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59자)

입장문

출연자와 사랑에 빠진 연애 예능 막내 작가 · 소하린

혜란은 손전등을 끄지 않았다⁠. 불빛이 강욱의 얼굴에서 내 얼굴로⁠, 다시 강욱에게로 옮겨 갔다⁠.

“⁠남4는 들어가⁠. 내일 아침 인터뷰 하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 줄게⁠.⁠”

“⁠안 들어갑니더⁠.⁠”

“⁠들어가요⁠.⁠” 내가 말했다⁠. 강욱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강욱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혼자 안 해요⁠. 피디님하고 둘이 얘기하는 거예요⁠. 둘이면 혼자가 아니잖아요⁠.⁠”

강욱은 한참 나를 보았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강욱의 눈이 가늘어졌다⁠. 혜란이 오이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남4⁠, 위약금 얘기는 내일 아침에 해도 돼⁠. 지금 들어가면⁠.⁠”

강욱은 혜란을 보지 않았다⁠. 나만 보았다⁠. 그러고 나서 내 손을 자기 팔에서 떼어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빨래집게 하나였다⁠. 국화 꽃잎을 집어 두었던 집게였다⁠. 꽃잎은 없었다⁠. 강욱은 고개를 숙여 창고 문을 나갔다⁠.

*

새벽 한 시⁠, 편집 트럭 안의 하드디스크 열두 개가 여전히 웅웅 돌았다⁠. 혜란은 모니터 앞 의자에 앉았고⁠, 나는 서 있었다⁠. 나는 설아의 휴대전화를 혜란 앞 책상에 내려놓고 영상을 틀었다⁠.

8시 41분⁠. 김치통을 든 설아⁠. 창 너머 열린 트럭 뒷문⁠. 모니터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는 혜란⁠. 「⁠열한 시 반에 올려⁠. 얼굴은 흐리게⁠, 맨투맨은 살려⁠.⁠」

혜란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 끝까지 보았다⁠. 영상이 끝나자 손을 뻗어 처음부터 한 번 더 틀었다⁠. 두 번째에는 소리를 껐다⁠. 소리 없는 화면 속에서 자기가 휴대전화를 내리고 귀에 대는 장면을 보았다⁠. 영상이 다시 끝나자 혜란은 휴대전화를 나에게 밀어 돌려주었다⁠.

“⁠여2네⁠. 김치 냉장고⁠. 할머니 열무김치⁠.⁠” 혜란이 웃었다⁠. 오늘 들어 가장 피곤한 웃음이었다⁠. “⁠캐리어 안감까지 뜯었는데⁠.⁠”

“⁠왜 그러셨어요⁠?⁠”

“⁠틀어⁠.⁠” 혜란은 대답 대신 의자를 돌려 나를 정면으로 보았다⁠. “⁠틀면 어떻게 되는지 말해 줄게⁠. 그다음에 틀든지 말든지 해⁠.⁠”

혜란이 손가락을 하나 폈다⁠.

“⁠조작 방송에 노이즈 마케팅⁠. 피디가 직접 밀회 영상을 퍼뜨렸다⁠. 방송사는 나를 자르고 시즌을 내려⁠. 심의 기관에서 징계가 내려오고⁠, 플랫폼은 남은 회차를 안 틀어⁠. 팀 스무 명은 다음 달부터 일이 없어⁠. 재웅이 돌잔치는 해도 돌반지 값은 못 받겠지⁠.⁠”

손가락이 하나 더 펴졌다⁠.

“⁠여2⁠. 휴대전화 숨긴 거 계약 위반이야⁠. 그 영상이 증거고⁠. 위약금 오천⁠. 영상이 나가는 순간 여2는 숨긴 전화로 몰래 찍은 출연자가 돼⁠. 팔로워는 늘겠지⁠. 고소장도 같이 오고⁠.⁠”

세 번째 손가락⁠.

“⁠남4⁠. 내가 올렸든 누가 올렸든⁠, 둘이 입 맞춘 건 진짜야⁠. 품위 유지는 그대로 걸려⁠. 오히려 판이 커져⁠. 피디가 퍼뜨린 밀회⁠, 그다음 기사는 남4 얼굴 흐림을 벗기는 거야⁠. 사람들은 흐린 얼굴을 못 참아⁠.⁠”

혜란이 네 번째 손가락을 폈다가 접었다⁠.

“⁠보름 씨는 살겠네⁠. 전여친 유출설은 끝나⁠. 그건 인정할게⁠. 대신 나머지가 다 죽어⁠.⁠”

트럭 안이 조용했다⁠. 하드디스크 소리만 났다⁠. 혜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왜 올렸냐고 물었지⁠. 4⁠.4⁠. 판권 다시 붙었어⁠. 어제 저녁에 시즌 4 편성 확정 문자 왔어⁠. 스무 명⁠, 내년까지 일 있어⁠. 섬 배는⁠? 여객선 회사가 9월 오후 운항 계속하는 쪽으로 다시 본대⁠. 관광객 문의가 세 배래⁠. 곽판순 할머니 아들 배 이름도 다음 회에 넣어 줄 거야⁠.⁠” 혜란의 목소리는 끝까지 낮았다⁠. “⁠너 하나 검색어 됐어⁠. 대신 스무 명하고 섬 하나가 살았어⁠. 나는 이거 다시 하라고 해도 해⁠.⁠”

나는 혜란을 보았다⁠. 혜란의 말은 이번에도 맞았다⁠. 맞는 말 안에서 거짓말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맞았다⁠. 거짓말이 빠지자 사람 숫자만 남았다⁠. 스무 명⁠. 섬 하나⁠. 소방관 하나⁠.

“⁠그럼 저는요⁠?⁠”

“⁠너한테는 하나 남았어⁠.⁠” 혜란이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입장문 초안이었다⁠. 「⁠영상 속 인물은 제작진 기은새 작가로⁠, 출연자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였고 출연자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남4 징계위 내일 아침 열 시야⁠. 창원에서⁠. 남4 직장 지킬 문장은 이것밖에 없어⁠. 출연자가 거절했으면 품위 유지 위반이 안 돼⁠. 작가 혼자 저지른 일이 되니까⁠.⁠”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이지⁠.⁠” 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입장의 넘어진 스태프는 아무도 안 믿었어⁠. 이건 믿어⁠. 네 이름이 붙으니까⁠. 사람들은 자기 이름 걸고 자기를 깎는 문장은 믿어⁠.⁠”

“⁠조건은요⁠?⁠”

“⁠남4한테 다시는 연락 안 하기⁠. 오늘 새벽에 왔던 배로 나가기⁠.⁠” 혜란이 설아의 휴대전화를 턱으로 가리켰다⁠. “⁠영상은 네가 가져⁠. 지우라고 안 해⁠. 나는 네가 안 틀 걸 아니까⁠.⁠”

혜란은 나를 처음 뽑은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문장을 고를지⁠, 나보다 먼저 알았다⁠.

*

나는 의자에 앉았다⁠. 혜란의 초안을 앞에 두고 볼펜을 들었다⁠.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니가 안 한 것까지 했다 카지는 마라⁠. 보름의 말이 떠올랐다⁠. 남이 쓴 문장 말고 하세요⁠. 강욱의 말이 떠올랐다⁠. 혼자 하지는 마이소⁠. 세 사람의 말을 차례로 어기는 문장을 쓰려고 나는 볼펜을 딸깍였다⁠. 한 번⁠, 두 번⁠.

혜란의 초안에 줄을 긋고 아래에 다시 썼다⁠. 소리 내어 읽으며 썼다⁠.

「⁠영상 속 작가는 저⁠, 기은새입니다⁠. 제가 먼저 다가갔고⁠, 출연자는 거절했습니다⁠. 제작진의 서약을 어긴 사람은 저 하나입니다⁠. 시즌 1에서 출연자 한 분을 다치게 한 자막도 제가 썼습니다⁠. 두 일 모두 제 잘못입니다⁠. 출연자와 출연자의 지인에게 쏟아지는 말을 멈춰 주십시오⁠.⁠」

다섯 문장 가운데 하나만 거짓말이었다⁠. 출연자는 거절했습니다⁠. 나머지 넷은 다 사실이었다⁠. 거짓말 하나를 사실 넷 사이에 끼워 넣는 법을 나는 삼 년 동안 배웠다⁠. 자막도⁠, 질문지도⁠, 예고편도 그렇게 썼다⁠. 배운 대로 쓴 문장이 가장 잘 읽혔다⁠.

혜란이 종이를 받아 읽었다⁠. 시즌 1 대목에서 눈이 잠깐 멈췄다⁠.

“⁠이건 왜 넣었어⁠?⁠”

“⁠이건 사실이니까요⁠. 사실이 하나 더 있어야 거짓말이 덜 무거워요⁠.⁠”

혜란은 오래 나를 보다가 종이를 접었다⁠.

“⁠아홉 시에 올린다⁠.⁠”

“⁠피디님⁠.⁠”

“⁠응⁠.⁠”

“⁠시즌 4 하세요⁠. 재웅 선배 돌잔치도 가시고요⁠.⁠” 나는 설아의 휴대전화를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막내한테는 동의서 4쪽⁠, 빼 주세요⁠.⁠”

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트럭 문을 열어 주었다⁠.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새벽 바다 냄새였다⁠.

*

새벽 세 시 반⁠, 창고 앞 담 그늘에 설아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람막이 모자를 눌러쓰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였다⁠. 내가 다가가자 설아는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들었다⁠.

“⁠틀었어요⁠?⁠”

“⁠피디님한테만요⁠.⁠”

“⁠밖으로는요⁠?⁠”

“⁠안 틀어요⁠.⁠”

설아의 얼굴이 굳었다⁠. 카메라가 없는 데서 설아의 얼굴은 늘 감추는 법을 몰랐다⁠. 나는 설아의 휴대전화를 비닐에 다시 싸서 내밀었다⁠. 설아는 받지 않았다⁠.

“⁠그럼 저는요⁠? 위약금 오천 걸고 작가님 편 골랐는데⁠.⁠”

“⁠설아 씨 전화기는 김치통 밑으로 돌아가요⁠. 아무도 몰라요⁠. 피디님도 말 안 할 거예요⁠. 말하면 영상 얘기가 같이 나오니까⁠.⁠” 나는 휴대전화를 설아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피디님 거래는 받으세요⁠. 마지막 장면⁠, 설아 씨 거예요⁠. 피디님이 줘도 설아 씨가 받을 만한 장면이에요⁠.⁠”

“⁠부축했다고 증언하라고요⁠?⁠”

“⁠그건 안 하셔도 돼요⁠. 이제 필요 없어요⁠. 제가 썼어요⁠. 거절당했다고⁠.⁠”

설아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비닐 위로 김치 국물 얼룩이 말라 있었다⁠. 한참 뒤 설아가 웃었다⁠. 웃음 끝이 비뚤어졌다⁠.

“⁠저 작가님 편 골랐는데⁠, 작가님은 저를 안 고르네요⁠.⁠”

“⁠설아 씨를 골랐어요⁠. 설아 씨 할부도 같이요⁠.⁠”

“⁠그건 고른 게 아니라 봐준 거예요⁠.⁠” 설아가 일어섰다⁠. 바람막이 모자를 벗자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저 들러리 싫다고 했잖아요⁠. 작가님 대신 무너지지 않게 해 준 거⁠, 고맙다고는 안 할게요⁠. 대신 기억할게요⁠. 작가님도 기억하세요⁠. 저는 작가님 편 골랐어요⁠.⁠”

설아는 휴대전화를 바람막이 안주머니에 넣고 창고로 들어갔다⁠. 김치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맨 아래 칸이었다⁠.

*

새벽 네 시 반⁠, 어선은 갯바위 옆에서 시동을 걸었다⁠. 선장은 껌을 씹지 않았다⁠. 내가 배에 오르자 선장은 아무 말 없이 조타실 문을 열어 주었다⁠. 할머니가 갯바위 위에 서 있었다⁠. 몸뻬에 장화⁠, 이번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니 또 나가나⁠.⁠”

“⁠네⁠.⁠”

“⁠섬 법에 고깃배로 들어온 사람은 두 번 안 나간다⁠.⁠”

“⁠제가 법을 어겼네요⁠.⁠”

할머니는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장화 발로 갯바위를 한 번 굴렀다⁠.

“⁠발바닥 간지럽게 살지 말라 캤제⁠.⁠”

배가 바위에서 멀어졌다⁠. 언덕 위 숙소는 아직 어두웠다⁠. 2층 왼쪽 끝 창만 하얬다⁠. 마당 끝 빨래줄에는 아무것도 널려 있지 않았다⁠. 강욱은 오늘 새벽에 빨래를 널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의 빨래집게를 꽉 쥐었다⁠. 집게 용수철이 손금을 파고들었다⁠.

*

아홉 시⁠, 입장문이 올라갔다⁠. 통영 모텔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앉아 새로고침을 했다⁠. 기사가 먼저 붙었다⁠. 「⁠‘⁠밀물 하우스⁠’ 작가 실명 입장 “⁠제가 먼저 다가갔고 출연자는 거절⁠”⁠」 「⁠시즌 1 자막도 본인⁠… 작가⁠, 자필로 사과⁠」

댓글이 방향을 틀었다⁠. 혜란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 걸고 자기를 깎는 문장을 믿었다⁠.

「⁠작가 혼자 좋아한 거였네⁠」

「⁠남4 불쌍하다 촬영장에서 스토킹당한 거잖아⁠」

「⁠전여친은 무관이었네⁠. 사과해라 유출설 퍼뜨린 사람들⁠」

「⁠그래도 자기 이름 걸고 쓴 건 인정⁠」

보름의 사진 밑 글이 줄었다⁠. 오후가 되자 「⁠보름달 꽃방⁠」 지도 앱 리뷰에 별 다섯 개짜리가 하나 붙었다⁠. 「⁠유출설 믿었던 거 죄송합니다⁠. 수국 사러 갈게요⁠」 별 하나 삼백 개 위에 별 다섯 하나는 작았다⁠. 그래도 붙었다⁠.

내 계정의 메시지함은 오백을 넘겼다⁠. 미리 보기 줄의 낱말이 바뀌었다⁠. 조작 작가에서 스토커 작가로⁠. 나는 휴대전화를 엎지 않았다⁠. 엎지 않고 끝까지 내렸다⁠. 끝은 없었다⁠.

*

열한 시⁠, 재웅 선배가 영상을 보냈다⁠. 문자는 없었다⁠.

숙소 마당이었다⁠. 평상 위에 강욱이 앉아 있었다⁠. 혜란이 강욱에게 자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 입장문이 떠 있었다⁠. 강욱은 휴대전화를 받아 읽었다⁠. 천천히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엄지로 화면을 내리지 않고 다섯 문장을 다 읽고 나서 휴대전화를 혜란에게 돌려주었다⁠.

강욱이 가슴께로 손을 올렸다⁠. 티셔츠 깃에 꽂힌 무선 마이크를 뺐다⁠. 허리 뒤에서 마이크 팩을 뗐다⁠. 줄을 둘둘 감았다⁠. 수건 개듯이 세 번 접어 평상 위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강욱은 일어섰다⁠. 마당 끝 빨래줄로 걸어갔다⁠. 빈 줄 아래에서 멈추고⁠, 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줄이 낮게 떨었다⁠. 흔들리는 화면 너머로 떨림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이크는 평상 위에 있었다⁠.

나는 모텔 침대에 앉아 화면 속 빨래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줄은 내 손끝 아래에서도 한동안 떨다가⁠, 영상이 끝나는 자리에서 멈췄다⁠. 손바닥 안의 빨래집게는 아직 용수철을 다문 채였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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