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00자)

생방송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오후 여섯 시⁠, 송출팀 막내가 모니터실 문을 두드렸다⁠. 마당 큰 화면에 틀 추억 영상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나는 외장 하드를 건넸다⁠. 파일 이름은 「⁠추억_최종⁠」이었다⁠. 혜란은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 하드가 송출팀 막내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무엇이 들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부터 마당은 사람으로 찼다⁠. 출연자 열 명이 앉을 평상 앞으로 접이식 의자 마흔 개가 놓였다⁠. 섬 사람들이 앞줄을 차지했다⁠. 곽판순 할머니는 남색 한복을 다시 입고 맨 앞 가운데 앉았다⁠. 옆자리에 여객선 회사 본부장이 앉았다⁠. 할머니가 본부장에게 전복 꼬치를 쥐여 주었고⁠, 본부장은 꼬치를 든 채 어색하게 웃었다⁠. 선장은 맨 뒷줄에 서서 껌을 씹었다⁠. 오늘은 한 번도 터뜨리지 않았다⁠.

마당 한쪽에 세운 큰 화면이 노을을 받아 빨갛게 빛났다⁠. 빨래줄은 그대로 있었다⁠. 줄에는 수건 열한 장이 널려 있었다⁠. 맨 끝은 회색이었다⁠. 혜란이 걷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림이 된다고 했다⁠.

여덟 시 반⁠, 휴대전화에 문자가 잇달아 들어왔다⁠. 첫 번째는 보름이었다⁠.

「⁠생방송 가게에서 볼게요⁠. 손님 둘이랑⁠. 리뷰 보고 수국 사러 온 분들이에요⁠. 텔레비전이 작아서 셋이 머리 맞대고 봐요⁠.⁠」

두 번째는 강욱의 여동생이었다⁠.

「⁠엄마랑 소방서 팀장님이랑 다 같이 봐요⁠. 팀장님이 치킨 세 마리 시킴⁠. 오빠 이상한 짓 하면 작가님이 말려요⁠. 이상한 짓 안 하면 그것도 말려요⁠. 오빠는 이상한 짓을 해야 오빠예요⁠.⁠」

세 번째는 어머니였다⁠. 사진 한 장뿐이었다⁠. 세탁소 텔레비전 앞에 동네 사람 여섯이 둘러앉아 있었고⁠, 어머니가 맨 앞에서 다리미를 든 채 엄지를 들고 있었다⁠.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바람막이 안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네 번 접은 종이가 손끝에 닿았다⁠. 재웅 선배가 의자를 굴려 내 옆으로 왔다⁠.

“⁠아니 근데 은새야⁠. 피디님이 도토리 돌잔치 온대⁠. 아까 나한테 봉투 줬어⁠. 생방송 끝나고 주면 까먹을까 봐 미리 준대⁠.⁠”

“⁠얼마 들었어요⁠?⁠”

“⁠안 열어 봤어⁠. 무서워서⁠.⁠” 선배가 봉투를 가슴께에 대고 눌렀다⁠. “⁠근데 두꺼워⁠. 아니 근데 두꺼우니까 더 무서워⁠.⁠”

선배는 봉투를 품에 넣은 채 조종기를 들었다⁠. 혜란은 스위처 앞에서 큐시트를 다시 넘기고 있었다⁠. 실루엣 칸에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두 번 그려져 있었다⁠. 최종 선택 칸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

아홉 시 정각⁠, 송출이 시작됐다⁠. 모니터실은 부조정실이 되었다⁠. 화면 마흔두 개 앞에 송출 스위처가 놓였고⁠, 혜란이 스위처 앞에 앉았다⁠. 오른쪽 위 작은 화면에 플랫폼 동시 시청자 숫자가 떴다⁠. 「⁠84⁠,210⁠」 숫자 아래로 텔레비전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가 가늘게 꿈틀댔다⁠.

오프닝은 드론으로 열었다⁠. 「⁠갈매기 1호⁠」가 프로펠러 하나를 새것으로 갈고 섬 위를 크게 돌았다⁠. 갈매기 세 마리가 따라붙었다⁠. 재웅 선배는 조종기를 쥔 채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근데 오늘은 따라와도 돼⁠. 오늘은 내가 대장이야⁠.⁠”

갈매기들은 선배 말을 들었는지 드론 뒤에 나란히 줄지어 날았다⁠. 채팅창에 「⁠갈매기 출연료 드디어 지급⁠」이 올라왔다⁠. 혜란이 처음으로 웃었다⁠.

출연자 열 명이 한 사람씩 소감을 말했다⁠. 남1은 휘파람 이야기를 했고 할머니가 앞줄에서 고무장갑을 흔들었다⁠. 강욱 차례에 강욱은 짧게 말했다⁠. 「⁠빨래가 잘 말랐습니더⁠」 채팅창이 웃음으로 덮였다⁠. 강욱의 셔츠 깃에는 무선 마이크 옆에 빨래집게 하나가 꽂혀 있었다⁠.

*

아홉 시 사십 분⁠, 「⁠제작진 사과⁠」 차례였다⁠. 숙소 현관 앞에 역광 조명이 켜졌다⁠. 실루엣 자리였다⁠. 진행 피디가 무전기로 나를 불렀다⁠.

“⁠작가님⁠, 현관으로 오세요⁠. 등만 나갑니다⁠.⁠”

나는 모니터실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혜란이 스위처에서 고개를 돌렸다⁠.

“⁠안 갈 거니⁠?⁠”

“⁠어제 말씀드렸어요⁠. 얼굴로 하든지 안 하든지요⁠.⁠”

혜란은 이 초 동안 나를 보았다⁠. 생방송의 이 초는 길었다⁠. 혜란이 무전기를 들었다⁠.

“⁠사과 코너 자막으로 대체⁠. 2번 자막 띄워⁠.⁠”

화면에 하얀 글자가 떴다⁠. 「⁠제작진은 촬영장 관리 소홀과 출연자 및 관계자께 드린 상처에 깊이 사과드립니다⁠」 글자는 칠 초 동안 떠 있다가 사라졌다⁠. 채팅창이 잠깐 술렁였다⁠. 「⁠사과를 자막으로 함⁠?⁠」 「⁠작가는 어디 감⁠」 「⁠작가는 어디 감⁠」 밑에 「⁠모니터실에 숨어 있겠지⁠」가 달렸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채팅창을 끝까지 읽었다⁠. 읽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차례는 아직이었다⁠.

*

아홉 시 오십 분⁠, 마당 큰 화면에 추억 영상이 떴다⁠. 혜란이 스위처 위에서 손을 멈췄다⁠. 마당 화면이 송출 화면에 그대로 물렸다⁠. 무엇이 나오든 팔만 명이 같이 보는 그림이었다⁠.

첫 장면은 새벽 빨래줄이었다⁠. 수건 터는 손⁠, 탁 소리⁠, 흰색과 하늘색과 분홍⁠. 자막이 떴다⁠. 「⁠수건도 줄 맞춰 너는 남자⁠」 마당에서 웃음이 터졌다⁠. 다음은 갯바위였다⁠. 할머니가 남1의 엉덩이를 고무장갑으로 때렸다⁠. 할머니가 앞줄에서 일어나 관객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설아가 성게를 놓치고 물속에서 허우적댔다⁠. 「⁠포기란 없다⁠」 「⁠성게도 포기함⁠」 재웅 선배의 드론이 갈매기 떼에 쫓겼다⁠. 「⁠항공 그림 실패⁠」 선배가 모니터실 창가에서 「⁠아니 그걸 왜 넣어⁠」 하고 비명을 질렀다⁠.

혜란은 스위처를 쥔 손을 풀지 않았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혜란의 어깨가 조금씩 올라갔다⁠.

마지막 장면은 쪽배였다⁠. 설아와 강욱이 첫 밀물 선택 때 탄 배⁠. 노를 혼자 저은 강욱 때문에 배가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았고⁠, 설아가 뱃전을 붙잡고 웃었다⁠. 웃다가 각도를 잊었다⁠. 자막은 없었다⁠. 영상이 끝났다⁠. 큰 화면이 까매졌다⁠.

냉동 창고도⁠, 초록빛 화면도⁠, 트럭 뒷문도 없었다⁠.

혜란이 숨을 내쉬었다⁠. 오래 참았던 숨이었다⁠. 혜란이 나를 보았다⁠.

“⁠안 틀었네⁠.⁠”

“⁠틀 거면 처음부터 안 들어왔어요⁠.⁠”

혜란은 무언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스위처 옆에 놓인 오이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동시 시청자 숫자는 「⁠156⁠,930⁠」이었다⁠.

*

열 시⁠, 마지막 밀물이 들어왔다⁠. 모래톱 길이 잠기는 바다를 배경으로 최종 선택이 시작되었다⁠. 여자가 먼저 골랐다⁠. 설아가 세 번째로 마당 한가운데에 나왔다⁠. 손에 노 한 자루를 들었다⁠. 큐시트대로라면 설아는 노를 강욱에게 내밀고⁠, 대본을 읽고⁠, 강욱이 노를 받는다⁠. 광고는 그다음이었다⁠.

설아는 노를 들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았다⁠. 턱을 돌리지 않았다⁠.

“⁠저 대본 받았어요⁠.⁠”

마당이 조용해졌다⁠. 혜란이 스위처 위로 몸을 숙였다⁠.

“⁠‘⁠이 섬에서 저는 처음으로⁠, 노를 같이 저어 주는 사람을 만났어요⁠.⁠’ 오늘 읽으라고 받은 문장이에요⁠. 서울에서 작가님이 써서 보냈대요⁠. 예쁜 문장이에요⁠. 근데 제 문장이 아니에요⁠.⁠” 설아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들어 보였다⁠. “⁠그리고 등대에서 들은 말도 받은 거였어요⁠. 저한테 한 말 아니었어요⁠. 저 그거 알고도 웃었어요⁠. 오천 때문에요⁠.⁠”

설아가 숨을 들이쉬었다⁠. 할머니가 가르친 대로⁠, 길게⁠.

“⁠저 스튜디오 빚이 오천 남았어요⁠. 필라테스 기구 열두 대 할부요⁠. 이 방송에서 이름 하나 얻어서 나가려고 왔어요⁠. 최종 커플 되면 협찬 들어온대서⁠. 근데요⁠, 남이 써 준 문장으로 골라지면 저는 평생 그 문장으로 불릴 것 같아요⁠.⁠” 설아가 노를 마당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오늘 아무도 안 고를게요⁠. 저를 고를게요⁠. 기구 열두 대는 제가 갚을게요⁠. 제 이름으로요⁠.⁠”

“⁠광고⁠!⁠”

혜란이 외쳤다⁠. 손바닥이 스위처의 광고 버튼 위로 내려갔다⁠.

내 손이 먼저 닿았다⁠. 혜란의 손등 위에 내 손바닥이 얹혔다⁠. 혜란의 손이 버튼 위에서 멈췄다⁠. 차가운 손이었다⁠. 하루 종일 18도 방에 있던 손이었다⁠.

“⁠손 치워⁠.⁠”

“⁠지금 끊으면 내일 기사 제목이 뭔지 아세요⁠?⁠”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다섯 번 고쳐 쓰지 않은 문장이었다⁠. “⁠‘⁠생방송 중 출연자 입 막은 제작진⁠.⁠’ 그 기사 누가 누르는지 피디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혜란의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굳었다⁠. 동시 시청자 숫자가 바뀌었다⁠. 「⁠247⁠,555⁠」 「⁠268⁠,104⁠」 「⁠301⁠,880⁠」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가 위로 꺾였다⁠. 혜란의 눈이 숫자를 보았다⁠. 숫자를 보는 눈이 처음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마당 화면 속 설아는 노를 내려놓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혜란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할머니가 앞줄에서 박수를 쳤다⁠. 한 사람이 치자 섬 사람들이 따라 쳤다⁠. 여객선 본부장이 전복 꼬치를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혜란이 손을 들었다⁠. 내 손바닥 아래에서 혜란의 손이 빠져나갔다⁠. 혜란은 무전기를 집었다⁠.

“⁠…⁠…가⁠. 그대로 가⁠.⁠”

*

열 시 십 분⁠, 강욱 차례였다⁠. 진행 피디가 강욱에게 카드 한 장을 건넸다⁠. 아침에 내가 진행 피디에게 직접 넘긴⁠, 네 번 접은 종이를 옮겨 적은 카드였다⁠. 혜란은 아직 질문을 보지 않았다⁠. 혜란이 스위처에서 몸을 일으켜 송출 화면을 보았다⁠. 화면 아래에 질문이 자막으로 떴다⁠. 질문을 자막으로 띄우는 것까지가 혜란이 고칠 수 없는 내 몫이었다⁠.

「⁠강욱 씨는 지금⁠, 누구 옆에 서고 싶어요⁠?⁠」

강욱이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마당에 바닷바람이 불어 빨래줄의 수건 열한 장이 한꺼번에 펄럭였다⁠. 맨 끝의 회색 수건이 줄에서 반쯤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혜란이 나를 돌아보았다⁠. 질문을 읽은 얼굴이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야⁠?⁠”

“⁠네⁠.⁠”

“⁠대답이 정해진 데가 없잖아⁠.⁠”

“⁠그래서 못 고치신다고 했어요⁠.⁠”

화면 속 강욱이 카드를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깃의 무선 마이크를 뺐다⁠. 허리 뒤에서 마이크 팩을 뗐다⁠. 줄을 둘둘 감아 세 번 접었다⁠. 빨래집게를 깃에서 빼 접은 마이크 팩에 집었다⁠. 평상 위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강욱이 걷기 시작했다⁠.

평상을 지나고⁠, 설아가 내려놓은 노를 지나고⁠, 접이식 의자 마흔 개 사이를 지났다⁠. 할머니 옆을 지날 때 할머니가 강욱의 엉덩이를 고무장갑으로 한 번 쳤다⁠. 카메라 하나가 강욱을 놓쳤다⁠. 다음 카메라가 강욱을 잡았다가 놓쳤다⁠. 강욱은 마당 문을 나서 언덕길로 내려갔다⁠. 언덕 아래에는 마을회관이 있었다⁠.

“⁠따라가⁠! 핸드헬드⁠!⁠”

혜란이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카메라 감독 둘이 어깨에 카메라를 얹고 뛰었다⁠.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강욱의 등이 내리막을 내려왔다⁠. 흰 티셔츠 아래로 날갯죽지가 움직였다⁠. 동시 시청자 숫자는 이제 숫자로 보이지 않았다⁠. 자릿수만 보였다⁠.

모니터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창으로 몰렸다⁠. 재웅 선배가 창틀에 이마를 박았다⁠. 막내 작가 둘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혜란만 스위처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앉아 있지도 못한 채 화면 마흔두 개 앞에 서 있었다⁠.

1층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한 칸씩⁠, 무겁고 고르게⁠. 사다리의 네 발이 땅에 닿듯이⁠.

모니터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똑⁠, 똑⁠, 똑⁠.

1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생방송 ·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