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07자)

맨 앞줄

시골 다방 단골이 전부 칠십 대 조폭 · 나경훈

“⁠가겠소⁠.⁠”

망치의 목소리는 사무실 에어컨 소리보다 낮았다⁠.

“⁠가서 내 입으로 말하겠소⁠. 솔섬골에서 문을 몇 개 부쉈는지⁠, 위원장 무릎을 어떻게 쳤는지⁠, 곰을 어떻게 감쌌는지⁠. 그 대신 위원장이 지금 산 용역 얘기도 그 자리에서 하겠소⁠.⁠”

공치범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좁아졌다⁠.

“⁠우리가 그 짓을 할 때 누가 돈을 댔는지⁠. 지금 누가 돈을 대는지⁠. 평상 앞에서 핸드폰 들고 서 있던 사람⁠, 굴착기 기사한테 손 흔든 사람⁠. 그 아가씨 머리 위로 지붕이 떨어졌소⁠.⁠”

“⁠형님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소⁠?⁠”

“⁠없소⁠.⁠”

망치가 대답했다⁠.

“⁠그래서 하겠소⁠. 자격 있는 사람은 그 말 못 하요⁠. 해 본 사람만 아요⁠.⁠”

망치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갔다⁠. 다섯이 뒤를 따랐다⁠. 곰이 빈 원두 자루 두 개를 어깨에 걸쳤다⁠. 서랑이 마지막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고무 슬리퍼 소리가 지팡이 소리보다 오래 남았다⁠.

*

구월 첫날 아침 일곱 시⁠, 다섯은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쌍화차 다섯 잔이 식는 동안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공청회에서 우리가 말하면 원도심이 밀려⁠.⁠”

뱀장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채운 채였다⁠.

“⁠방송국이 온다잖여⁠. 솔섬골 철거 용역이 서른다섯 해 동안 원도심 한가운데 다방에 앉아 있었다⁠, 그 말 한마디면 시장이 도장 찍어⁠. 그라믄 시장 사람들⁠, 철물점⁠, 사진관⁠, 갈치 이모네 가게 다 밀려⁠. 우리 죄 값을 그 사람들이 치르는 거여⁠.⁠”

“⁠그 집 사람이 말하라 했소⁠.⁠”

백구가 말했다⁠. 다섯이 백구를 보았다⁠. 백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했소⁠.⁠”

곰이 말했다⁠. 피처를 쥐고 있었는데 우유는 들어 있지 않았다⁠.

“⁠동 주민센터에서 했소⁠. 잘려서 돌아다니지만⁠. 한 번 더 하라면 하요⁠. 근데 형님⁠, 이번엔 나 혼자 말고 다 같이 해야 되요⁠.⁠”

면도날이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이 떨렸다⁠.

“⁠나는 내 손 얘기도 해야 하요⁠? 그건 솔섬골 일이 아닌디⁠.⁠”

“⁠솔섬골 일만 하면 그 영감님 머그는 왜 저기 걸려 있소⁠?⁠”

망치가 고개로 맞은편 벽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머그가 거기 걸려 있었다⁠. 면도날은 이것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뭘 말할지는 그날 정하요⁠. 앉는 것부터 하요⁠. 맨 앞에⁠.⁠”

세나는 계산대 뒤에서 이 말을 들었다⁠. 무엇을 말할지 정하지 못한 채 맨 앞줄부터 정한 사람들이었다⁠. 뱀장어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망치가 옳다는 것도 알았다⁠. 둘 다 옳은데 한쪽만 고를 수 있었다⁠.

*

공치범은 이날 오후에 왔다⁠. 지팡이 소리 두 번⁠. 계산대 앞에 서서 쓴 보리차를 한 잔 시켰고⁠, 사천 원 대신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제 이 건물은 아가씨 거요⁠. 빚 없는 땅 주인⁠. 조합이 서려면 아가씨 동의가 필요하요⁠.⁠”

봉투 안에는 조감도 한 장과 숫자가 적힌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새 상가 일층 모퉁이⁠, 유리 외벽⁠, 스물두 평⁠. 지금 다방 자리의 보상금 일억 오천⁠. 그리고 이 모퉁이 가게를 우선 분양받을 권리⁠.

“⁠커피는 새 건물에서 파시오⁠. 에어컨 나오고 비 안 새고⁠, 창이 넓은 데서⁠. 간판도 동백다방 그대로 다시오⁠. 그 양반들은 빼고⁠.⁠”

세나는 조감도를 보았다⁠. 유리 외벽 모퉁이 가게⁠. 성수동 카페의 통유리와 같은 높이였다⁠. 세나가 서울에서 잘리기 전에 일하던 바⁠, 기계가 들어오기 전의 이 바⁠. 이 그림을 오래 보았다⁠. 오래 본 것을 공치범도 보았다⁠.

“⁠공청회 끝나고 말씀드릴게요⁠.⁠”

“⁠기다리겠소⁠.⁠”

공치범은 봉투를 두고 나갔다⁠. 쓴 보리차는 마시지 않았다⁠. 세나는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다가 다시 열어 조감도를 한 번 더 보았다⁠. 창가의 다섯은 세나를 보지 않았다⁠. 국밥집 쪽을 보고 있었다⁠.

*

머그 두 개가 걸린 것은 구월 세 번째 날 아침이었다⁠.

망치가 창가 맞은편 벽⁠, 그물 노인의 흰 머그 옆에 못 두 개를 박았다⁠. 세나가 머그를 걸었다⁠. 하나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서랑의 것이었다⁠. 다른 하나도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공치범의 것이었다⁠. 둘 다 아무도 마시러 오지 않을 머그였다⁠.

일곱 시 십 분⁠, 국밥집 셔터가 올라갔다⁠. 서랑이 골목 건너편을 보았다⁠. 대나무 발 아래 절반으로 창가 소파의 다섯이 보였고⁠, 뒤쪽 벽에 걸린 흰 머그 세 개가 보였다⁠. 가마솥 뚜껑을 열기 전에 이 셋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다⁠.

*

이날 밤 열 시⁠, 셔터를 반쯤 내렸을 때 지팡이 소리가 났다⁠. 두 번⁠.

공치범은 셔터 밑으로 허리를 숙여 들어오지 않았다⁠. 셔터 앞에 서서 말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그렇게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세나는 셔터를 올렸다⁠.

공치범은 창가 맞은편 벽 앞으로 갔다⁠. 흰 머그 세 개⁠. 그물 노인의 것⁠, 누님의 것⁠, 그리고 자기 것⁠. 공치범은 자기 머그를 내려다보며 오래 서 있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쓴 보리차 한 잔 주시오⁠.⁠”

세나는 원두를 갈았다⁠.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동안 다방 안에는 이 소리밖에 없었다⁠. 커피를 공치범의 머그에 따랐다⁠. 공치범은 이것을 보고 눈썹을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님이 왜 이 잔에 내 것까지 샀는지 아쇼⁠?⁠”

“⁠위원장님도 거기 계셨으니까요⁠.⁠”

공치범은 머그를 두 손으로 감쌌다⁠. 뜨거울 텐데 손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날 그 집 문밖에 누워 있었소⁠. 눈 위에⁠. 무릎이 돌아가서 일어설 수가 없었소⁠. 문 안에서 연기가 나오고⁠, 누님이 아버지를 끌고 나오는 걸 거기 누워서 봤소⁠. 누님 소매에 불이 붙은 것도⁠. 나는 기어가지도 못했소⁠. 누님이 눈에 팔을 묻는 걸 거기서 봤소⁠.⁠”

공치범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이 찌푸려졌다⁠.

“⁠서른다섯 해 동안 누님 대신 말한 거⁠, 누님 대신 아파한 거⁠, 그거 다 그날 못 기어간 값이오⁠. 누님은 그걸 다 알고 나를 말리지 않았소⁠. 그러다 그날 내 책상에 저 잔 값을 올려놓았지⁠.⁠”

공치범은 머그를 내려놓았다⁠. 반이 남아 있었다⁠.

“⁠공청회는 하요⁠. 나는 내가 할 말을 할 거요⁠. 아가씨도 아가씨 할 일 하시오⁠.⁠”

공치범은 사천 원을 계산대에 놓고 나갔다⁠. 세나는 공치범의 머그를 씻어 다시 못에 걸었다⁠. 커피 냄새가 머그 안에 남았다⁠.

*

양복은 구월 네 번째 날 저녁에 나왔다⁠.

다섯은 각자 집에서 양복을 가져와 다방 소파 위에 펼쳤다⁠. 좀약 냄새가 쌍화차 냄새를 이겼다⁠. 곰의 양복은 설명회 때 입은 회색 양복이었다⁠. 어깨가 터질 것 같았다⁠. 뱀장어의 양복은 밤색이었는데⁠, 바짓단이 나팔처럼 벌어져 있었다⁠. 뱀장어는 이것을 입고 소파 사이를 한 바퀴 걸었다⁠.

“⁠아따⁠, 이게 팔십육 년도 선창 최신 유행이여⁠.⁠”

“⁠그랑께⁠, 바지에 빗자루를 달고 다니는 것 같소⁠.⁠”

곰이 말했다⁠. 백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백구의 양복은 검은색이었다⁠. 상갓집에만 입고 간 양복이라 무릎이 하나도 늘어나지 않았다⁠. 망치의 양복도 검은색이었다⁠. 계춘 할머니 장례식 때 입은 것이었다⁠. 안주머니에서 하얀 리본 끈이 나왔다⁠. 이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면도날은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지 못했다⁠. 손이 떨렸다⁠. 단추 구멍을 찾아가던 손가락이 단추를 놓치고⁠, 다시 잡고⁠, 다시 놓쳤다⁠. 맨 위 단추에서 손을 내렸다⁠.

“⁠사장님⁠.⁠”

세나가 계산대에서 나왔다⁠. 면도날은 턱을 들었다⁠.

“⁠내가 이 손으로 사람 얼굴을 그었소⁠. 이 손으로는 이 단추를 못 채우요⁠. 사장님이 채워 주시오⁠.⁠”

세나는 면도날의 목 앞에 손을 댔다⁠. 면도날의 숨이 세나의 손등에 닿았다⁠. 쌍화차와 담배와 좀약 냄새가 섞인 숨이었다⁠. 단추가 작았다⁠. 구멍을 찾는 동안 면도날의 목울대가 한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 단추가 들어갔다⁠. 면도날은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매지 못했다⁠. 곰이 면도날의 넥타이를 대신 맸는데⁠, 큰 손으로 맨 매듭이 주먹만 했다⁠.

다섯이 양복을 입고 소파 앞에 섰다⁠. 회색⁠, 밤색⁠, 검정⁠, 검정⁠, 그리고 단추를 끝까지 채운 면도날의 감색⁠. 세나는 이 다섯을 보았다⁠. 첫날 아침 일곱 시⁠, 허리를 직각으로 꺾던 다섯이었다⁠. 오늘은 아무도 허리를 꺾지 않았다⁠.

*

구월 닷새⁠, 시청 대강당⁠.

에어컨이 세게 돌아 바닷바람 냄새 대신 새 카펫 냄새가 났다⁠. 의자가 사백 개 넘게 깔려 있었다⁠. 단상 위에 원도심 전체를 덮은 조감도가 걸렸다⁠. 유리 외벽 아파트가 일곱 동⁠, 상가 거리⁠, 공원⁠. 동백다방이 있던 골목은 그림 어디에도 없었다⁠. 단상 옆에 방송국 카메라 두 대가 서 있었다⁠. 첫 줄 가운데 다섯 자리에 「⁠시공사⁠」 「⁠시청⁠」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세나는 강당 뒤에서 사람들을 보았다⁠. 갈치 이모⁠, 게스트하우스 사장⁠, 철물점 부부⁠, 사진관 노인⁠, 건어물 가게 노인⁠. 머그를 산 사람과 내린 사람과 한 번도 사지 않은 사람이 섞여 앉아 있었다⁠. 강당 뒷문 옆에는 제복을 입은 경위가 서 있었다⁠. 서른다섯 해 전 솔섬골 골목 입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 옆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맨 뒷줄 가운데에 서랑이 앉아 있었다⁠. 긴소매⁠, 얇은 스카프⁠. 이 두 줄 앞에 그물 깁는 노인이 있었다⁠. 딸이 이 옆에 앉아 있었다⁠.

여섯 시 오십 분⁠, 다섯이 강당 앞문으로 들어왔다⁠.

회색⁠, 밤색⁠, 검정⁠, 검정⁠, 감색⁠. 다섯이 통로를 걸어 내려가는 동안 강당이 조용해졌다⁠. 다섯은 첫 줄로 갔다⁠. 시공사 이름표 앞에서 멈췄다⁠. 직원 하나가 달려와 이 자리는 정해진 자리라고 말했다⁠. 망치는 이름표를 집어 들어 직원에게 건넸다⁠. 그리고 앉았다⁠. 넷이 이 옆에 앉았다⁠. 곰이 앉자 의자가 삐걱거렸다⁠.

직원은 이름표를 든 채 단상 쪽을 보았다⁠. 공치범이 단상 옆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손을 들어 직원을 물렸다⁠.

세나는 다섯의 바로 뒷줄에 앉았다⁠. 세나의 가방 안에 서랍에서 꺼내 온 서류 봉투가 있었다⁠. 일억 오천과 유리 외벽 모퉁이⁠. 아직 답을 정하지 않았다⁠. 가방 지퍼를 잠그고 무릎 위에 올려 두 손으로 눌렀다⁠.

일곱 시 정각⁠, 공치범이 단상에 올랐다⁠. 지팡이를 단상 옆에 기대 놓고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았다⁠.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카메라의 빨간 불이 켜졌다⁠.

“⁠원도심을 왜 바꿔야 하는지⁠, 오늘은 그림 말고 사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치범은 맨 앞줄을 내려다보았다⁠. 다섯을 한 사람씩⁠. 망치에게서 멈췄다⁠.

“⁠지금 이 자리 맨 앞줄에⁠, 삼십오 년 전 솔섬골을 부순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카메라 두 대가 단상에서 첫 줄로 돌아갔다⁠. 사백 개의 얼굴이 앞으로 기울었다⁠. 맨 뒷줄에서 서랑이 일어서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망치가 일어섰다⁠. 검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리본 끈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이것을 밀어 넣지 않았다⁠. 단상 쪽으로⁠, 공치범이 쥐고 있는 마이크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망치의 뒤에서 곰이 일어섰다⁠. 백구가⁠, 뱀장어가 일어섰고⁠, 면도날이 단추를 끝까지 채운 목으로 마지막에 일어섰다⁠.

공치범은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망치가 단상 계단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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