을 사는 거예요⁠.⁠”

오스벨은 말에 올라 언덕을 내려갔다⁠. 근위병들이 뒤따랐다⁠. 이델라는 배나무 아래에서 말발굽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

시빌라를 기다리는 동안 이델라는 빈 방을 하나씩 돌았다⁠. 위층 침실에는 옷궤가 빠져나간 자리가 바닥에 희게 남아 있었다⁠. 부엌 화덕은 식어서 손을 대도 온기가 없었다⁠. 서재 창틀에는 지난밤 지도를 긋다 흘린 잉크 한 방울이 말라 붙어 있었다⁠. 이델라는 손톱으로 잉크 방울을 긁어 보았다⁠. 긁히지 않았다⁠. 다음 주인이 창틀을 닦을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었다⁠.

*

해가 다 지고 시빌라가 왔다⁠. 서기 둘이 납작한 상자 대신 소금 자루 하나를 들고 따라왔다⁠. 이델라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왕관을 상자에 담아 언덕을 내려가면 왕도 사람들이 다 쳐다볼 것이었다⁠. 소금 자루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마당의 수레들은 이미 떠난 뒤였다⁠. 하르벤이 마지막 수레에 브리다와 무 단지를 태우고 먼저 내려갔다⁠. 직공들과 베틀은 벨라크 상단 창고 동쪽 칸에 들어가 있었다⁠. 별궁에는 이델라와⁠, 열쇠 꾸러미와⁠, 텅 빈 방들만 남아 있었다⁠.

시빌라가 큰방 창가에 섰다⁠. 맨유리 너머로 나루의 불빛이 내려다보였다⁠.

“⁠좋은 집입니다⁠.⁠”

“⁠좋은 집이에요⁠. 겨울엔 창고가 춥고 여름엔 부엌이 더워요⁠. 빨래터 소식은 빨라요⁠. 페넬라 상관 이야기도 하루면 본궁 부엌까지 갈 거예요⁠.⁠”

“⁠기억해 두지요⁠.⁠”

서기가 소금 자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델라는 자루 입구를 풀었다⁠. 굵은 베냐 소금 사이에서 손끝에 금이 닿았다⁠. 이델라는 소금을 헤치고 왕관 테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금이 미지근해졌다⁠. 손톱으로 누르자 아주 조금 물러났다⁠. 열다섯 해 전 성당 계단에서 이델라의 머리에 한 번 얹혔던 무게였다⁠. 이델라는 자루 입구를 다시 묶었다⁠.

“⁠진짜예요⁠.⁠”

“⁠몬테가는 담보를 바꿔치기하지 않습니다⁠.⁠”

“⁠금화는 깎으시잖아요⁠.⁠”

시빌라의 눈이 이델라를 똑바로 보았다⁠. 웃음이 없었다⁠. 시빌라는 대답하지 않고 장갑을 벗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델라는 허리의 열쇠 꾸러미를 풀었다⁠. 별궁 창고 열쇠 셋과 대문 열쇠⁠, 뒤뜰 쪽문 열쇠가 고리에 꿰여 있었다⁠. 금고 열쇠는 따로 빼서 손에 쥐었다⁠. 나머지 꾸러미를 시빌라의 손바닥에 놓았다⁠. 놋쇠가 시빌라의 반지에 부딪혀 짧게 울었다⁠. 열쇠가 손을 떠나자 허리가 가벼워졌다⁠. 손가락이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뒤뜰 배나무요⁠.⁠”

“⁠예⁠.⁠”

“⁠봄마다 가지를 쳐 줘야 열매가 달려요⁠. 밑동의 돌은 건드리지 마세요⁠.⁠”

시빌라는 열쇠 꾸러미를 쥔 채 오래 이델라를 보았다⁠.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감독관님⁠.⁠”

이델라는 소금 자루를 들었다⁠. 자루가 무거웠다⁠. 소금의 무게와 금의 무게가 한 자루에 같이 실려 있었다⁠. 이델라는 자루를 어깨에 메고 대문을 나섰다⁠. 대문 기둥에 아직 간택 공고가 붙어 있었다⁠. 풀을 한 번만 발라 귀퉁이가 들려 있었다⁠. 이델라는 공고를 떼지 않았다⁠.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안 이델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의 별궁 큰방 창에 등불 하나가 켜졌다⁠. 시빌라가 켠 불이었다⁠. 뒤뜰의 배나무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가지 끝의 망울은 밤사이 조금 더 부풀 것이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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