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2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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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새벽 다섯 시⁠, 나는 27번 화면을 켜지 않았다⁠. 켜지 않아도 빨래줄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았다⁠. 「⁠밀물 하우스⁠」 공식 계정의 메시지함이 밤새 천 개 넘게 찼다⁠. 제작진 몇 명이 돌려 보는 계정이었고⁠, 나도 비밀번호를 알았다⁠. 맨 위 메시지는 다섯 시 일 분에 왔다⁠.

「⁠회색 맨투맨 작가님 이름 뭐예요⁠?⁠」

아래로도 같은 질문이 줄지어 있었다⁠. 말투만 달랐다⁠. 나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맨투맨을 벗었다⁠. 벗고 나니 반팔 티셔츠 아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에어컨은 18도였다⁠. 다시 입었다⁠.

여섯 시⁠, 작가 방에 제작진 스무 명이 다 모였다⁠. 서울에서 메인 작가 선배가 영상 통화로 들어왔다⁠. 선배는 밤새 운 얼굴이었다⁠. 혜란은 스피커로 켜 둔 휴대전화를 방 한가운데 놓았다⁠. 편성 본부장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동남아 판권은 보류⁠. 협찬사 두 곳이 연락 왔어요⁠. 석 피디⁠, 오늘 안에 정리해요⁠. 공식 입장은 일단 ‘⁠확인 중⁠’으로⁠.⁠”

“⁠네⁠, 본부장님⁠.⁠”

“⁠그리고 시청률은 걱정하지 말래요⁠. 편성 쪽에서는 5회가 4는 넘을 거라고 하더라고⁠.⁠”

본부장은 마지막 말을 칭찬처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 안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재웅 선배가 「⁠아니 근데⁠…⁠…⁠」 하고 입을 열었다가 혜란과 눈이 마주치자 닫았다⁠.

*

여덟 시⁠, 선착장에 낚싯배 두 척이 붙었다⁠. 통영에서 빌린 배였다⁠. 기자 여섯과 카메라 넷이 내렸다⁠. 그중 한 사람은 개인 방송 채널 이름을 새긴 조끼를 입고 셀카봉을 들었다⁠. 셀카봉 끝 휴대전화 화면에 동시 시청자 숫자가 떠 있었다⁠.

곽판순 할머니가 먼저 나갔다⁠. 할머니는 몸뻬 바지에 장화를 신고 고무 대야 하나와 마당 호스를 끌고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대야를 선착장 입구에 엎어 놓고 대야 위에 올라섰다⁠. 호스 끝을 손가락으로 눌러 물을 부챗살처럼 뿌렸다⁠.

“⁠우리 섬은 표 끊고 들어온 사람만 손님이다⁠! 낚싯배 타고 온 사람은 고기다⁠!⁠”

물줄기가 카메라 렌즈를 정확히 때렸다⁠. 셀카봉 조끼가 뒷걸음질 치다가 밧줄에 걸려 넘어졌다⁠. 마을 사람 둘이 할머니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이장은 한 걸음 뒤에서 머리를 긁었다⁠.

“⁠할매⁠, 저 사람들도 섬에 돈 쓰고 갈 끼다⁠.⁠”

“⁠돈 쓰러 온 사람 얼굴이 아이다⁠. 남 얼굴 찍으러 온 얼굴이다⁠.⁠”

모니터실 창으로 선착장을 보던 막내 작가 하나가 「⁠할머니 최고⁠」라고 작게 말했다⁠.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호스는 나 때문에 들려 있었다⁠. 이장은 대합실 유리문의 공고 앞을 서성였다⁠. 「⁠이용객 변동에 따라 다시 검토합니다⁠」 오늘 섬에 들어온 사람은 평소보다 많았다⁠. 공고를 붙인 회사가 바란 사람들이 아니었다⁠.

*

열 시⁠, 마을회관 1층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왔다⁠. 도 소방본부 감찰계였다⁠. 진행 피디가 강욱을 숙소에서 데려왔다⁠. 강욱은 마을회관 1층 유리문 안에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서 있었다⁠. 나는 2층 계단참에서 유리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강욱은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또 한 번 끄덕였다⁠. 대답은 짧았다⁠. 입 모양으로 「⁠예⁠」만 읽혔다⁠.

통화는 십오 분 이어졌다⁠. 강욱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유리문을 나섰다⁠. 계단참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어깨가 한 번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어깨였다⁠. 진행 피디가 나중에 전해 주었다⁠. 영상이 사실이면 품위 유지 위반으로 징계 여부를 따지고⁠, 징계위원회는 7월 22일⁠, 그때까지 촬영은 본인 판단에 맡긴다고⁠.

열한 시⁠, 내 휴대전화로 모르는 번호가 걸려 왔다⁠.

“⁠작가님이에요⁠? 우리 오빠 신청서 받은 작가님⁠?⁠”

강욱의 여동생이었다⁠. 신청서 맨 아래에 적힌 연락처를 나도 기억했다⁠. 여동생은 숨도 안 쉬고 쏘아붙였다⁠.

“⁠회색 맨투맨 작가님 맞죠⁠? 아니라고 하지 마요⁠. 우리 오빠가 여름에 회색 입은 사람 좋아할 리가 없어⁠. 오빠는 회색 싫어해요⁠. 불 꺼진 재 색깔이라고⁠.⁠”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고 건 거 아니에요⁠.⁠” 여동생의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 “⁠제가 방송국에 고쳐 달랬지⁠, 부숴 달라고는 안 했잖아요⁠. 오빠 직장에서 전화 왔대요⁠. 우리 엄마 지금 청심환 드시고 누워 계세요⁠.⁠”

“⁠동생분⁠.⁠”

“⁠근데요⁠, 작가님⁠.⁠” 여동생이 잠깐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영상에서 오빠가 웃더라고요⁠. 흐리게 해 놨는데도 보여요⁠. 삼 년 만에 처음 봐요⁠. 그래서 더 열받아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한참 서 있었다⁠.

*

오후 두 시⁠, 혜란은 녹화를 멈췄다⁠. 열여드레 만에 처음이었다⁠. 기술 감독이 서버 앞에서 스위치를 하나씩 내렸고⁠, 모니터실 벽의 화면 마흔두 개가 차례로 까매졌다⁠. 1번 현관⁠, 2번 거실⁠, 15번 등대 전망대⁠, 27번 빨래줄⁠. 마지막 화면이 꺼지자 모니터실이 처음으로 어두워졌다⁠. 에어컨 소리만 남았다⁠. 나는 까만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화면 마흔두 개에 내 얼굴이 마흔두 번 비쳤다⁠.

출연자들은 마당에 모였다⁠. 혜란이 마당 평상 위에 올라섰다⁠.

“⁠촬영장 영상이 밖으로 나갔어요⁠. 휴대전화를 숨긴 사람이 있다는 제보가 있어요⁠. 지금부터 짐을 확인하겠습니다⁠. 동의 안 하시는 분은 지금 말씀하세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스태프 여섯이 방 다섯 개를 뒤졌다⁠. 설아의 방은 혜란이 직접 들어갔다⁠. 설아는 마당에 서서 팔짱을 끼고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이십 분 뒤 혜란이 빈손으로 나왔다⁠. 캐리어 안감까지 뜯어 봤다고 진행 피디가 작게 말했다⁠.

“⁠없네⁠.⁠”

“⁠없죠⁠.⁠” 설아가 팔짱을 풀었다⁠. “⁠제 짐 다 보셨으니까 이제 제가 하나 물어봐도 돼요⁠? 저 안 올렸어요⁠. 그럼 누가 올렸어요⁠?⁠”

혜란은 대답하지 않고 설아를 보았다⁠. 둘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둘 다 카메라 각도를 아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둘 다 카메라 없이 서 있었다⁠. 혜란이 먼저 웃었다⁠.

“⁠위설아 씨⁠, 저녁에 잠깐 봐요⁠. 할 얘기가 있어요⁠.⁠”

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욱은 마당 끝 빨래줄 아래 서서 줄곧 바다를 보고 있었다⁠. 강욱의 방에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강욱의 캐리어에는 옷 대신 빨래집게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고⁠, 짐을 뒤진 스태프가 웃지도 못하고 전했다⁠.

*

저녁 일곱 시⁠, 혜란은 마을회관 계단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1층과 2층 사이 계단참이었다⁠. 녹화가 멈춘 날이라 카메라는 없었다⁠. 혜란은 계단 난간에 기대어 오이 대신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공식 입장⁠. 내일 아침 열 시에 올라가⁠.⁠”

나는 종이를 받았다⁠. 「⁠영상 속 인물은 제작진 중 한 명으로⁠, 개인적 일탈 행위가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작가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며⁠, 출연자는 촬영 중 넘어진 스태프를 부축했을 뿐임을 알려 드립니다⁠. 제작진은 촬영장 관리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하차요⁠.⁠”

“⁠내일 첫 배⁠.⁠” 혜란이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남4는 촬영 계속해⁠. 계약 위약금이 있어서 나가도 손해고⁠. 부축했다는 건 여2가 증언할 거야⁠. 여2한테는 내가 줄 게 있어⁠.⁠”

“⁠무엇을요⁠?⁠”

“⁠최종회 마지막 장면⁠.⁠” 혜란이 웃었다⁠. “⁠네가 여2한테 약속한 거⁠. 이제 내가 지키면 되잖아⁠. 너는 없으니까⁠.⁠”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혜란은 등대 계단의 일까지 알고 있었다⁠.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었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사각지대가 없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혜란의 화면이었다⁠.

“⁠영상 올린 사람은요⁠?⁠” 내 목소리가 계단 벽에 부딪혔다⁠. “⁠카드가 원본이면⁠, 모니터 화면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은 트럭에 있던 사람이에요⁠. 피디님하고 재웅 선배⁠.⁠”

“⁠그리고 트럭 문 열려 있을 때 지나간 사람 전부⁠.⁠” 혜란은 난간에서 몸을 뗐다⁠. “⁠은새야⁠, 누가 올렸든 지금은 상관없어⁠. 불부터 꺼야지⁠. 불난 집에서 성냥 주인 찾는 사람이 어디 있니⁠?⁠”

“⁠강욱 씨 직장은요⁠?⁠”

“⁠그러니까 네가 나가는 거야⁠.⁠” 혜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작가가 혼자 일탈했고 출연자는 부축만 했다⁠. 그래야 남4 징계위에서 쓸 말이 생겨⁠. 너 남4 좋아하는 거 맞잖아⁠. 그럼 남4 직장을 먼저 지켜⁠. 네가 나가는 게 남4를 지키는 거야⁠.⁠”

혜란은 언제나 맞는 말로 이겼다⁠. 오늘은 맞는 말 안에 거짓말이 한 겹 들어 있었다⁠. 무엇이 거짓말인지 나는 아직 손으로 집어낼 수 없었다⁠. 혜란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다⁠.

“⁠배는 일곱 시야⁠. 늦지 마⁠.⁠”

여덟 시⁠, 모니터실 창으로 편집 트럭이 보였다⁠. 설아가 트럭 계단을 올라갔다⁠. 혜란이 문을 열어 주었고 문이 닫혔다⁠. 이십 분 뒤 설아가 나왔다⁠.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설아는 트럭 계단을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마을회관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선팅된 창이라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설아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얼굴로⁠, 그래도 보았다⁠.

설아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뗐다⁠. 딸깍⁠, 볼펜 누르는 시늉이었다⁠. 한 번⁠, 두 번⁠. 그러고는 숙소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거래를 받아들였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내 버릇을 아직 기억한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설아는 한 번도 뜻을 하나만 담아 움직인 적이 없었다⁠.

*

밤 열 시⁠, 나는 작가 방에서 짐을 쌌다⁠. 캐리어 하나에 맨투맨 세 벌⁠, 클립보드⁠, 질문지 묶음⁠, 충전기⁠. 열여드레 동안 쓴 질문지가 한 뼘 두께였다⁠. 맨 아래 장마다 묻지 않은 질문이 하나씩 있었다⁠. 나는 묶음을 캐리어 맨 밑에 깔았다⁠.

곽판순 할머니가 문을 밀고 들어와 검은 봉지 하나를 캐리어 위에 올렸다⁠. 멸치였다⁠.

“⁠육지 가서 밥 굶지 마래이⁠.⁠”

“⁠할머니⁠, 죄송해요⁠. 섬 이름이 이상하게 났어요⁠.⁠”

“⁠섬 이름은 원래 이상하다⁠. 달비가 뭐꼬⁠, 달비가⁠?⁠” 할머니는 내 묶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니 내일 첫 배 탄다 카대⁠. 막배 아이고 첫 배라서 다행이다⁠. 첫 배는 다시 들어오는 배가 있다⁠.⁠”

나는 대답 대신 멸치 봉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봉지 안에서 마른 멸치들이 바스락거렸다⁠. 사십 년 전 막배를 보낸 사람이 첫 배를 타는 사람에게 건네는 무게였다⁠.

할머니는 나가다 말고 창문을 가리켰다⁠.

“⁠저 총각 방 불⁠, 저녁부터 안 꺼진다⁠.⁠”

창밖 언덕 위 숙소 2층⁠, 왼쪽 끝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녹화가 멈춘 날이라 숙소의 다른 창은 일찍 까매졌다⁠. 강욱의 창만 하얗게 남았다⁠.

자정 무렵 기술 감독이 서버를 다시 올렸다⁠. 모니터실 벽에 화면이 하나씩 돌아왔다⁠. 나는 짐을 들고 마지막으로 2층에 올라갔다⁠. 27번 화면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빨래줄이었다⁠. 강욱이 자정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새벽에만 널던 사람이었다⁠.

흰 수건⁠, 하늘색⁠, 분홍⁠. 열 사람 몫⁠. 강욱은 빨래집게를 두 개씩 꽂고 한 뼘씩 사이를 두었다⁠. 줄 맨 끝에 수건 하나를 더 걸었다⁠. 숙소에 없는 색이었다⁠. 회색이었다⁠. 강욱은 회색 수건의 귀퉁이를 손바닥으로 한참 눌러 펴고 나서⁠, 마을회관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화면 앞에서 소매를 걷었다⁠. 걷은 손으로 화면을 짚었다⁠. 화면은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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