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87자)

보름달 꽃방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아침 일곱 시 첫 배는 갈매기를 반쯤 태우고 떠났다⁠. 갑판 난간에 매달린 관광객 둘이 과자를 던졌고⁠, 갈매기들이 배 꽁무니를 따라 낮게 날았다⁠. 재웅 선배는 선실 맨 안쪽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손바닥만 한 카메라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섭외 과정도 나중에 비하인드로 쓴다고 혜란이 들려 보낸 카메라였다⁠.

“⁠아니 근데 은새야⁠, 쟤네 과자 다 떨어지면 우리 먹으러 오는 거 아니야⁠?⁠”

“⁠선배는 맛없어 보여서 괜찮아요⁠.⁠”

“⁠그건 위로야⁠, 욕이야⁠?⁠”

배가 한 번 크게 기우뚱하자 선배는 말을 멈추고 비닐봉지를 찾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어젯밤 찾아 둔 기사를 다시 열었다⁠. 삼 년 전 3월⁠, 창원의 한 고시원 화재⁠. 「⁠구조대원 1명 순직⁠, 1명 등에 화상⁠… 거주자 열한 명 전원 구조⁠」 기사에는 이름이 없었다⁠. 사진 속 구조대원은 방화복 등판이 검게 그을린 채 들것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은 헬멧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깨의 각도를 나는 열흘 동안 화면으로 보았다⁠.

불 근처에 두지 마세요⁠. 하보름의 목소리가 배 엔진 소리 밑에서 다시 울렸다⁠.

단톡방이 떨었다⁠.

「⁠[혜란] 섭외 진행 보고 열두 시까지⁠」

「⁠[혜란] 안 되면 남4 여동생이라도 데려와⁠. 신청서 문장력 보니까 걔도 그림 됨⁠」

나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통영항이 창밖으로 다가왔다⁠.

*

창원 상남동 골목의 꽃집은 간판보다 화분이 먼저 보였다⁠. 문 앞 계단 세 칸에 수국 화분이 줄지어 있었고⁠, 유리문에는 노란 종이 달이 붙어 있었다⁠. 「⁠보름달 꽃방⁠」 문을 밀자 종이 울리고 찬 물 냄새가 얼굴에 닿았다⁠. 꽃집의 냉장고는 모니터실보다 차가웠다⁠.

작업대 앞에서 여자가 국화를 다듬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앞치마⁠, 뒤로 질끈 묶은 머리⁠, 손등에 물방울⁠. 작업대 왼편에는 흰 국화로 채운 장례 화환이⁠, 오른편에는 연분홍 장미로 만든 부케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같은 가위로 국화 줄기를 자르고⁠, 같은 가위로 장미 가시를 땄다⁠.

“⁠하보름 씨죠⁠? 어젯밤 전화드린 기은새예요⁠.⁠”

“⁠알아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어리네요⁠.⁠”

보름은 가위를 내려놓지 않았다⁠. 재웅 선배가 카메라를 들자⁠, 보름은 작업대 옆 양동이에서 안개꽃 한 다발을 뽑아 렌즈 앞에 꽂듯이 내밀었다⁠. 화면이 하얗게 덮였다⁠.

“⁠찍지 마세요⁠. 찍으면 안개꽃값 받아요⁠.⁠”

“⁠얼마예요⁠?⁠”

“⁠만 이천 원⁠.⁠”

선배는 카메라를 내리고 지갑을 꺼내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넣었다⁠. 나는 작업대 앞 의자에 앉았다⁠. 삼 년 동안 출연자 백 명 넘게 섭외하면서 외운 순서가 있었다⁠. 먼저 상대가 얻을 것을 말하고⁠, 다음에 상대가 잃지 않을 것을 말한다⁠. 출연료⁠, 얼굴 흐림 처리 여부⁠, 분량⁠, 촬영 일정⁠. 나는 순서대로 말했다⁠. 보름은 국화 줄기를 비스듬히 잘라 물에 꽂으며 끝까지 들었다⁠.

“⁠그러니까요⁠.⁠” 보름이 가위를 놓았다⁠. “⁠삼 년 전에 문자 한 줄로 끝낸 사람을⁠, 방송에서 다시 만나라는 거죠⁠?⁠”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하시면 돼요⁠. 저희는 장면만 마련하고요⁠.⁠”

“⁠장면⁠.⁠” 보름이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작가님은 그 사람이 거기서 저를 만나면 뭐가 좋아요⁠?⁠”

질문지에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고르는 대신 사실을 골랐다⁠.

“⁠시청률이 올라요⁠.⁠”

보름이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솔직하시네⁠. 그럼 저도 솔직하게⁠. 안 가요⁠.⁠”

“⁠출연료는 삼백만 원이에요⁠. 이틀이면 되고요⁠.⁠”

“⁠삼백이면 이 가게 두 달 월세예요⁠.⁠” 보름은 냉장고 유리문을 가리켰다⁠. 안쪽 칸 절반이 비어 있었다⁠. “⁠요즘 결혼식은 꽃을 생화로 안 해요⁠. 장례식장은 화환 대신 쌀을 받고요⁠. 그래서 저는 요즘 두 가지만 만들어요⁠. 남이 결혼하는 꽃이랑 남이 죽는 꽃⁠.⁠”

“⁠그럼 삼백만 원이 필요하시잖아요⁠.⁠”

“⁠필요해요⁠.⁠” 보름이 장미 가시를 하나 더 땄다⁠. “⁠필요한 거랑 가는 거는 달라요⁠. 작가님 일은 둘을 같은 걸로 만드는 거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재웅 선배가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맞는 말을 들었을 때 선배가 내는 기침이었다⁠.

보름의 눈이 카운터로 갔다⁠. 계산대 옆 꽃병 아래에 하얀 봉투가 꽂혀 있었다⁠. 금박으로 찍은 두 이름 가운데 하나가 하보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날짜는 10월 17일이었다⁠.

“⁠결혼하시는구나⁠.⁠”

“⁠가을에요⁠. 이 사람은 제가 꽃 다듬는 거 보면 손 다칠까 봐 가위부터 빼앗아 가요⁠.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보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에는 해바라기 한 다발이 거꾸로 매달려 말라 있었다⁠. 꽃잎이 갈색으로 오그라들어⁠, 손끝만 닿아도 바스러질 만큼 말라 있었다⁠. 꽃집에 마른 꽃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해바라기만 혼자 창가 볕을 다 받고 있었다⁠.

“⁠저건 안 파는 거예요⁠?⁠”

보름은 해바라기를 한 번 보고 다시 국화로 돌아갔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사 온 거예요⁠. 버릴 때를 놓쳤어요⁠.⁠” 가위가 다시 움직였다⁠. “⁠작가님⁠, 그 사람 등 봤어요⁠?⁠”

“⁠아뇨⁠.⁠”

“⁠보면 알아요⁠. 저는 그 등 보고 울었고⁠, 그 사람은 다음 날 아침에 문자를 보냈어요⁠. ‘⁠미안타⁠. 그만하자⁠.⁠’ 마침표까지 찍어서⁠.⁠”

보름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장례 화환의 리본을 펴서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부케의 리본을 같은 손으로 묶었다⁠. 나는 더 묻지 못했다⁠. 물어서 나올 말은 다 녹화하고 싶은 말이었고⁠, 녹화하고 싶은 말을 물으러 온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오는 길에 재웅 선배가 문 앞 수국 화분 하나를 샀다⁠. 만 오천 원이었다⁠.

“⁠안개꽃값 대신이야⁠. 아니 근데 은새야⁠, 배에 이거 들고 타면 갈매기가 먹을까⁠?⁠”

*

통영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선배는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너 남4 좋아하지⁠?⁠”

“⁠앞에 신호요⁠.⁠”

“⁠신호 봤어⁠. 너 남4 화면 넘길 때 손이 느려⁠. 다른 출연자는 휙휙 넘기는데 남4만 한 박자 늦어⁠.⁠”

“⁠선배 지금 운전하면서 제 손을 봤어요⁠?⁠”

“⁠아니 근데 그게 조연출이 하는 일이야⁠. 사람 손 보는 거⁠.⁠”

선배는 신호에 멈추자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 속에서 머리털이 몇 가닥 없는 아기가 숟가락을 물고 있었다⁠. 돌잔치 초대장 시안이었다⁠. 「⁠우리 도토리의 첫 생일에 초대합니다⁠」

“⁠다음 달 24일⁠. 그때까지만 아무 일 없으면 돼⁠. 너도 와⁠. 너 오면 도토리가 좋아할 거야⁠.⁠”

“⁠아직 저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좋아하지⁠. 알면 너도 무서워⁠.⁠”

나는 웃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돌잔치 날짜를 말하면서 혜란의 이름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아도 두 이야기는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

막배는 저녁 여섯 시였다⁠. 선착장에 내리자 혜란이 편집 트럭 계단에 앉아 오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 된다며⁠.⁠”

“⁠아직 하루밖에 안 됐어요⁠.⁠”

“⁠방송은 화요일이야⁠. 화요일까지는 사흘이고⁠.⁠” 혜란은 오이를 반으로 부러뜨려 반쪽을 내밀었다⁠. “⁠먹어⁠. 섭외는 배고프면 진다⁠.⁠”

나는 오이를 받았다⁠. 혜란은 재웅 선배 품의 수국 화분을 흘끗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수국 예쁘네⁠. 그림 된다⁠.⁠”

곽판순 할머니 민박 마당에서 마을 사람 셋이 평상에 앉아 수박을 쪼개고 있었다⁠. 오후 배 이야기였다⁠. 9월이면 오후 배가 없어지고⁠, 그러면 통영 병원에 다녀오는 날은 하룻밤을 뭍에서 자야 한다⁠. 이장이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밀물 하우스⁠」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수박씨를 뱉으며 말했다⁠.

“⁠저기 우리 집 나온다⁠. 저거 잘되면 배 안 없앤다⁠.⁠”

마을 사람 하나가 화면 속 숙소를 가리키며 자기 집 지붕도 나왔다고 좋아했다⁠. 나는 평상을 지나치며 화면을 보지 않았다⁠. 예고편 끝 자막은 내가 쓴 문장이었다⁠. 「⁠이 여름⁠, 누군가의 비밀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

밤 열한 시⁠, 모니터실 27번 화면 속 빨래줄이 비어 있었다⁠. 강욱은 늘 새벽에 빨래를 널었다⁠. 나는 화면을 끄고 숙소로 내려갔다⁠. 마당 카메라 배터리를 갈 시간이었고⁠, 실제로 배터리 가방도 들었다⁠. 다만 배터리를 갈아야 하는 카메라는 창고 앞이 아니라 현관 위에 있었다⁠.

창고 뒤로 돌아가면 빨래줄 끝자락이 카메라 밖으로 빠진다⁠. 섬의 사각지대 셋 가운데 하나였다⁠. 달이 밝아 빨래가 하얗게 떠 보였다⁠. 빨래줄 끝에서 강욱이 마른 수건을 걷어 개고 있었다⁠. 수건 한 장을 세 번 접어 바구니에 넣을 때마다 손바닥으로 한 번씩 눌렀다⁠.

“⁠안 주무세요⁠?⁠”

강욱은 놀라지 않았다⁠. 수건을 하나 더 개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작가님은 와 여기 있는데예⁠?⁠”

“⁠배터리요⁠.⁠”

강욱이 내 손의 배터리 가방을 보고⁠, 현관 위 카메라를 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등 뒤로 돌렸다⁠. 바닷바람이 빨래줄을 흔들어 수건 끝이 내 팔에 닿았다⁠. 햇볕을 하루 종일 먹은 수건은 밤에도 따뜻했다⁠.

강욱이 한 걸음 다가와 코를 조금 찡그렸다⁠.

“⁠국화 냄새 납니더⁠.⁠”

“⁠네⁠?⁠”

“⁠작가님한테서예⁠. 장례식장 냄새 말고⁠, 꽃집 냄새⁠. 물 냄새 섞인 거⁠.⁠” 강욱은 수건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 인터뷰에 작가님 없었지예⁠. 다른 작가님이 왔었고⁠. 창원 갔다 왔지예⁠?⁠”

빨래줄이 바람에 끼익 울었다⁠. 나는 머릿속에 자막을 띄우려 했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제 얘기 쓰러 간 거면⁠.⁠” 강욱이 낮게 말했다⁠. “⁠쓰지 마이소⁠.⁠”

“⁠안 써요⁠.⁠”

“⁠거짓말할 때 작가님은 볼펜을 누르데예⁠. 지금은 볼펜이 없어가 손가락을 누르고 있고⁠.⁠”

나는 엄지로 검지를 꾹꾹 누르던 손을 맨투맨 주머니에 넣었다⁠. 강욱은 웃지 않았다⁠. 대신 빨래줄에서 마지막 수건을 걷었다⁠.

“⁠작가님은 저한테 뭘 시키고 싶은데예⁠?⁠”

질문이 거꾸로 왔다⁠. 삼 년 동안 나는 질문을 받는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었다⁠. 혜란이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고⁠, 재웅 선배가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고⁠, 화이트보드의 빨간 실이 원하는 대답이 있었다⁠. 나는 그중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아무것도요⁠.⁠”

강욱이 수건을 든 채 나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짧은 머리 끝에 하얗게 묻었다⁠.

“⁠그 말은 질문지에 없지예⁠?⁠”

“⁠없어요⁠.⁠”

“⁠그라믄 됐습니더⁠.⁠”

강욱이 손을 들었다⁠. 손끝이 내 머리 옆에 와서 멈췄다가⁠, 묶은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 있던 무언가를 집어 냈다⁠. 국화 꽃잎 하나였다⁠. 강욱은 꽃잎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잠깐 보더니 빨래집게에 집어 빨래줄에 걸었다⁠. 하얀 꽃잎이 바람에 팔랑였다⁠.

“⁠보름이는 잘 있습니꺼⁠?⁠”

“⁠가을에 결혼한대요⁠.⁠”

강욱은 바구니를 들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창고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대답했다⁠.

“⁠잘됐네예⁠.⁠”

목소리에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게 하느라 애쓴 목소리였다⁠. 나는 빨래줄의 꽃잎을 떼지 못한 채 현관으로 걸어가 멀쩡한 배터리를 새 배터리로 갈았다⁠.

*

자정을 조금 넘겨 모니터실로 돌아왔을 때 휴대전화가 떨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첫 줄을 읽기 전에 누구인지 알았다⁠. 문장에 마침표가 꼬박꼬박 찍혀 있었다⁠.

「⁠갈게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제 얘기를 한 녹화본이 있으면⁠, 방송 나가기 전에 저한테 먼저 보여 주세요⁠.⁠」

화면 마흔두 개 가운데 27번의 오른쪽 끝에서만⁠, 하얀 꽃잎 하나가 바람을 따라 화면 안팎을 들락거렸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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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은담2026.10.31· 2화

    첫 배가 갈매기를 반쯤 태우고 떠났다는 첫 문장 보고 바로 다음 화 눌렀어요.

    • 소하린작가2026.11.01

      섬 촬영은 늘 첫 배에서 시작해요. 그 배에 누가 타는지가 매 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