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296자)

사각지대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문을 열자 강욱이 서 있었다⁠. 숨이 조금 가빴다⁠. 언덕을 뛰지 않고 걸어 내려왔는데도 가빴다⁠. 강욱 뒤 계단에 카메라 감독 둘이 어깨에 카메라를 얹고 서로 부딪치며 멈췄다⁠. 렌즈 두 개가 강욱의 등 너머로 나를 잡았다⁠. 빨간 불 두 개가 켜져 있었다⁠.

강욱의 셔츠 깃에는 마이크가 없었다⁠. 카메라에 달린 작은 마이크가 소리를 주울 것이었다⁠. 강욱은 카메라 마이크가 귀를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얼굴로⁠, 크지 않게 말했다⁠.

“⁠제 대답입니더⁠.⁠”

“⁠네⁠.⁠”

“⁠작가님 옆에예⁠.⁠”

모니터실 안에서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재웅 선배가 창틀에 이마를 댄 채 굳어 있었다⁠. 막내 작가 둘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혜란은 스위처 앞에 앉아 송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송출 화면에는 내 얼굴이 떠 있었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그림⁠, 문틀⁠, 강욱의 어깨 너머 모니터실의 푸른 불빛⁠, 한가운데에 나⁠.

강욱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내 앞이 아니라 내 옆으로⁠. 문틀 안에 나란히 설 자리를 비워 두었다⁠.

나는 헤드셋을 벗었다⁠. 삼 년 동안 목에서 내려놓지 않던 헤드셋이었다⁠. 헤드셋을 책상 위에 놓고⁠,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사진첩 맨 아래를 열었다⁠. 7월 17일 오후 8시 41분⁠.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스위처 앞으로 걸어갔다⁠. 혜란이 고개를 들었다⁠.

“⁠지워 주세요⁠.⁠”

혜란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멈춘 장면은 김치통을 든 설아였다⁠. 창 너머의 혜란은 아직 작게 보였다⁠.

“⁠네가 지워도 되잖아⁠.⁠”

“⁠제가 지우면 제가 덮은 게 돼요⁠. 피디님이 지우세요⁠. 피디님 손으로요⁠.⁠” 나는 휴대전화를 스위처 옆⁠, 오이 옆에 내려놓았다⁠. “⁠저는 안 틀었어요⁠. 이제 갖고 있지도 않을 거예요⁠. 이건 피디님 몫이에요⁠.⁠”

혜란은 휴대전화를 집었다⁠. 엄지가 휴지통 모양 위에서 한 번 멈췄다⁠. 「⁠삭제하시겠습니까⁠?⁠」 혜란이 눌렀다⁠. 「⁠최근 삭제한 항목⁠」으로 들어가 한 번 더 눌렀다⁠. 첫날 새벽 내가 녹음을 지우던 순서와 같았다⁠. 혜란은 휴대전화를 내게 돌려주었다⁠.

“⁠은새야⁠. 나가면 다시 검색어야⁠. 이번엔 얼굴로⁠.⁠”

“⁠알아요⁠.⁠”

혜란이 나를 보았다⁠. 무언가를 고르는 눈이었다⁠. 화면 마흔두 개 가운데 어느 것을 송출할지 고르던 이십 년의 눈이었다⁠. 혜란은 고르는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가⁠.⁠”

*

강욱과 나는 언덕길을 나란히 올라갔다⁠. 카메라 감독 둘이 뒷걸음으로 우리 앞을 올라가며 찍었다⁠. 하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고⁠, 강욱이 팔을 뻗어 잡아 주었다⁠. 카메라 감독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소리까지 송출에 들어갔다⁠. 마당 큰 화면에 넘어질 뻔한 장면이 떴고⁠, 마당 사람들이 웃었다⁠.

마당 문을 들어서자 웃음이 그쳤다⁠. 접이식 의자 마흔 개의 얼굴이 한꺼번에 나를 보았다⁠. 출연자 열 명이 평상 앞에 서 있었다⁠. 설아가 노를 내려놓은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보았다⁠. 곽판순 할머니가 앞줄에서 고무장갑을 벗었다⁠.

평상 위에 강욱의 마이크 팩이 접혀 있었다⁠. 빨래집게가 집혀 있었다⁠. 나는 집게를 빼서 강욱의 깃에 다시 집어 주고⁠, 마이크를 내 바람막이 깃에 꽂았다⁠. 마이크 팩은 허리 뒤에 걸었다⁠. 출연자들에게 수백 번 달아 준 물건이었다⁠. 내 몸에 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보았다⁠. 턱을 돌리지 않았다⁠. 각도를 몰랐다⁠.

“⁠작가 기은새예요⁠.⁠”

목소리가 마당 스피커로 나갔다⁠. 내 목소리를 바깥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높았다⁠.

“⁠실루엣으로 사과하라고 했는데⁠, 등만 보이는 사과는 싫어서 얼굴로 나왔어요⁠. 시즌 1 때 제가 붙인 자막 한 줄 때문에 출연자 한 분이 회사를 그만두셨어요⁠. 그분 이름이 자막이 됐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출연자와 따로 만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어긴 사람은 저예요⁠. 죄송합니다⁠.⁠”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들어가기 전에 길게⁠, 길게⁠.

“⁠지난주 제 입장문은 다섯 줄이었어요⁠. 그중 한 줄이 거짓말이었어요⁠. 출연자는 거절하지 않았어요⁠. 제가 먼저 좋아했다는 것도 반만 맞아요⁠. 둘이 같이 좋아했어요⁠.⁠”

마당에 바닷바람이 불었다⁠. 빨래줄의 수건 열한 장이 펄럭였다⁠. 나는 맨 끝의 회색 수건을 보았다⁠. 다음 말은 고쳐 쓰지 않았다⁠. 처음 떠오른 대로 나갔다⁠.

“⁠저는 오늘로 작가를 그만둬요⁠. 남한테 말하게 하는 질문은 이제 안 쓸게요⁠. 앞으로는 제가 대답하는 쪽으로 살아 볼게요⁠. 출연자분들⁠, 그리고 섬 분들⁠, 많이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할머니⁠, 섬 이름 이상하게 나게 해서 죄송해요⁠.⁠”

“⁠달비는 원래 이상하다⁠!⁠”

할머니가 앞줄에서 외쳤다⁠. 마당이 웃음으로 터졌다⁠. 여객선 본부장이 웃다가 전복 꼬치를 떨어뜨렸다⁠. 선장이 맨 뒷줄에서 껌을 딱 터뜨렸다⁠. 오늘 처음이었다⁠.

마당 큰 화면에는 내 얼굴이 떠 있었다⁠. 흐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화면 구석의 송출 표시등이 꺼지지 않았다⁠. 혜란은 끊지 않았다⁠. 광고는 붙지 않았다⁠. 협찬사가 산 최종 커플의 그림은 끝내 나가지 않았다⁠.

강욱이 내 옆으로 와 섰다⁠. 앞이 아니라 옆이었다⁠. 손을 잡지 않았다⁠. 손등이 내 손등에 닿았다⁠. 오래 닿아 있었다⁠.

설아가 노를 집어 들었다⁠. 노를 우리 쪽으로 내밀지 않고 자기 어깨에 걸쳤다⁠. 카메라를 보고 턱을 십 도 돌렸다⁠. 이번에는 일부러였다⁠.

“⁠여2 위설아였습니다⁠. 필라테스 기구 열두 대⁠, 제 이름으로 갚을게요⁠. 회원 모집합니다⁠.⁠”

마당이 다시 웃었다⁠. 생방송은 열 시 이십 분에 끝났다⁠. 끝 자막이 올라갔다⁠. 작가 이름들 맨 끝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끝 자막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

이튿날 아침 일곱 시⁠, 마을회관 계단참에서 혜란과 나는 나란히 앉았다⁠. 녹화는 끝났고 카메라는 철수 중이었다⁠. 기술팀이 2층에서 화면을 하나씩 떼어 상자에 넣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혜란은 오이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6⁠.1⁠.⁠”

“⁠최종회요⁠?⁠”

“⁠동시 시청 최고 사십일만⁠. 판권은 동남아 셋에 일본 하나⁠. 협찬사 하나는 위약금 물라고 했고 하나는 다음 시즌에 또 붙겠대⁠. 사람들이 손잡는 그림보다 손등 닿는 그림을 더 퍼 날랐대⁠.⁠” 혜란이 오이를 씹었다⁠. 빨리 씹었다⁠. “⁠여객선 회사가 오늘 아침에 공고 바꿨어⁠. 대합실 가 봐⁠.⁠”

“⁠피디님은요⁠?⁠”

“⁠시즌 4 해⁠. 스무 명 그대로⁠. 재웅이 돌잔치 가고⁠.⁠” 혜란이 오이 꼭지를 계단 아래로 던졌다⁠. 이번에는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의서 4쪽 뺐어⁠. 어젯밤에⁠.⁠”

나는 오이를 한 입 베었다⁠. 시원했다⁠. 혜란이 앞을 보며 말했다⁠.

“⁠너 진짜 그만둬⁠?⁠”

“⁠네⁠.⁠”

“⁠아깝다⁠.⁠” 혜란이 웃었다⁠. 처음으로 무언가 묻은 웃음이었다⁠. “⁠네 마지막 질문⁠, 이십 년 동안 내가 못 쓴 질문이야⁠. 대답이 정해진 데가 없는 질문⁠. 그런 거 쓰면 그림이 안 나올까 봐 무서워서 못 썼어⁠.⁠”

“⁠그림 나왔잖아요⁠.⁠”

“⁠나왔지⁠. 내가 안 고른 그림이⁠.⁠” 혜란이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계단을 두 칸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다⁠. “⁠은새야⁠. 네가 그 영상 나한테 지우라고 줬을 때⁠, 나 처음으로 졌다고 생각했어⁠. 이긴 사람이 진 사람한테 무기를 돌려주더라⁠. 이십 년 동안 그런 그림은 못 봤어⁠.⁠”

“⁠피디님이 저를 뽑으셨잖아요⁠. 저는 피디님한테 배운 거예요⁠. 마지막 장면은 직접 고르는 거⁠.⁠”

혜란은 대답하지 않고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오이 씹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여덟 시 배를 기다리는 선착장에서 설아가 캐리어를 끌고 왔다⁠. 휴대전화를 돌려받은 설아는 화면을 보며 걸었고⁠, 걸으면서 웃었다⁠. 팔로워가 밤새 십이만 명 늘었다고 했다⁠. 설아는 내 손에 명함 한 장을 쥐여 주었다⁠. 「⁠설아의 코어 · 필라테스⁠」 뒷면에 볼펜으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작가님 평생 무료⁠. 대신 볼펜 누르기 금지⁠」

“⁠제가 이겼죠⁠?⁠”

“⁠설아 씨가 골랐잖아요⁠. 설아 씨를⁠.⁠”

“⁠그러니까 이긴 거예요⁠. 제가 짠 그림으로⁠.⁠” 설아가 선글라스를 썼다⁠. 턱은 돌리지 않았다⁠.

재웅 선배는 선착장 말뚝에 걸터앉아 혜란에게 받은 봉투를 처음으로 열었다⁠. 안에서 돌반지 한 돈과 오이 두 개가 나왔다⁠. 오이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도토리 엄마 아빠 거⁠」 선배는 오이를 양손에 쥔 채 한참 웃다가⁠, 웃는 얼굴로 소매에 눈을 문질렀다⁠.

“⁠아니 근데⁠, 오이는 왜 넣었어⁠?⁠”

“⁠피디님한테는 오이가 밥이잖아요⁠.⁠”

선배는 오이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받았다⁠. 오늘 아침에만 두 번째 오이였다⁠.

선착장 대합실 유리문에는 새 공고가 붙어 있었다⁠. 「⁠9월 이후에도 오후 운항을 계속합니다⁠」 이장이 공고 앞에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열한 번째 사진이라고 했다⁠.

*

10월 17일⁠, 보름의 결혼식에서 보름은 은색 귀걸이를 했다⁠. 하객석 맨 뒷줄에 앉은 강욱은 축의금 봉투 대신 해바라기 한 다발을 들고 갔다⁠. 보름은 부케를 던지지 않고 들고 들어갔다⁠. 자기가 만든 부케라 아까워서라고 했다⁠.

10월 마지막 주⁠, 나는 오후 배를 탔다⁠.

통영항에서 두 시 배였다⁠. 갑판에 관광객이 열댓 명 있었다⁠. 「⁠밀물 하우스⁠」를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둘이 나를 알아보고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가 손을 흔들자 휴대전화를 내리고 같이 손을 흔들었다⁠. 갈매기들이 배 꽁무니를 따라 낮게 날았다⁠. 나는 부산 어머니 세탁소에서 석 달째 다리미를 잡고 있었다⁠. 남의 옷 얼룩을 빼는 일이었다⁠. 내 손등에 다리미 김에 덴 자국이 두 개 생겼다⁠.

곽판순 할머니의 마당은 넓었다⁠. 카메라 마흔두 대가 떼어 나간 자리마다 처마 밑에 나사 구멍이 남아 있었다⁠. 마을회관 2층 창은 선팅을 벗겨 그냥 유리가 되었다⁠. 유리 너머로 빈 방이 보였다⁠. 화면을 떼어 낸 벽에 테이프 자국만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마흔두 개였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마당 끝 창고 앞 빨래줄에 강욱이 서 있었다⁠. 휴가를 받아 사흘 먼저 섬에 들어와 있었다⁠. 할머니 집 빨래를 다 널고 바구니 바닥에 남은 두 벌을 들고 나를 돌아보았다⁠. 남색 반팔 티셔츠와 회색 맨투맨이었다⁠.

“⁠작가님 꺼는 작가님이 너이소⁠.⁠”

“⁠작가 아니에요⁠.⁠”

“⁠그라믄 은새 씨 꺼는 은새 씨가 너이소⁠.⁠”

강욱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질문지 맨 밑에도 없던 말이었다⁠. 나는 바구니에서 맨투맨을 꺼내 탁 털었다⁠. 소리가 마당에 퍼졌다⁠. 이 소리를 들으려고 음향을 혼자 올리던 새벽이 있었다⁠. 지금은 올릴 것이 없었다⁠. 그냥 들렸다⁠.

강욱이 남색 티셔츠를 줄에 걸었다⁠. 빨래집게 두 개⁠. 나는 맨투맨을 바로 옆에 걸었다⁠. 빨래집게 두 개⁠. 한 뼘을 띄우지 않았다⁠. 남색 소매와 회색 소매가 바람에 들려 서로 겹쳤다가 떨어지고⁠, 다시 겹쳤다⁠.

선착장에서 오후 배가 뱃고동을 길게 울렸다⁠. 할머니가 부엌 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우리를 보고 창을 닫았다⁠. 마을회관 2층 유리창에 빨래줄이 비쳤다⁠. 비친 빨래줄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화면 없이⁠, 내 눈으로 줄 끝까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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