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74자)

고모와 손자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3월 22일 수요일 오후 세 시⁠, 김인철은 본부청사 2층 접견실 문 앞에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접견실 바닥에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문정숙이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혜림은 복도 의자에 남았다⁠.

접견실은 길쭉했다⁠. 창가에 낮은 탁자와 안락의자 넷이 놓였고⁠, 벽에 금강산 그림이 있었다⁠. 김여정이 창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색 치마 정장이었다⁠. 인철이 신문 사진과 프라하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얼굴이었다⁠.

“⁠김인철 동무⁠. 앉으시오⁠.⁠”

“⁠신발을 벗어도 되오⁠?⁠”

문정숙의 안경이 코끝에서 미끄러졌다⁠. 김여정은 인철의 구두를 한 번 보았다⁠.

“⁠벗으시오⁠.⁠”

인철은 외투 주머니에서 털 슬리퍼를 꺼내 신고 구두를 문 곁에 나란히 놓았다⁠. 문정숙이 안경을 다시 밀어 올렸다⁠. 김여정은 슬리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인철이 앉자 김여정도 앉았다⁠.

“⁠나는 동무 할아버지의 조카요⁠. 동무는 내 오촌 조카가 되오⁠. 처음 보는 오촌이오⁠.⁠”

“⁠나도 처음 보는 오촌 고모요⁠.⁠”

“⁠고모라고 부르지 마시오⁠. 여기서 그 말은 다른 사람한테 쓰오⁠.⁠”

김여정이 문정숙에게 눈짓했다⁠. 문정숙이 탁자 위에 봉투 하나를 놓았다⁠. 봉투 안에서 비행기 표 한 장이 나왔다⁠. 「⁠평양⁠—베이징 3월 29일 고려항공⁠」⁠, 그리고 베이징에서 프라하까지 가는 표가 한 장 더 붙어 있었다⁠. 이름은 하나였다⁠. 김인철⁠.

“⁠조용히 떠나시오⁠. 려권과 영주권은 비행기 타기 전에 돌려주겠소⁠. 버섯 칼도⁠.⁠”

“⁠버섯 칼까지 아시오⁠?⁠”

“⁠보고서는 다 읽소⁠.⁠”

인철은 표를 집지 않았다⁠.

“⁠할아버지 표도 주시오⁠. 두 장이면 받겠소⁠.⁠”

“⁠할아버지는 이 나라를 떠날 수 없소⁠. 김일성 주석의 아들이오⁠. 아들이 나라 밖에서 늙으면 나라 밖에서 깃발이 되오⁠.⁠”

“⁠결정문에 할아버지 이름을 올리신 분이 할아버지를 지킨다 하시오⁠?⁠”

김여정은 창밖을 보지 않고 인철을 보았다⁠.

“⁠이름을 올려야 이름이 지켜지는 데가 있소⁠. 결정문에 오른 이름은 결정문대로 다스리오⁠. 직책을 거두고⁠, 집을 옮기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오⁠. 그것으로 끝이오⁠. 이름이 안 오르면 밤에 사람이 사라지오⁠. 1970년대가 그랬소⁠. 결정문이 없었으니까⁠.⁠”

“⁠곁가지를 친다고 쓰는 게 지키는 거요⁠?⁠”

“⁠곁가지를 친다고 써야 아무도 곁가지를 들고 나오지 못하오⁠. 동무가 평양에 있으면 늙은이들이 동무를 세우오⁠. 동무를 세우면 군이 둘로 나뉘오⁠. 나뉜 군은 국경부터 흔들리오⁠. 양강도 국경 군단장 자리는 석 달째 비어 있소⁠.⁠”

“⁠나를 세운 사람은 따로 있소⁠. 전보를 친 사람⁠.⁠”

김여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정숙이 손에 쥔 볼펜을 한 번 딸깍였다⁠. 김여정이 봉투를 인철 앞으로 조금 더 밀었다⁠.

“⁠동무는 전차를 몬다 들었소⁠. 전차는 선로 밖으로 못 나가지요⁠.⁠”

“⁠못 나가오⁠. 그래서 종점까지 가오⁠. 종점에서 사람을 다 내리고 돌아오오⁠.⁠”

“⁠여기는 종점이 없소⁠.⁠”

인철은 봉투를 김여정 앞으로 도로 밀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봉투가 탁자 한가운데에 멈췄다⁠.

“⁠한 장은 안 받겠소⁠. 할아버지가 남으면 나도 남소⁠. 할아버지를 두고 가는 건 프라하 사람들도 안 하오⁠.⁠”

김여정이 일어났다⁠. 면담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인철도 일어나 슬리퍼를 벗어 주머니에 넣고 구두를 신었다⁠. 끈을 묶는 동안 김여정은 창가에서 기다렸다⁠. 인철이 고개를 들자 김여정이 말했다⁠.

“⁠한 장은 이 달 말까지 살아 있소⁠. 그 뒤에는 열병식이오⁠.⁠”

탁자 한가운데의 봉투는 문정숙이 거두어 갔다⁠.

*

3월 24일 금요일 오전 열 시⁠, 오혜림은 국가보위성 청사 지하 1층 조사실 3호에서 공책을 펴고 맞은편의 윤설향을 보았다⁠. 장명길이 어제 내린 지시였다⁠. 혜산 사진의 출처를 확인할 증인 진술⁠. 결정문 부록에 붙일 것⁠. 받아 적을 사람은 혜림이었다⁠.

설향은 혜산에서 밤기차로 왔다⁠. 솜 외투의 소매 끝이 기차 석탄 연기에 그을려 있었다⁠. 조사실 쇠 의자에 앉자마자 설향은 혜림의 군복 외투를 위아래로 훑었다⁠.

“⁠대위 동무 외투에 털깃이 없슴다⁠. 하나 달아 드림까⁠? 평양 값 말고 혜산 값으로⁠.⁠”

“⁠증인은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오⁠.⁠”

“⁠기럼 물어보시라요⁠. 빨리 묻고 빨리 보내 주시라요⁠. 동생이 평양 답을 기다림다⁠.⁠”

혜림은 볼펜을 쥐었다⁠. 종이 두 장 사이에 먹지를 끼웠다⁠.

“⁠3월 8일 혜산역 앞 광장에서 본 것을 본 대로 말하시오⁠.⁠”

설향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했다⁠. 오후 다섯 시⁠, 코트 여섯 벌⁠, 맨 앞의 동생⁠, 국숫집 아주머니의 국자⁠, 단속원 최광수의 단추⁠. 그리고 역사 계단 위의 남자⁠.

“⁠혜산 사람이 아님다⁠. 구두가 반짝였슴다⁠. 3월 혜산에서 구두가 반짝이는 사람은 없슴다⁠. 바짓단에 흙도 없었슴다⁠. 사진을 다 찍고 평양 번호판 승용차에 올랐슴다⁠.⁠”

“⁠사진기는 어떤 것이었소⁠?⁠”

“⁠검은 거⁠. 렌즈가 팔뚝만 했슴다⁠. 혜산 사진관에는 없는 물건임다⁠.⁠”

혜림은 받아 적었다⁠. 볼펜을 세게 눌렀다⁠.

“⁠1월 23일 혜산 보위국 조사실에서 본 것도 말하시오⁠.⁠”

설향이 혜림을 보았다⁠. 묻지 않은 것까지 아는 사람의 질문이었다⁠.

“⁠지도원 동지 서랍 위의 전보임다⁠. 첫 줄만 봤슴다⁠. 「⁠평양 지시 — 혜산 사치 풍조 사진 자료를 올려 보낼 것⁠」⁠.⁠”

“⁠3월 12일에 서명한 진술서는⁠?⁠”

설향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멈췄다⁠.

“⁠그거는 동생 내보내 달라고 쓴 거임다⁠. 쓰라는 대로 썼슴다⁠. 광고는 내가 시킨 게 아님다⁠. 동생이 지 혼자 했슴다⁠. 기래도 내가 시킨 걸로 해야 동생이 덜 다친다고 해서 그렇게 썼슴다⁠.⁠”

“⁠지금 한 말을 받아 적으면⁠, 3월 12일 진술서는 거짓 진술서가 되오⁠. 동생 일이 다시 열리오⁠.⁠”

“⁠알고 있슴다⁠.⁠”

설향은 혜림의 볼펜 끝을 보았다⁠.

“⁠대위 동무가 본 대로 말하라고 했슴다⁠. 혜산 사람은 평양 사람이 본 대로 말하라 하면 처음에는 안 믿슴다⁠. 대위 동무는 볼펜을 세게 누르길래 믿었슴다⁠.⁠”

혜림은 마지막 줄까지 받아 적었다⁠. 진술서 끝에 설향이 이름 석 자를 썼다⁠. 3월 12일 혜산에서 쓴 이름과 같은 글씨였다⁠. 혜림은 먹지를 빼어 전등에 비췄다⁠. 「⁠평양 번호판⁠」이 거꾸로 비쳤다⁠.

“⁠진술은 끝났소⁠. 오늘 밤 기차로 돌아가시오⁠.⁠”

“⁠대위 동무⁠.⁠”

설향이 문간에서 돌아보았다⁠.

“⁠동생 소매가 길었슴다⁠. 사진에서 그렇게 보였을 거임다⁠. 내가 코트를 크게 줬슴다⁠. 아직 클 나이라서⁠.⁠”

문이 닫혔다⁠. 혜림은 먹지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여섯 장이 되었다⁠.

*

3월 28일 화요일 오후 네 시⁠, 리학철은 부부장 강성호의 방에서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 세 장을 내려다보았다⁠. 강성호는 찻잔 뚜껑을 손가락으로 들었다 놓았다 했다⁠.

“⁠정치국 결정이다⁠.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102주년 열병식⁠. 김일성광장⁠.⁠”

102주년은 정주년이 아니었다⁠. 다섯 해나 열 해로 끊어지지 않는 해에 열병식을 연다는 것이 결정의 뜻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나라 밖에 보여 주려는 열병식이었다⁠.

“⁠주석단 배치도가 셋 올라왔다⁠.⁠”

첫 장은 총무부 안이었다⁠. 주석단 한가운데 금테 두른 붉은 의자⁠, 의자 오른편에 총무부장 김여정⁠, 왼편에 향도 김주애⁠. 12월 1일 자 1면 사진과 같은 자리였다⁠.

두 번째 장은 선전선동부 안이었다⁠. 한가운데 붉은 의자⁠, 의자 왼편에 향도 김주애 혼자⁠. 김여정의 이름은 둘째 줄 끝에 있었다⁠. 배치도 귀퉁이에 「⁠1면 사진은 향도 동지 단독 구도⁠」라는 연필 글씨가 있었다⁠. 진경훈의 글씨였다⁠.

세 번째 장은 중앙군사위원회 안이었다⁠. 한가운데 붉은 의자⁠, 양옆에 정치국 상무위원과 군 원로들⁠. 김주애의 자리는 상무위원들 뒤였다⁠. 주석단 맨 왼편 끝에 이름 없는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옆에 작게 「⁠손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손님은 누구입니까⁠?⁠”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강성호가 찻잔 뚜껑을 한 번 두드렸다⁠.

“⁠조직지도부는 의견을 내지 않는다⁠. 세 장 다 상무위원회로 올린다⁠. 다만 셋 가운데 어느 것을 맨 위에 놓아 올리는지는 자네가 정한다⁠.⁠”

“⁠맨 위에 놓는 것이 의견이 됩니다⁠.⁠”

“⁠그러니 자네가 정하라는 거다⁠. 내가 정하면 내 의견이 된다⁠.⁠”

학철은 배치도 세 장을 한 장씩 겹쳐 보았다⁠. 세 장 모두 한가운데 붉은 의자의 자리는 같았다⁠. 의자 곁에 누가 서는지만 달랐다⁠. 강성호가 찻잔 뚜껑을 두 번 두드렸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다⁠. 알았나⁠?⁠”

“⁠알았습니다⁠.⁠”

학철은 세 장을 들고 3층 사무실로 내려왔다⁠. 책상 왼편 문건철 열두 개 위에 배치도 세 장을 올려놓았다⁠. 열두 장 위에 세 장이 얹히자⁠, 회색 문건철 맨 위에 붉은 의자 그림 셋이 포개졌다⁠.

*

4월 1일 토요일 저녁 여섯 시⁠, 오혜림은 본부청사 3층 간부과 사무실 문 앞에서 노크를 두 번 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토요일 저녁까지 불이 켜진 방은 간부과 하나였다⁠. 장명길은 3월 24일 진술서를 조직지도부 간부과에 직접 가져다주라고 했다⁠. 결정문 부록 검토가 간부과 과장에게 있다는 것을⁠, 혜림은 3월 9일 문서고에서 받아 든 철 겉장 귀퉁이의 도장에서 이미 읽었다⁠. 「⁠조직지도부 검토 — 간부과 리학철⁠」⁠.

“⁠들어오시오⁠.⁠”

리학철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왼편에 회색 문건철이 쌓였고⁠, 맨 위에 그림이 든 종이 세 장이 얹혀 있었다⁠. 혜림은 경례를 붙이고 봉투 둘을 책상에 놓았다⁠.

“⁠국가보위성 대위 오혜림입니다⁠. 3월 24일 혜산 증인 진술서입니다⁠. 부록 검토에 쓰라는 대좌 동지 지시입니다⁠.⁠”

“⁠알았습니다⁠.⁠”

학철이 첫 봉투를 받았다⁠. 혜림은 두 번째 봉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것은 지시 받지 않은 것입니다⁠.⁠”

학철이 혜림을 보았다⁠. 혜림은 봉투를 열어 먹지 여섯 장을 책상 위에 날짜 순서로 펼쳤다⁠. 검은 종이 위로 사무실 형광등 빛이 번들거렸다⁠.

“⁠제가 처음 쓴 보고서들입니다⁠. 먹지라서 글씨가 거꾸로 남았습니다⁠. 창에 대고 보시면 읽힙니다⁠.⁠”

학철은 1월 13일 장을 들어 창에 댔다⁠. 저녁 해가 남은 하늘이 검은 종이를 비췄다⁠. 「⁠가거라⁠」가 거꾸로 비쳤다⁠. 학철은 한참 먹지를 창에 댄 채 있었다⁠.

“⁠원로 손에 가면 원로가 이것으로 총무부를 칩니다⁠. 총무부 손에 가면 불에 들어갑니다⁠. 대좌 동지 손에 가면 서랍에 들어갑니다⁠. 과장 동지 책상에서는 절차가 됩니다⁠. 검토 의견에 붙여 주십시오⁠.⁠”

“⁠2월 3일 장도 있습니까⁠?⁠”

혜림은 학철이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부록 목록 맨 아래 줄의 출처가 「⁠보위성 대위 보고⁠」였다⁠.

“⁠있습니다⁠. 리정훈 중위의 이름도 제가 썼습니다⁠. 들은 대로⁠, 본 대로 썼습니다⁠.⁠”

학철의 손이 먹지를 창에서 내렸다⁠.

“⁠2월 3일 장을 빼시면 나머지 다섯 장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여섯 장이 다 같은 볼펜 자국이어야 합니다⁠. 같은 손이 같은 힘으로 눌러 쓴 것이어야⁠, 고친 세 장이 다른 손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혜림은 경례를 붙이고 몸을 돌렸다가⁠, 문고리를 잡은 채 한 번 더 말했다⁠.

“⁠아버지 서류를 닫을 도장은 찍지 않았습니다⁠. 찍었으면 이 여섯 장은 오늘 여기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혜림의 구둣발 소리가 계단까지 멀어졌다⁠. 학철은 먹지 여섯 장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회색 문건철 열두 개와 붉은 의자 그림 세 장 곁에서⁠, 검은 종이 여섯 장이 형광등 아래 거꾸로 된 글씨를 품고 있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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