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01자)

김치 냉장고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아침 아홉 시⁠, 모르는 번호가 울렸다⁠. 모텔 창밖 벽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실외기 위를 걸어 다녔다⁠. 나는 받지 않으려다가 끝자리를 보고 받았다⁠. 끝자리가 0228이었다⁠. 2월 28일⁠. 설아가 고백방에서 생일이라고 말한 날이었다⁠.

“⁠작가님⁠, 저예요⁠. 소리 작게 할게요⁠. 여기 화장실이에요⁠.⁠”

“⁠설아 씨⁠, 휴대전화⁠…⁠…⁠.⁠”

“⁠김치 냉장고 맨 아래 칸이요⁠. 할머니 열무김치 통 밑에⁠, 비닐 세 겹⁠. 피디님이 캐리어 안감까지 뜯을 때 저는 김치 냄새 맡으면서 웃었어요⁠.⁠” 설아의 목소리가 타일 벽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밤마다 몰래 나가서 숏폼 찍었어요⁠. 나가면 올리려고⁠. 섬 생활 브이로그요⁠. 근데 그중 하나에 이상한 게 찍혔어요⁠.⁠”

“⁠무엇이 찍혔는데요⁠?⁠”

“⁠전화로는 안 보여 드려요⁠.⁠” 설아가 숨을 한 번 골랐다⁠. “⁠작가님 얼굴 보고 줘야 돼요⁠. 제가 이걸 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작가님 얼굴 보고 알고 싶어요⁠.⁠”

문밖에서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아가 큰 소리로 「⁠저 배 아파요⁠!⁠」라고 외치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저 피디님한테 거래 받았어요⁠. 최종회 마지막 장면 준대요⁠. 대신 넘어진 스태프를 강욱 씨가 부축하는 걸 제가 봤다고 말하기로⁠. 아직 대답 안 했어요⁠. 오늘 밤 열두 시까지예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쥔 채 침대 끝에 앉았다⁠. 달비섬으로 들어가는 막배는 오후 네 시였다⁠. 표를 사면 내 이름이 남는다⁠. 내 이름은 이제 검색어였다⁠.

검색창에 내 이름을 쳐 보았다⁠. 연관 검색어가 줄줄이 따라 나왔다⁠. 「⁠기은새 작가⁠」 「⁠기은새 맨투맨⁠」 「⁠기은새 시즌1⁠」 「⁠기은새 남4⁠」 맨 끝에 「⁠기은새 나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내가 몇 살인지까지 궁금해했다⁠. 스물여섯 해 동안 아무도 묻지 않던 것이었다⁠. 나는 검색창을 지우고 할머니 번호를 찾았다⁠.

*

나는 곽판순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할머니는 신호가 두 번 가기도 전에 받았다⁠.

“⁠니 밥은 묵었나⁠?⁠”

“⁠할머니⁠, 저 섬에 다시 들어가야 돼요⁠. 배표 없이⁠.⁠”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장구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혼자 장구채를 무릎에 두드리는 소리였다⁠.

“⁠우리 아들 배 있다⁠. 오늘 밤 미륵도 쪽 작은 항구로 고기 넘기러 간다⁠. 열 시에 거기 있으래이⁠. 아들한테는 내가 말해 놓께⁠.⁠”

“⁠고마워요⁠, 할머니⁠.⁠”

“⁠고맙기는⁠. 첫 배 타고 나간 사람은 막배 말고 고깃배로 들어오는 기다⁠. 그게 섬 법이다⁠.⁠” 할머니가 장구를 한 번 크게 쳤다⁠. “⁠그 총각 어제 밥도 안 묵었다⁠. 니가 와서 멕이라⁠.⁠”

*

밤 열 시⁠, 미륵도 작은 항구에 할머니 아들의 어선이 붙어 있었다⁠. 선장은 쉰 넘은 남자였고 껌을 씹었다⁠. 나를 보더니 껌을 한 번 딱 터뜨리고 말했다⁠.

“⁠타소⁠.⁠”

선장은 두 글자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타실 뒤 좁은 의자에 앉았다⁠.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선 상자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휴대전화로 플랫폼을 열었다⁠. 5회가 시작하고 있었다⁠.

등대가 나왔다⁠. 서쪽 바다가 주황색으로 녹고⁠, 설아가 미션 카드를 읽고⁠, 강욱이 카드를 보지 않고 말했다⁠. 「⁠설아 씨랑 있으면 파도 소리가 작게 들립니더⁠」 내가 쓴 세 줄이 텔레비전 소리로 나오니 남이 쓴 문장 같았다⁠. 마지막 한 줄에서 자막이 떴다⁠. 「⁠제가 시키고 싶은 거는⁠, 아무것도요⁠」 자막 아래 작은 글씨로 「⁠서툰 남자의 진심⁠」

조타실의 선장이 고개를 돌려 내 휴대전화 화면을 보았다⁠. 껌을 딱 터뜨렸다⁠.

“⁠우리 배는 또 안 나오네⁠.⁠”

“⁠다음 회에는 나올 거예요⁠.⁠”

“⁠그 말 지난번에도 들었소⁠.⁠”

방송 아래 실시간 댓글 창이 빠르게 흘렀다⁠. 지난주와 결이 달랐다⁠. 「⁠이거 작가가 써 준 대사 아님⁠?⁠」 「⁠회색 맨투맨이 쓴 거네ㅋㅋ⁠」 「⁠아무것도요는 진짜 같은데⁠」 「⁠진짜 같은 것도 써 줬겠지⁠」 등대 위의 세 줄과 마지막 한 줄이 같은 의심 속에 섞였다⁠. 내가 쓴 문장과 강욱이 한 문장을 사람들은 가려내지 못했다⁠. 가려낼 까닭도 없었다⁠. 둘 다 내 이름 밑에 묶여 있었다⁠.

선장이 조타실 창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남의 말을 잘도 하네⁠.⁠”

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꺼진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흐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열한 시 반⁠, 단톡방에 숫자가 떴다⁠. 나는 아직 단톡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내보내지 않았다⁠.

「⁠[혜란] 5회 4⁠.4%⁠. 최고⁠」

박수 이모티콘이 열둘 달렸다⁠. 지난주보다 일곱 개가 적었다⁠. 재웅 선배는 아무것도 달지 않았다⁠. 배가 달비섬 앞바다로 들어서자 언덕 위 숙소의 불빛이 보였다⁠. 2층 왼쪽 끝 창은 오늘 밤도 꺼지지 않았다⁠.

*

어선은 선착장 반대편 갯바위 옆에 나를 내려 주었다⁠. 선장은 밧줄을 잡아 준 손을 거두며 한마디를 더 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니 그 총각 좋아한다 카대⁠.⁠”

“⁠…⁠…네⁠.⁠”

“⁠그라믄 좋아하소⁠.⁠” 껌이 딱 터졌다⁠. “⁠좋아하는 거는 죄가 아이다⁠. 배 이름 안 나오는 기 죄지⁠.⁠”

곽판순 할머니의 창고는 선착장 옆 냉동 창고와 편집 트럭 사이에 있었다⁠. 창고 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을 밀자 김치 냉장고 두 대가 웅웅 돌고 있었고⁠, 두 대 사이 플라스틱 상자 위에 설아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잠옷 위에 바람막이를 걸쳤다⁠. 손에 비닐로 감싼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진짜 오셨네⁠.⁠” 설아가 웃었다⁠. “⁠고깃배 타고 오셨죠⁠? 비린내 풍겨요⁠.⁠”

“⁠설아 씨는 김치 냄새 풍겨요⁠.⁠”

“⁠사흘째예요⁠. 지워지지가 않아요⁠.⁠”

설아가 휴대전화 비닐을 벗겼다⁠. 화면을 켜고 영상 하나를 띄워 내게 내밀었다⁠. 화면 위 시간 표시는 7월 17일 오후 8시 41분이었다⁠.

영상은 설아의 얼굴로 시작했다⁠. 설아는 김치 냉장고 앞에서 열무김치 통을 들고 카메라에 대고 속삭였다⁠. 「⁠여러분⁠, 섬 생활 극비 브이로그⁠. 지금 할머니 김치 훔치러 왔어요⁠.⁠」 설아가 창고의 작은 창 쪽으로 몸을 돌리자 화면 뒤로 창밖이 잡혔다⁠. 담 너머 편집 트럭⁠, 활짝 열린 뒷문⁠, 문 안의 모니터 불빛⁠.

모니터 앞에 혜란이 서 있었다⁠.

혜란은 휴대전화를 들어 모니터에 대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은 초록빛이었다⁠. 한참 뒤 혜란이 휴대전화를 내리고 귀에 댔다⁠. 창 너머라 소리가 작았다⁠. 설아가 소리를 끝까지 올렸다⁠. 냉장고 모터 소리 위로 혜란의 목소리가 얹혔다⁠.

「⁠열한 시 반에 올려⁠. 얼굴은 흐리게⁠, 맨투맨은 살려⁠. 대행사 계정 말고 새로 만든 계정으로⁠. 응⁠. 기사 붙일 데는 내가 따로 연락해⁠.⁠」

영상 속 설아가 창에서 몸을 떼며 「⁠뭐야⁠」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거기서 영상이 끝났다⁠.

창고 안에 김치 냉장고 두 대의 모터 소리만 남았다⁠. 셔츠 가슴 주머니⁠, 단추 채운 소리⁠. 내가 미쳤니⁠? 누가 올렸든 지금은 상관없어⁠. 혜란의 목소리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맞는 말 안에 한 겹 들어 있던 거짓말이⁠, 이제 손에 잡혔다⁠.

“⁠피디님이 올렸어요⁠.⁠” 설아가 말했다⁠. “⁠노이즈 마케팅이요⁠. 숏폼 하는 사람은 다 알아요⁠. 욕먹는 영상이 제일 빨리 퍼져요⁠. 4⁠.4 나왔죠⁠?⁠”

“⁠나왔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설아는 휴대전화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피디님이 마지막 장면 준대요⁠. 작가님도 준다고 했고⁠. 둘 다 준다는데⁠, 저는 둘 다 안 받을래요⁠.⁠”

“⁠왜요⁠?⁠”

“⁠저 지는 그림 못 견뎌요⁠. 근데요⁠, 남이 짜 준 그림에서 이기는 건 더 못 견디겠어요⁠.⁠” 설아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등대에서 강욱 씨가 아무것도요 할 때 알았어요⁠. 저 지금 남의 대사 받고 웃고 있구나⁠. 그거 화면으로 다시 보면 저 너무 창피할 것 같아요⁠. 팔로워 사만 명이 그 창피한 얼굴을 저장할 거고⁠.⁠”

“⁠이거 쓰면 설아 씨도 터져요⁠. 휴대전화 숨긴 거⁠, 계약 위반이에요⁠.⁠”

“⁠알아요⁠. 위약금 오천이래요⁠. 할부가 두 배 되는 거죠⁠.⁠” 설아는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그러니까 작가님이 정하세요⁠. 저는 작가님 편 고른 거예요⁠. 쓸지 말지는 작가님이 고르세요⁠. 작가님 질문지 맨 밑에 있는 질문처럼⁠.⁠”

설아가 일어나 바람막이 지퍼를 올렸다⁠.

“⁠아⁠, 그리고⁠. 강욱 씨도 불렀어요⁠. 저 그림 짜는 거 잘해요⁠.⁠”

설아가 창고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문틈으로 키 큰 그림자가 들어왔다⁠.

*

창고는 둘이 서기에는 좁았다⁠. 김치 냉장고와 플라스틱 상자 사이에 겨우 두 사람 몫의 바닥이 있었다⁠. 강욱은 문틀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남색 티셔츠에 김치 냄새가 금세 뱄다⁠.

“⁠밥은 묵었습니꺼⁠?⁠”

“⁠충무김밥이요⁠. 여덟 개⁠.⁠”

“⁠저는 안 묵었습니더⁠.⁠” 강욱이 플라스틱 상자 위에 앉았다⁠. 무릎이 내 무릎에 닿았다⁠. “⁠작가님 혼자 나간 거⁠, 화났습니더⁠.⁠”

“⁠보름 씨가 그랬어요⁠. 강욱 씨는 누가 자기 앞에 서는 게 제일 무섭다고⁠.⁠”

강욱이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이고 있다가 일어섰다⁠. 좁은 창고에서 일어서니 정수리가 천장 전구에 닿을 듯했다⁠. 강욱은 등을 돌려 티셔츠 아랫단을 잡고 천천히 끌어 올렸다⁠.

등이 나왔다⁠. 날갯죽지 아래부터 허리 위까지⁠, 피부가 다른 결로 굳어 있었다⁠. 매끈한 자리와 오그라든 자리가 번갈아 이어져⁠, 썰물에 드러난 모래톱처럼 물결무늬를 이루었다⁠. 전구 불빛 아래에서 흉터는 분홍과 하양 사이의 색이었다⁠.

“⁠보름이는 이거 보고 울었습니더⁠.⁠”

나는 울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 손끝을 흉터 가장자리에 댔다⁠. 강욱의 등 근육이 한 번 움찔했다⁠. 피부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흉터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결이 손바닥 아래에서 오르내렸다⁠. 숨이었다⁠. 강욱의 숨이 길었다⁠.

“⁠안 울어요⁠.⁠” 내 목소리가 김치 냉장고 모터 소리 밑으로 깔렸다⁠. “⁠화면으로 봤으면 저는 이걸 크게 잡았을 거예요⁠. 음악 깔고⁠, 자막 달고⁠. 근데 지금은 화면이 아니라서요⁠. 그냥 강욱 씨 등이에요⁠.⁠”

강욱이 돌아섰다⁠. 티셔츠가 흘러내려 흉터를 덮었다⁠. 강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았다⁠. 김치 냄새와 생선 비린내와 비누 냄새가 섞였다⁠. 강욱의 턱이 내 정수리에 닿았다⁠. 내 손은 아직 강욱의 등 위에 있었다⁠. 이번에는 천 너머로 결이 느껴졌다⁠.

강욱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먼저 내 이마에 닿았고⁠, 다음에 눈꺼풀에⁠, 다음에 입술에 닿았다⁠. 풍어제 밤보다 느렸다⁠. 서두를 까닭이 없다는 듯이⁠. 강욱의 손이 내 반팔 소매 밑으로 들어와 팔뚝의 소름을 쓸었다⁠. 소름이 가라앉았다⁠. 김치 냉장고 문에 내 등이 닿았고⁠, 문짝의 냉기가 등을 타고 내려갔는데 앞은 더웠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들어가기 전에 길게⁠, 길게⁠. 할머니가 가르친 숨이었다⁠.

“⁠작가님⁠.⁠” 강욱이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댔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 안 하께예⁠. 대신 혼자 하지는 마이소⁠.⁠”

“⁠혼자 안 할게요⁠.⁠”

“⁠약속 질문지에 적어 놓으이소⁠. 맨 밑에⁠.⁠”

나는 웃었다⁠. 강욱도 웃었다⁠. 소리가 났다⁠.

*

창고 문이 열렸다⁠.

손전등 불빛이 먼저 들어왔다⁠. 불빛이 김치 냉장고를 쓸고⁠, 플라스틱 상자를 쓸고⁠, 우리 둘의 얼굴에서 멈췄다⁠. 강욱이 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나는 강욱의 팔을 잡아 옆으로 끌었다⁠. 둘이 나란히 섰다⁠.

손전등 뒤에서 혜란이 오이를 씹었다⁠. 아주 천천히 씹었다⁠.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다며⁠.⁠”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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