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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새벽 다섯 시, 나는 27번 화면을 켜지 않았다. 켜지 않아도 빨래줄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았다. 「밀물 하우스」 공식 계정의 메시지함이 밤새 천 개 넘게 찼다. 제작진 몇 명이 돌려 보는 계정이었고, 나도 비밀번호를 알았다. 맨 위 메시지는 다섯 시 일 분에 왔다.
「회색 맨투맨 작가님 이름 뭐예요?」
아래로도 같은 질문이 줄지어 있었다. 말투만 달랐다. 나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맨투맨을 벗었다. 벗고 나니 반팔 티셔츠 아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에어컨은 18도였다. 다시 입었다.
여섯 시, 작가 방에 제작진 스무 명이 다 모였다. 서울에서 메인 작가 선배가 영상 통화로 들어왔다. 선배는 밤새 운 얼굴이었다. 혜란은 스피커로 켜 둔 휴대전화를 방 한가운데 놓았다. 편성 본부장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동남아 판권은 보류. 협찬사 두 곳이 연락 왔어요. 석 피디, 오늘 안에 정리해요. 공식 입장은 일단 ‘확인 중’으로.”
“네, 본부장님.”
“그리고 시청률은 걱정하지 말래요. 편성 쪽에서는 5회가 4는 넘을 거라고 하더라고.”
본부장은 마지막 말을 칭찬처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 안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재웅 선배가 「아니 근데……」 하고 입을 열었다가 혜란과 눈이 마주치자 닫았다.
*
여덟 시, 선착장에 낚싯배 두 척이 붙었다. 통영에서 빌린 배였다. 기자 여섯과 카메라 넷이 내렸다. 그중 한 사람은 개인 방송 채널 이름을 새긴 조끼를 입고 셀카봉을 들었다. 셀카봉 끝 휴대전화 화면에 동시 시청자 숫자가 떠 있었다.
곽판순 할머니가 먼저 나갔다. 할머니는 몸뻬 바지에 장화를 신고 고무 대야 하나와 마당 호스를 끌고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대야를 선착장 입구에 엎어 놓고 대야 위에 올라섰다. 호스 끝을 손가락으로 눌러 물을 부챗살처럼 뿌렸다.
“우리 섬은 표 끊고 들어온 사람만 손님이다! 낚싯배 타고 온 사람은 고기다!”
물줄기가 카메라 렌즈를 정확히 때렸다. 셀카봉 조끼가 뒷걸음질 치다가 밧줄에 걸려 넘어졌다. 마을 사람 둘이 할머니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이장은 한 걸음 뒤에서 머리를 긁었다.
“할매, 저 사람들도 섬에 돈 쓰고 갈 끼다.”
“돈 쓰러 온 사람 얼굴이 아이다. 남 얼굴 찍으러 온 얼굴이다.”
모니터실 창으로 선착장을 보던 막내 작가 하나가 「할머니 최고」라고 작게 말했다.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호스는 나 때문에 들려 있었다. 이장은 대합실 유리문의 공고 앞을 서성였다. 「이용객 변동에 따라 다시 검토합니다」 오늘 섬에 들어온 사람은 평소보다 많았다. 공고를 붙인 회사가 바란 사람들이 아니었다.
*
열 시, 마을회관 1층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왔다. 도 소방본부 감찰계였다. 진행 피디가 강욱을 숙소에서 데려왔다. 강욱은 마을회관 1층 유리문 안에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서 있었다. 나는 2층 계단참에서 유리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강욱은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또 한 번 끄덕였다. 대답은 짧았다. 입 모양으로 「예」만 읽혔다.
통화는 십오 분 이어졌다. 강욱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유리문을 나섰다. 계단참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어깨가 한 번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어깨였다. 진행 피디가 나중에 전해 주었다. 영상이 사실이면 품위 유지 위반으로 징계 여부를 따지고, 징계위원회는 7월 22일, 그때까지 촬영은 본인 판단에 맡긴다고.
열한 시, 내 휴대전화로 모르는 번호가 걸려 왔다.
“작가님이에요? 우리 오빠 신청서 받은 작가님?”
강욱의 여동생이었다. 신청서 맨 아래에 적힌 연락처를 나도 기억했다. 여동생은 숨도 안 쉬고 쏘아붙였다.
“회색 맨투맨 작가님 맞죠? 아니라고 하지 마요. 우리 오빠가 여름에 회색 입은 사람 좋아할 리가 없어. 오빠는 회색 싫어해요. 불 꺼진 재 색깔이라고.”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고 건 거 아니에요.” 여동생의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 “제가 방송국에 고쳐 달랬지, 부숴 달라고는 안 했잖아요. 오빠 직장에서 전화 왔대요. 우리 엄마 지금 청심환 드시고 누워 계세요.”
“동생분.”
“근데요, 작가님.” 여동생이 잠깐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영상에서 오빠가 웃더라고요. 흐리게 해 놨는데도 보여요. 삼 년 만에 처음 봐요. 그래서 더 열받아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한참 서 있었다.
*
오후 두 시, 혜란은 녹화를 멈췄다. 열여드레 만에 처음이었다. 기술 감독이 서버 앞에서 스위치를 하나씩 내렸고, 모니터실 벽의 화면 마흔두 개가 차례로 까매졌다. 1번 현관, 2번 거실, 15번 등대 전망대, 27번 빨래줄. 마지막 화면이 꺼지자 모니터실이 처음으로 어두워졌다. 에어컨 소리만 남았다. 나는 까만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화면 마흔두 개에 내 얼굴이 마흔두 번 비쳤다.
출연자들은 마당에 모였다. 혜란이 마당 평상 위에 올라섰다.
“촬영장 영상이 밖으로 나갔어요. 휴대전화를 숨긴 사람이 있다는 제보가 있어요. 지금부터 짐을 확인하겠습니다. 동의 안 하시는 분은 지금 말씀하세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스태프 여섯이 방 다섯 개를 뒤졌다. 설아의 방은 혜란이 직접 들어갔다. 설아는 마당에 서서 팔짱을 끼고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이십 분 뒤 혜란이 빈손으로 나왔다. 캐리어 안감까지 뜯어 봤다고 진행 피디가 작게 말했다.
“없네.”
“없죠.” 설아가 팔짱을 풀었다. “제 짐 다 보셨으니까 이제 제가 하나 물어봐도 돼요? 저 안 올렸어요. 그럼 누가 올렸어요?”
혜란은 대답하지 않고 설아를 보았다. 둘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둘 다 카메라 각도를 아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둘 다 카메라 없이 서 있었다. 혜란이 먼저 웃었다.
“위설아 씨, 저녁에 잠깐 봐요. 할 얘기가 있어요.”
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욱은 마당 끝 빨래줄 아래 서서 줄곧 바다를 보고 있었다. 강욱의 방에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강욱의 캐리어에는 옷 대신 빨래집게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고, 짐을 뒤진 스태프가 웃지도 못하고 전했다.
*
저녁 일곱 시, 혜란은 마을회관 계단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1층과 2층 사이 계단참이었다. 녹화가 멈춘 날이라 카메라는 없었다. 혜란은 계단 난간에 기대어 오이 대신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공식 입장. 내일 아침 열 시에 올라가.”
나는 종이를 받았다. 「영상 속 인물은 제작진 중 한 명으로, 개인적 일탈 행위가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작가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며, 출연자는 촬영 중 넘어진 스태프를 부축했을 뿐임을 알려 드립니다. 제작진은 촬영장 관리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하차요.”
“내일 첫 배.” 혜란이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남4는 촬영 계속해. 계약 위약금이 있어서 나가도 손해고. 부축했다는 건 여2가 증언할 거야. 여2한테는 내가 줄 게 있어.”
“무엇을요?”
“최종회 마지막 장면.” 혜란이 웃었다. “네가 여2한테 약속한 거. 이제 내가 지키면 되잖아. 너는 없으니까.”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혜란은 등대 계단의 일까지 알고 있었다.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었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사각지대가 없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혜란의 화면이었다.
“영상 올린 사람은요?” 내 목소리가 계단 벽에 부딪혔다. “카드가 원본이면, 모니터 화면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은 트럭에 있던 사람이에요. 피디님하고 재웅 선배.”
“그리고 트럭 문 열려 있을 때 지나간 사람 전부.” 혜란은 난간에서 몸을 뗐다. “은새야, 누가 올렸든 지금은 상관없어. 불부터 꺼야지. 불난 집에서 성냥 주인 찾는 사람이 어디 있니?”
“강욱 씨 직장은요?”
“그러니까 네가 나가는 거야.” 혜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작가가 혼자 일탈했고 출연자는 부축만 했다. 그래야 남4 징계위에서 쓸 말이 생겨. 너 남4 좋아하는 거 맞잖아. 그럼 남4 직장을 먼저 지켜. 네가 나가는 게 남4를 지키는 거야.”
혜란은 언제나 맞는 말로 이겼다. 오늘은 맞는 말 안에 거짓말이 한 겹 들어 있었다. 무엇이 거짓말인지 나는 아직 손으로 집어낼 수 없었다. 혜란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다.
“배는 일곱 시야. 늦지 마.”
여덟 시, 모니터실 창으로 편집 트럭이 보였다. 설아가 트럭 계단을 올라갔다. 혜란이 문을 열어 주었고 문이 닫혔다. 이십 분 뒤 설아가 나왔다.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설아는 트럭 계단을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마을회관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선팅된 창이라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설아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얼굴로, 그래도 보았다.
설아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뗐다. 딸깍, 볼펜 누르는 시늉이었다. 한 번, 두 번. 그러고는 숙소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거래를 받아들였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내 버릇을 아직 기억한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설아는 한 번도 뜻을 하나만 담아 움직인 적이 없었다.
*
밤 열 시, 나는 작가 방에서 짐을 쌌다. 캐리어 하나에 맨투맨 세 벌, 클립보드, 질문지 묶음, 충전기. 열여드레 동안 쓴 질문지가 한 뼘 두께였다. 맨 아래 장마다 묻지 않은 질문이 하나씩 있었다. 나는 묶음을 캐리어 맨 밑에 깔았다.
곽판순 할머니가 문을 밀고 들어와 검은 봉지 하나를 캐리어 위에 올렸다. 멸치였다.
“육지 가서 밥 굶지 마래이.”
“할머니, 죄송해요. 섬 이름이 이상하게 났어요.”
“섬 이름은 원래 이상하다. 달비가 뭐꼬, 달비가?” 할머니는 내 묶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니 내일 첫 배 탄다 카대. 막배 아이고 첫 배라서 다행이다. 첫 배는 다시 들어오는 배가 있다.”
나는 대답 대신 멸치 봉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봉지 안에서 마른 멸치들이 바스락거렸다. 사십 년 전 막배를 보낸 사람이 첫 배를 타는 사람에게 건네는 무게였다.
할머니는 나가다 말고 창문을 가리켰다.
“저 총각 방 불, 저녁부터 안 꺼진다.”
창밖 언덕 위 숙소 2층, 왼쪽 끝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녹화가 멈춘 날이라 숙소의 다른 창은 일찍 까매졌다. 강욱의 창만 하얗게 남았다.
자정 무렵 기술 감독이 서버를 다시 올렸다. 모니터실 벽에 화면이 하나씩 돌아왔다. 나는 짐을 들고 마지막으로 2층에 올라갔다. 27번 화면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빨래줄이었다. 강욱이 자정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새벽에만 널던 사람이었다.
흰 수건, 하늘색, 분홍. 열 사람 몫. 강욱은 빨래집게를 두 개씩 꽂고 한 뼘씩 사이를 두었다. 줄 맨 끝에 수건 하나를 더 걸었다. 숙소에 없는 색이었다. 회색이었다. 강욱은 회색 수건의 귀퉁이를 손바닥으로 한참 눌러 펴고 나서, 마을회관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화면 앞에서 소매를 걷었다. 걷은 손으로 화면을 짚었다. 화면은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