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82자)

대본 없는 척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새벽 다섯 시 십 분⁠, 모니터실 에어컨이 한 번 덜컹했다⁠. 마을회관 2층 벽 하나를 화면 마흔두 개가 채우고 있었고⁠, 마흔한 개는 자는 사람이나 빈방을 비췄다⁠. 움직이는 화면은 27번 하나였다⁠. 숙소 마당 끝⁠, 창고 앞의 빨래줄이었다⁠.

남자 하나가 바구니에서 수건을 꺼내 털고 있었다⁠. 수건을 탁 털 때마다 화면 아래 음향 막대가 짧게 튀었다⁠. 흰 수건을 먼저 널고⁠, 하늘색을 옆에⁠, 분홍은 맨 끝에 걸었다⁠. 빨래집게는 수건마다 두 개씩⁠, 사이는 손바닥 한 뼘이었다⁠. 나는 클립보드의 자막 초안 종이에 볼펜으로 썼다⁠. 「⁠수건도 줄 맞춰 너는 남자⁠」 쓰고 나서 줄을 두 번 그었다⁠.

출연자 「⁠남4⁠」⁠, 도강욱⁠. 창원 소방서의 구조대원이었고⁠, 열흘 동안 카메라 앞에서 한 말을 다 모아도 내 질문지 한 장을 못 채웠다⁠. 대신 아침마다 열 사람 몫의 빨래를 널었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다⁠. 사흘째 아침에 여자 출연자 하나가 누가 자기 수건을 널었느냐고 물었을 때도⁠, 강욱은 대답 없이 평상에 앉아 물만 마셨다⁠.

나는 27번을 되감았다⁠. 수건 터는 손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털고⁠, 다시 돌아갔다⁠. 세 번째로 되감았을 때 강욱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마을회관을 향해 있었다⁠. 2층 창은 진하게 선팅이 되어 있어서 바깥에서 안이 보일 리 없었다⁠. 강욱은 한참 창을 보다가 빈 바구니를 들고 들어갔다⁠.

나는 맨투맨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렸다⁠. 한여름에 회색 맨투맨을 입는 사람은 섬에서 나 하나였다⁠. 에어컨을 18도 위로 올리면 녹화 서버가 뜨거워진다고 기술 감독이 말했고⁠, 나는 이 방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산다⁠. 목에 건 검은 헤드셋이 쇄골에 닿아 차가웠다⁠.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떨었다⁠. 제작진 단톡방이었다⁠.

「⁠[혜란] 2회 1⁠.4%⁠. 1회보다 0⁠.9 빠짐⁠」

「⁠[혜란] 일곱 시 작가 방⁠. 그림 없으면 아무도 아침 없음⁠」

「⁠[팽재웅] 아니 근데 아침은 주세요 피디님ㅠㅠ⁠」

「⁠[혜란] 재웅이는 점심도 없음⁠」

나는 책상에 이마를 댔다⁠. 머릿속에서 자막이 저절로 떴다⁠. 「⁠막내 작가⁠, 아침 굶을 위기⁠」 자막을 다는 버릇은 삼 년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

여섯 시 반⁠, 숙소 별채의 고백방은 창고를 고친 방이라 바닥에서 아직 그물 냄새가 올라왔다⁠. 의자 둘⁠, 카메라 둘⁠, 조명 하나⁠. 출연자는 아침마다 이 방에 한 사람씩 들어와 어제 일을 말하고⁠, 나는 카메라 옆에 쪼그려 앉아 질문을 던진다⁠. 대본은 없다⁠. 대신 저절로 그렇게 말하게 되는 질문이 있고⁠, 질문은 내가 쓴다⁠.

강욱은 문틀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짧은 검은 머리에 남색 반팔 티셔츠⁠, 의자에 앉으니 무릎이 카메라 삼각대에 닿았다⁠.

“⁠어제 밀물 선택 때 누구 생각 하셨어요⁠?⁠”

“⁠노요⁠.⁠”

“⁠노요⁠?⁠”

“⁠노예⁠. 배 젓는 노⁠. 생각보다 무겁대예⁠.⁠”

카메라 감독이 뷰파인더 뒤에서 어깨를 떨었다⁠. 나는 클립보드를 넘겼다⁠.

“⁠어제 하루 가장 오래 이야기한 사람은 누구예요⁠?⁠”

“⁠갈매기요⁠. 평상 위에 앉아가 제 빵을 계속 보길래⁠, 안 된다꼬 했습니더⁠.⁠”

“⁠갈매기가 뭐라던가요⁠?⁠”

“⁠끝까지 봤습니더⁠.⁠”

나는 웃음을 참느라 볼펜 끝을 물었다⁠. 다른 출연자 앞에서 나는 볼펜을 쉬지 않고 딸깍거린다⁠. 질문을 고를 때 나는 버릇이다⁠. 강욱 앞에서는 볼펜이 조용했다⁠. 나도 열흘째에야 알았다⁠.

강욱이 의자 옆에 놓은 보리차 병을 내 쪽으로 밀었다⁠.

“⁠작가님 어제도 안 잤지예⁠?⁠”

“⁠질문은 제가 해요⁠.⁠”

“⁠그라믄 하이소⁠. 기다리께예⁠.⁠”

기다린다는 사람 앞에서 질문지가 하얗게 보였다⁠. 나는 사전 인터뷰를 떠올렸다⁠. 촬영 전 서울 회의실에서 강욱은 같은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 연애는 삼 년 전이고⁠, 자기가 끝냈고⁠, 연애 이야기는 안 하겠다고⁠. 나는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질문지에서 연애사 항목을 지웠다⁠. 메인 작가 선배가 왜 지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림이 안 나올 것 같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의 까닭은 엿새째 밤에 있었다⁠. 마당 처마 밑 카메라가 바람에 돌아가 벽만 찍고 있었고⁠, 기술팀은 다 통영에 나가 있었다⁠. 나는 창고에서 사다리를 꺼내 혼자 올라갔다⁠. 사다리 다리 하나가 마당 돌 틈에 빠져 기우뚱했을 때⁠, 아래에서 누가 사다리를 붙잡았다⁠. 나는 카메라 나사를 다 조일 때까지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내려와 보니 강욱이었다⁠. 강욱은 사다리 다리 밑에 납작한 돌을 하나 괴어 놓고 말했다⁠.

“⁠사다리는 네 발이 다 땅에 닿아야 됩니더⁠. 세 발로는 사람 못 버팁니더⁠.⁠”

“⁠촬영 중에 제작진하고 말하시면 안 돼요⁠.⁠”

“⁠카메라가 벽 보고 있었다 아입니꺼⁠.⁠”

강욱은 한마디만 남기고 숙소로 들어갔다⁠. 나는 돌아간 카메라를 바로 세운 사람이 되었고⁠, 강욱은 카메라가 안 보는 동안 나를 받친 사람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27번 화면을 남보다 오래 보았다⁠.

*

일곱 시⁠, 작가 방은 곽판순 할머니 민박 안방 옆의 작은 방이었다⁠. 벽에 붙인 화이트보드에는 출연자 열 명의 사진과 사진 사이를 잇는 색실이 있었다⁠. 밀물 선택에서 쪽배를 같이 탄 둘은 빨간 실⁠, 같이 밥을 먹은 둘은 파란 실⁠. 남4의 사진에서 나간 실은 빨간 실 하나뿐이었고⁠, 끝에 「⁠여2 위설아⁠」가 있었다⁠.

석혜란 피디는 방 한가운데 앉아 오이를 씹고 있었다⁠. 마흔넷⁠, 이 팀을 만든 사람이고 나를 막내로 뽑은 사람이다⁠. 혜란은 화가 날수록 오이를 천천히 씹었다⁠. 오늘은 한 입을 십 초 동안 씹었다⁠.

스피커로 켜 둔 휴대전화에서 편성 본부장의 목소리가 나왔다⁠.

“⁠석 피디⁠, 플랫폼에서 동남아 판권 얘기가 들어왔다가 2회 보고 멈췄어요⁠. 3회도 1점대면 8회에서 접읍시다⁠.⁠”

“⁠네⁠, 본부장님⁠.⁠”

전화가 끊겼다⁠. 혜란은 오이 꼭지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남4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얘 전 여친 데려와⁠. 깜짝 등장⁠.⁠”

방이 조용해졌다⁠. 재웅 선배가 노트북 뒤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아니 근데 피디님⁠, 남4는 연애 얘기 안 한다고⁠…⁠…⁠.⁠”

“⁠그러니까 그림이 되지⁠. 말 안 하는 애 앞에 말하게 만드는 사람 세워 놓으면⁠.⁠” 혜란이 나를 보았다⁠. “⁠은새야⁠. 네가 섭외해⁠.⁠”

“⁠제가요⁠?⁠”

“⁠남4 사전 인터뷰 네가 했잖아⁠.⁠”

“⁠그 사람⁠, 그 얘기는 안 하겠다고 했어요⁠. 동의서에도 사생활은⁠…⁠…⁠.⁠”

“⁠동의서 4쪽⁠. ‘⁠제작진이 정한 상황에 참여한다⁠.⁠’ 네가 넣은 문장이야⁠.⁠”

내가 넣은 문장이 맞았다⁠. 시즌 1 끝나고 동의서를 고칠 때⁠, 나는 저 한 줄을 넣고 칭찬을 받았다⁠.

“⁠피디님⁠, 그 사람은 그런 거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 거가 뭔데⁠?⁠”

대답이 목에서 멈췄다⁠. 혜란은 기다리지 않았다⁠.

“⁠스무 명이야⁠. 재웅이 애 돌잔치가 다음 달이고⁠, 음향 감독은 지난달에 대출을 갈아탔어⁠. 메인 작가는 이번 시즌 끝나면 자기 이름 걸고 기획안 낸다고 서울에서 밤새우고 있고⁠. 8회에서 접히면 이 사람들 다음 달에 어디로 가니⁠? 네가 데리고 갈래⁠?⁠”

혜란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화이트보드 아래 단톡방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이 바람에 떨었다⁠. 「⁠밀물 제작 20⁠」

혜란이 내 클립보드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리고 은새야⁠. 너 남4 인터뷰만 이십 분씩 길더라⁠. 섭외는 사정 아는 사람이 해야지⁠.⁠”

목덜미가 18도보다 차가워졌다⁠. 혜란은 모니터를 나보다 오래 본 사람이었다⁠. 나는 클립보드를 가슴에 붙였다⁠.

“⁠데려오면⁠, 장면은 제가 짤게요⁠.⁠”

“⁠짜⁠. 그림만 나오면⁠.⁠”

혜란이 새 오이를 집었다⁠. 이번에는 빨리 씹었다⁠.

*

회의가 끝나자 곽판순 할머니가 멸치볶음 통을 들고 방문을 밀었다⁠. 일흔하나⁠, 숙소 건물의 주인이고 젊을 때는 물질을 했다⁠. 할머니는 통을 내 앞에 내려놓고 내 맨투맨 소매를 집었다⁠.

“⁠여름에 이기 뭐꼬⁠? 니 거기 2층에서 얼어 죽을라 카나⁠.⁠”

“⁠에어컨이 세서요⁠.⁠”

“⁠에어컨 말고⁠. 니는 맨날 아침에 창문에 코 박고 있대⁠.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다⁠.⁠”

재웅 선배가 밥을 뿜을 뻔했다⁠. 나는 멸치를 한 젓가락 크게 집었다⁠. 할머니는 방을 나가다가 문턱에서 혜란을 돌아보았다⁠.

“⁠피디 양반⁠. 여객선 회사에서 9월부터 오후 배 없앤다 카더라⁠. 손님 안 늘면⁠. 너거 방송 잘돼야 된데이⁠.⁠”

“⁠잘될 거예요⁠, 할머니⁠.⁠”

혜란은 웃으며 대답했고⁠, 할머니가 나가자마자 웃음을 지웠다⁠. 노트북 화면에는 포털 기사 제목이 떠 있었다⁠. 「⁠연애 예능 홍수 속 시청자 피로감⁠… 새 시즌 줄줄이 1%대⁠」

*

오후 세 시⁠, 재웅 선배가 모니터실 창문을 열고 드론을 띄웠다⁠. 드론 이름은 「⁠갈매기 1호⁠」였다⁠. 선배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고⁠, 선배는 진짜 갈매기를 무서워했다⁠.

“⁠아니 근데 은새야⁠, 저 갈매기가 자꾸 1호를 쳐다봐⁠. 동족인 줄 아나 봐⁠.⁠”

“⁠선배가 이름 붙인 걸 알아서 그래요⁠.⁠”

갈매기 두 마리가 드론을 따라붙자 선배는 조종기를 든 채 의자 밑으로 몸을 숙였다⁠. 드론은 숙소 지붕 위를 한 바퀴 돌다가 배터리 경고음을 내며 돌아왔다⁠. 선배는 의자 밑에서 나오지 않고 단톡방에 「⁠항공 그림 실패⁠」라고 올렸다⁠.

나는 화면 마흔두 개 가운데 여섯 개를 같이 보았다⁠. 거실 소파의 설아가 강욱 옆자리로 한 칸 옮겨 앉았다⁠. 설아는 필라테스 강사였고⁠, 출연자 가운데 팔로워가 가장 많았다⁠. 말을 할 때면 늘 고개를 카메라 각도에 맞췄다⁠. 강욱이 수박을 썰자 설아가 접시를 받쳤다⁠. 화면으로 보면 둘은 한 쌍이었다⁠. 나란히 앉은 둘을 한 화면에 넣으면 시청자는 둘을 하나로 읽는다⁠. 나는 그렇게 읽게 만드는 일로 월급을 받았다⁠.

설아가 수박 한 조각을 강욱 입 앞에 내밀었다⁠. 강욱은 손으로 받아 먹었다⁠. 설아의 웃음이 화면 안에서 한 박자 늦게 멈췄다⁠. 나는 볼펜을 세 번 딸깍였다⁠.

*

밤 열 시⁠, 선착장의 가로등 아래에서 나는 강욱의 출연 신청서를 다시 열었다⁠. 신청서를 낸 사람은 강욱이 아니라 강욱의 여동생이었다⁠. 맞춤법이 반쯤 틀린 신청서를 처음 읽던 날⁠, 나는 회의실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지원 동기⁠: 우리 오빠는 연애를 삼 년째 안 함⁠. 보름 언니(⁠창원 상남동 보름달 꽃방⁠) 이후로 사람이 고장 남⁠. 소방관이 고장 나면 누가 고침⁠? 방송국이 고쳐 주세요⁠.⁠」

방송국은 고치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꽃집 번호를 검색해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바다에서 밀물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모래톱 길이 한 뼘씩 잠기고 있었다⁠. 저 길이 다 잠기면 작은달비까지는 둘이서 노를 저어야 건넌다⁠. 나는 혼자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네 번 가고 여자 목소리가 받았다⁠.

“⁠보름달 꽃방입니다⁠. 영업은 끝났는데요⁠.⁠”

“⁠늦게 죄송합니다⁠. 방송 작가 기은새라고 합니다⁠. 도강욱 씨 일로 전화드렸어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가위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고⁠, 셀로판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한참 뒤에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까보다 낮았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통영 앞바다 섬에서 촬영 중이에요⁠.⁠”

“⁠섬이요⁠.⁠” 하보름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작가님⁠. 무슨 방송인지는 안 물을게요⁠. 하나만 부탁해요⁠.⁠”

“⁠네⁠.⁠”

“⁠그 사람 거기 있으면⁠, 불 근처에 두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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