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06자)

드론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편집 트럭의 모니터 화면은 초록빛이었다⁠. 야간 촬영 모드로 찍힌 그림이라 사람 얼굴이 물속처럼 번졌다⁠. 냉동 창고 지붕 높이에서 내려다본 각도였다⁠. 화면 아래쪽에 실외기의 둥근 팬이 보였고⁠, 팬 옆 벽에 두 사람이 붙어 있었다⁠.

키 큰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회색 맨투맨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목에서 헤드셋이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둘의 이마가 닿고⁠, 입술이 닿았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등을 감쌌다⁠. 여자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화면 시간 표시로 이 분 사십 초였다⁠.

나는 내 등을 보았다⁠. 화면 속 회색 천 위에 놓인 손바닥을 처음으로 바깥에서 보았다⁠. 강욱의 손은 생각보다 컸다⁠.

혜란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내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장면에서 멈췄다⁠. 혜란은 그런 장면을 고르는 일로 이십 년을 산 사람이었다⁠.

재웅 선배는 트럭 구석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부러진 프로펠러를 올려놓고 나를 보지 않았다⁠.

“⁠이거 내 금고에 있어⁠.⁠” 혜란이 메모리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들었다⁠. “⁠원본은 이거 하나⁠. 백업은 없어⁠. 재웅이가 새벽에 가져와서 나만 봤어⁠.⁠”

“⁠지워 주세요⁠.⁠”

“⁠지우면 네가 내 말 들을 이유가 없잖아⁠.⁠”

혜란은 카드를 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단추를 채우는 소리가 트럭 안에서 크게 들렸다⁠.

“⁠조건 말할게⁠. 최종회까지 남4는 여2야⁠. 네가 쓴다⁠. 대사도 쓰고⁠, 그림도 짜고⁠. 생방송 최종 선택에서 남4가 여2 손 잡는 데까지⁠. 그리고 너는 오늘 밤 남4랑 끝내⁠. 다시는 둘이 사각지대에 서지 마⁠.⁠”

“⁠피디님⁠.⁠”

“⁠이거 나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지⁠?⁠” 혜란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조작 방송⁠. 작가가 출연자랑 사귀면서 대본을 썼다⁠. 시즌 끝⁠. 팀 스무 명 끝⁠. 섬 오후 배 끝⁠. 너도 끝⁠. 이 바닥에서 너 다시는 질문지 못 써⁠. 그리고 남4는 소방관이지⁠? 공무원이야⁠. 품위 유지 의무라는 게 있어⁠. 방송 나가서 작가랑 밀회한 소방관⁠.⁠”

혜란이 손을 내렸다⁠. 맞는 말을 다섯 개 늘어놓은 손이었다⁠.

“⁠나는 이거 안 내보내⁠. 내보내면 나도 끝이니까⁠. 너만 내 말 들으면 아무도 안 끝나⁠.⁠”

나는 셔츠 주머니의 네모난 자국을 보았다⁠. 손톱만 한 카드 하나에 스무 명과 섬 하나와 소방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나흘째⁠.⁠” 혜란은 망설이지 않았다⁠. “⁠남4가 마당에서 처음 빨래 널던 날⁠. 너 27번 음량 혼자 올리더라⁠. 음향 감독이 나한테 물어봤어⁠. 막내가 왜 빨래 소리를 올리냐고⁠.⁠”

“⁠그래서 섭외를 저한테 맡기셨어요⁠?⁠”

“⁠너만큼 아프게 쓸 사람이 없으니까⁠.⁠” 혜란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에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네가 썼잖아⁠. 반지 장면⁠. 3⁠.3⁠.⁠”

*

새벽 세 시⁠, 재웅 선배가 트럭 계단에서 나를 따라 나왔다⁠. 선배는 프로펠러를 손에 쥔 채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겨우 입을 뗐다⁠.

“⁠아니 근데 은새야⁠. 나 진짜 몰랐어⁠. 카드 꽂아 보니까 너였어⁠. 나 그거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피디님한테 먼저 갖다 드렸어요⁠?⁠”

“⁠무서워서⁠.⁠” 선배가 프로펠러를 내려다보았다⁠. “⁠지우면 나중에 일 터졌을 때 내가 지운 사람이 되잖아⁠. 갖고 있으면 내가 갖고 있는 사람이 되고⁠. 피디님한테 드리면⁠, 피디님이 정하니까⁠.⁠”

선배다운 대답이었다⁠. 겁이 나면 윗사람에게 먼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나는 선배를 미워하려고 했다⁠. 선배의 휴대전화 화면에서 숟가락 문 아기가 웃고 있어서 잘 되지 않았다⁠.

“⁠돌잔치는 꼭 하세요⁠, 선배⁠.⁠”

선배는 대답하지 못했다⁠. 테이프가 반쯤 뜬 프로펠러가 바람에 팔랑였다⁠.

*

토요일 오전 내내 나는 강욱과 설아의 남은 그림을 짰다⁠. 일요일 밀물 선택⁠, 월요일 섬 일주 자전거⁠, 화요일 둘만의 저녁⁠. 혜란은 대사를 원했다⁠. 설아는 강욱에게 대사를 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강욱의 대사 칸을 비워 두고⁠, 설아의 질문만 길게 썼다⁠. 질문이 좋으면 대답은 저절로 따라 나온다⁠.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이었고⁠, 지금은 강욱이 나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방식이었다⁠.

곽판순 할머니가 점심에 열무국수를 말아 들고 왔다⁠. 할머니는 내 앞에 그릇을 놓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니 얼굴이 와 이래 누렇노⁠. 밤새 뭐 했노⁠?⁠”

“⁠일했어요⁠.⁠”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다⁠.⁠” 할머니가 젓가락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내 아들 배 이름은 끝까지 안 나왔더라⁠. 다음 회에는 좀 나오게 해 도⁠.⁠”

“⁠노력할게요⁠, 할머니⁠.⁠”

할머니가 나가고⁠, 나는 국수를 반도 먹지 못했다⁠. 국수 그릇 옆 구성안에서 「⁠여2⁠」라는 글자가 열네 번 나왔다⁠. 「⁠남4⁠」 옆에는 모두 「⁠반응⁠」이라고만 써 있었다⁠.

*

오후 네 시⁠, 설아의 인터뷰가 끝나자 설아는 마이크 팩을 떼며 구성안을 흘끗 보았다⁠. 내가 무릎에 엎어 둔 종이였다⁠. 설아는 엎어 둔 종이도 읽는 사람이었다⁠.

“⁠제 질문이 엄청 길어졌네요⁠. 강욱 씨 대사는 하나도 없고⁠.⁠”

“⁠약속했잖아요⁠.⁠”

“⁠지키셨네⁠.⁠” 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작가님⁠, 오늘 얼굴이 그림이 안 나와요⁠. 무슨 일 있어요⁠?⁠”

“⁠잠을 못 자서요⁠.⁠”

“⁠거짓말할 때 손가락 누르시는 거 알아요⁠?⁠” 설아가 웃었다⁠.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할머니 김치 냉장고 있잖아요⁠. 선착장 옆 창고에 있는 거⁠. 거기 열무김치 맛있대요⁠. 작가님도 드셔 보세요⁠. 맨 아래 칸이 제일 맛있어요⁠.⁠”

설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백방을 나갔다⁠. 열무김치는 할머니 부엌에도 있었다⁠. 설아가 왜 선착장 창고의 김치 냉장고를⁠, 하필 맨 아래 칸을 말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물었어야 했다⁠. 사흘 뒤에야 나는 맨 아래 칸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았다⁠.

곽판순 할머니의 김치 냉장고가 있는 창고는 편집 트럭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창고 작은 창으로 트럭의 뒷문이 보였다⁠. 저녁 여덟 시 반쯤⁠, 나는 모니터실 창으로 설아가 창고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 심부름으로 김치를 가지러 간다고 했다⁠. 설아는 김치 한 통을 들고 이십 분 뒤에 나왔다⁠. 설아가 창고에 있는 동안⁠, 담 너머 트럭의 뒷문은 내내 열려 있었다⁠.

*

밤 아홉 시⁠, 빨래줄 끝⁠. 강욱이 먼저 와 있었다⁠. 빨래는 널려 있지 않았다⁠. 강욱은 빈 줄 아래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오늘 아침 인터뷰에 다른 작가님 왔대예⁠. 점심도 안 왔고⁠.⁠”

“⁠바빴어요⁠.⁠”

“⁠작가님⁠.⁠” 강욱이 돌아섰다⁠. “⁠무슨 일 있습니꺼⁠?⁠”

나는 오는 길에 문장을 골라 두었다⁠. 다섯 번 고쳐 쓰고 소리 내어 읽어 본 문장이었다⁠.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목이 막혔고⁠, 막히지 않을 때까지 읽었다⁠.

“⁠어젯밤 일은 실수였어요⁠. 저는 작가고⁠, 강욱 씨는 출연자예요⁠. 남은 촬영 동안 따로 만나면 안 돼요⁠.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설아 씨랑 그림이 많이 잡힐 거예요⁠. 설아 씨한테 잘해 주세요⁠.⁠”

막히지 않았다⁠. 다섯 번 고친 문장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나갔다⁠. 강욱이 내 얼굴을 보았다⁠. 아주 오래 보았다⁠.

“⁠그 말은 누가 썼습니꺼⁠?⁠”

“⁠제가요⁠.⁠”

“⁠작가님이 쓴 말이 맞네예⁠. 깔끔합니더⁠.⁠” 강욱이 빈 빨래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줄이 낮게 떨었다⁠. “⁠누가 뭘 쥐고 있습니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 되는 줄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욱은 줄에서 손을 뗐다⁠.

“⁠알겠습니더⁠. 작가님 말이 그거면⁠, 그거로 하께예⁠.⁠”

강욱이 창고 모퉁이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사다리는 네 발이 다 닿아야 된다 캤지예⁠. 작가님은 지금 몇 발로 서 있습니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강욱은 모퉁이를 돌았다⁠. 나는 빈 빨래줄 아래 서 있었다⁠. 빨래집게 하나에 국화 꽃잎이 아직 집혀 있었다⁠. 엿새를 바람에 시달린 꽃잎은 누렇게 말라 있었다⁠. 나는 꽃잎을 떼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라이브 클립이 시작됐다⁠. 오늘의 그림은 거실이었다⁠. 출연자들이 둘러앉아 수박 게임을 했다⁠. 설아가 진 사람에게 이마 맞기 벌칙을 정했고⁠, 강욱이 졌다⁠. 설아가 손가락을 튕기기 직전 강욱이 눈을 질끈 감자 채팅창에 웃음이 쏟아졌다⁠. 「⁠남4 눈 감는 거 귀여워⁠」 「⁠여2 손가락 힘 조절 실패ㅋㅋㅋ⁠」 동시 시청자 숫자는 육만을 넘었다⁠.

열한 시 이십 분⁠, 혜란이 휴대전화를 들고 모니터실을 나갔다⁠.

“⁠통화 좀⁠. 본부장님⁠.⁠”

혜란은 십오 분 뒤에 돌아왔다⁠. 얼굴이 평소와 같았다⁠. 의자에 앉아 남은 오 분을 끝까지 보았다⁠. 라이브 클립이 끝나자 혜란은 박수를 두 번 쳤다⁠.

“⁠다들 수고⁠. 내일 밀물 선택 여섯 시 집합⁠.⁠”

*

자정을 사십 분 넘겨 단톡방이 터졌다⁠. 터졌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이 없었다⁠. 메시지가 한꺼번에 서른 개쯤 쏟아졌다⁠. 맨 위에 링크 하나가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글이었다⁠. 제목은 「⁠밀물 하우스 촬영장 유출 영상 (⁠12초⁠)⁠」

나는 링크를 눌렀다⁠. 영상이 재생됐다⁠. 초록빛 화면⁠, 냉동 창고 실외기⁠, 키 큰 남자⁠, 회색 맨투맨⁠. 이 분 사십 초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십이 초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흐리게 처리되어 있었다⁠. 맨투맨과 헤드셋은 흐리지 않았다⁠.

댓글이 실시간으로 늘었다⁠. 「⁠남4 키 아님⁠?⁠」 「⁠저 헤드셋 스태프 거잖아⁠」 「⁠출연자랑 작가⁠? 이거 조작 방송 아니냐⁠」 「⁠회색 맨투맨 여름에 입는 사람 누구임⁠」

모니터실이 조용해졌다⁠. 재웅 선배가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막내 작가 둘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가 동시에 눈을 돌렸다⁠. 혜란이 내 옆으로 왔다⁠.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누가 올렸어⁠?⁠”

“⁠피디님 금고에 있다면서요⁠.⁠”

“⁠내가 미쳤니⁠?⁠” 혜란이 내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아 영상을 다시 돌렸다⁠. “⁠이거 나가면 나도 끝이라고 했잖아⁠. 카드는 여기 있어⁠.⁠” 혜란이 셔츠 주머니를 두드렸다⁠. 단추는 채워져 있었다⁠. “⁠찍힌 화면이 아니야⁠. 모니터에서 다시 찍은 거야⁠. 봐⁠, 화면 테두리⁠. 누가 트럭 모니터를 휴대전화로 찍었어⁠.⁠”

“⁠트럭에는 피디님하고 재웅 선배밖에⁠…⁠…⁠.⁠”

“⁠출연자 중에 휴대전화 숨긴 애 있다는 소문 들었어⁠. 진행 피디가 그러더라⁠. 여2가 바깥 숫자를 너무 잘 안다고⁠.⁠” 혜란이 휴대전화를 내 손에 돌려주었다⁠. “⁠내일 숙소 다 뒤진다⁠.⁠”

혜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차분해서 믿을 수 있었고⁠, 차분해서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쪽인지 고르지 못했다⁠.

새벽 한 시 사십 분⁠, 첫 기사가 떴다⁠. 「⁠[단독] 연애 예능 ‘⁠밀물 하우스⁠’⁠, 작가-출연자 밀회 영상 확산⁠… 제작진 “⁠확인 중⁠”⁠」 오 분 뒤 기사가 일곱 개로 늘었다⁠. 포털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새로고침될 때마다 한 칸씩 올라갔다⁠.

「⁠4위 밀물 하우스 작가⁠」

「⁠7위 회색 맨투맨⁠」

나는 내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손등까지 끌어내린 회색 소매가 모니터 불빛을 받아 파랬다⁠. 화면 마흔두 개가 숙소의 잠든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27번 화면 속 빨래줄은 비어 있었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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