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6,327자)
41일째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제목: 41일째 훅: 비준 없는 임명 문건 열두 장이 쌓인 아침, 프라하에서 온 손자가 털 슬리퍼를 들고 순안공항에 내렸다. 요약: 2034년 1월 10일, 김정은이 공개 활동을 멈춘 지 41일째. 조직지도부 간부과 과장 리학철은 비준 없는 임명 문건 열두 장을 들고 금수산 특각에 불려 가, 김여정이 자기 이름으로 비준을 대신하겠다는 요구를 거절한다. 같은 날 김평일의 손자 김인철이 프라하에서 순안공항에 내려 국가보위성 대위 오혜림에게 여권과 버섯 칼을 맡기고, 혜산 장마당에서는 윤설향이 털깃 단 검은 가죽코트를 판다. --- 2034년 1월 10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리학철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 3층 조직지도부 간부과 사무실에 들어가 외투도 벗지 않고 책상 서랍부터 열었다. 서랍 안에는 지난해 12월 1일 자 노동신문이 비닐에 싸여 있었다. 1면 한가운데 사진에서 검은 인민복 차림의 김정은이 금테 두른 붉은 벨벳 의자 뒤에 서 있었고, 왼편에는 털깃 단 검은 가죽코트의 김주애가, 오른편에는 남색 치마 정장의 김여정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대동강 기슭 새 살림집 준공식이었다. 사진이 실린 뒤로 1면에 김정은의 새 사진은 한 장도 오르지 않았다.
학철은 날짜를 손가락으로 세지 않았다. 세지 않아도 알았다. 2014년 가을, 김정은은 9월 3일부터 10월 14일까지 41일 동안 모습을 감췄다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2014년의 학철은 스물여섯 살, 함경남도 도당의 지도원이었다. 지팡이 사진이 실린 날 도당 사무실 사람들은 신문을 돌려 보며 소리 없이 손뼉을 쳤다. 오늘은 41일째였다. 오늘이 지나면 2014년보다 긴 날이 시작된다.
책상 왼편에 회색 문건철 열두 개가 쌓여 있었다. 양강도와 함경북도와 자강도의 도당 책임비서, 성 부상 둘, 군단장 셋, 나머지는 도 인민위원장과 공장 지배인이었다. 맨 위 문건은 양강도 국경을 맡은 군단의 군단장 자리였다. 전임 군단장은 11월에 비리로 물러났다. 열두 장 모두 맨 아래 김정은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하얬다. 김정은이 문건에 이름을 써서 허락하는 비준이 없으면 임명장은 종이였다. 비준 없는 임명장을 받고 짐을 싸는 간부는 없었고, 그런 간부를 받아 주는 도당도 없었다.
부과장 최영남이 들어와 노동신문을 펼치더니 늘 하던 대로 보고 말투로 읽었다.
“오늘 사설 제목은 「새해 진군의 보폭을 더 크게」입니다. 다 읽었습니다. 1면 아래 귀퉁이 사진은 향도 동지께서 평양산원 새 병동을 찾으신 사진입니다. 날씨는 영하 19도입니다. 이상입니다.”
“사설은 읽었다고만 하지 말고 읽으라.”
“알았습니다. 다음 날부터 읽겠습니다.”
학철은 신문을 받아 귀퉁이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김주애 혼자였다. 호칭은 「향도」였다. 앞길을 밝혀 이끈다는 뜻으로, 수령과 후계자에게만 붙이던 말이었다. 2023년 2월 신문은 김주애를 「존경하는 자제분」이라 불렀고, 2024년 봄에는 부녀를 「향도의 위대한 분들」이라 불렀다. 이제는 이름 앞에 「향도」 두 글자만 붙어 있었다.
여덟 시 오 분, 책상 전화가 울렸다. 총무부 과장 문정숙이었다. 총무부는 당 내부 문건이 오가는 길을 맡은 부서였다.
“총무부장 동지께서 특각에서 찾으십니다. 열두 장 다 가지고 오십시오.”
*
같은 날 오전 열 시 이십 분, 학철은 금수산 특각 병실 앞방의 양탄자 끝에 서 있었다. 특각은 김정은이 머무는 별장이었다. 앞방은 난방이 세서 외투 속이 금세 젖었다. 안방으로 이어지는 하얀 문은 닫혀 있었고, 문 너머에서 기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짧게 울었다. 문정숙이 은 줄 달린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문건철 열두 개를 받아 탁자에 줄 맞춰 놓았다.
김여정은 창가에 서 있었다. 남색 치마 정장이었다. 창밖 소나무에 눈이 얹혀 있었고, 김여정은 눈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리 과장, 앉으시오.”
“서서 말씀 듣겠습니다.”
“열두 장, 내 이름으로 내보내시오. 총무부장 대리 비준. 문 과장이 도장 자리를 만들어 두었소.”
문정숙이 맨 위 문건을 펼쳐 보였다. 김정은의 이름이 들어갈 자리 옆에 연필로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네모 안에 작게 「대리」라고 쓰여 있었다.
“총무부장 동지. 간부 임명 문건에는 김정은 동지의 비준만 오릅니다. 다른 이름이 든 임명장은 도당에서 받지 않습니다.”
“받게 하면 되지 않소?”
“받게 하는 것이 조직지도부 일이라서 말씀드립니다. 이름이 바뀌면 지방에서는 다음 이름이 누구인지부터 묻습니다. 묻기 시작하면 아무도 짐을 안 쌉니다.”
김여정이 탁자로 다가왔다. 문건을 넘기지 않고 손바닥으로 덮었다.
“스물한 살을 앞에 세우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오? 군이 아이 뒤에 서고 보위성이 아이 옆에 서오. 그다음에는 아이를 방패로 삼아 나라를 썰어서 나눠 먹소. 나는 그걸 막겠다는 거요. 비준은 손이 하는 일이고, 손이 비면 누군가 채워야 하오.”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방 문 너머에서 기계가 또 울었다. 학철은 기계가 몇 번 우는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향도 동지 경호대에 아드님이 있지요. 리정훈 중위.”
김여정은 다른 말 없이 이름만 말했다. 학철의 손이 바짓단 솔기를 찾아 쥐었다.
“예. 있습니다.”
“래일이면 42일째요. 래일 다시 오시오. 열두 장 다 가지고.”
학철은 문건철을 다시 품에 안았다. 문정숙이 연필 네모를 지우개로 지우지 않고 그대로 덮어 건넸다. 복도로 나오는 동안 등 뒤에서 기계 소리가 따라왔다.
*
같은 날 오후 두 시 십 분, 국가보위성 대위 오혜림은 순안공항 도착장 유리벽 앞에서 종이 한 장을 다시 읽었다. 국가보위성은 주민과 간부를 감시하고 간첩을 잡는 기관이었고, 혜림은 오늘부터 손님 한 사람의 안내원이었다. 종이에는 프라하의 대사관이 보낸 전보가 옮겨 적혀 있었다.
「스물아홉 살 남자, 큰 키에 마른 몸, 이마를 덮는 검은 머리, 가는 눈매에 은테 안경, 짙은 회색 유럽식 울 코트에 남색 목도리, 손에 낡은 갈색 가죽 여행 가방」
베이징에서 온 고려항공 비행기의 손님들이 짐 검사대를 지나왔다. 중국 상인 셋, 러시아 사람 둘, 그리고 종이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남자 하나였다. 남자는 국경 경비병 앞에서 여권을 돌려받더니 고개를 숙였다.
“동무, 수고하였소.”
경비병이 눈을 끔벅였다. 혜림은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탄광 마을의 늙은 당 비서가 회의 끝에나 하던 말씨였다. 혜림은 유리문을 밀고 나가 남자 앞으로 갔다.
“김인철 동무입니까?”
“그렇소. 동무는 누구시오?”
“안내원 오혜림입니다. 려권과 손전화를 맡겠습니다. 평양에 계시는 동안 쓸 손전화는 따로 드립니다.”
인철은 여권과 휴대전화를 건넸다. 체코 영주권 카드가 여권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혜림은 가방을 열어 보겠다고 했고, 인철은 순순히 걸쇠를 풀었다. 맨 위에 회색 털 슬리퍼 한 켤레가 비닐에 싸여 있었다. 슬리퍼 밑에서 접이칼 하나가 나왔다. 손잡이 끝에 짧은 솔이 달려 있었다.
“이건 맡겠습니다.”
“그건 무기가 아니오. 버섯 캐는 칼이오. 흙 털라고 솔도 달렸소.”
“평양 공원에는 버섯이 없습니다.”
“1월에는 어디에도 없소. 그래도 가지고 다니오. 프라하 사람은 다 그렇소.”
혜림은 칼을 비닐봉지에 넣고 봉지 입구를 두 번 접었다. 인철은 봉지가 혜림의 외투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 같은 눈이었다.
주차장 바람이 뺨을 베었다. 혜림이 검은 승용차 뒷문을 열자 인철은 타지 않고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거요?”
“숙소가 먼저입니다. 할아버지 일정은 위에서 정합니다.”
“전보에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쓰여 있었소. 곧 오라고.”
“전보는 전보고 일정은 일정입니다.”
“그럼 일정이 정해질 때까지 여기 서 있겠소.”
혜림은 문을 연 채 기다렸다. 영하 19도였다. 인철의 남색 목도리 끝이 바람에 날렸고, 안경알에 입김이 서렸다가 지워졌다. 일 분이 지나자 혜림이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손자가 공항 주차장에서 얼어 죽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인철은 안경을 벗어 목도리 끝으로 닦고 차에 올랐다. 차가 순안 길을 달리는 동안 가로수 버드나무들이 잎 하나 없이 늘어서 있었다. 시내 어귀에서 붉은 전차 한 대가 차 옆을 지나갔다. 인철이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타트라 같소.”
“무엇입니까?”
“내가 몰던 전차하고 닮았소. 프라하 22번.”
혜림은 「전차 운전사」라는 낱말을 머릿속 보고서 첫 줄에 올렸다.
*
같은 날 오후 세 시, 양강도 혜산 장마당 옷 매대 줄 끝에서 윤설향은 철사 옷걸이에 걸린 검은 가죽코트의 털깃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장마당은 나라가 허락한 종합시장과 둘레의 노점을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었다. 매대 뒤로 얼어붙은 압록강이 하얗게 누워 있었고, 강 건너 중국 장백의 아파트 창들이 한낮인데도 번들거렸다.
매대 기둥에는 노동신문 1면 사진이 비닐에 싸여 붙어 있었다. 금테 의자 왼편에 선 김주애의 코트, 털깃의 높이와 단추 넷의 간격을 장백 공장 재단사에게 보여 주려고 오려 낸 것이었다. 설향은 사진의 얼굴이 접히지 않게 비닐을 두 겹으로 쌌다. 어머니가 가르친 대로였다.
세 시 정각, 시장관리원 박옥순이 손바닥만 한 수첩을 들고 매대 줄을 따라왔다. 옥순은 도 상업관리소 부소장의 아내였다. 시장관리원 자리는 혜산에서도 간부 아내들 차지였다. 오후 세 시면 매대에 내건 물건 값의 십 퍼센트를 장세로 걷었다.
“설향이, 오늘 몇 벌 걸었니?”
“세 벌임다.”
“세 벌인데 옷걸이 밑에 보따리는 왜 불룩하니?”
“거는 내 도시락임다.”
“도시락이 털깃을 달았구나야.”
옥순은 수첩에 세 벌을 적고 설향이 내민 중국 돈을 손가락으로 세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넣고 나서 코트 소매를 한 번 쓸어 보았다. 소매에서 손을 떼는 데 시간이 오래 들었다.
“우리 집 딸 시집갈 때 하나 남겨 두라.”
“남겨 두면 장세는 빼 주심둥?”
“말 같은 소리를 하라.”
옥순이 지나가자 청년 둘이 매대 앞으로 왔다. 하나가 코트를 걸쳐 보더니 뒷짐을 지고 턱을 들었다. 열병식 주석단 사진에서 본 자세였다. 다른 하나가 낄낄거렸다.
“얼마임까?”
“육백오십 위안.”
“육백.”
“육백오십. 털깃 값이 오십임다. 털깃 빼면 육백에 주갔소.”
“털깃 빼면 무슨 맛임까?”
“기래서 사겠슴둥, 말겠슴둥?”
청년들이 돈을 모으는 사이 붉은 완장을 찬 남자가 매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82연합지휘부 단속원 최광수였다. 82연합지휘부는 2021년 여름 109상무를 비롯한 단속 조직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검열 조직이었다. 광수는 기둥의 신문 사진과 옷걸이의 코트를 번갈아 보았다.
“설향 동무. 향도 동지 옷을 베끼는 거이 충성이오, 불경이오?”
“지도원 동지가 정해 주시라요.”
“내가 정할 수 있으면 벌써 정했지. 위에 물었소. 아직 답이 안 내려왔소.”
“답 내려오면 알려 주시라요. 기때까지는 장사임다.”
광수가 코트 단추를 하나 풀었다 채웠다. 청년 하나가 귀엣말을 했다. 요즘 강 건너가 헐렁하다고, 국경 군단장 자리가 비어서 경비대 소대장들이 중국 돈만 보면 눈을 감는다고. 설향은 들은 척하지 않고 육백오십 위안을 세어 받았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사십 분, 김인철은 문수동 외교단 숙소 4층 방 문턱에서 구두를 벗고 회색 털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외교단 숙소는 평양에 머무는 외국 손님과 대사관 사람들이 묵는 건물이었다. 방바닥은 난방이 미지근했고, 창밖 대동강은 얼음 위에 가로등 불빛만 띄워 놓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조선중앙텔레비죤이 지난해 가을의 현지 지도 기록 영화를 다시 틀었다. 검은 인민복의 김정은이 공장 기계 앞에서 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켰고, 화면 귀퉁이에는 날짜가 없었다. 인철은 소리를 끄고 가방에서 전보를 꺼냈다. 프라하 대사관 직원이 아파트까지 들고 온 전보였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곧 오너라. 김평일」
열네 살에 프라하 공항에서 헤어진 뒤로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글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인철은 전보 종이를 다시 접어 슬리퍼 옆에 놓았다.
밤 열 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군복 차림의 중좌 하나가 털모자를 벗어 들고 서 있었다. 견장 위에 눈이 녹고 있었다.
“김인철 동무. 중앙군사위원회 박정천 부위원장 동지께서 래일 아침 여덟 시 반, 만경대에서 기다리십니다.”
“할아버지는 오시오?”
“할아버지 일도 그 자리에서 말씀하실 겁니다.”
복도 끝 방문이 열리고 혜림이 나왔다. 외투를 벗은 군복 차림이었다.
“안내원 허락 없이 손님 방을 찾으면 안 됩니다.”
중좌는 혜림을 내려다보았다.
“대위 동무. 부위원장 동지의 허락이 안내원 허락보다 높소.”
혜림은 대답하지 않고 중좌의 견장을 보았다. 인철은 문턱에 선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털 슬리퍼 앞코가 문턱 밖 복도 바닥에 닿아 있었다. 인철은 슬리퍼를 한 뼘 뒤로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