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299자)

징계위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서울 망원동 옥탑방의 평상은 낮 동안 햇볕을 먹어 손을 대면 뜨거웠다⁠. 나는 수요일 저녁 버스로 통영을 떠나 밤늦게 옥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열여드레 동안 닫혀 있던 방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18도 방은 이제 없었다⁠. 대신 선풍기를 문밖으로 끌어내 틀고 평상 위에 누웠다⁠. 밤하늘이 넓었다⁠. 화면 마흔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었다⁠.

자정 무렵⁠, 휴대전화가 떨었다⁠. 설아의 끝자리 0228이었다⁠. 파일 하나와 문장 하나가 왔다⁠.

「⁠기억하라고요⁠. 지우든 말든 작가님 마음⁠.⁠」

7월 17일 오후 8시 41분⁠. 김치통을 든 설아⁠, 창 너머 혜란⁠. 나는 파일을 열지 않고 휴대전화 사진첩 맨 아래에 두었다⁠. 옥탑에서 나는 열여드레 만에 처음으로 여덟 시간을 잤다⁠. 꿈에 빨래줄이 나왔다⁠. 줄에는 아무것도 널려 있지 않았다⁠.

*

목요일 아침 열 시⁠, 창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평상에 앉아 휴대전화를 무릎에 올려놓고 기다렸다⁠. 연락이 올 데는 없었다⁠. 혜란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다⁠. 다시는 강욱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연락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바빴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닫고⁠, 열었다가 닫았다⁠.

열한 시 사십 분⁠, 강욱의 여동생이 전화했다⁠.

“⁠작가님⁠, 우리 오빠가 미쳤어요⁠.⁠”

“⁠무슨 일이에요⁠?⁠”

“⁠위원회 들어가서 첫마디가 뭐였는 줄 알아요⁠?⁠” 여동생은 숨을 몰아쉬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자동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소방서 주차장에서 거는 전화였다⁠. “⁠‘⁠작가님 입장문은 사실이 아입니더⁠. 제가 먼저 좋아했습니더⁠. 거절 안 했습니더⁠.⁠’ 위원장님이 안경을 벗었대요⁠. 팀장님이 밖에서 듣다가 벽에 머리 박았대요⁠.⁠”

나는 평상 모서리를 쥐었다⁠. 나무 결이 손바닥에 박혔다⁠.

“⁠그래서요⁠?⁠”

“⁠견책이래요⁠. 제일 가벼운 거⁠. 근무 시간 밖의 일이고⁠, 직무랑 상관없고⁠, 본인이 다 말했으니까⁠. 팀장님이 오빠 삼 년 동안 한 번도 출동 안 빠진 거 서류로 다 뽑아 갔대요⁠. 그거 보고 위원들이 조용해졌대요⁠.⁠” 여동생이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작가님⁠, 오빠가 위원회에 뭘 들고 들어갔는 줄 알아요⁠?⁠”

“⁠뭘요⁠?⁠”

“⁠회색 수건이요⁠. 손에 꼭 쥐고⁠. 위원 한 분이 그게 뭐냐고 물으니까 ‘⁠제 겁니더⁠’ 이랬대요⁠.⁠”

나는 웃었다⁠. 웃다가 평상에 이마를 댔다⁠. 뜨거운 나무가 이마를 데웠다⁠. 여동생은 내가 웃는 소리와 다른 소리를 둘 다 들었다⁠.

“⁠작가님⁠. 오빠 고장 고쳐 줘서 고마워요⁠. 부순 건 아직 화나고요⁠. 둘 다예요⁠.⁠”

*

오후 세 시⁠, 기사가 다시 뒤집혔다⁠. 「⁠소방관 출연자 징계위서 “⁠제가 먼저 좋아했다⁠”⁠… 작가 입장문 정면 반박⁠」 「⁠‘⁠밀물 하우스⁠’ 입장문⁠, 누가 썼나⁠」 이틀 전 나를 스토커라고 부르던 댓글들이 같은 기사 밑에서 방향을 바꿨다⁠.

「⁠뭐야 쌍방이었네⁠」

「⁠작가가 남자 지키려고 혼자 뒤집어쓴 거⁠?⁠」

「⁠근데 둘 다 서약 어긴 건 맞잖아⁠」

「⁠제작진은 그럼 처음 입장문 왜 냄⁠? 넘어진 스태프 부축 어쩌고⁠」

마지막 댓글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붙었다⁠. 화살이 혜란에게로 돌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첩 맨 아래의 파일을 한 번 눌렀다가 열리기 전에 닫았다⁠.

저녁 무렵 보름에게서 문자가 왔다⁠. 마침표가 꼬박꼬박 찍힌 문장이었다⁠.

「⁠그 사람 바른말 했대요⁠.⁠」

「⁠작가님 문장 하나 지웠네요⁠.⁠」

「⁠저는 식장 그대로 가요⁠. 10월 17일⁠. 시어머니 되실 분이 기사 보시고 다시 전화하셨어요⁠. 이번엔 괜찮다고 한 번만 하셨어요⁠.⁠」

마지막 문자에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작업대 위 작은 상자 안에 은색 귀걸이 한 쌍이 누워 있었다⁠. 반지를 녹인 은이었다⁠. 귀걸이 옆에 장미 가시를 딴 가위가 놓여 있었다⁠. 나는 사진을 오래 보았다⁠. 사진 속에는 남의 결혼식 꽃도 남의 장례식 꽃도 없었다⁠. 보름의 것만 있었다⁠.

금요일 밤 6회가 나갔다⁠. 6회는 풍어제와 섬 일주 자전거 장면이었다⁠. 강욱의 분량은 지난주의 반이었다⁠. 화면 속 강욱은 말이 거의 없었고⁠, 자막이 대신 말했다⁠. 「⁠말없는 남4⁠」 「⁠오늘도 바다만⁠」 혜란은 6회 끝에 곽판순 할머니 아들의 어선을 이름까지 넣어 길게 잡았다⁠. 「⁠제3달비호⁠」 할머니가 화면 앞에서 무릎을 쳤을 것이다⁠. 시청률은 4⁠.1이었다⁠. 5회보다 조금 내렸다⁠.

방송이 끝나자 어머니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 속 어머니 뒤로 세탁소 옷걸이에 걸린 비닐 커버들이 줄지어 흔들렸다⁠. 손님 둘이 어머니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동네 사람들이 세탁소 텔레비전으로 같이 본 모양이었다⁠.

“⁠니 봤나⁠? 그 총각 위원회 가서 바른말 했다 카대⁠.⁠”

“⁠엄마⁠, 손님들 계시잖아요⁠.⁠”

“⁠손님들이 먼저 물어봤다⁠. 저 총각 니 신랑 될 사람이냐고⁠.⁠” 어머니 뒤에서 손님 하나가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님이 「⁠빨래 잘 너는 총각⁠!⁠」 하고 외쳤다⁠. 어머니가 화면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니 입장문 내가 읽어 봤다⁠. 다섯 줄 중에 한 줄이 얼룩이더라⁠.⁠”

“⁠어떻게 아셨어요⁠?⁠”

“⁠삼십 년 얼룩 빼 봤다⁠. 남의 얼룩은 색이 다르다⁠.⁠” 어머니는 다리미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총각이 그 얼룩 빼 줬다⁠. 다음부터는 니가 니 옷 얼룩만 묻혀라⁠. 남의 것까지 묻히지 말고⁠.⁠”

어머니 뒤의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나는 화면 앞에서 웃었다⁠. 옥탑의 밤바람이 빨랫줄에 넌 내 수건 두 장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끊기 전에 덧붙였다⁠. 김치찌개는 냉동실에 얼려 놨다고⁠. 언제 와도 된다고⁠.

*

토요일 오후⁠, 재웅 선배가 옥탑 계단을 올라왔다⁠. 수국 화분을 안고 있었다⁠.

“⁠아니 근데 이거⁠, 창원 그 꽃집에서 또 샀어⁠. 택배로⁠. 보름 씨가 리본 달아 줬어⁠. 봐⁠.⁠”

화분에 연분홍 리본이 묶여 있었다⁠. 리본에 꽃집 도장이 찍혀 있었다⁠. 「⁠보름달 꽃방⁠」 선배는 화분을 평상 위에 내려놓다가 옥상 난간의 비둘기 두 마리를 보고 화분 뒤로 몸을 숨겼다⁠.

“⁠선배⁠, 비둘기예요⁠.⁠”

“⁠알아⁠. 갈매기 동생이잖아⁠.⁠”

“⁠사촌쯤 될걸요⁠.⁠”

“⁠사촌이면 더 무서워⁠. 친척끼리 정보 공유해⁠.⁠”

선배는 비둘기가 날아갈 때까지 화분 뒤에 있다가 평상에 앉았다⁠. 앉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아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숟가락 대신 수국 잎을 물고 있었다⁠. 사진을 넘기던 선배의 손가락이 멈췄다⁠.

“⁠은새야⁠, 나 할 말 있어⁠.⁠”

“⁠카드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일이라면 선배가 가장 빨랐다⁠. 이번에는 천천히 끄덕였다⁠.

“⁠풍어제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피디님한테 드렸어⁠. 피디님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고⁠. 나는 그날 아침에 너한테 깨졌을 거라고 거짓말했고⁠.⁠” 선배가 수국 잎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리고 토요일 밤 여덟 시 반에 트럭에 갔는데⁠, 피디님이 휴대전화로 모니터를 찍고 있었어⁠. 나보고 나가 있으라고 했어⁠. 나 나갔어⁠. 그날 밤 영상 뜨고 나서⁠, 피디님이 누가 올렸냐고 할 때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돌잔치 때문에요⁠?⁠”

“⁠돌잔치 때문에⁠.⁠” 선배가 웃었다⁠. 웃는 얼굴 끝이 자꾸 일그러졌다⁠. “⁠아니 근데 웃기지 않냐⁠. 도토리 돌잔치 날 우리 엄마가 사진 찍어 줄 거거든⁠. 나 웃는 사진⁠. 근데 나 그날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선배의 등을 두드렸다⁠. 선배가 화분을 끌어안았다⁠.

“⁠하나 더 있어⁠.⁠” 선배가 말했다⁠. “⁠남4가 생방송 안 한대⁠. 최종회 생방송⁠, 다음 주 수요일 밤⁠. 협찬사가 최종 커플 광고 자리를 사 갔고⁠, 여객선 회사 사람들도 섬에 들어와서 본대⁠. 근데 남4가 그래⁠. 작가님 질문 아니면 안 앉겠다고⁠. 피디님이 위약금 얘기를 해도 그래⁠. 위약금 내겠대⁠. 적금 깨겠대⁠.⁠”

“⁠피디님은요⁠?⁠”

“⁠피디님은 오이를 하루에 여섯 개 먹어⁠.⁠” 선배가 평상에서 일어섰다⁠. “⁠아마 너 찾아올 거야⁠. 나 먼저 가야 돼⁠. 피디님이랑 계단에서 마주치면 나 진짜 죽어⁠.⁠”

선배는 화분을 두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비둘기에게 한 번 더 놀라 계단 난간에 매달렸다⁠.

*

일요일 저녁 일곱 시⁠, 계단에서 누가 숨을 몰아쉬었다⁠. 옥탑 계단은 다섯 층이었다⁠. 혜란이 마지막 칸을 올라와 난간을 짚고 섰다⁠.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이가 비쳤다⁠.

“⁠엘리베이터 없는 데 사는 거⁠, 너 일부러 그러지⁠.⁠”

“⁠월세가 싸서요⁠. 계단은 덤이고요⁠.⁠”

혜란은 숨을 고르는 동안 옥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빨랫줄⁠, 수국 화분⁠, 평상⁠, 문밖에 나와 도는 선풍기⁠. 어디서든 그림부터 찾는 눈이었다⁠.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한 번 젓고 평상에 앉았다⁠. 봉지에서 오이 하나를 꺼내 나에게 내밀고⁠, 하나를 자기가 물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망원동 지붕들 위로 붉은 빛이 번졌다⁠. 섬의 노을과 색이 달랐다⁠. 바다가 없어서 빛이 땅으로 내려앉지 못하고 지붕 위에 떠 있었다⁠.

“⁠남4가 징계위에서 다 말했어⁠.⁠” 혜란이 말했다⁠. “⁠네 문장이 하루 만에 뒤집혔어⁠. 네가 다섯 문장 중에 거짓말을 하나 넣었는데⁠, 남4가 그 하나를 정확히 집었어⁠.⁠”

“⁠알아요⁠.⁠”

“⁠그래서 지금 사람들은 첫 공식 입장을 봐⁠. 넘어진 스태프 부축⁠. 그거 누가 썼냐고⁠. 내가 썼지⁠.⁠” 혜란이 오이를 씹었다⁠. 천천히 씹었다⁠. “⁠남4는 생방송 안 앉겠대⁠. 네 질문 아니면⁠. 협찬사는 최종 커플 광고 자리 샀고⁠, 여객선 회사 본부장은 섬에 들어와서 생방송 본대⁠. 오후 배 계속할지 그날 보고 정한대⁠.⁠”

“⁠그래서 오셨어요⁠?⁠”

“⁠그래서 왔어⁠.⁠” 혜란이 오이 꼭지를 봉지에 넣었다⁠. “⁠생방송 작가로 들어와⁠. 크레디트에 이름은 안 올라가⁠. 섬에도 몰래 들어가⁠. 질문지는 네가 써⁠. 최종 선택 직전까지⁠.⁠”

“⁠최종 선택은요⁠?⁠”

“⁠남4가 여2 손 잡는 거⁠.⁠” 혜란이 나를 보았다⁠. “⁠광고가 그거야⁠. 최종 커플⁠.⁠”

“⁠안 써요⁠.⁠”

“⁠그럼 남4가 안 앉아⁠. 남4가 안 앉으면 생방송이 비고⁠, 생방송이 비면 시즌 4가 흔들려⁠. 스무 명⁠. 섬 하나⁠.⁠” 혜란이 손가락을 펴려다 말고 주먹을 쥐었다⁠. 오늘은 손가락을 세지 않았다⁠. “⁠은새야⁠, 나 지쳤어⁠.⁠”

혜란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혜란은 말해 놓고 스스로 놀란 얼굴로 오이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막내였어⁠. 대본 달라던 남자애한테 밤새 대사 써 주던⁠. 이십 년 동안 그 남자애 결혼식 밥만 생각하면서 버텼어⁠. 그런데 이번에 네 영상 보면서 알았어⁠. 남4 웃는 얼굴⁠, 내가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못 찍은 그림이었어⁠. 내가 찍은 게 아니라⁠, 드론이 지붕에 떨어져서 찍었어⁠.⁠”

나는 오이를 한 입 베었다⁠. 미지근했다⁠. 혜란이 내 얼굴을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혜란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사진첩 맨 아래의 파일이 휴대전화 안에 있었다⁠. 혜란도 파일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었다⁠. 섬에는 사각지대가 없었고⁠, 혜란에게는 옥탑에도 없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고 혜란을 보았다⁠.

“⁠들어갈게요⁠.⁠”

혜란의 어깨가 내려갔다⁠.

“⁠대본은 제가 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디님이 고치고 싶은 데는 고치세요⁠. 대신⁠.⁠” 나는 오이 꼭지를 혜란의 봉지에 넣었다⁠. “⁠마지막 질문 하나는 피디님이 못 고칩니다⁠.⁠”

12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징계위 ·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