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10자)
대본 주이소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대본은 없어요.”
내 목소리가 고백방 벽에 부딪혀 작게 돌아왔다. 강욱은 무릎 위의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라믄 질문지 읽어 주이소. 질문 안에 대답이 다 들어 있다 아입니꺼. 저는 들어 있는 대답을 하께예.”
카메라 둘이 빨간 불을 켠 채 돌았다. 혜란은 모니터실에서 이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첫 줄을 읽었다.
“어젯밤 보름 씨를 봤을 때 어떤 마음이었어요?”
“반가웠습니더. 미안했고예. 그라고 고마웠습니더.”
또박또박 세 마디였다. 질문지 둘째 줄의 예상 답 칸에 내가 적어 둔 세 낱말이었다. 강욱은 질문지를 본 적이 없었다. 질문만 듣고 내가 바라는 답을 맞혔다. 삼 년 동안 내가 출연자들에게 바란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바라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목이 말랐다.
“보름 씨가 반지를 돌려줄 때, 흔들렸어요?”
“예, 흔들렸습니더.”
“지금은요?”
“지금은 괜찮습니더. 이제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더.”
나는 클립보드를 내렸다. 질문지 셋째 줄 예상 답에도 같은 문장이 있었다. 「이제 새로 시작하고 싶다」 혜란이 어젯밤 메모로 달아 놓은 문장이었다.
“이렇게 하실 거면 인터뷰 안 하셔도 돼요.”
“와예? 다들 좋아할 낀데. 작가님이 쓴 말이 제 말보다 낫대예. 어젯밤에 육만 명이 봤다 카대.”
진행 피디가 어제 마당에서 떠든 말이 숙소 창문을 넘은 모양이었다.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었다.
“강욱 씨.”
“예.”
“어제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녹화본 보낸 것도, 보름 씨를 데려온 것도.”
강욱이 처음으로 눈을 들었다. 카메라를 보지 않고 나를 보았다.
“그 말도 질문지에 있습니꺼?”
없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지를 반으로 찢었다. 찢는 소리가 고백방 마이크에 크게 들어갔다. 카메라 감독이 뷰파인더 뒤에서 「오」 하고 입을 벌렸다. 강욱은 다시 무릎 위로 눈을 내렸다.
“찢으셔도 똑같습니더. 작가님 머릿속에 있잖아예.”
*
여덟 시, 작가 방 화이트보드에서 남4의 사진과 「보름」이라고 쓴 포스트잇 사이에 빨간 실이 새로 이어져 있었다. 혜란은 실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나서, 남4와 여2 사이에 빨간 실을 하나 더 감았다.
“전 연인 보내고 새 사람한테 가는 남자. 시청자는 이거 좋아해. 아픈 사람이 다시 웃는 거.”
“어제 보낸 사람이 오늘 새 사람한테 가요?”
“방송으로는 사흘 뒤야. 시청자한테는 사흘이면 충분해.” 혜란은 오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늘 저녁 등대 데이트. 남4, 여2. 남4가 대본 달라 했다며? 줘.”
“그건 홧김에 한 말이에요.”
“홧김에 한 말도 말이야. 은새야, 출연자가 제 입으로 대본 달라는 날은 다시 안 와.”
재웅 선배가 노트북 뒤에서 「아니 근데 그건 맞아」라고 작게 말하다가 내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혜란은 화이트보드 마커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등대 꼭대기 대사 세 줄. 너무 달면 안 되고, 너무 담백해도 안 돼. 어제 운 사람이 오늘 할 수 있는 말. 그거 쓸 줄 아는 사람 우리 팀에 너밖에 없어.”
칭찬이었다. 혜란의 칭찬은 늘 일과 한 묶음으로 왔다. 나는 마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점심은 편집 트럭 계단에서 혜란과 김밥을 나눠 먹었다. 혜란은 김밥 꼬다리만 골라 먹는 사람이었다. 꼬다리를 다 먹고 나서 혜란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 막내 때, 출연자 하나가 나한테 대본 달라고 한 적 있어. 남자애였는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입이 굳었어.”
“주셨어요?”
“줬지. 밤새 써서. 걔가 그거 읽고 최종 커플 됐고, 이 년 뒤에 결혼했어. 청첩장도 나한테 보냈어.” 혜란은 김밥 은박지를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눌렀다. “그 결혼식 가서 축가 들으면서 생각했어. 저 사람들 처음 한 말을 내가 썼구나. 그 뒤로 이십 년 이 일 했어.”
“후회 안 하세요?”
“결혼식 밥이 맛있었어.” 혜란은 은박지를 내 손에 쥐여 주고 일어섰다. “대사 세 줄, 다섯 시까지.”
혜란이 후회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은박지는 아직 따뜻했다.
*
오후 두 시, 해녀 체험은 섬 남쪽 갯바위에서 열렸다. 곽판순 할머니가 낡은 고무 잠수복을 입고 바위에 섰다.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허리에 납덩이 띠를 차자, 할머니는 일흔하나가 아니라 바다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출연자 열 명이 빌린 잠수복을 입고 줄지어 섰다.
“숨은 이래 쉰다. 물 들어가기 전에 길게, 길게. 숨비소리 내는 거는 나올 때다. 들어갈 때 휘파람 불면 바다가 비웃는다.”
출연자들이 웃었다. 남1이 휘파람을 불었고, 할머니가 남1의 엉덩이를 고무장갑으로 철썩 때렸다. 카메라 감독은 고무장갑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갯바위 뒤에 쪼그려 앉아 자막을 머릿속에 띄웠다. 「바다 대신 할머니가 비웃음」
재웅 선배는 방수 카메라를 들고 허리까지 물에 들어갔다가 갈매기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가자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아니 근데 쟤들은 왜 물에도 있어?”
“바다새니까요, 선배.”
“바다새면 바다에 있어야지 왜 내 위에 있어?”
물에 들어간 강욱은 할머니 말대로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려갔다가, 다른 출연자보다 두 배 오래 있다 나왔다. 손에 성게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가 혀를 찼다.
“저 총각은 숨이 길다. 불구덩이에서 숨 참는 거 배운 사람 숨이다.”
할머니는 성게를 망사리에 넣고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고무 잠수복에서 짠물이 뚝뚝 떨어져 내 운동화를 적셨다.
“니 그 총각 좋아하제?”
“할머니, 마이크 있어요.”
“마이크는 저어기 있다.” 할머니는 턱으로 출연자들을 가리켰다. “내도 사십 년 전에 육지 남자 하나 좋아했다. 섬 떠나자 카길래 짐 다 싸가 선착장까지 갔다. 막배가 들어왔는데, 내 발이 안 떨어지대. 배가 떠날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
“왜요?”
“엄마가 물에 들어가 있었다. 물질하는 엄마 두고는 못 가겠대.” 할머니는 수건을 풀어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그 뒤로 막배 소리 들리면 아직도 발바닥이 간지럽다. 니는 발 간지럽게 살지 마래이.”
할머니는 다시 물로 들어갔다. 바위 위에 짠물 발자국이 남았다.
체험을 마치고 선착장으로 내려가는데 대합실 유리문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여객선 회사의 공고였다. 「9월 1일부터 오후 운항을 멈출 예정입니다. 이용객 변동에 따라 다시 검토합니다」 마을 사람 셋이 공고 앞에 모여 있었다. 이장이 손가락으로 마지막 줄을 짚었다.
“이용객 변동. 저기 사람 많이 오면 다시 본다는 기라.”
“그라믄 저 방송이 잘돼야 되네.”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잘 부탁합니데이」라고 외쳤다.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잘하겠다는 말이 어떤 장면을 뜻하는지, 공고를 붙인 회사도 마을 사람들도 몰랐다. 나는 알았다.
*
다섯 시, 모니터실에서 나는 등대 대사 세 줄을 썼다. 혜란의 주문은 정확했다. 어제 운 사람이 오늘 할 수 있는 말. 첫 줄을 쓰고 지웠다. 둘째 줄을 쓰고 지웠다. 종이 위에 지운 자국이 늘수록 쉬운 문장이 남았다. 쉬운 문장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설아 씨랑 있으면 파도 소리가 작게 들립니더.」
「어제는 지난 일을 보냈고, 오늘은 앞을 보고 싶습니더.」
「내일 밀물 때도, 노 하나 같이 들어 주이소.」
미션 카드에 옮겨 적는 동안 나는 강욱의 말씨를 흉내 냈다. 소리 내어 읽어 보니 강욱 목소리로 들렸다. 들리는 것이 싫었다. 카드를 봉투에 넣어 진행 피디에게 넘겼다.
“남4 거는 대사고, 여2 거는 질문만이에요. 여2한테는 대사가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알아요. 대본 없는 척.”
진행 피디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봉투를 받아 갔다.
*
해 질 녘 등대는 섬 서쪽 끝 벼랑 위에 있었다. 하얀 몸통에 빨간 꼭대기, 안에는 나선 계단 백열두 칸. 꼭대기 전망대에는 카메라 둘, 계단 아래와 입구에 하나씩. 계단 한가운데 쉰 칸쯤은 어느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았다. 섬의 두 번째 사각지대였다.
모니터실의 15번과 16번 화면에 전망대가 떴다. 서쪽 바다가 주황색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설아가 먼저 난간에 기대어 섰고, 강욱이 한 걸음 뒤에 있었다. 혜란은 내 뒤에서 팔짱을 꼈다. 재웅 선배는 조종기를 든 채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드론 「갈매기 1호」가 등대 위를 크게 돌며 노을을 찍었다.
갈매기 세 마리가 드론 뒤에 줄지어 따라붙었다. 화면으로 보면 드론이 갈매기 떼를 이끄는 대장 같았다. 선배는 조종기를 꽉 쥐고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왜 따라와? 나 너네 대장 아니야. 나 그냥 서른한 살 조연출이야.”
“선배, 그림은 지금이 제일 좋아요. 그대로 두세요.”
“그대로 두면 쟤네가 1호를 쪼아.”
혜란이 뒤에서 「쪼이기 전까지 찍어」라고 말했다. 선배는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라면 선배가 팀에서 가장 빨랐다.
설아가 미션 카드를 펼쳐 읽었다.
“등대 꼭대기에서, 상대에게 오늘 처음 느낀 것을 말해 주세요.” 설아가 카드를 접었다. “나부터 할게요. 오늘 물질할 때, 강욱 씨 물속에서 오래 안 나와서 무서웠어요. 그거 처음 느낀 거예요.”
질문 카드만 받은 사람의 대답이었다. 혜란이 「좋다」 하고 짧게 말했다.
강욱이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보지 않았다. 다 외운 얼굴이었다.
“설아 씨랑 있으면 파도 소리가 작게 들립니더.”
설아가 고개를 돌려 강욱을 보았다. 노을이 설아의 왼쪽 얼굴을 비췄다. 각도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빛이었다.
“어제는 지난 일을 보냈고, 오늘은 앞을 보고 싶습니더. 내일 밀물 때도, 노 하나 같이 들어 주이소.”
혜란이 내 의자 등받이를 두 번 두드렸다. 잘했다는 신호였다. 내가 쓴 세 줄이 내가 쓴 순서대로 바다 위로 나갔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강욱은 대본을 그대로 읽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대본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게 내 일이었다.
설아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강욱은 손을 잡지 않고 난간을 짚었다. 그러고 나서 한마디를 더 했다. 카드에 없는 말이었다.
“제가 시키고 싶은 거는, 아무것도요.”
모니터실이 조용해졌다. 혜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뭔 소리야? 은새야, 저것도 네가 쓴 거니?”
“……애드리브예요.”
“애드리브 이상하네. 자막으로 살려. ‘서툰 남자의 진심’ 정도로.”
혜란에게는 이상한 애드리브였다. 나에게는 그저께 밤 빨래줄 끝에서 내가 한 대답이었다. 아무것도요. 강욱은 내 대답을 내가 쓴 대사 끝에 붙여 등대 꼭대기에서 돌려주었다. 나는 맨투맨 소매 속에서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15번 화면 안에서 설아가 움직였다. 설아는 강욱을 보지 않았다. 강욱의 눈이 가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섬 동쪽, 언덕 위 마을회관. 설아는 마을회관을 한참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망대 기둥에 달린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았다. 웃지 않았다. 턱 각도도 맞추지 않았다.
16번 화면이 설아의 얼굴을 크게 잡았다. 설아의 눈이 렌즈를 지나 모니터실 안까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