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22자)

조사실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1월 23일 월요일 아침 열 시⁠, 김인철은 국가보위성 청사 지하 1층 조사실 3호의 쇠 의자에 앉아 외투 주머니에서 털 슬리퍼를 꺼냈다⁠. 바닥은 시멘트였고 방열기는 꺼져 있었다⁠. 탁자 다리는 바닥에 나사로 박혀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대좌 장명길이 앉아 있었고⁠, 벽 곁 작은 탁자에 혜림이 공책을 펴고 앉아 있었다⁠.

“⁠신어도 되오⁠?⁠”

“⁠여기는 손님방이 아니오⁠.⁠”

“⁠그래서 묻는 거요⁠. 손님방이면 안 묻고 신었소⁠.⁠”

장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철은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구두 두 짝을 의자 밑에 나란히 놓았다⁠. 혜림의 볼펜이 공책 위에서 한 번 멈췄다가 움직였다⁠.

“⁠프라하에서 누구와 사오⁠?⁠”

“⁠고양이하고 사오⁠. 이름이 슈베이크요⁠.⁠”

“⁠무슨 뜻이오⁠?⁠”

“⁠체코 소설에 나오는 병사 이름이오⁠. 시키는 대로 다 하다가 다 망치는 병사요⁠. 고양이도 시키는 대로 다 하오⁠. 밥 달라면 밥 주고 나가라면 나가오⁠. 그리고 소파를 다 망쳤소⁠.⁠”

장명길의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혜림은 공책에 「⁠고양이 슈베이크⁠」라고 쓰고 다음 줄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장명길이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었다⁠. 공항에서 맡긴 휴대전화의 내용을 옮겨 친 목록이었다⁠. 지도 앱⁠, 프라하 교통공사 근무표 앱⁠, 버섯 도감 앱⁠, 그리고 영상 앱 하나⁠. 영상 앱 밑에 본 것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체코 경찰 드라마⁠, 미국 요리 경연⁠, 그리고 남조선 드라마 다섯 편⁠.

“⁠이 다섯 편은 무엇이오⁠?⁠”

“⁠체코 사람들도 다 보는 거요⁠. 전차 정비소 아주머니가 추천해 줬소⁠. 울면서 봤다고⁠.⁠”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아오⁠? 남조선 영화와 드라마를 보거나 퍼뜨리면 엄하게 다스리는 법이오⁠.⁠”

“⁠프라하에서는 체코 법을 따르오⁠.⁠”

“⁠려권은 공화국 려권이오⁠.⁠”

인철은 입을 다물었다⁠. 프라하에서 읽은 유럽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2024년 한국 통일부가 낸 북한인권보고서를 옮긴 기사였다⁠. 2022년 황해남도에서 남한 노래 일흔 곡과 영화 세 편을 보고 퍼뜨린 스물두 살 청년이 공개 처형됐다는 증언이 실려 있었다⁠. 기사를 읽던 날 인철은 22번 전차 운전석에서 점심 샌드위치를 먹다 말았다⁠.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지금은 려권에 적힌 나라 이야기였다⁠.

장명길이 종이 두 장을 더 꺼내 나란히 놓았다⁠. 타자기로 친 진술서였다⁠.

「⁠나는 군 원로들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왔다⁠」

「⁠나는 할아버지 김평일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왔다⁠」

“⁠하나에 서명하오⁠. 둘 다 동무 말과 다르지 않을 거요⁠.⁠”

“⁠둘 다 다르오⁠.⁠”

“⁠어디가 다르오⁠?⁠”

“⁠원로들은 나를 부른 적이 없소⁠. 만경대에서 기다렸을 뿐이오⁠. 할아버지는 전보를 보내지 않았다고 했소⁠.⁠”

“⁠그럼 누가 불렀소⁠?⁠”

인철은 진술서 밑의 빈 종이를 끌어당겨 볼펜을 쥐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획순대로 또박또박 썼다⁠.

「⁠나는 전보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왔다⁠. 김인철⁠」

장명길이 종이를 들어 읽었다⁠. 처음으로 눈썹이 움직였다⁠.

“⁠전보는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전보를 조사하시오⁠. 나는 사람이라 여기 앉아 있소⁠.⁠”

“⁠만경대에서 부위원장 동지가 동무에게 앞에 서라고 했소⁠?⁠”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리켰소⁠. 나는 한 걸음만 갔소⁠. 사진기는 기다리지 않았소⁠.⁠”

“⁠한 걸음은 왜 갔소⁠?⁠”

“⁠빈자리를 보면 앉고 싶은 게 전차 운전사 버릇이오⁠. 종점에서 승객이 다 내리면 빈자리가 쉰 개요⁠. 나는 한 번도 안 앉았소⁠. 운전석이 따로 있으니까⁠.⁠”

장명길은 인철이 쓴 종이를 진술서 두 장 위에 올려놓고 서류철을 덮었다⁠.

“⁠동무는 숙소로 가오⁠. 대위는 남으라⁠.⁠”

인철은 슬리퍼를 벗어 외투 주머니에 넣고 구두를 신었다⁠. 끈을 묶는 동안 혜림의 볼펜이 끝까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인철은 혜림이 공책 맨 아래에 무엇을 쓰는지 보지 못했다⁠.

*

같은 날 오후 세 시⁠, 윤설향은 양강도 보위국 조사실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혜산역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의 회색 건물이었다⁠. 창밖으로 압록강 얼음이 보였고⁠, 얼음 건너 장백의 아파트 꼭대기에 붉은 중국 글자 간판이 붙어 있었다⁠. 조사실 난로에는 석탄이 반쯤 타고 있었다⁠.

지도원 조영수가 탁자 위에 종이 열몇 장을 늘어놓았다⁠. 82연합지휘부가 성민의 손전화 기록철에서 뽑은 사진들이었다⁠. 오 분마다 저절로 찍힌 화면들이 시간 순서로 놓여 있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에 성민이 있었다⁠. 코트 털깃을 세우고 턱을 들고 뒷짐을 진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코트는 어디서 들여오오⁠?⁠”

“⁠장백 공장임다⁠.⁠”

“⁠공장 이름은⁠?⁠”

“⁠이름은 없슴다⁠. 재봉틀 스무 대 있는 이층집임다⁠. 조선족 재단사가 하오⁠.⁠”

“⁠돈은 누가 대오⁠?⁠”

“⁠내 돈임다⁠.⁠”

“⁠동무 매대 하나로 코트 쉰 벌 값이 나오오⁠?⁠”

설향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폈다⁠. 손가락 끝마다 재봉선 자국처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여름 내내 중국 라면하고 콩기름 팔아 모은 돈임다⁠. 겨울 장사는 원래 옷임다⁠.⁠”

조영수는 설향의 손가락을 보다가 다음 종이를 넘겼다⁠.

“⁠사 가는 사람은⁠?⁠”

“⁠혜산 청년들하고⁠, 평양 손님들임다⁠.⁠”

“⁠평양 손님 이름은⁠?⁠”

“⁠이름은 모름다⁠. 써비차가 주문 종이를 들고 오고⁠, 돈은 써비차가 받아다 줌다⁠. 털깃 달린 걸 찾는 집 딸들이라는 것만 앎다⁠.⁠”

“⁠간부 집 딸들이오⁠?⁠”

“⁠간부 집인지 아닌지는 털깃이 말해 주지 않슴다⁠.⁠”

조영수가 성민의 거울 사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 동무는 누구 흉내를 냈소⁠?⁠”

“⁠코트 광고임다⁠. 내가 시켰슴다⁠.⁠”

“⁠광고에 뒷짐을 지오⁠?⁠”

“⁠뒷짐을 져야 털깃이 서 보임다⁠. 지도원 동지도 입어 보시면 앎다⁠. 최광수 지도원 동지는 아직 안 벗었다던데요⁠.⁠”

조영수의 귀 끝이 붉어졌다⁠. 문밖에서 누가 기침을 했다⁠. 조영수는 사진들을 모아 탁자에 두 번 쳐서 가지런히 하더니⁠, 책상 서랍에 넣으려다 말고 맨 위에 놓인 전보 종이를 뒤집어 덮었다⁠. 설향은 뒤집히기 전의 첫 줄을 보았다⁠. 「⁠평양 지시 — 혜산 사치 풍조 사진 자료를 올려 보낼 것⁠」⁠.

“⁠위에서 답이 내려오면 다시 부르겠소⁠. 그때까지 코트는 팔지 마오⁠.⁠”

“⁠팔지 말라는 게 위에서 내려온 답임까⁠?⁠”

“⁠내가 하는 말이오⁠.⁠”

“⁠지도원 동지 말이면 장사해도 됨다⁠. 위에서 답이 내려오면 그때 멈추갔슴다⁠.⁠”

설향은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 나왔다⁠. 복도 끝 창으로 압록강이 보였다⁠. 얼음 위 한가운데⁠, 국경을 지키는 초소 앞을 사람 하나가 보따리를 지고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다⁠. 초소는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리학철은 평양 중구역 아파트 6층 부엌 식탁에서 마지막 김장김치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아내 김선희가 단지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어 배추 두 잎을 건져 올렸다⁠.

“⁠조직지도부 다니는 남편은 일을 가방에 넣어 와요⁠. 돌을 넣어 오는 것처럼 무거워요⁠.⁠”

“⁠가방은 비었소⁠.⁠”

“⁠얼굴에 넣어 왔잖아요⁠.⁠”

현관문이 열리고 아들 리정훈이 들어왔다⁠. 호위사령부 군복 위에 사복 외투를 걸쳤다⁠. 월요일 밤은 비번이었다⁠. 스물네 살⁠, 아버지보다 한 뼘 컸고 어깨가 넓었다⁠. 정훈은 모자를 벗자마자 김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고⁠, 어머니에게 손등을 맞았다⁠.

셋이 밥을 먹는 동안 정훈은 사격 표창 이야기를 했다⁠. 다섯 발에 마흔여덟 점⁠, 향도 동지께서 이름을 직접 부르셨다고⁠. 학철은 이미 들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들었다⁠. 밥그릇이 반쯤 비었을 때 정훈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열두 장⁠, 향도 동지 서명으로 내보내십시오⁠.⁠”

“⁠누가 그 말을 너한테 시켰냐⁠?⁠”

“⁠시킨 사람 없습니다⁠. 향도 동지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도 살고 우리도 삽니다⁠.⁠”

“⁠우리가 누구냐⁠?⁠”

“⁠향도 동지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너는 경호원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정훈의 얼굴이 굳었다⁠. 김선희가 김치 단지를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아버지는 문 앞에도 안 서고 책상 뒤에만 계십니다⁠. 책상 뒤에서 마흔 날 넘게 종이만 쌓고 계십니다⁠.⁠”

“⁠종이가 쌓이는 동안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국경 군단은 다치고 있습니다⁠. 압록강에 보따리가 오가는 거 다 압니다⁠.⁠”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들이 국경 군단 이야기를 아는 까닭을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으면 아들이 대답할 것이고⁠, 대답 속에 누구의 이름이 들어 있을지 학철은 짐작이 갔다⁠.

“⁠아버지가 그 종이를 놓지 않으시면⁠, 향도 동지 곁 사람들이 아버지를 곁가지 편으로 볼 겁니다⁠.⁠”

김선희가 숟가락으로 단지 바닥을 다시 긁었다⁠. 쇠가 사기에 닿는 소리가 길게 났다⁠. 건질 김치는 더 없었다⁠.

“⁠둘 다 먹어라⁠. 마지막 김치다⁠.⁠”

정훈이 외투를 집어 들었다⁠. 현관에서 군화를 신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다음 주에 향도 동지 곁 분을 모시고 바깥에 나갈 일이 있습니다⁠. 어디인지는 말씀 못 드립니다⁠.⁠”

문이 닫혔다⁠. 학철은 아들이 남기고 간 밥그릇을 끌어당겨 남은 밥에 김치 국물을 부었다⁠.

*

1월 24일 화요일 아침 아홉 시⁠, 오혜림은 보위성 청사 5층 장명길의 방에서 어제 조사실 보고서를 두 부 내밀었다⁠. 먹지는 안주머니에 있었다⁠. 보고서 마지막 줄에는 인철이 쓴 한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나는 전보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왔다⁠」⁠.

장명길은 보고서를 읽지 않고 책상 한편에 밀어 두었다⁠. 대신 누런 봉투에서 사진 다섯 장을 꺼내 혜림 앞에 펼쳤다⁠.

혜산역 앞 광장이었다⁠. 털깃 단 검은 가죽코트를 입은 청년 일곱이 한 줄로 서서 뒷짐을 지고 턱을 들고 있었다⁠. 맨 오른편 청년은 코트가 커서 소매가 손가락 끝까지 내려왔다⁠. 다른 사진에는 같은 청년이 거울 앞에 혼자 서 있었다⁠. 손전화가 오 분마다 저절로 찍어 둔 화면이었다⁠. 사진 아래 연필 글씨가 있었다⁠. 「⁠윤성민⁠, 20세⁠, 청년동맹 돌격대원⁠」⁠.

“⁠곁가지 손자 다음은 이거다⁠.⁠”

“⁠혜산 청년들이 코트를 입은 사진입니다⁠.⁠”

“⁠향도 동지가 입은 코트다⁠. 혜산 장마당에서 베껴 판다⁠.⁠”

“⁠사치 풍조로 보는 겁니까⁠, 충성으로 보는 겁니까⁠?⁠”

장명길이 사진 한 장을 손가락으로 집어 혜림 앞으로 돌렸다⁠. 맨 오른편⁠, 소매가 긴 청년이었다⁠.

“⁠오늘 오후에 이 사진들이 평양 두 곳으로 올라간다⁠. 한 벌은 총무부로⁠, 한 벌은 선전선동부로⁠. 한 곳은 사치라고 쓰고 한 곳은 충성이라고 쓸 거다⁠. 같은 사진이다⁠.⁠”

“⁠보위성은 무엇이라고 씁니까⁠?⁠”

“⁠보위성은 보낸 시각을 쓴다⁠.⁠”

장명길은 사진을 봉투에 도로 넣었다⁠. 봉투 입구를 침으로 붙이며 덧붙였다⁠.

“⁠어제 조사실 진술은 없는 걸로 한다⁠. 서명 안 한 진술서는 없는 진술서다⁠.⁠”

“⁠김인철이 쓴 문장은 있습니다⁠. 서명도 했습니다⁠.⁠”

“⁠전보가 불렀다는 문장 말이냐⁠.⁠”

“⁠예⁠.⁠”

“⁠그건 진술이 아니라 농담이다⁠.⁠”

혜림은 경례를 붙이고 나왔다⁠. 복도 창문에 성에가 끼어 있었다⁠. 혜림은 손가락으로 성에를 긁어 작은 구멍을 냈다⁠. 구멍 너머로 청사 마당에 대기 중인 승용차 두 대가 보였다⁠. 한 대는 총무부로⁠, 한 대는 선전선동부로 갈 것이었다⁠. 소매가 손가락 끝까지 내려온 청년의 얼굴이 혜림의 눈에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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