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99자)

사백 개

시골 다방 단골이 전부 칠십 대 조폭 · 나경훈

망치는 기차표를 접지도 펴지도 않고 쥐고 있었다⁠.

“⁠빚 날짜를 한 해 미뤄 준다 했소⁠. 내가 목포를 뜨면⁠.⁠”

“⁠그 거래 안 받아요⁠.⁠”

세나는 숨이 아직 가쁜 채로 말했다⁠. 대합실 형광등이 세나의 머리 위에서 깜박였다⁠.

“⁠제 빚이에요⁠. 할머니가 저한테 남긴 거고⁠, 제가 안 판다고 한 거예요⁠. 할아버지가 대신 갚는 거 아니에요⁠.⁠”

“⁠나 하나 빠지면 다방이 살고⁠, 그 집 사람도⁠…⁠…⁠.⁠”

“⁠서랑 사장님이 세 가지 말했잖아요⁠. 둘째가 날마다 일곱 시예요⁠. 할아버지가 떠나면 그 약속이 거짓말이 돼요⁠. 그건 다방 살리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거예요⁠.⁠”

망치가 세나를 보았다⁠. 세나는 이 다음 말을 할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했다⁠.

“⁠곰 할아버지가 그날 문밖으로 뛰었다고 했죠⁠. 할아버지가 끌고 들어갔다고⁠. 지금은 누가 할아버지를 끌고 들어가요⁠?⁠”

망치의 손에서 기차표가 구겨졌다⁠.

대합실 유리문이 열렸다⁠. 곰이 들어왔다⁠. 얼음 창고에서 곧장 뛰어온 차림이었다⁠. 고무 앞치마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숨소리가 대합실을 채웠다⁠. 뒤이어 뱀장어가 들어왔다⁠. 줄무늬 잠옷 바지에 셔츠만 걸치고⁠, 셔츠 단추는 하나도 채우지 않았다⁠. 백구가 면도날을 부축하고 맨 뒤에 들어왔다⁠.

“⁠아따⁠, 형님⁠. 서울 가서 뭐 할라고⁠? 서울은 쌍화차를 오천 원 받어⁠.⁠”

뱀장어가 말했다⁠. 망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섯 시 십 분 서울행 열차의 개찰 방송이 나왔다⁠. 망치는 일어서지 않았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떠나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다섯은 대합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첫차 손님들이 이들을 힐끔거렸다⁠.

여섯 시 반⁠, 망치가 일어나 구겨진 표를 휴지통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일곱 시요⁠. 늦겄소⁠.⁠”

*

세나는 이날 아침 공치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치범은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

“⁠망치 할아버지 안 떠나요⁠. 거래도 없어요⁠. 팔월 삼십일일 다섯 시에 사천 가져갈게요⁠.⁠”

수화기 너머가 한동안 조용했다⁠.

“⁠그 양반을 붙잡았소⁠?⁠”

“⁠아뇨⁠. 다섯 시 십 분 기차를 그냥 보낸 건 할아버지예요⁠. 제가 한 건 옆에 앉아 있었던 것뿐이에요⁠.⁠”

“⁠알겠소⁠. 그라믄 나도 내 셈대로 하겠소⁠.⁠”

공치범의 셈은 이틀 뒤에 왔다⁠. 철물점 부부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와 벽 앞에 섰다⁠. 남편이 손을 뻗어 머그 두 개를 내렸다⁠. 남편은 못에서 머그를 빼면서 엄지로 손잡이를 한 번 쓸었다⁠. 아내는 세나를 보지 못했다⁠.

“⁠미안해요⁠. 추진위에서 왔는데⁠, 지금 동의하면 새 상가 일층을 먼저 준대요⁠. 이주비도 따로 주고⁠. 머그 산 집은 빼겠다고⁠…⁠…⁠.⁠”

세나는 서랍에서 이십만 원을 세어 돌려주었다⁠. 철물점 부부는 머그를 들고 나갔다⁠. 벽에 못 두 개가 비었다⁠.

이날 하루에 머그가 열한 개 내려갔다⁠. 사진관 노인은 내리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내렸다⁠. 다음 날 아홉 개가 더 내려갔다⁠. 내려가는 머그마다 공치범의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골목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망치가 못이 빈 자리를 오래 보았다⁠. 못을 뽑지 않았다⁠.

“⁠빈 못은 그대로 두시오⁠. 다시 걸지도 모르니께⁠.⁠”

*

수산시장 상인회 회의는 금요일 저녁 경매장 이층에서 열렸다⁠. 공치범이 단상 대신 긴 탁자 끝에 앉아 있었다⁠. 이 앞에 상가 분양 안내서가 쌓여 있었다⁠. 세나는 문 앞에서 갈치 이모를 만났다⁠. 이모가 세나의 팔을 끌고 들어갔다⁠.

공치범은 이모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오 사장님⁠, 오셨소⁠. 마침 잘됐소⁠. 상인들한테 동백다방 머그가 무슨 표인지 설명하던 참이오⁠.⁠”

“⁠제가 할게요⁠.⁠”

세나는 탁자 반대편 끝에 섰다⁠. 상인 서른 남짓이 세나를 보았다⁠. 그중에 머그를 산 얼굴이 여럿 있었다⁠. 내린 얼굴도 있었다⁠.

“⁠머그 사신 분들 중에 그게 위원장님한테 맞서는 표라고 생각하고 사신 분들 계신 거 알아요⁠. 그런데 저는 그 표 받으려고 머그 판 거 아니에요⁠. 할머니 빚 갚으려고 판 거예요⁠. 환불하실 분은 하세요⁠. 돌려드려요⁠. 그 대신 다방이 남으면⁠, 머그를 내리신 분도 오시면 커피는 드려요⁠.⁠”

“⁠그 다방에 앉은 사람들이 누군지 다들 아시지 않소⁠.⁠”

공치범의 목소리가 느렸다⁠. 공치범은 상인들을 한 사람씩 보았다⁠.

“⁠솔섬골에서 불 낸 사람⁠, 그 사람을 숨겨 준 다방⁠. 그 다방에 커피 값을 미리 내는 게 무슨 뜻인지 다들 아실 거요⁠.⁠”

“⁠알제⁠.⁠”

갈치 이모였다⁠. 이모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이 날마다 아침 일곱 시에 그 국밥집 쪽으로 의자 돌려서 앉아 있는 것도 알제⁠. 다방 문 닫았을 때는 그 집 앞 맥주 상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생선 받으러 새벽마다 그 골목을 지나가⁠. 위원장님은 그거 봤는가⁠?⁠”

공치범이 대답하지 않았다⁠. 건어물 가게 노인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머그를 산 적이 없었다⁠. 이날 회의가 끝나고 세나 앞을 지나며 말했다⁠. 머그는 안 산다고⁠. 이 사람들한테 커피 값을 미리 줄 생각은 없다고⁠. 대신 상가 동의서에도 도장 안 찍었다고⁠.

*

그물 깁는 노인은 손수레가 아니라 다방으로 왔다⁠. 다방이 다시 열리고 엿새째 되던 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서지 않고 벽 앞으로 갔다⁠. 머그를 보았다⁠. 갈치⁠, 엉덩이 하트⁠,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경위의 머그⁠. 그리고 빈 못⁠.

“⁠하나 주게⁠.⁠”

노인은 만 원짜리 열 장을 세나에게 건넸다⁠. 굵은 손가락이 지폐를 한 장씩 셌다⁠.

“⁠나는 마시러 안 와⁠. 그냥 걸어만 두게⁠. 저 사람 앉는 자리 맞은편에⁠.⁠”

노인이 고개로 가리킨 사람은 면도날이었다⁠. 면도날은 창가 소파에 앉아 국밥집 쪽을 보고 있다가 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손이 무릎 위에서 떨렸다⁠.

“⁠저 사람이 여기 앉아서 커피 마실 때마다 내 잔이 보이게⁠. 그 손이 그 잔을 보게⁠.⁠”

망치가 맞은편 벽에 못을 하나 새로 박았다⁠. 노인은 머그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이것이 못에 걸리는 것을 보고 나갔다⁠. 면도날은 이날부터 쌍화차를 마실 때 잔을 두 손으로 들었다⁠. 그래도 쏟았다⁠. 쏟을 때마다 맞은편 벽의 흰 머그를 보았다⁠.

면도날은 이후로도 새벽마다 선창 그물 작업장에 갔다⁠. 사흘 전부터는 노인이 면도날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물 끝을 잡고 서 있게 했다⁠. 떨리는 손으로 잡은 그물이 바닷바람에 같이 떨었다⁠. 노인은 이 그물을 기웠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팔월 삼십일일 오후 세 시⁠, 머그는 삼백아흔여덟 개였다⁠.

벽 세 면이 흰 머그로 덮였다⁠. 내려간 머그의 빈 못 몇 개가 이 사이에 남아 있었다⁠. 세나는 서랍과 금고와 계좌의 돈을 다 꺼냈다⁠. 상당수가 현금이었다⁠. 시장 사람들은 현금으로 냈고⁠, 노인들은 봉투에 넣어 냈다⁠. 이 돈을 원두 자루 두 개에 나눠 담았다⁠. 삼베 자루에서 볶은 원두 냄새가 났다⁠.

“⁠이십만 원 모자라요⁠. 머그 두 개⁠.⁠”

다섯이 지갑을 꺼냈다⁠. 망치의 갈라진 지갑에서 이만 삼천 원⁠. 뱀장어 만 원⁠. 백구 오만 원⁠. 면도날의 동전이 칠천 원어치⁠. 곰은 지갑을 열어 보고 다시 닫았다⁠. 다 합쳐도 머그 하나 값이 안 됐다⁠. 세나는 이 돈을 받지 않았다⁠. 다섯이 지난주에 연금을 털어 한 사람에 하나씩 이미 머그를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다섯 개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뱀장어가 유리문 너머 골목 건너편을 보았다⁠. 국밥집 계산대 밑에 양은 쌀통이 있다는 것을 다섯 다 알았다⁠. 서른 해 동안 이들이 깡통에 넣은 돈이 뜯기지 않은 채 거기 꽂혀 있었다⁠. 천팔백만 원이었다⁠.

“⁠사장님⁠, 그 쌀통에 우리가 넣은 돈이⁠…⁠…⁠.⁠”

“⁠안 돼요⁠.⁠”

세나와 망치가 동시에 말했다⁠. 뱀장어는 입을 다물었다⁠. 셔츠 단추를 만지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 돈은 서른 해 동안 한 번도 이들의 돈이었던 적이 없었다⁠. 뱀장어도 이것을 알았고⁠, 알면서 입에 올린 것이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네 시 반⁠, 세나와 다섯은 원두 자루를 메고 추진위 사무실로 갔다⁠. 곰이 두 자루를 한꺼번에 어깨에 멨다⁠. 부동산 계단을 오를 때 원두 자루에서 돈 냄새 대신 커피 냄새가 났다⁠.

공치범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자루를 보고⁠, 다섯을 보고⁠, 세나를 보았다⁠. 직원 하나를 불러 돈 세는 기계를 가져오게 했다⁠. 직원이 자루를 뒤집자 지폐 사이에서 볶은 원두 몇 알이 책상 위로 굴러 나왔다⁠. 기계가 지폐를 넘기는 소리가 사무실을 채웠다⁠. 동전은 손으로 셌다⁠. 벽시계가 네 시 오십 분을 가리켰다⁠.

“⁠삼천구백팔십만 원이오⁠.⁠”

공치범이 말했다⁠.

“⁠이십만 원 모자라요⁠. 다섯 시까지 십 분⁠.⁠”

세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십 분 안에 이십만 원을 보내 줄 사람을 머릿속으로 셌다⁠. 서울의 옛 동료들⁠, 연락이 끊긴 지 석 달⁠.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이미 머그 셋을 샀다⁠. 갈치 이모는 둘을 샀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지팡이 소리가 아니었다⁠. 고무 슬리퍼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였다⁠.

공서랑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원두 자루⁠, 돈 세는 기계⁠, 다섯⁠, 세나⁠, 그리고 책상 뒤의 동생⁠. 앞치마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스무 장을 꺼냈다⁠. 봉투에 넣지 않은 맨 돈이었다⁠. 사골 냄새가 배어 있었다⁠.

서랑은 이것을 공치범의 책상 위에 놓았다⁠.

“⁠머그 둘⁠.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니 거⁠.⁠”

공치범이 누님을 올려다보았다⁠. 공치범의 손이 책상 위의 지폐 옆에서 멈췄다⁠.

“⁠누님⁠, 이게⁠…⁠…⁠.⁠”

“⁠다방 창가 맞은편에 걸어 달라고 할 거야⁠. 나는 거기 안 앉아⁠. 니도 안 앉겠지⁠. 그래도 걸어 둬⁠. 니 잔도 거기 있어야 돼⁠. 니도 거기 있었으니까⁠.⁠”

벽시계가 네 시 오십육 분을 가리켰다⁠. 공치범은 스무 장을 집어 돈 세는 기계에 넣었다⁠. 기계가 넘기는 소리⁠. 이십⁠. 이것을 자루의 돈 위에 얹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도장을 찍었다⁠. 빚을 다 받았다는 확인이었다⁠. 이 사람은 이 종이를 세나 쪽으로 밀었다⁠.

“⁠다 받았소⁠.⁠”

곰이 숨을 내쉬었다⁠. 이 소리가 사무실 안에서 컸다⁠. 뱀장어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다시 채웠다⁠.

*

세나가 종이를 집어 드는데 공치범이 일어섰다⁠. 지팡이를 짚고⁠, 오른쪽 다리를 둥글게 돌려 책상 앞으로 나왔다⁠. 벽의 조감도 앞에 섰다⁠. 아파트 세 동⁠, 상가 거리⁠, 지하주차장 입구⁠.

“⁠다방은 남았소⁠. 축하하요⁠.⁠”

공치범은 조감도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원도심 골목 일곱 개가 이 손바닥 밑에 있었다⁠.

“⁠어제 시청에 조합 설립 인가를 신청했소⁠. 원도심 2구역만이 아니오⁠. 1구역부터 3구역까지⁠, 원도심 전체를 하나로 묶었소⁠. 구월 닷새⁠, 시청 대강당에서 정비 공청회를 하요⁠. 시장도 오고 시공사도 오고 방송국도 와요⁠.⁠”

공치범은 돌아서서 망치를 보았다⁠. 다섯 가운데 망치만 보았다⁠.

“⁠형님⁠, 그날 오시오⁠. 누님이 형님들한테 말하라 했지라⁠. 거기서 말하시오⁠. 형님 입으로⁠, 형님 이름으로⁠. 솔섬골에서 뭘 했는지⁠.⁠”

망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 하시면 내가 하겠소⁠. 형님이 내 무릎 친 거⁠, 곰 형님이 난로 찬 거⁠, 계춘 할머니가 그 밤에 숨겨 준 거⁠, 그 점퍼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그라고 그 다방이 원도심 한가운데 서른다섯 해 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도⁠.⁠”

서랑이 동생을 보았다⁠. 세나가 망치를 보았다⁠. 망치는 조감도 앞의 공치범을 보았다⁠. 망치의 입이 열렸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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