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0자)

등대 계단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혜란] 3회 2⁠.6%⁠」

「⁠[혜란] 살았다⁠」

「⁠[혜란] 금요일 4회는 보름 회⁠. 3 넘긴다⁠. 다들 밥 먹어⁠」

단톡방에 밥그릇 이모티콘이 스무 개 가까이 달렸다⁠. 새벽 한 시였다⁠. 재웅 선배는 「⁠아니 근데 밥 먹으라는 말 들으니까 눈물 나요⁠」라고 썼고⁠, 편집 감독은 「⁠아직 4회 편집 중임⁠」이라고 쓴 뒤 곧바로 밥그릇 하나를 더 달았다⁠. 나는 포털에서 3회 기사를 찾아 댓글을 읽었다⁠. 「⁠남4 빨래 장면에서 웃었음⁠」 「⁠자막 누가 썼냐 수건도 줄 맞춰 너는 남자ㅋㅋㅋ⁠」 첫날 새벽에 지운 자막을 편집팀이 원본 초안에서 살려 넣었다⁠. 지운 문장이 전국에 나갔다⁠.

아침 여덟 시⁠, 진행 피디가 작가 방 문을 반쯤 열고 얼굴만 들이밀었다⁠.

“⁠은새 씨⁠, 여2가 따로 보재요⁠. 열 시에 등대 계단⁠. 카메라 점검하는 척하고 오래요⁠.⁠”

“⁠출연자가 작가를 따로 부르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점검하는 척하래요⁠. 여2가 그렇게 말했어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진행 피디는 문을 닫았다⁠. 화이트보드 위 남4와 여2를 잇는 빨간 실이 선풍기 바람에 흔들렸다⁠.

*

등대 나선 계단은 백열두 칸이었다⁠. 아래에서 서른 칸⁠, 위에서 서른두 칸까지는 카메라가 닿는다⁠. 가운데 쉰 칸은 하얀 벽과 쇠 난간과 작은 창 하나뿐이었다⁠. 나는 공구 가방을 들고 올라가다가 예순 번째 칸에서 멈췄다⁠. 설아가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작가님⁠, 공구 가방 무거워 보여요⁠. 안에 뭐 들었어요⁠?⁠”

“⁠드라이버요⁠.⁠”

“⁠드라이버 하나요⁠?⁠”

“⁠네⁠. 딱 하나⁠.⁠”

설아가 웃었다⁠. 그러고 나서 웃음을 뚝 그쳤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설아의 얼굴은 각도를 찾지 않았다⁠.

“⁠작가님⁠, 강욱 씨 좋아하죠⁠.⁠”

계단 아래에서 바람이 올라와 쇠 난간을 울렸다⁠. 나는 공구 가방을 계단에 내려놓았다⁠.

“⁠볼펜 얘기라면⁠…⁠…⁠.⁠”

“⁠볼펜만이면 안 불렀어요⁠.⁠” 설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일요일 밤 열한 시⁠. 저 2층 화장실 창문으로 봤어요⁠. 작가님이 배터리 가방 들고 창고 뒤로 가는 거⁠. 배터리 갈아야 할 카메라는 현관에 있는데⁠. 그리고 이십 분 뒤에 나왔어요⁠. 강욱 씨는 오 분 뒤에 나왔고⁠. 둘 다 빨래 바구니도 없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아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 어제 등대⁠. ‘⁠제가 시키고 싶은 거는⁠, 아무것도요⁠.⁠’ 저 그 말 듣고 알았어요⁠. 저한테 한 말이 아니구나⁠. 앞의 세 줄은 누가 써 준 거고⁠, 마지막 한 줄만 강욱 씨 거구나⁠.⁠”

“⁠설아 씨⁠.⁠”

“⁠최종 인터뷰에서 말할 거예요⁠.⁠” 설아는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 꼈다⁠. “⁠막내 작가가 출연자를 좋아해서 대사를 써 줬다고⁠. 그 대사를 받은 사람이 나라고⁠. 카메라 보고 또박또박⁠.⁠”

“⁠그러면 쇼가 끝나요⁠. 조작 방송이 되니까요⁠.⁠”

“⁠알아요⁠.⁠”

“⁠설아 씨도 같이 끝나요⁠. 작가가 써 준 대사 받은 여자가 되잖아요⁠.⁠”

“⁠그것도 알아요⁠. 근데 작가님⁠, 들러리로 끝나는 거보다는 그게 나아요⁠.⁠” 설아가 창밖을 보았다⁠. 바다가 아침 볕에 하얗게 부서졌다⁠. “⁠저 스튜디오 보증금 빼서 빚 갚았는데도 오천이 남았어요⁠. 필라테스 기구 열두 대 할부요⁠. 저는 이 방송에서 이름 하나 얻어서 나가야 돼요⁠. 착한 들러리 이름 말고⁠. 작가님 비밀이 저한테는 이름이에요⁠.⁠”

설아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혜란의 말처럼⁠.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맞는 말로 나를 막을까⁠? 나는 계단에 앉았다⁠. 차가운 쇠가 청바지를 뚫고 들어왔다⁠.

“⁠이름을 다른 걸로 드리면요⁠?⁠”

설아가 고개를 돌렸다⁠.

“⁠최종회 마지막 장면을 설아 씨 얼굴로 끝낼게요⁠. 엔딩 크레디트 올라가기 전 마지막 삼십 초⁠. 단독 인터뷰 분량도 남은 회차마다 설아 씨를 제일 길게 잡고요⁠. 그리고 숏폼 클립으로 나갈 장면은 설아 씨가 직접 고르게 할게요⁠.⁠”

“⁠작가님이 그걸 정할 수 있어요⁠?⁠”

“⁠서브 작가가 됐어요⁠. 어제부터⁠.⁠”

설아가 한참 나를 보았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화면으로 수백 번 본 눈이었다⁠. 출연자들이 쪽배에 누구를 태울지 정하기 직전의 눈⁠. 이번에는 내가 쪽배 위에 있었다⁠.

“⁠조건 하나 더요⁠.⁠” 설아가 말했다⁠. “⁠강욱 씨한테 대사 쓰지 마세요⁠. 제가 받는 말이 남이 쓴 거면 기분 나빠요⁠. 하는 거든 안 하는 거든⁠, 강욱 씨 말로 하게 해 주세요⁠.⁠”

“⁠네⁠.⁠”

“⁠약속 어기면 생방송에서 말해요⁠. 마지막 날은 생방송이라면서요⁠.⁠”

설아는 창틀에서 내려와 계단을 올라갔다⁠. 위에서 서른두 칸⁠, 카메라가 닿는 칸에 이르자 설아의 걸음이 달라졌다⁠. 어깨가 펴지고 턱이 십 도 돌아갔다⁠. 설아는 위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 오늘 아침에 팔로워 사천 명 늘었다던데⁠.⁠”

출연자는 휴대전화를 반납했다⁠. 아침에 늘어난 팔로워 숫자를 아는 출연자는 없어야 했다⁠. 나는 팔로워 숫자를 공구 가방에 넣고 계단을 내려왔다⁠.

*

오후 내내 나는 남은 회차 구성안을 다시 짰다⁠. 설아의 단독 인터뷰를 앞으로 당기고⁠, 설아가 물질에서 성게를 놓친 장면에 자막 세 개를 붙였다⁠. 「⁠포기란 없다⁠」 「⁠성게도 포기함⁠」 「⁠하지만 여2는 포기 안 함⁠」 쓰면서 웃음이 났고⁠, 웃음이 나서 더 싫었다⁠. 나는 화면 속 사람을 고르고 있었다⁠. 누가 길게 나오고 누가 짧게 나올지⁠. 혜란이 하는 일이었다⁠.

작가 방 문이 벌컥 열리고 곽판순 할머니가 전 부치는 냄새와 함께 들어왔다⁠.

“⁠작가 아가씨⁠, 오늘 밤 풍어제다⁠. 바다에 막걸리 붓고 배에 깃발 다는 날⁠. 너거 방송에 나오나⁠?⁠”

“⁠네⁠, 다 같이 가요⁠.⁠”

“⁠그라믄 내 한복 입어야겠다⁠.⁠” 할머니는 재웅 선배를 보았다⁠. “⁠니는 그 날아다니는 거 오늘은 띄우지 마래이⁠. 갈매기들 풍어제 날은 성질 더럽다⁠.⁠”

“⁠아니 근데 할머니⁠, 오늘 항공 그림이 제일 중요해요⁠.⁠”

“⁠항공 그림이고 뭐고⁠, 갈매기 성질이 더 중요하다⁠.⁠”

선배는 노트북 뒤로 숨었다⁠. 할머니가 나가자 선배는 작게 말했다⁠.

“⁠띄울 거야⁠. 오늘 불꽃놀이도 한대⁠. 이장님이 통영에서 사 왔대⁠.⁠”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불꽃놀이⁠. 불 근처에 두지 마세요⁠. 꽃집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다시 또렷해졌다⁠.

*

풍어제는 해 진 뒤 방파제에서 열렸다⁠. 어선 다섯 척이 오색 깃발을 달고 줄지어 묶였고⁠,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막걸리를 부었다⁠. 출연자 열 명은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전을 받아먹었다⁠. 곽판순 할머니는 남색 한복을 입고 장구를 쳤다⁠. 장구 장단이 빨라질 때마다 남1이 엉덩이를 들썩였고⁠, 할머니가 장구채로 남1을 가리키며 「⁠니 또 휘파람 불면 바다에 넣는다⁠」라고 외쳤다⁠.

나는 클립보드를 들고 방파제 끝⁠, 등대 불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서 있었다⁠. 이장에게 불꽃놀이 순서를 바꿔 달라고 말할 틈을 찾았다⁠. 이장은 막걸리 잔을 든 채 출연자 사이를 돌아다녔고⁠, 혜란이 이장 옆에 붙어 있었다⁠. 혜란이 이장의 귀에 무언가 말했고⁠, 이장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꽃은 예정보다 이십 분 일찍 올라갔다⁠.

펑⁠. 하늘에 붉은 국화가 피었다⁠. 출연자들이 환호했다⁠. 펑⁠. 펑⁠. 초록과 금빛이 연달아 터지고 화약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방파제를 덮었다⁠. 나는 사람들 머리 위로 강욱을 찾았다⁠. 강욱은 무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하늘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손이 남색 티셔츠 가슴께를 쥐고 있었다⁠.

설아가 강욱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카메라 하나가 설아를 따라 돌았다⁠. 나는 클립보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강욱 씨⁠, 마이크 팩 배터리 갈아야 돼요⁠. 잠깐만요⁠.⁠”

카메라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지루한 말이었다⁠. 카메라 감독은 실망한 얼굴로 렌즈를 돌렸다⁠. 나는 강욱의 팔꿈치를 잡았다⁠. 팔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방파제를 따라 걸어 선착장 옆 냉동 창고 뒤로 돌았다⁠. 섬의 세 번째 사각지대였다⁠. 창고 외벽에서 냉기가 흘러나왔고⁠, 생선 비린내와 얼음 냄새가 화약 냄새를 밀어냈다⁠.

강욱은 창고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숨이 짧았다⁠. 들이쉬는 숨이 내쉬는 숨보다 반 박자 빨랐다⁠.

“⁠숨 길게요⁠. 할머니가 그랬잖아요⁠. 들어가기 전에 길게⁠, 길게⁠.⁠”

강욱이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같이 들이쉬었다⁠. 하나⁠, 둘⁠, 셋⁠, 넷⁠. 내쉬었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또 터졌다⁠. 창고 벽이 붉게 물들었다가 까매졌다⁠. 다섯 번째 숨에서 강욱의 손이 티셔츠를 놓았다⁠.

“⁠고시원이었습니더⁠.⁠” 강욱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3층⁠. 복도가 좁아가 둘이 나란히 못 걸어가는 데⁠. 구 반장님이 앞에 가고 제가 뒤에 갔습니더⁠. 천장이 내려앉았는데⁠, 반장님이 저를 뒤로 밀었어예⁠. 저는 밀려가 넘어졌고⁠, 등에 불붙은 판자가 떨어졌고⁠. 반장님은 앞에 있었고⁠.⁠”

불꽃이 멈췄다⁠. 방파제의 환호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타는 냄새 맡으면 지금도 숨이 짧아집니더⁠. 보름이는 제 등 보고 울었고⁠, 저는 그게 반장님이 우는 거 같았습니더⁠. 그래가 끝냈습니더⁠. 마침표까지 찍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질문지에 없었다⁠. 강욱이 눈을 떴다⁠.

“⁠작가님⁠.⁠”

“⁠네⁠.⁠”

“⁠작가님이 쓴 말 말고⁠, 작가님 말 한 번만 듣고 싶습니더⁠.⁠”

냉동 창고의 실외기가 덜덜 돌았다⁠. 나는 맨투맨 소매에서 손을 꺼냈다⁠. 꺼낸 손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리 옆에서 멈췄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요⁠. 강욱 씨 빨래 너는 거 보려고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수건 터는 소리가 화면으로도 들려요⁠. 저는 그 소리 들으려고 음향을 혼자 올려요⁠. 그리고 엿새째 밤 사다리 잡아 준 뒤로⁠, 강욱 씨 화면만 한 박자 늦게 넘겨요⁠. 재웅 선배도 알아요⁠. 다 알아요⁠. 이게 제 말이에요⁠.⁠”

강욱이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부터⁠. 열이틀 동안 화면 마흔두 개 어디에서도 못 본 얼굴이었다⁠. 강욱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내 이마에 닿았다⁠. 강욱의 숨에서 막걸리 냄새가 아주 조금 났고⁠, 땀 냄새가 났고⁠, 화약 냄새는 나지 않았다⁠. 숨이 이제 길었다⁠.

입술이 닿았을 때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삼 년 동안 남의 입맞춤을 화면 마흔두 개로 보았다⁠. 각도를 재고⁠, 몇 초인지 세고⁠, 어느 카메라 그림이 나은지 골랐다⁠. 지금은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다⁠. 화면이 없었다⁠. 강욱의 속눈썹이 너무 가까워서 흐렸다⁠. 강욱의 손이 내 맨투맨 등을 감쌌다⁠. 천 너머로 손바닥의 열이 번졌다⁠. 18도에 맞춰 입은 옷이 처음으로 덥게 느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강욱은 이마를 떼지 않았다⁠.

“⁠작가님 볼펜 없어도 손가락 안 누르네예⁠.⁠”

“⁠눌렀어요⁠. 강욱 씨 등에다가⁠.⁠”

강욱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낮고 짧은 소리였다⁠. 나는 웃음소리를 녹음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녹음하고 싶다는 생각이 부끄러워 강욱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머리 위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냉동 창고 지붕 슬레이트 위⁠, 처마 끝에 검은 덩어리 하나가 비스듬히 얹혀 있었다⁠. 프로펠러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저녁에 재웅 선배가 띄웠다가 갈매기 떼에 쫓겨 사라졌다고 투덜대던 드론이었다⁠. 「⁠갈매기 1호⁠」

드론 몸통 아래에서 작은 빨간 불이 깜박였다⁠.

깜박⁠, 깜박⁠. 녹화 중일 때 켜지는 불이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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