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609자)

형제도 곁가지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2월 26일 일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 리학철은 본부청사 회의장 2층 방청석 맨 끝 줄에서 무릎 위에 공책을 폈다⁠. 방청석은 중앙위원이 아닌 부서 일꾼들이 회의를 지켜보는 자리였다⁠. 말을 할 수 없고 기침도 참아야 하는 자리였다⁠. 아래층에는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이백여 명이 줄을 맞춰 앉아 있었다⁠. 사람마다 앞에 같은 두께의 회의 자료철과 유리컵이 하나씩 놓였다⁠.

주석단은 무대 위의 긴 탁자였다⁠. 흰 천을 덮은 탁자 뒤로 검은 가죽 의자 열 개가 놓였고⁠, 한가운데 하나만 금테 두른 붉은 벨벳 의자였다⁠. 학철의 서랍 속 12월 1일 자 신문 1면 사진에 나온 의자와 같은 의자였다⁠. 붉은 의자 앞에는 명패가 없었다⁠. 마이크 두 대와 물컵 하나가 놓였고⁠, 물컵은 비어 있었다⁠.

주석단 맨 오른편 끝자리에 남색 치마 정장이 앉아 있었다⁠. 김여정이었다⁠. 붉은 의자 바로 오른편 검은 의자에서 조직지도부장 조용원이 일어나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0기 제8차 전원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김정은 동지의 위임에 따라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회의를 집행합니다⁠.⁠”

방청석 앞줄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다⁠. 위임이 누구의 입에서 나와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지는 3주 전 1면 결정서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학철은 공책에 「⁠위임⁠」 두 글자만 썼다⁠.

첫 번째 의정인 인민경제 보고가 사십 분⁠, 두 번째 의정인 국방 보고가 삼십 분 이어졌다⁠. 학철 옆자리의 부과장 최영남은 보고자가 「⁠넘쳐 수행⁠」을 말할 때마다 입술을 같이 움직였다⁠. 아침마다 사설을 보고 말투로 읽는 사람이라⁠, 보고 말투를 들으면 입이 먼저 따라 나갔다⁠. 국방 보고 중간에 최영남의 목에서 기침이 올라왔다⁠. 최영남은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참다가⁠, 아래층에서 박수가 터지는 순간에 모자 안에 대고 기침을 했다⁠. 박수가 끝나자 아무 일 없는 얼굴로 모자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열한 시 십 분⁠, 조용원이 세 번째 의정을 알렸다⁠.

“⁠조직 문제⁠. 결정문 초안은 총무부장 동지가 보고합니다⁠.⁠”

김여정이 주석단 끝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오른편 연단으로 걸어갔다⁠. 구두 굽 소리가 회의장 끝까지 들렸다⁠.

“⁠조직 문제에 대하여⁠.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 장은 간부 사업의 규율에 관한 말이었다⁠. 두 번째 장은 비상시 당 문건이 오가는 길을 총무부 한 곳으로 모은다는 말이었다⁠. 학철은 두 번째 장에서 펜을 멈췄다⁠. 비준이라는 낱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문건 처리⁠」가 다섯 번 나왔다⁠. 세 번째 장 마지막 줄은 1월에 학철이 검토실에서 손가락으로 덮었던 줄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김여정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백두의 혈통을 흐리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며⁠, 김평일 일가의 곁가지는 친다⁠.⁠”

회의장에 소리가 없었다⁠. 아래층 맨 앞줄 군복들 가운데 하나가 탁자 위 군모를 손바닥으로 반 뼘 밀어냈다⁠. 박정천이었다⁠.

“⁠토론할 동지 있습니까⁠?⁠”

조용원이 물었다⁠. 미리 정해 둔 토론자 셋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초안을 지지한다는 원고를 읽고 내려왔다⁠. 네 번째로 박정천이 손을 들었다⁠. 조용원의 손이 마이크 위에서 잠시 멈췄다가 연단을 가리켰다⁠.

박정천은 연단에 종이 한 장을 펴 놓고 읽지 않았다⁠.

“⁠나는 결정문 초안을 지지하오⁠. 곁가지는 쳐야 하오⁠.⁠”

아래층 몇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췄다⁠. 박정천이 말을 이었다⁠.

“⁠다만 나는 늙어서 낱말 뜻부터 묻소⁠. 곁가지가 무엇이오⁠? 줄기에서 옆으로 난 가지요⁠. 백두의 줄기는 김일성 동지에서 김정일 동지로⁠, 김정일 동지에서 김정은 동지로 곧게 올라왔소⁠. 김정일 동지 곁에서 옆으로 난 가지가 김평일이면⁠, 김정은 동지 곁에서 옆으로 난 가지는 무엇이오⁠? 형제요⁠.⁠”

박정천은 주석단 끝을 보지 않았다⁠. 회의장 정면의 초상화만 보았다⁠.

“⁠형제도 곁가지요⁠. 곁가지를 칠 거면 다 쳐야 하오⁠. 한 가지만 골라 치는 건 가지치기가 못 되오⁠. 남의 가지를 쳐서 제 가지를 키우는 거요⁠.⁠”

박정천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연단을 내려왔다⁠. 군화 소리가 계단 셋을 내려와 맨 앞줄 자리에서 멎었다⁠. 박수는 없었다⁠. 학철은 주석단 맨 오른편 끝을 보았다⁠. 김여정은 연단에서 돌아와 앉은 뒤로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자료철을 덮고⁠, 덮은 자료철 위에 펜을 가로로 놓고⁠, 펜 끝을 자료철 모서리에 맞췄다⁠.

조용원이 왼편과 오른편의 상무위원과 머리를 맞댔다⁠. 빈 붉은 의자의 등받이 위로 귓속말이 건너갔다가 건너왔다⁠. 오 분 뒤 조용원이 마이크를 당겼다⁠.

“⁠조직 문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더 연구하여 다음 회의에 다시 제기하기로 합니다⁠. 이의 있는 동지는 손을 드십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학철은 공책에 「⁠미룸⁠」이라고 썼다⁠. 두 자리 건너 진경훈이 자기 공책에 한 줄을 적고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진경훈은 공책을 무릎 위에 반쯤 펼쳐 둔 채 학철을 보았다⁠. 밑줄 친 글자가 보였다⁠. 「⁠형제도 곁가지⁠」⁠.

“⁠우리가 하고 싶던 말을 원로가 해 주셨습니다⁠.⁠”

진경훈이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방청석에서는 말을 하면 안 되었다⁠. 학철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앞을 보았다⁠. 빈 붉은 의자 앞의 물컵에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물을 따르지 않았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오혜림은 외교단 숙소 현관 유리문 안에서 군용 지프의 전조등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김덕수 중좌가 내렸다⁠. 어깨에 마대 자루 하나를 메고 있었다⁠. 혜림은 현관문을 열지 않고 손잡이를 쥔 채 기다렸다⁠. 김덕수가 유리를 손가락 마디로 두 번 두드렸다⁠.

“⁠보위성 허락 없이는 손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만나러 온 게 아니오⁠. 감자를 가져왔소⁠.⁠”

혜림이 문을 반만 열었다⁠. 김덕수가 자루를 현관 바닥에 내려놓았다⁠. 흙 묻은 감자가 자루 아가리로 두어 알 굴러 나왔다⁠. 응접실에서 털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인철이 나와 감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다 뭐요⁠?⁠”

“⁠부위원장 동지께서 보내셨소⁠. 동무가 매점에서 감자 가루를 찾았다고 들었소⁠.⁠”

혜림은 김덕수의 얼굴을 보았다⁠. 감자 가루 이야기는 그저께 매점에서 나왔다⁠. 매점 판매원 송명옥은 감자 가루가 없다며 중국 라면 두 봉지를 내밀었고⁠, 인철은 라면 봉지 뒷면의 조리법을 소리 내어 읽다가 「⁠물 오백 밀리리터⁠」에서 웃었다⁠. 할아버지 크네들리키에 물을 재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혜림은 매점 일을 보고서 두 부에 한 줄씩 적었다⁠. 「⁠감자 가루를 찾음⁠. 없음⁠.⁠」 한 부는 장명길에게⁠, 한 부는 문정숙에게 갔다⁠. 두 부 가운데 하나가 원로의 부관에게까지 읽히고 있었다⁠.

인철이 감자 한 알을 집어 흙을 털었다⁠.

“⁠프라하에서 감자 한 자루를 메고 오는 손님은 장모님밖에 없소⁠.⁠”

“⁠장가를 안 갔다고 들었소⁠.⁠”

“⁠그러니 더 놀랍소⁠.⁠”

김덕수가 웃지 않으려고 턱에 힘을 주었다⁠. 턱이 두 번 떨렸다⁠.

“⁠전할 말이 있소⁠. 오늘 회의에서 동무 할아버지 이름이 든 한 줄이 올라왔다가 내려갔소⁠. 부위원장 동지께서 내리셨소⁠.⁠”

“⁠회의 내용은 신문에 나기 전에는 바깥에서 말할 수 없습니다⁠.⁠”

혜림이 말했다⁠. 김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에는 안 날 말이오⁠. 그러니 지금 하는 거요⁠.⁠”

“⁠누구 이름을 대신 올렸소⁠?⁠”

인철이 물었다⁠. 김덕수는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감자 자루 아가리를 끈으로 다시 묶었다⁠. 매듭이 두 번 감겼다⁠.

“⁠다음 회의 때까지 평양을 떠나지 마오⁠. 부위원장 동지 말씀이오⁠.⁠”

“⁠손님 일정은 보위성이 정합니다⁠.⁠”

“⁠오늘 회의장에서 보위상 동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소⁠. 보위성은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오⁠.⁠”

김덕수가 경례를 붙이고 나갔다⁠. 지프 전조등이 다시 켜졌다가 문수동 거리로 사라졌다⁠. 인철은 자루 끈을 쥐고 들어 올려 보았다⁠.

“⁠이십 킬로는 되겠소⁠. 할아버지 크네들리키를 백 번은 하겠소⁠.⁠”

“⁠할아버지 댁 방문은 다음 주 화요일입니다⁠. 허락이 나면⁠.⁠”

“⁠허락이 안 나면⁠?⁠”

“⁠감자는 숙소 부엌에 두십시오⁠. 썩기 전에⁠.⁠”

인철이 웃었다⁠. 혜림은 웃지 않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혜림은 보고서 용지 두 장 사이에 먹지를 끼우고 오늘 밤의 말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썼다⁠. 「⁠부위원장 동지께서 내리셨소⁠.⁠」 「⁠누구 이름을 대신 올렸소⁠?⁠」 「⁠대답 없음⁠.⁠」 다 쓰고 나서 먹지를 빼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안주머니의 먹지가 다섯 장이 되었다⁠. 현관 바닥에는 감자 자루가 벽에 기대 있었고⁠, 자루 아가리의 매듭은 군대식으로 단단했다⁠.

*

2월 27일 월요일 오전 열한 시⁠, 리학철은 금수산 특각 병실 앞방에 혼자 불려 갔다⁠. 문정숙은 복도에서 학철의 외투를 받아 들고⁠, 앞방 문을 밖에서 닫았다⁠. 앞방은 1월보다 덥지 않았다⁠. 방열기 하나가 꺼져 있었다⁠. 하얀 문 너머의 기계 소리는 1월과 같은 간격으로 울었다⁠.

김여정은 창가에 있지 않았다⁠. 하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제 회의장과 같은 남색 치마 정장이었다⁠.

“⁠리 과장⁠, 이리 오시오⁠.⁠”

학철은 양탄자 끝에서 세 걸음을 걸었다⁠. 김여정이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한 뼘 열었다⁠. 기계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학철은 문틈으로 하얀 커튼과 하얀 벽과 침대 머리맡의 작은 탁자를 보았다⁠. 탁자 위에 돋보기안경 하나와 뚜껑 닫힌 만년필 한 자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만년필 옆에 문건 받침판이 비어 있었다⁠. 간호원 한 사람이 등을 보인 채 기계 화면의 숫자를 공책에 옮겨 적었다⁠. 학철은 침대 위를 보지 않았다⁠. 눈을 탁자에 두었다⁠.

김여정이 문을 닫았다⁠. 기계 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어제 박 부위원장 말 들었소⁠?⁠”

“⁠예⁠. 방청석에서 들었습니다⁠.⁠”

“⁠형제도 곁가지라⁠. 맞는 말이오⁠. 나는 곁가지요⁠. 그래서 문 앞에 서 있는 거요⁠. 줄기에 손이 닿는 데가 문 앞밖에 없으니까⁠.⁠”

“⁠총무부장 동지⁠. 열두 장은⁠…⁠.⁠”

“⁠열두 장 이야기 하려고 부른 게 아니오⁠. 과장 인사 문건을 읽었소⁠. 2014년 가을⁠, 함흥에서 손을 안 들었다지⁠.⁠”

학철의 손이 바짓단 솔기를 찾았다⁠. 스무 해 전 가을이 떠올랐다⁠. 2014년 10월 초⁠, 함흥의 함경남도당 회의실이었다⁠. 스물여섯 살 지도원 리학철은 맨 뒷줄에 앉아 있었다⁠. 김정은이 인민 앞에 나서지 않은 지 서른 날을 넘긴 날이었다⁠. 도당 조직비서가 김정은 원수님께서 곧 다시 인민 앞에 나서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동무는 손을 들라고 했다⁠. 서른 사람이 손을 들었다⁠. 학철은 손을 들지 않았다⁠. 모르는 일에 손을 들 수 없다고 말했다⁠. 열흘쯤 뒤 김정은이 지팡이를 짚고 신문 1면에 나왔다⁠. 학철의 평양 전근은 한 해 늦춰졌다⁠. 평양에 올라온 뒤로 학철은 무슨 말을 듣든 「⁠알았습니다⁠」를 먼저 말했다⁠. 손을 들어야 하는 자리에서 손을 늦게 드는 일은 다시 없었다⁠.

“⁠과장은 이번에는 손을 들고 있소⁠. 89일째⁠. 돌아오신다에⁠.⁠”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두 장을 내보내지 않은 까닭이 절차라고 학철은 여든아홉 날 동안 말해 왔다⁠. 절차 밑에 무엇을 깔고 있었는지 김여정이 대신 말했다⁠.

“⁠그러면 누가 쥡니까⁠?⁠”

“⁠과장이 쥐지 않으면 아이 뒤의 손들이 쥐고⁠, 늙은이들이 쥐면 곁가지 손자를 쥐오⁠. 나는 쥐겠다고 말하는 거요⁠. 문 앞에서⁠.⁠”

김여정은 하얀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김정은 동지는 다시 펜을 쥐지 못하오⁠. 오른손이오⁠. 의사들이 사흘째 아침에 말했소⁠. 나는 사흘째부터 알았소⁠.⁠”

복도로 나오자 문정숙이 외투를 건넸다⁠. 안주머니에 학철의 볼펜이 심을 내민 채 꽂혀 있었다⁠. 학철은 볼펜 머리를 엄지로 눌러 심을 집어넣었다⁠. 딸깍 소리가 복도에 크게 났다⁠. 등 뒤의 하얀 문 너머에서는 기계가 같은 간격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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