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10자)

내가 하지 않은 말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3월 9일 목요일 오후 두 시⁠, 오혜림은 보위성 청사 5층 장명길의 방 책상에 얇은 철을 내려놓았다⁠. 철 옆에 먹지 다섯 장을 날짜 순서로 펼쳤다⁠. 장명길은 읽던 서류에서 눈을 들지 않고 안경만 벗어 책상에 두었다⁠.

“⁠문서고에서 작성자 확인을 하라고 내준 철입니다⁠. 세 장 다 제 이름입니다⁠. 세 장 다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네 글씨다⁠.⁠”

“⁠제 글씨를 닮은 글씨입니다⁠. 저는 볼펜을 세게 눌러 씁니다⁠. 먹지를 끼우니까요⁠. 이 세 장은 뒷면이 매끈합니다⁠.⁠”

혜림은 1월 13일 먹지를 집어 창에 댔다⁠. 오후 햇빛이 검은 종이를 뚫고 들어와 거꾸로 박힌 글씨를 비췄다⁠. 「⁠김평일은 전보를 자기가 보내지 않았다고 말함⁠」⁠. 「⁠가거라⁠」⁠. 장명길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먹지는 쓰고 나면 그날로 태우는 것이 규정이다⁠.⁠”

“⁠태우라는 지시를 문서로 주시면 오늘 태우겠습니다⁠.⁠”

장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을 다시 쓰고 철을 펼쳐 세 장을 한 장씩 넘겼다⁠. 넘기는 손이 느렸다⁠.

“⁠고친 건 총무부다⁠. 나는 고치지 않았다⁠.⁠”

“⁠막지도 않으셨습니다⁠.⁠”

“⁠막으면 보위성이 원로 편이 된다⁠. 어제 원로한테 허가서를 써 준 것도 같은 까닭이다⁠. 총무부에는 보고서를 주고 원로한테는 손님을 준다⁠. 그러면 보위성은 어느 편도 되지 않는다⁠. 이 집에서 편을 고른 사람은 다음 해 탄광에 간다⁠. 네 아버지가 편을 골랐냐⁠? 만두를 골랐지⁠.⁠”

혜림의 손이 먹지 위에서 멈췄다⁠. 장명길이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누렇게 바랜 철 하나가 나왔다⁠. 겉장에 붉은 줄 두 개⁠, 그리고 이름이 있었다⁠. 「⁠오정식⁠」⁠.

“⁠네 아버지 서류다⁠. 총무부장 동지께서 약속하셨다⁠. 이 부록에 작성자 도장 하나만 찍으면 이 철을 닫아 주겠다고⁠. 닫힌 철은 다시 안 열린다⁠. 너는 평양에 남는다⁠. 네 어머니도 탄광 마을에서 나온다⁠.⁠”

혜림은 철의 겉장을 보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타자 글씨였다⁠. 아궁이 앞에서 아버지가 몰래 읽어 주던 사본과 같은 활자였다⁠.

“⁠도장을 찍으면 김평일은 앞에 서겠다고 말한 사람이 됩니다⁠. 손자는 알았다고 대답한 사람이 되고⁠, 김덕수 중좌는 이름을 올리겠다고 한 사람이 됩니다⁠. 제가 듣지 않은 말을 세 사람이 한 것이 됩니다⁠.⁠”

“⁠말은 원래 그렇게 생긴다⁠.⁠”

“⁠아버지 서류도 그렇게 생겼습니까⁠?⁠”

장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청사 마당의 승용차 한 대가 시동을 걸었다⁠.

“⁠오늘 안이다⁠. 문서고가 기다린다⁠.⁠”

혜림은 먹지 다섯 장을 모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철은 책상 위에 두었다⁠.

“⁠작성자 확인은 작성자가 합니다⁠. 저는 이 세 장을 쓴 적이 없어서 확인할 것이 없습니다⁠. 철은 대좌 동지께 두고 가겠습니다⁠.⁠”

혜림은 경례를 붙이고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책상 위를 한 번 보았다⁠. 부록 철 옆에 아버지의 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누런 겉장 위에 창 햇빛이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복도로 나온 혜림은 계단참 창가에서 안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먹지 다섯 장 가운데 2월 3일 장도 있었다⁠. 응접실 문간에 서 있던 중위의 이름까지 적은 장이었다⁠. 혜림은 중위의 이름이 어느 책상까지 올라갔는지 아직 몰랐다⁠. 계단 아래에서 누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나자 혜림은 손을 내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

같은 날 저녁 일곱 시⁠, 김인철은 외교단 숙소 부엌 가스 곤로 앞에서 국자를 저었다⁠. 냄비에서 감자국이 끓었다⁠. 체코 사람들이 브람보라치카라고 부르는 국이었다⁠. 감자와 양파와 마늘을 넣고⁠, 마지막에 마조람이라는 마른 풀을 한 줌 넣어야 했다⁠. 매점에는 마조람이 없었다⁠. 송명옥이 대신 중국 오향 가루 한 봉지를 내밀었다⁠. 향이 다섯 가지라 하나는 맞을 거라고 했다⁠.

혜림이 부엌 문간에 들어왔다⁠. 외투를 벗지 않았다⁠.

“⁠앉으시오⁠. 국이 다 됐소⁠.⁠”

“⁠안내원은 손님과 밥을 먹지 않습니다⁠.⁠”

“⁠국이오⁠. 밥은 안 줬소⁠.⁠”

혜림이 식탁 끝에 앉았다⁠. 인철이 국을 한 그릇 떠서 내밀었다⁠. 혜림은 숟가락으로 한 번 떠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게 체코 국입니까⁠?⁠”

“⁠체코 국이었소⁠. 오향이 들어가서 지금은 베이징 국이오⁠.⁠”

혜림은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그러고는 한 숟가락을 더 떴다⁠. 인철은 자기 그릇을 앞에 두고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오늘 박 부위원장이 대위 동무가 처음 쓴 보고서를 가져오라 했소⁠. 총무부가 고친 보고서를 부록에 붙였다고⁠. 가져오면 다음 회의에서 초안을 통째로 내리겠다고⁠.⁠”

혜림의 숟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닿았다⁠.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

“⁠문 닫기 전에는 한 번 말하는 게 내 일이라고 했소⁠.⁠”

“⁠처음 쓴 보고서는 총무부와 대좌 동지 책상에 있습니다⁠. 저한테 남은 건 먹지입니다⁠.⁠”

“⁠먹지가 뭐요⁠?⁠”

“⁠종이 두 장 사이에 끼우는 검은 종이입니다⁠. 위에 쓰면 아래 장에 글씨가 찍히고⁠, 먹지에는 글씨가 거꾸로 남습니다⁠.⁠”

“⁠그걸 주면 할아버지 이름이 내려가오⁠?⁠”

“⁠원로 손에 가면 원로의 증거가 됩니다⁠. 원로는 그 증거로 다음 회의에서 총무부를 칩니다⁠. 치고 나면 김인철 동무를 앞에 세웁니다⁠. 이번에는 초가 앞마당이 아니고 주석단입니다⁠.⁠”

“⁠그럼 주지 마시오⁠.⁠”

혜림이 고개를 들었다⁠. 인철은 이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전차 운전석이 있소⁠. 주석단은 앉을 데가 너무 많소⁠.⁠”

“⁠총무부 손에 가면 불에 들어갑니다⁠. 대좌 동지 손에 가면 서랍에 들어갑니다⁠.⁠”

“⁠대위 동무 손에 있으면⁠?⁠”

혜림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냄비 뚜껑이 김에 들썩였다⁠.

“⁠제 아버지 서류가 닫히지 않습니다⁠.⁠”

인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국자를 들어 혜림의 그릇에 국을 더 떠 넣었다⁠.

“⁠더 드시오⁠. 오향은 두 번째 그릇부터 괜찮아지오⁠.⁠”

혜림은 두 번째 그릇을 다 비웠다⁠. 다 비우고 나서 말했다⁠.

“⁠괜찮아지지 않습니다⁠.⁠”

인철이 웃었다⁠. 혜림은 이번에는 입술을 물지 않았다⁠.

*

3월 10일 금요일 새벽 네 시⁠, 윤설향은 부엌 문짝이 흔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깥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였다⁠. 설향이 빗장을 다 풀기도 전에 손전등 불빛 둘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보위국 군복 둘과⁠, 사복에 털모자를 쓴 남자 하나였다⁠.

“⁠윤성민 나오라⁠.⁠”

윗방에서 성민이 돌격대 솜옷을 걸치며 나왔다⁠.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누나⁠, 내 말 들어 보오⁠. 나 아무것도 안 했소⁠.⁠”

“⁠아무것도 안 했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성민이 신발에 발을 꿰었다⁠. 끈을 묶으려고 쭈그리자 군복 하나가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설향은 부뚜막 위 깡통에서 백 위안짜리 두 장을 꺼내 성민의 솜옷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사복 남자가 손을 뻗어 주머니에서 돈을 도로 꺼냈다⁠.

“⁠증거물이오⁠.⁠”

남자는 돈을 접어 자기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증거물을 넣는 봉투는 없었다⁠. 손전등 불빛이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설향은 문간에 맨발로 나가 골목 끝을 보았다⁠. 풀린 신발 끈 한 짝이 언 땅에 끌리는 소리가 한참 들리다가 멎었다⁠.

*

3월 12일 일요일 오전 열 시⁠, 윤설향은 양강도 보위국 조사실 나무 의자에 다시 앉았다⁠. 성민이 끌려간 지 사흘째였다⁠.

지도원 조영수가 사진 석 장을 탁자에 놓았다⁠. 3월 8일 역 앞 광장이었다⁠. 소매 긴 코트의 청년이 뒷짐을 지고 국숫집 매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청년 뒤로 다섯이 손바닥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세 번째 사진 가장자리에 털깃을 단추로 누른 최광수가 반쯤 찍혀 있었다⁠.

“⁠최광수 지도원은 오늘부터 국경 초소 근무요⁠.⁠”

“⁠코트는 두고 갔슴까⁠?⁠”

“⁠입고 갔소⁠.⁠”

조영수가 타자로 친 종이 한 장을 사진 위에 올렸다⁠.

「⁠3월 8일 혜산역 앞 광장의 흉내는 내가 코트를 팔려고 동생에게 시킨 광고다⁠. 윤설향⁠」

“⁠여기 서명하면 동무 동생의 일은 장사꾼 광고가 되오⁠. 서명 안 하면 향도 동지를 흉내 내어 비웃은 일이 되오⁠. 광고는 매대를 닫으면 끝나고⁠, 비웃음은 안 끝나오⁠.⁠”

설향은 종이를 끝까지 읽었다⁠. 두 번 읽었다⁠.

“⁠동생 먼저 내보내 주시면 서명함다⁠.⁠”

“⁠서명 먼저요⁠.⁠”

“⁠기러면 동생 얼굴 먼저 보여 주시라요⁠. 얼굴 보고 서명하고⁠, 서명하고 데려가겠슴다⁠.⁠”

“⁠동무는 여기서도 흥정을 하오⁠?⁠”

“⁠여기가 제일 비싼 데라서 그럼다⁠.⁠”

조영수는 한참 설향을 보다가 일어나 문을 반쯤 열었다⁠. 복도 긴 의자에 성민이 앉아 있었다⁠. 솜옷 차림으로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 누나를 보고 웃으려다 말았다⁠. 문이 다시 닫혔다⁠.

설향은 볼펜을 쥐었다⁠.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썼다⁠. 조영수가 종이를 거둬 서류철에 넣었다⁠.

“⁠동생은 평양에서 답이 내려오면 나가오⁠.⁠”

“⁠평양 답은 언제 옴까⁠?⁠”

“⁠평양 답은 평양이 정하오⁠.⁠”

같은 날 오후 설향은 매대를 열었다⁠. 기둥에 비닐로 싸서 붙여 둔 노동신문 1면 사진 아래⁠, 3월 8일 성민에게서 벗겨 낸 코트를 철사 옷걸이에 걸었다⁠. 값을 묻는 손님에게는 팔지 않는 코트라고 했다⁠. 소매가 손가락 끝까지 내려오는 코트였다⁠.

*

3월 13일 월요일 오전 아홉 시 반⁠, 리학철은 간부과 사무실에서 문정숙이 두고 간 부록 철을 펼쳤다⁠. 표지에 「⁠조직지도부 검토 의견을 붙일 것⁠」이라고 쓴 작은 종이가 클립으로 물려 있었다⁠.

첫 묶음은 보위성 자료 사본 세 장이었다⁠. 1월 13일⁠, 1월 23일⁠, 2월 26일⁠. 세 장 다 작성자 확인 도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 1월 13일 장의 두 번째 줄에서 학철은 손을 멈췄다⁠. 「⁠이제 내가 앞에 서겠다⁠」⁠. 1월 14일 검토실에서 받은 사본에는 반가워했다와 감자 요리 두 줄뿐이었다⁠. 같은 날짜⁠, 같은 작성자의 보고서가 두 달 사이에 세 번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두 번째 묶음은 사진이었다⁠. 3월 8일 혜산역 앞⁠, 소매 긴 청년이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 번째 묶음은 목록이었다⁠. 제목은 「⁠곁가지와 접촉한 자들⁠」⁠. 만경대 사진 속 군 장령 둘과 사진사⁠,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박정천⁠, 부관 김덕수 중좌⁠. 줄마다 날짜와 장소와 출처가 붙어 있었다⁠. 맨 아래 줄은 다른 줄보다 글씨가 촘촘했다⁠.

「⁠2월 3일 19시⁠, 문수동 외교단 숙소 응접실⁠. 선전선동부 부부장 진경훈⁠, 호위사령부 중위 리정훈⁠. 출처⁠: 보위성 대위 보고⁠」

학철은 1월 23일 밤 부엌 식탁을 떠올렸다⁠. 다음 주에 향도 동지 곁 분을 모시고 바깥에 나갈 일이 있습니다⁠. 어디인지는 말씀 못 드립니다⁠. 아들이 말하지 못한 곳이 목록 맨 아래 줄에 시각까지 적혀 있었다⁠.

학철은 서랍을 열고 비닐에 싼 12월 1일 자 신문을 꺼냈다⁠. 금테 두른 붉은 의자 뒤의 김정은⁠, 왼편의 김주애⁠, 오른편의 김여정⁠. 김주애의 왼편 뒤⁠, 사진 가장자리에 경호원 하나의 어깨가 반쯤 잘려 들어와 있었다⁠. 석 달 동안 서랍을 수십 번 열었지만 학철은 잘린 어깨를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견장의 별 하나와 귀 끝이 보였다⁠. 아들의 귀는 어머니를 닮아 끝이 조금 접혀 있었다⁠.

학철은 목록을 손가락으로 덮지 않았다⁠. 1월에 검토실에서 「⁠곁가지는 친다⁠」를 덮었다가 뗀 적이 있었다⁠. 덮어도 떼어도 글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아들의 이름도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책상 왼편의 회색 문건철 열두 개는 석 달째 같은 높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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