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75자)

첫 배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첫 배는 일곱 시 정각에 밧줄을 풀었다⁠. 나는 맨투맨을 캐리어에 넣고 검은 반팔 티셔츠만 입고 탔다⁠. 회색은 이제 검색어였다⁠. 갑판으로 나가자 아침 바닷바람이 팔뚝을 할퀴었다⁠. 열여드레 동안 18도 방에서 산 몸이 바깥 바람 앞에서 오그라들었다⁠.

선착장에는 곽판순 할머니가 서 있었다⁠. 몸뻬에 장화⁠, 손에는 어제의 호스 대신 빈 고무 대야를 들었다⁠. 할머니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대야를 머리 위로 한 번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할머니 뒤로 재웅 선배가 조종기 없이 서 있었다⁠. 선배는 손을 흔들다가⁠, 흔드는 손이 부끄러운지 반쯤에서 멈췄다⁠.

혜란은 나오지 않았다⁠. 강욱도 나오지 않았다⁠. 출연자는 숙소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배가 섬 모퉁이를 돌자 언덕 위 숙소가 보였다⁠. 마당 끝 빨래줄에 수건 열한 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열 장은 흰색과 하늘색과 분홍이었다⁠. 맨 끝의 한 장만 색이 달랐다⁠. 거리가 멀어 색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알았다⁠. 나는 갑판 난간을 쥐고 수건이 섬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옆 의자에 앉은 남자가 휴대전화로 기사를 읽고 있었다⁠. 「⁠‘⁠밀물 하우스⁠’ 영상 속 작가는 누구⁠?⁠」 남자는 기사를 내리다가 내 팔뚝의 소름을 힐끔 보았다⁠. 나는 갑판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

열 시⁠, 공식 입장이 올라왔다⁠. 어제 혜란이 계단에서 내민 종이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해당 작가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며⁠, 출연자는 촬영 중 넘어진 스태프를 부축했을 뿐임을 알려 드립니다⁠」 나는 통영 버스터미널 대합실 의자에서 입장문을 읽었다⁠. 넘어진 스태프⁠. 이 분 사십 초 동안 넘어진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는 댓글이 첫 줄에 붙었다⁠. 「⁠부축을 입으로 함⁠?⁠」 좋아요가 삼천 개였다⁠.

강구안 뒷골목 모텔은 하룻밤 사만 원이었다⁠. 방에서 묵은 담배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면 옆 건물 벽이 손 닿는 거리에 있었다⁠. 침대 하나⁠, 텔레비전 하나⁠, 탁자 위 일회용 커피 두 봉지⁠. 나는 캐리어를 열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얼룩이 모래톱처럼 길게 번져 있었다⁠.

열여드레 동안 나는 남의 방을 화면으로 보았다⁠. 오늘은 내 방을 보는 화면이 없었다⁠. 화면이 없으니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고⁠, 아무도 보지 않으니 내가 어디 있는지 나도 잘 몰랐다⁠.

*

오후 세 시⁠, 실명이 나왔다⁠.

사건을 퍼 나르는 개인 방송 채널이었다⁠. 썸네일에 빨간 글씨가 박혀 있었다⁠. 「⁠[충격] 밀물 하우스 막내 작가 신상 공개⁠… 시즌 1 악마의 편집도 이 사람⁠?⁠」 영상은 십이 분이었다⁠. 앞 이 분은 드론 영상이었고⁠, 다음 삼 분은 내 대학 졸업 사진이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사진이었다⁠. 나머지는 시즌 1이었다⁠. 「⁠(⁠눈치 없음 주의⁠)⁠」 자막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진행자가 말했다⁠. 이 자막 하나로 출연자가 퇴사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자막을 쓴 작가가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내 개인 계정의 메시지함이 한 시간 만에 사백 개가 넘었다⁠. 나는 열지 않았다⁠. 열지 않아도 미리 보기 줄에 첫 문장이 떴다⁠. 「⁠조작 작가⁠」 「⁠출연자랑 놀아나면서 대본 썼냐⁠」 「⁠시즌 1 피해자한테 사과는 했냐⁠」 미리 보기 줄이 자꾸 아래로 밀렸다⁠. 밀리는 줄 사이에 낯익은 이름 하나가 있었다⁠. 시즌 1의 출연자였다⁠. 나는 이름이 뜬 줄만 눌렀다⁠.

「⁠작가님⁠. 이제 아시겠죠⁠. 자막 한 줄이 이름이 되는 거⁠.⁠」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굳었다⁠. 이 초 뒤 한 줄이 더 왔다⁠.

「⁠그래도 밥은 드세요⁠. 저 그때 사흘 굶었는데⁠, 굶는다고 아무것도 안 바뀌더라고요⁠.⁠」

나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대고 천장을 보았다⁠. 얼룩이 흐려졌다⁠. 흐려진 것이 얼룩인지 내 눈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탁자 위 일회용 커피 한 봉지를 뜯어 물 없이 반쯤 털어 먹었다⁠. 썼다⁠.

*

네 시⁠, 시즌 1 출연자의 말대로 밥을 먹으러 나갔다⁠. 모자를 눌러쓰고 강구안 시장 골목의 충무김밥 집에 들어갔다⁠. 가게 텔레비전에서 연예 정보 프로그램이 돌고 있었다⁠. 화면 아래 자막이 흘렀다⁠. 「⁠연애 예능 작가-출연자 영상 파문⁠… 제작진 “⁠작가 하차⁠”⁠」 자막 뒤로 숙소 마당의 빨래줄이 잠깐 지나갔다⁠.

김밥을 내온 주인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섬 방송 아가씨도 봤나⁠? 저 빨래 너는 총각⁠.⁠”

“⁠네⁠, 조금요⁠.⁠”

“⁠우리 손녀가 저 총각 땜에 수건을 다시 갠다 카더라⁠. 줄 맞춰 넌다꼬⁠.⁠” 할머니가 깍두기 접시를 내 앞으로 밀었다⁠. “⁠근데 작가가 우째 출연자를 좋아하노⁠. 일하러 갔으면 일을 해야지⁠.⁠”

“⁠그러게요⁠.⁠”

“⁠그래도 내는 저 총각 웃는 거 처음 봤다⁠. 테레비에서 사흘 내내 안 웃더만⁠, 저 흐릿한 거에서는 웃대⁠.⁠” 할머니는 혀를 찼다⁠. “⁠방송국 놈들이 웃는 거는 흐리게 해 놓고⁠, 우는 거는 크게 해 놓는다⁠. 맨날 그렇다⁠.⁠”

나는 오징어무침을 씹다가 혀를 깨물었다⁠. 할머니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우는 장면을 크게 잡는 일⁠, 내 삼 년이 거기 있었다⁠. 김밥 여덟 개를 다 먹었다⁠. 시즌 1 출연자의 말이 맞았다⁠. 굶는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먹어도 바뀌지 않았지만⁠, 먹고 나니 다음 일을 생각할 힘이 조금 생겼다⁠.

*

다섯 시⁠, 어머니가 전화했다⁠. 부산 영도에서 세탁소를 삼십 년 한 사람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다리미 김 빠지는 소리가 났다⁠.

“⁠니 테레비 나왔더라⁠.⁠”

“⁠엄마⁠, 그거 저 아니에요⁠.⁠”

“⁠니 맞다⁠. 저 맨투맨 내가 지난겨울에 드라이한 기다⁠. 왼쪽 소매 보풀 내가 떼 줬다⁠.⁠” 어머니가 다리미를 탁 내려놓았다⁠. “⁠얼굴 흐리게 해 놔도 니 엄마는 소매 보고 안다⁠.⁠”

나는 웃었다⁠. 웃는데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웃음과 메인 목을 둘 다 들었다⁠.

“⁠밥은⁠?⁠”

“⁠커피 먹었어요⁠.⁠”

“⁠커피가 밥이가⁠.⁠” 어머니는 손님에게 무언가 말하고 다시 수화기로 돌아왔다⁠. “⁠그 총각⁠, 테레비에 빨래 너는 거 나오대⁠. 수건을 두 개씩 집는 거 봤나⁠? 우리 세탁소 삼십 년 해 보니까⁠, 빨래 너는 거 보면 사람 안다⁠. 대충 너는 사람은 사람도 대충 대한다⁠. 그 총각은 수건 귀퉁이까지 편다⁠.⁠”

“⁠엄마⁠, 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그라믄 언제 하노⁠? 니 지금 어디고⁠?⁠”

“⁠통영이요⁠.⁠”

“⁠통영이면 집까지 두 시간이다⁠. 내려와라⁠. 김치찌개 끓이 놓께⁠.⁠”

“⁠조금만 있다가요⁠.⁠”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다리미 김이 한 번 더 빠졌다⁠. 전화를 끊기 전에 어머니가 말했다⁠.

“⁠은새야⁠. 니가 잘못한 기 있으면 잘못했다 캐라⁠. 근데 니가 안 한 것까지 했다 카지는 마라⁠. 세탁소에서도 남의 얼룩까지 우리가 묻혔다 카면⁠, 그다음부터 손님이 다 그 말만 믿는다⁠.⁠”

*

저녁 여덟 시⁠, 모텔 방문을 누가 두드렸다⁠. 세 번⁠, 천천히⁠. 기자가 아니었다⁠. 기자는 그렇게 천천히 두드리지 않는다⁠. 문을 열자 보름이 서 있었다⁠. 꽃집 앞치마를 입은 채였다⁠. 창원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온 얼굴이었다⁠.

“⁠작가님 계정에 통영 버스터미널 사진 올라왔더라고요⁠. 누가 찍어서⁠. 이 근처 모텔 몇 개 돌았어요⁠.⁠”

보름은 방에 들어와 탁자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 통화 기록이 떠 있었다⁠. 「⁠○○웨딩홀⁠」 오늘 오후에 세 번⁠.

“⁠예약 그대로 갈 거냐고 묻는 전화예요⁠. 시어머니 되실 분이 미루자고 하셨대요⁠. 식장에서는 위약금 얘기부터 하고요⁠.⁠”

“⁠보름 씨⁠, 저는⁠…⁠…⁠.⁠”

“⁠아직 안 끝났어요⁠.⁠” 보름이 화면을 넘겼다⁠. 커뮤니티 게시글이었다⁠. 「⁠밀물 하우스 영상 유출자 = 전여친 설⁠」 질투한 전 연인이 제작진에게서 영상을 빼돌려 올렸다는 글이었다⁠. 근거는 없었다⁠. 근거가 없어서 더 빨리 퍼졌다⁠. 댓글이 이천 개였다⁠. “⁠저 그 섬에 하룻밤 있었어요⁠. 영상 찍힌 날은 창원에 있었고요⁠. 그래도 사람들은 저를 봐요⁠. 이제 별점이 아니라 제 사진 밑에 글이 달려요⁠.⁠”

보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화가 나면 더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느렸다⁠.

“⁠작가님은 나가면 끝이죠⁠. 하차하고⁠, 방송국 안 다니면 되고⁠. 저는 가게가 거기 있어요⁠. 내일 아침에도 문 열어야 돼요⁠.⁠”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들으러 온 거 아니에요⁠.⁠” 보름은 강욱의 여동생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앉은 채로 한참 창밖의 벽을 보았다⁠. “⁠하나 물어볼게요⁠. 공식 입장⁠, 작가님이 쓴 거예요⁠?⁠”

“⁠아뇨⁠.⁠”

“⁠그럴 줄 알았어요⁠. 그 사람 이름을 지키는 문장이 너무 깔끔해서⁠.⁠” 보름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손가락 끝에 꽃물이 들어 있었다⁠. “⁠작가님⁠, 그 사람이 왜 삼 년 전에 문자 한 줄로 끝냈는지 아세요⁠?⁠”

“⁠제 등을 보고 울어서라고요⁠.⁠”

“⁠그건 반만이에요⁠.⁠” 보름이 고개를 저었다⁠. “⁠구 반장님 장례식에서 반장님 사모님이 그 사람 멱살을 잡았어요⁠. 니가 뒤에 있어서 우리 남편이 앞에 갔다고⁠. 그 사람⁠, 아무 말도 안 하고 맞고만 있었어요⁠. 그날 밤에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나는 누가 내 앞에 서는 게 제일 무섭다⁠. 누가 나 때문에 앞에 서면⁠, 그 사람이 다칠 것 같다⁠.⁠”

나는 숨을 멈췄다⁠. 빨래줄 끝⁠, 휴대전화를 돌려주던 차가운 손⁠. 작가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요⁠. 이 말을 한 사람은 나였다⁠. 강욱이 먼저 같은 말을 내게 했어야 했는데⁠, 강욱은 말하지 않고 내 손등만 쓸었다⁠.

“⁠다음 날 제가 그 사람 앞에 섰어요⁠. 엄마가 반대해도 같이 있겠다고⁠. 그날 아침에 문자가 왔어요⁠. 미안타⁠. 그만하자⁠.⁠” 보름이 탁자 위 일회용 커피 봉지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지금 작가님이 그 사람 앞에 서 있어요⁠. 혼자 다 뒤집어쓰고 혼자 나가서⁠. 그러면 그 사람 또 문자 한 줄 보내요⁠. 이번에는 작가님한테⁠.⁠”

보름은 일어섰다⁠. 문고리를 잡고 뒤돌아보았다⁠.

“⁠저 반지 녹여서 귀걸이 했어요⁠. 그 사람 말대로⁠. 결혼식 날 하려고요⁠. 결혼식은 할 거예요⁠. 미뤄도 할 거예요⁠.⁠” 보름의 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걸이는 아직 상자 안에 있을 것이었다⁠. “⁠작가님도 뭘 하든⁠, 남이 쓴 문장 말고 하세요⁠. 그거 하나 말하러 왔어요⁠.⁠”

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앞치마 끈이 문틀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

밤 열한 시⁠, 휴대전화가 떨었다⁠. 재웅 선배였다⁠. 영상 하나와 문자 하나⁠.

「⁠아니 근데 은새야⁠. 이거 보내면 나 잘림⁠. 근데 보냄⁠」

영상은 숙소 마당이었다⁠. 라이브 클립 그림이 아니었다⁠. 선배가 손에 든 카메라로 찍은 흔들리는 그림이었다⁠. 마당 평상에 강욱이 앉아 있었다⁠. 마이크 팩이 평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진행 피디가 무언가 말하자 강욱이 고개를 저었다⁠. 혜란이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혜란이 말했다⁠. 내일 아침 인터뷰⁠, 저녁 밀물 선택⁠. 오늘 하루 아무것도 안 찍혔다고⁠. 이러면 위약금이라고⁠.

강욱이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를 보았다⁠. 흔들리는 화면 너머로 강욱의 눈이 렌즈를 지나 나에게 왔다⁠.

“⁠작가님 불러 주이소⁠.⁠”

혜란이 무언가 말하려 했다⁠. 강욱이 한 번 더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안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겠습니더⁠.⁠”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문자가 한 줄 더 왔다⁠.

「⁠남4 오늘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안 했어⁠. 방금 처음 한 말이야⁠」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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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지율2026.11.01· 9화

    회색 맨투맨이 이제 검색어라는 말이 너무 슬프고 웃겨요. 막내 작가님 들킨 거예요?

    • 소하린작가2026.11.01

      들켰다기보다 옷이 먼저 유명해졌어요. 그래서 검은 반팔만 입고 바닷바람을 맞습니다.

첫 배 ·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