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883자)
프라하행 표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5월 6일 토요일 오후 네 시, 김인철은 보통강 기슭 아파트 9층 김평일의 식탁에 표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식탁 위 벽에는 카를교 사진이 걸린 액자가 있었다. 1월에 왔을 때도 같은 자리였다. 창밖 보통강 둑의 버드나무가 연두색으로 덮였다. 3월에 가지를 친 자리마다 새 가지가 손가락 길이로 돋아 있었다. 혜림은 부엌 끝 의자에 앉아 공책을 무릎에 두고 펴지 않았다.
김평일이 돋보기를 쓰고 표를 한 장씩 들어 보았다. 평양, 베이징, 프라하. 김인철. 다음 장. 평양, 베이징, 프라하. 김평일. 노인은 자기 이름이 적힌 표를 오래 들고 있었다.
“누가 줬냐?”
“중국 대사관 참사관이요. 날짜는 대사관이 정한대요. 베이징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못 본대요.”
“중국 사람들이 사람을 안 보이게 하는 재주는 좋지.”
김평일은 표를 내려놓지 않았다. 인철은 식탁 밑에서 털 슬리퍼 신은 발을 꼼지락거렸다.
“할아버지. 프라하 아파트에 방이 두 개예요. 하나는 슈베이크가 쓰는데, 할아버지 오시면 슈베이크는 소파에서 자면 돼요. 어차피 소파는 다 망가졌어요.”
김평일이 웃었다. 웃다가 기침을 했고, 기침이 멎자 표를 식탁 위에 엎어 놓았다.
“나는 마흔 해를 밖에서 떠돌았다. 대사관에서 대사관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고, 어느 나라에서도 내가 왜 거기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와서야 내가 왜 밖에 있었는지 알았다. 밖에 있으라고 밖에 둔 거였다.”
“그러니까 이제 나가셔도 돼요.”
“이번에 나가면 다르다. 결정문에 곁가지를 친다고 쓰였는데 곁가지가 달아나면, 결정문이 옳은 결정문이 된다. 달아난 놈은 처음부터 달아날 놈이었다고들 하겠지. 내가 여기 남아서 아무것도 안 해야 결정문이 틀린 결정문이 된다.”
“할아버지가 남으시면 원로들이 할아버지를 깃발로 써요.”
“깃발은 바람이 불어야 날린다. 나는 곧 여든이다. 나한테 부는 바람은 이제 없다.”
김평일은 식탁에서 일어나 현관까지 걸어갔다. 인철이 따라 일어났다. 혜림이 공책을 쥐고 부엌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관에서 김평일이 뒤돌아 손자를 보았다. 엎어 놓았던 표를 언제 집어 들었는지, 노인의 손에 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김평일은 표를 손자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가거라」가 든 주머니였다.
“네 표는 네 거고, 내 표도 네 거다. 한 장은 쓰고 한 장은 두어라. 두 장 다 쓰면 나를 잊고, 한 장도 안 쓰면 너를 잃는다.”
“할아버지.”
“슬리퍼 새로 사라. 그거 다섯 번째로 산 거 아니냐?”
“네 번째예요.”
“같은 가게냐?”
“같은 가게요.”
“그럼 됐다.”
현관문이 닫혔다. 인철은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외투 주머니가 두 장 몫으로 두꺼웠다. 혜림은 공책을 펴지 않은 채 계단 앞에서 기다렸다.
*
5월 7일 일요일 오전 열 시, 김인철은 중앙군사위원회 초대소 마당의 자갈 위에서 박정천과 마주했다. 마당 가장자리의 라일락이 피어 있었다. 김덕수가 열 걸음 떨어져 서 있었고, 혜림은 정문 밖이었다. 박정천은 외투를 입지 않았다. 군복 소매 끝으로 노인의 손목뼈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남으신다 들었소.”
“남으시오. 부위원장 동지 바람대로.”
“내 바람이 아니오. 뿌리가 이 땅에 있어야 한다는 거요.”
“부위원장 동지. 하나만 묻겠소. 1월에 프라하로 온 전보, 누가 쳤소?”
박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당 끝에서 김덕수가 고개를 들었다. 인철은 기다렸다. 라일락 위에 벌 한 마리가 붙었다가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안 쳤다고 했소. 보위성 대좌는 그 줄을 빼라 했소. 빼지 않으면 군복 입은 사람들 이름이 나온다고. 1월 10일 밤 내 숙소 문을 처음 두드린 사람이 김 중좌였소. 만경대에서 기다린 사람이 부위원장 동지였고. 공항에 내린 지 여덟 시간 만이었소.”
“외무성 통신선에 내 사람이 있소.”
박정천이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나는 피를 찾았소. 녀자가 영도한 전례가 없는 나라에서, 백두의 피를 이은 사내를. 평양에서 손에 쥘 수 있는 사내 핏줄은 프라하에 하나 있었소. 할아버지 이름을 쓰면 손자가 올 줄 알았소.”
“왔소. 할아버지를 모시러.”
“그래서 동무는 깃발이 못 됐소. 할아버지를 모시러 온 사람은 깃발을 안 드오.”
인철은 외투 주머니에서 표 두 장을 꺼냈다. 박정천이 표를 보았다.
“중국이 줬구먼.”
“곁가지는 제 손으로 치겠소.”
박정천의 눈이 표에서 인철의 얼굴로 올라왔다.
“한 장으로 떠나겠소. 내가 떠나면 원로들은 손에 쥘 사내가 없어지오. 총무부는 칠 곁가지 손자가 없어지오. 향도 곁 사람들은 정통을 다툴 상대가 없어지오. 할아버지는 아무한테도 쓸모가 없어지오. 2월에 진경훈 부부장이 그랬소. 쓸모없는 노인은 평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그 말을 믿소?”
“안 믿소. 그래서 부위원장 동지께 부탁하는 거요. 할아버지를 깃발로 쓰지 마시오. 쓰시면 나는 프라하에서 체코 신문에 쓰겠소. 전보는 누가 쳤는지. 프라하 신문은 아무도 안 고치오.”
박정천은 오래 인철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라일락을 보았다.
“동무 할아버지는 말을 아꼈소. 동무는 정류장마다 말을 하오. 문 닫기 전에.”
“한 번만 하오. 그다음에 문을 닫소.”
박정천이 김덕수를 불렀다. 김덕수가 다가오자 박정천은 인철을 턱으로 가리켰다.
“손님 정문까지 모시라. 정문까지만.”
인철은 표 두 장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김덕수가 앞서 걸었다. 자갈 밟는 소리가 정문까지 이어졌다. 정문 앞에서 김덕수가 걸음을 멈추고, 인철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감자는 대홍단에서 내가 직접 골랐소.”
“알았소. 맛있었소.”
*
같은 날 밤 열한 시, 오혜림은 외교단 숙소 안내원 방 책상에서 보고서 용지 한 장을 폈다. 먹지는 끼우지 않았다. 한 부만 쓰는 보고서였고, 안내원으로 쓰는 마지막 보고서였다. 내일 아침 아홉 시 청진행 열차였다. 침대 위에 꾸린 군용 배낭이 하나 있었다.
혜림은 첫 줄을 썼다.
「5월 6일 16시, 김평일은 자기 이름이 적힌 표를 손자에게 돌려주고 남겠다고 말함」
두 번째 줄.
「5월 7일 10시, 초대소 마당. 대위는 정문 밖에 있어 듣지 못함. 손님이 정문에서 나와 대위에게 한 말을 옮김. 손님은 곁가지는 제 손으로 치겠다고 말했음. 손님은 표 한 장으로 떠남」
세 번째 줄에서 볼펜이 멈췄다. 인철이 정문 밖 차 안에서 한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전보는 원로가 쳤소. 박정천 부위원장이 그렇다고 했소. 혜림은 볼펜을 쥔 채 한참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거짓말이 든 보고서를 옮겨 적을 때도 글씨가 반듯했다고 했다. 혜림은 세 번째 줄을 썼다. 글씨가 반듯했다.
「손님의 말에 따르면, 1월 프라하로 간 전보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박정천의 사람이 외무성 통신선으로 친 것임. 박정천이 손님 앞에서 그렇다고 말함. 대위는 직접 듣지 못함. 들은 사람에게서 들은 대로 씀」
마지막 줄은 짧았다.
「이상 사실대로」
혜림은 보고서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책상 위 물병에서 버들가지를 꺼냈다. 하얀 뿌리가 물병 바닥까지 닿아 있었고, 가지 끝에 잎이 일곱 장 돋았다. 혜림은 젖은 뿌리를 신문지로 감싸 계단을 올라 4층 복도로 갔다. 인철의 방문 아래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혜림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인철이 털 슬리퍼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혜림은 신문지에 싼 버들가지를 내밀었다.
“프라하에는 못 가져가십니다. 숙소 마당에 심어 주십시오. 떠나시는 날까지 물을 주시면 됩니다.”
“곁가지를 맡기는 거요?”
“쓰레기를 맡기는 겁니다. 인민의 가로수에서 떨어진.”
인철이 웃었다. 혜림은 입술을 물지 않았다. 버들가지를 감싼 신문지는 4월 26일 자였다. 붉은 의자와 털깃 코트의 김주애가 젖은 뿌리에 배어 번져 있었다.
*
5월 9일 화요일 오후 한 시, 윤설향은 혜산 노동단련대 철문 앞 면회 줄 끝에서 콩기름 세 병이 든 자루를 고쳐 멨다. 줄에 여자 열몇 명이 서 있었다. 모두 자루를 메고 있었다. 단련대 지도원이 자루를 하나씩 열어 병을 세었다. 설향의 자루에서 한 병을 꺼내 책상 밑에 내려놓고, 나머지 두 병을 철망 아래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철망 건너에 성민이 서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볼이 꺼졌다. 손바닥에 물집이 터진 자국이 있었다.
“누나, 내 말 들어 보오. 여기 밥이 강냉이요. 강냉이도 국수처럼 굵게 뽑아 달라고 했더니 지도원 동지가 웃었소.”
“여기서도 흉내를 냈니?”
“흉내 아니오. 건의요.”
설향은 철망에 이마를 대었다. 쇠가 차가웠다.
“다음 달에 또 온다. 콩기름 네 병.”
“세 병이면 되오. 한 병은 지도원 동지가 드시니까.”
“기래서 네 병이다.”
성민이 웃었다. 3월 역 앞 광장에서 웃던 얼굴이었다.
“니 코트 아직 궤짝에 있다.”
“팔지 마오. 나가서 입을 거요.”
“나오면 소매 맞게 줄여 주마.”
“줄이지 마오. 나 아직 크오.”
성민이 철망 가까이 얼굴을 댔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나, 돌격대 지휘관한테 준 중국 돈 얘기는 여기서 아무한테도 안 했소. 물어봐도 안 했소.”
“누가 물어봤니?”
“지도원 동지가. 병 휴가를 누가 샀냐고.”
설향은 대답하지 않고 철망에 이마를 다시 댔다.
지도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성민이 철망에서 손을 떼고 뒷짐을 지었다. 턱을 들었다가, 설향을 보고 턱을 내렸다. 줄 선 단련대원들 사이로 성민의 짧은 머리가 멀어졌다.
*
5월 10일 수요일 오전 열 시, 리학철은 간부과 사무실 책상에 선전선동부의 결정문 새 초안을 펼치고 자를 댔다. 세 번째 장 마지막 줄이었다.
「백두의 혈통을 흐리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며, 김평일 일가의 곁가지는 친다」
바로 위 줄에는 진경훈이 넣은 문장이 있었다.
「백두의 직계 정통은 하나이며, 직계가 아닌 모든 가지는 곁가지이다」
학철은 자를 「김평일 일가의」 여섯 글자 밑에 대고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한 번 긋고, 한 번 더 그었다. 여백에 검토 의견을 적었다.
「당 결정문에 한 집안의 이름이 오른 전례가 없다. 조직지도부는 집안 이름을 뺄 것을 의견으로 붙인다. 간부과 리학철」
1월 14일 검토실에서 문정숙에게 한 말이었다. 넉 달 만에 같은 말을 종이에 썼다.
학철은 줄 그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백두의 혈통을 흐리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며, 곁가지는 친다」. 바로 위의 줄과 붙여 읽었다. 직계가 아닌 모든 가지는 곁가지이다. 곁가지는 친다. 김평일의 이름이 빠지자 한 줄의 칼날이 넓어졌다. 김평일 집안만 치던 칼이 직계가 아닌 모든 가지를 쳤다. 형제도 곁가지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정숙이 들어왔다. 총무부가 초안에서 빠진 뒤로 문정숙은 지난 부록 철을 거두러 다녔다. 문정숙은 책상 위의 초안을 보았다. 볼펜 두 줄 아래 지워진 여섯 글자를 보았다. 은 줄 달린 안경을 코끝에 걸지 않았다.
“이름을 빼시면 이 줄은 누구든 칩니다.”
“결정문에 집안 이름이 오른 전례가 없습니다. 1월에 말씀드렸습니다.”
“총무부장 동지도 곁가지가 됩니다. 체스꼬 대사 임명안이 과장 동지 책상에 있지요. 이 줄이 채택되면 그 임명안이 이 줄의 첫 번째 쓰임이 됩니다.”
“알았습니다.”
“1월에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1월에는 알았다고만 했습니다. 오늘은 썼습니다.”
문정숙은 오래 서 있었다. 안경을 목에 늘어뜨린 채 손으로 안경알을 한 번 닦았다. 그러고는 부록 철 묶음을 품에 안았다.
“총무부장 동지께 전하겠습니다. 조직지도부 의견이라고.”
“예. 조직지도부 의견입니다.”
문정숙이 나갔다. 학철은 줄 그은 초안을 봉투에 넣고 겉봉에 썼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책상 왼편에는 회색 문건철 열두 개와 흰 표지 두 장이 쌓여 있었다. 아들을 보낸 문건의 빈 흰 표지, 김여정을 보낼 문건의 흰 표지. 학철은 봉투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창으로 본부청사 마당의 버드나무가 보였다. 3월에 친 가지 자리에서 돋은 새 가지들이 바람에 한 방향으로 쏠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