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04자)
밀물 선택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편집 트럭 안은 하드디스크 열두 개가 한꺼번에 도는 소리로 웅웅거렸다. 아침 여덟 시, 편집 감독이 아직 잠에서 덜 깬 손으로 외장 하드를 하나 뽑아 주었다. 「사전 인터뷰_남4_B캠」 서울 회의실에서 찍은 원본이었다. 나는 A캠 원본만 보았다. B캠은 옆얼굴을 잡는 카메라라 대개 쓰지 않는다.
A캠은 내가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리에서 끝났다. B캠은 사십 초를 더 돌았다.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내가 화면 밖으로 사라진 뒤, 강욱이 의자에 앉은 채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어, 끝났다. 니가 쓴 신청서 때문에 내가 여기서 연애사를 말할 뻔했다 아이가.”
수화기 너머에서 여동생이 무언가 빠르게 쏘아붙였다. 강욱이 이마를 짚었다.
“보름이 얘기는 안 했다. 내 등 보고 운 사람을 또 울리라 카나. 됐다. 끊는다.”
강욱은 휴대전화를 내리고도 한참 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 번 쓸었다. 다음 순간 촬영 감독이 B캠 전원을 내리러 들어왔고 화면이 까맣게 닫혔다.
나는 사십 초를 다섯 번 돌렸다. 다섯 번째에는 소리를 끄고 무릎을 쓰는 손만 보았다. 화면 아래 시간 표시가 0분 38초에서 0분 39초로 넘어갈 때,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
아홉 시, 혜란은 편집 트럭 계단에 서서 내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오이는 들고 있지 않았다. 혜란이 진지할 때는 손이 비어 있었다.
“보내.”
“동생하고 한 통화예요. 인터뷰가 끝난 뒤였고요.”
“카메라 앞에서 했잖아. 네가 넣은 동의서 4쪽.” 혜란은 화면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보름 씨가 원한 게 이거잖아. 자기 얘기 하는 녹화본. 그 사람 마음 움직이는 데 이거보다 좋은 게 있니?”
“앞부분은 빼고 마지막만 보낼게요. 동생 이름 나오는 데는 다 자르고.”
“알아서 해. 그 대신 장면은 내가 정한다.”
“장면은 제가 짜기로 했잖아요.”
“네 안은 봤어.” 혜란은 내가 어젯밤 올린 문서를 열었다. 「비밀 손님은 숙소 밖 정자에서 기다리고, 남4가 만날지 말지를 고른다」 혜란은 문서를 닫았다. “고르게 하면 안 골라. 남4는 안 고르는 애야. 밀물 선택 때 선착장으로 들어와. 어선 불 켜고. 다들 쪽배 앞에 서 있을 때.”
“그럼 도망칠 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림이 되지.”
혜란이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내 맨투맨 소매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곽판순 할머니가 집던 자리와 똑같은 자리였다.
“너는 왜 맨날 거기에 손을 숨기니?”
혜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갔다. 나는 사십 초짜리 파일을 잘라 앞의 열여섯 초를 지우고 보름에게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손은 소매 밖에 있었다.
*
열 시 반, 고백방에서 설아의 아침 인터뷰가 있었다. 설아는 의자에 앉기 전에 조명 위치부터 보았고, 앉고 나서는 턱을 왼쪽으로 십 도쯤 돌렸다. 왼쪽 얼굴이 낫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각도였다.
“오늘 밀물 선택, 누구 생각하고 있어요?”
“강욱 씨요.” 설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쪽배 탔을 때 노를 혼자 다 저었어요. 제가 저어 보겠다고 하니까 손 다친다고. 근데 작가님, 그거 우리 둘이 저어야 배가 똑바로 가는 거죠? 강욱 씨 혼자 저으니까 배가 계속 오른쪽으로 돌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빙글빙글 돌면서 갔어요. 너무 웃겨서 그날 밤 웃다가 잠들었어요.”
설아가 웃었다. 이번 웃음은 각도를 잊어버린 웃음이었다. 나는 볼펜을 딸깍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인터뷰가 끝나자 설아는 마이크 팩을 떼다가 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작가님, 강욱 씨 인터뷰 때는 볼펜 안 누르시죠?”
손가락이 볼펜 위에서 굳었다.
“저 아까 강욱 씨 다음 순서라 밖에서 기다렸거든요. 벽이 얇아서 딸깍딸깍 다 들려요. 남1 씨 때도 딸깍, 남3 씨 때도 딸깍. 강욱 씨 때만 조용했어요.”
“강욱 씨가 대답이 짧아서요. 누를 틈이 없었어요.”
“아, 그렇구나.” 설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려 렌즈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밤 여2, 승부 봅니다. 그림 예쁘게 잡아 주세요.”
카메라 감독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설아는 혼자 있을 때도 보이지 않는 카메라에 대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의 귀는 대개 카메라보다 밝았다.
*
밀물은 밤 열 시 오십 분이었다. 플랫폼의 라이브 클립은 밤 열한 시에 시작해 이십 분을 돈다. 출연자 열 명이 선착장 옆 모래톱 앞에 한 줄로 섰을 때, 모래톱 길은 이미 바닷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쪽배 다섯 척이 말뚝에 묶인 채 흔들렸다.
모니터실의 공기는 18도보다 차가웠다. 혜란이 내 의자 뒤에 서서 두 손으로 등받이를 잡았다. 재웅 선배는 무전기를 들고 선착장 쪽 창문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 위 작은 화면에 라이브 클립의 동시 시청자 숫자가 떴다. 「3,214」
“라이브 들어갑니다. 지연 삼십 초.”
밀물 선택은 여자가 먼저 고르는 날이었다. 설아가 두 번째로 앞에 나왔다. 설아는 뒤로 묶은 머리를 한 번 풀었다가 다시 묶고, 망설임 없이 강욱 앞으로 걸어가 노 한 자루를 내밀었다.
“이번엔 같이 저어요. 똑바로 가 보게.”
강욱이 노를 받았다. 화면 아래쪽 채팅창에 글자가 쏟아졌다. 「여2 직진 미쳤다」 「남4 웃었다 방금」 「노 건네는 거 설렘」
바로 다음 순간 바다에서 불빛이 들어왔다. 곽판순 할머니 아들의 어선이었다. 혜란이 「불」이라고 한 글자를 무전기에 말하자 어선의 작업등이 한꺼번에 켜졌다. 흰 빛이 선착장을 쓸고 출연자 열 명의 그림자를 모래톱 위로 길게 눕혔다. 어선이 선착장에 붙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내렸다. 보름이었다.
출연자들이 웅성거렸다. 설아가 노를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강욱은 돌아보지 않았다. 작업등 불빛 속에서 강욱의 어깨가 한 번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어깨였다.
진행 피디가 규칙을 읽었다. 새로 온 사람은 오늘 밤 한 사람을 고를 수 있고, 골라진 사람은 거절할 수 있다. 보름은 쪽배 앞으로 걸어가 강욱 앞에 섰다. 설아가 쥔 노와 보름이 내민 노가 강욱의 가슴 앞에서 나란히 멈췄다.
동시 시청자 숫자가 「12,770」으로 바뀌었다. 혜란의 손이 의자 등받이를 꽉 쥐었다.
강욱은 설아를 보았다. 설아는 웃었다. 웃는 얼굴로 노를 내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다녀와요. 저는 기다리는 거 잘해요.”
채팅창이 하얘질 만큼 빨라졌다. 강욱이 보름의 노를 받았다. 둘이 쪽배에 오르자 뱃머리에 달린 소형 카메라가 둘을 정면으로 잡았다. 「41,880」
*
쪽배 위의 소리는 배에 붙인 마이크로만 들어왔다. 나는 헤드셋을 귀에 덮었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 두 사람의 숨소리. 둘은 처음 이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만 저었다. 배는 오른쪽으로 돌지 않았다. 삼 년 동안 둘이 같이 저어 본 배였다.
작은달비 앞에서 보름이 노를 멈췄다. 원피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뱃머리 카메라의 작은 화면 안에서 은색 반지가 작업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거 돌려주러 왔다. 니가 안 받아 가서 삼 년 동안 우리 가게 금고에 있었다.”
“……미안타.”
“그 말 말고.” 보름의 목소리가 헤드셋 안에서 떨리지 않았다. “내가 니 등 보고 운 거, 불쌍해서 운 거 아이다. 니가 거기서 혼자 아팠을 거라서 운 기다. 그거 하나 말하러 왔다.”
강욱은 반지를 받지 않았다. 대신 보름의 손을 손바닥째 감싸 반지를 도로 쥐여 주었다.
“그라믄 결혼할 때 녹여가 귀걸이라도 해라. 니 귀걸이 좋아하잖아.”
보름이 웃었다.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채팅창은 울음 이모티콘으로 덮였다. 「남4 눈 봐」 「전여친 멋있다」 「so sad i‘m crying」 플랫폼 화면 구석에 해외 시청자 표시가 켜졌다.
보름이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니한테 말할 게 하나 더 있다. 니 녹화본 나한테 보낸 사람, 그 작가님이 창원까지 왔더라. 니가 동생한테 한 말은 앞을 다 잘랐다고, 방송에는 안 쓴다고 하더라. 은새 씨라고…….”
“음성 내려!”
혜란이 소리쳤다. 음향 감독이 페이더를 끝까지 내렸다. 지연 삼십 초 덕분에 라이브 클립에는 보름의 입 모양만 나갔다. 헤드셋 안에는 아직 소리가 남아 있었다. 강욱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리였다. 노가 뱃전에 툭 닿는 소리가 났고, 뱃머리 카메라 화면 속에서 강욱이 고개를 돌렸다. 섬 쪽으로, 언덕 위 마을회관 2층 창으로.
나는 헤드셋을 벗었다.
*
라이브 클립은 이십 분을 채우고 끝났다. 마지막 동시 시청자 숫자는 「63,105」였다. 모니터실에 박수가 터졌다. 재웅 선배가 무전기를 든 채 의자 위에서 펄쩍 뛰다가 머리를 형광등에 박았다. 혜란은 손뼉을 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들고 엄지로 무언가를 빠르게 쓰고 있었다.
단톡방이 떨었다.
「[혜란] 라이브 최고 동접 6.3만. 클립 조회 한 시간 만에 40만」
「[혜란] 본부장님 판권 다시 본다 하심」
「[혜란] 기은새 다음 회부터 서브 작가 크레디트」
축하 이모티콘이 열아홉 개 줄줄이 달렸다. 재웅 선배는 「아니 근데 우리 막내 출세했네ㅠㅠㅠ」라고 썼다. 나는 단톡방 맨 아래 내 이름을 한참 보았다. 삼 년 동안 기다린 줄이었다. 방송 끝 자막의 작가 이름들 맨 끝, 메인 작가 아래 서브 작가 자리. 화면 속 내 이름은 깨끗했다. 깨끗한 이름을 보는데 헤드셋 안에서 들리던,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소리가 아직 귓바퀴에 남아 있었다.
혜란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했다. 이게 네 그림이야.”
*
자정, 선착장에는 어선이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곽판순 할머니의 아들이 밧줄을 풀었고, 할머니는 보름에게 멸치 한 봉지를 쥐여 주었다. 보름은 카메라가 다 꺼진 뒤에야 나를 불렀다. 원피스 위에 걸친 바람막이가 바닷바람에 부풀었다.
“작가님 이름 말했어요. 미안해요. 거짓말을 못 해서.”
“괜찮아요.”
“괜찮은 얼굴이 아니네.” 보름은 멸치 봉지를 고쳐 쥐었다. “그 사람, 안 울던데요. 배에서 내내 작가님 있는 데만 보더라. 저 언덕 위 창.”
“거기서는 안이 안 보여요.”
“알아요. 그 사람도 알 거고.” 보름은 어선에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보더라고요.”
어선의 작업등이 꺼지고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모래톱 길이 다 잠긴 바다는 까맸다. 나는 맨투맨 소매에 손을 숨기고 언덕을 올라갔다.
*
이튿날 아침 여섯 시 반, 고백방. 강욱은 문틀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 둘이 빨간 불을 켰다. 나는 클립보드를 들었다. 질문지 첫 줄은 「어젯밤 보름 씨를 봤을 때 어떤 마음이었어요?」였다. 어젯밤 열두 시에 내가 쓴 문장이었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강욱이 먼저 말했다.
“작가님.”
“네.”
“오늘부터 대본 주이소.”
카메라 감독이 뷰파인더에서 눈을 뗐다. 강욱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무릎을 쓸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더. 작가님이 쓴 말, 그대로 하께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