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35자)

베이징 연락선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5월 3일 수요일 저녁 일곱 시⁠, 김인철은 중앙군사위원회 초대소 식당의 둥근 식탁에 앉아 맞은편 손님의 젓가락을 보았다⁠. 손님은 젓가락 끝을 가지런히 맞춘 다음에야 음식을 집었다⁠. 중국 대사관 참사관 가오라고 했다⁠. 쉰 살쯤⁠, 회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배웠다는 조선말을 했다⁠. 박정천이 식탁 상석에 앉았고⁠, 김덕수가 박정천 등 뒤 벽에 붙어 서 있었다⁠. 혜림은 이번에도 정문 밖 차 안이었다⁠.

식탁에 평양랭면과 녹두지짐과 숭어국이 올랐다⁠. 인철은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내 가오 앞에 놓았다⁠. 1월 외교단 매점에서 일 유로에 산 체코 맥주였다⁠.

“⁠프라하 맥주요⁠. 선물이오⁠.⁠”

가오가 병을 들어 상표를 읽었다⁠. 유통기한 줄에서 눈이 멈췄다⁠. 2029년 3월⁠.

“⁠다섯 해 동안 안정된 맥주군요⁠.⁠”

“⁠평양에서는 기한이 지나도 아무도 안 버리오⁠. 안정이 되니까⁠.⁠”

박정천의 눈썹이 움직였다⁠. 김덕수가 벽에서 기침을 했다⁠. 가오는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고 병을 자기 의자 곁에 내려놓았다⁠.

박정천이 숟가락을 놓았다⁠.

“⁠참사관 동지⁠. 오늘 이 동무를 보여 드리려고 모셨소⁠. 김평일 동지의 손자요⁠. 백두의 피를 이은 사내요⁠. 우리 군은 이 피 앞에 줄을 설 수 있소⁠.⁠”

“⁠중국은 조선의 안정을 바랍니다⁠.⁠”

“⁠안정은 사람이 서야 오는 거요⁠. 스물한 살 아이가 서면 아이 뒤의 손들이 나라를 쥐고⁠, 녀자가 서면 문 앞의 손이 쥐오⁠. 사내가 서면 군이 쥐오⁠. 군이 쥐어야 국경이 안정되오⁠. 압록강 너머가 중국이오⁠.⁠”

“⁠어느 분이 앞에 서시든 안정이면 됩니다⁠. 중국은 어느 분의 이름도 고르지 않습니다⁠.⁠”

“⁠1월에 만경대 사진이 베이징까지 갔을 거요⁠.⁠”

“⁠사진은 받았습니다⁠. 잘 나왔습니다⁠.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인철은 녹두지짐을 한 장 더 집었다⁠. 같은 낱말이 다섯 번째 나왔다⁠. 프라하 전차 정비소 아주머니가 남편 잔소리를 흉내 낼 때도 같은 낱말을 다섯 번은 했다⁠.

박정천은 한동안 가오를 보다가 일어났다⁠. 일어나며 의자 등받이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1월 만경대에서 끼고 있던 손등 갈라진 가죽 장갑은 없었다⁠. 맨손이었다⁠.

“⁠김 중좌⁠. 차⁠.⁠”

박정천이 식당을 나갔다⁠. 김덕수가 따라 나가며 문을 닫았다⁠. 식탁에 두 사람이 남았다⁠. 가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가 식탁 밑으로 인철의 무릎까지 건너왔다⁠.

“⁠열어 보셔도 됩니다⁠.⁠”

봉투 안에 표가 두 장 있었다⁠. 평양에서 베이징⁠, 베이징에서 프라하⁠. 한 장에 김인철⁠, 한 장에 김평일⁠. 날짜 칸은 비어 있었다⁠.

“⁠날짜는 대사관이 정합니다⁠. 베이징에서는 우리가 모십니다⁠. 프라하까지 갈아타는 동안 아무도 두 분을 보지 못합니다⁠.⁠”

“⁠원로들이 바란 건 이게 아니오⁠.⁠”

“⁠원로 동지들은 사진을 보내셨고⁠, 우리는 표를 드리는 겁니다⁠. 곁가지 손자가 평양에 있으면 누구든 깃발로 쓰려 합니다⁠. 깃발이 많으면 안정이 안 됩니다⁠. 깃발이 프라하로 가면 모두 안정됩니다⁠.⁠”

“⁠할아버지가 받으실지 모르오⁠.⁠”

“⁠받으시면 안정이고⁠, 안 받으셔도 손자 한 분이 떠나시면 안정입니다⁠.⁠”

가오는 의자 곁의 맥주병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문간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이 맥주는 대사관 냉장고에 넣어 두겠습니다⁠. 마시지는 않겠습니다⁠.⁠”

인철은 봉투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할아버지가 써 준 「⁠가거라⁠」가 든 주머니였다⁠. 식탁 위의 숭어국이 식어 가고 있었다⁠.

*

같은 날 저녁 여덟 시⁠, 오혜림은 초대소 정문 밖에 세운 차 운전석 옆자리에서 정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박정천이 걸어 나왔다⁠. 김덕수가 승용차 뒷문을 열고 기다렸지만⁠, 박정천은 차로 가지 않고 혜림의 차 창문 앞에서 멈췄다⁠. 혜림이 문을 열고 내려 경례를 붙였다⁠.

“⁠대위 동무⁠. 4월 25일 계단 아래 일은 들었소⁠.⁠”

“⁠관람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보고서에 그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썼다지⁠. 그 보고서 덕에 김 중좌가 살았소⁠. 중좌가 주석단 계단을 다 올랐으면⁠, 지금쯤 곁가지와 접촉한 자들 목록 맨 위에 중좌 이름이 있을 거요⁠.⁠”

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정천은 초대소 담장 위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았다⁠.

“⁠오늘 기다린 손님은 안정 하나만 들고 왔소⁠. 늙은이가 넉 달을 기다린 손님이오⁠. 중국이 손자한테 무엇을 줬는지는 묻지 않겠소⁠. 대신 손자한테 전하시오⁠. 할아버지는 이 땅에 남으셔야 하오⁠. 뿌리가 나라 밖으로 나가면 곁가지는 정말 곁가지가 되오⁠.⁠”

“⁠손님에게 전하는 말은 보고서에 씁니다⁠.⁠”

“⁠쓰시오⁠. 이번에는 고칠 사람도 없을 테니⁠.⁠”

박정천은 승용차에 올랐다⁠. 김덕수가 문을 닫으며 혜림을 한 번 보았다⁠. 차가 떠난 뒤에야 인철이 정문으로 나왔다⁠. 외투 안주머니가 불룩했다⁠.

*

5월 4일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오혜림은 보위성 청사 5층 장명길의 방에서 발령장을 받았다⁠. 「⁠함경북도 보위국⁠. 5월 8일 부임⁠」⁠. 장명길은 발령장을 건네고 나서 안경을 벗지 않았다⁠.

“⁠먹지 때문이다⁠. 보위성 보고서가 보위성 밖 책상에 먼저 올라갔다⁠. 총무부는 빠졌지만 선전선동부도 원로도 보위성이 새는 그릇이라고 본다⁠. 그릇을 고칠 수는 없으니 새는 자리를 막는 거다⁠.⁠”

“⁠알았습니다⁠.⁠”

“⁠너도 조직지도부 과장 말버릇을 배웠냐⁠.⁠”

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명길이 서랍을 열었다가 닫았다⁠. 혜림은 닫히는 서랍 안에서 누런 철의 겉장을 보았다⁠.

“⁠네 아버지 철은 내 서랍에 있다⁠. 나는 닫지도 열지도 않는다⁠. 청진에서 보고서를 바로 쓰면 아무도 열 까닭이 없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김인철이 떠나는 날⁠, 순안공항까지는 제가 데려다주게 해 주십시오⁠.⁠”

“⁠떠나는 날이 있으면⁠.⁠”

“⁠있을 겁니다⁠.⁠”

장명길은 한참 혜림을 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끝 획이 왼편으로 꺾인 서명을⁠, 이번에는 혜림이 볼 수 없는 종이에 했다⁠.

같은 날 저녁 여덟 시⁠, 혜림은 외교단 숙소 응접실에서 인철에게 발령장을 보여 주었다⁠. 인철은 발령장을 다 읽고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표 두 장이 탁자 위에 놓였다⁠. 김인철⁠, 김평일⁠.

“⁠두 장이오⁠. 1월부터 찾던 두 장이오⁠.⁠”

“⁠누가 줬습니까⁠?⁠”

“⁠안정이 줬소⁠.⁠”

혜림은 표에 손대지 않았다⁠. 표 두 장 옆에 함경북도 발령장이 놓였다⁠. 탁자 위에 종이가 셋이었다⁠. 둘은 베이징과 프라하로 가는 종이였고⁠, 하나는 청진 바닷가로 가는 종이였다⁠.

“⁠청진에는 버섯이 나오⁠?⁠”

“⁠칠보산에 송이버섯이 납니다⁠. 가을에⁠.⁠”

“⁠가을에는 나는 없소⁠.⁠”

“⁠압니다⁠.⁠”

“⁠청진 바다는 춥소⁠?⁠”

“⁠5월에도 바닷물에 손을 넣으면 손가락이 저립니다⁠. 아버지는 바다를 한 번도 못 보셨습니다⁠. 탄광에서 청진까지 기차로 하루인데⁠.⁠”

“⁠그럼 대위 동무가 먼저 보고 아버지께 편지를 쓰시오⁠.⁠”

“⁠편지는 쓰면 읽는 사람이 둘입니다⁠.⁠”

“⁠할아버지 말씀이오⁠. 대위 동무도 그 부엌에 있었지⁠.⁠”

혜림이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웃음을 참는 얼굴이 아니었다⁠.

*

5월 5일 금요일 아침 여덟 시⁠, 윤설향은 혜산 장마당 매대 앞에서 한경희를 맞았다⁠. 경희는 털 조끼 대신 얇은 점퍼를 입었고⁠, 눈 밑이 검었다⁠.

“⁠어젯밤 오백 벌이 강가에서 잡혔다⁠. 배가 반쯤 건넜을 때 손전등이 켜졌다⁠.⁠”

설향은 손에 쥔 철사 옷걸이를 내려놓았다⁠.

“⁠초소장이 돈 냄새를 모른다고 하셨잖슴까⁠.⁠”

“⁠초소장은 몰랐지⁠. 초소장 위에 평양에서 새로 온 정치부 군관이 있었다⁠. 중위다⁠. 돈을 내밀었더니 손을 뒤로 감추더란다⁠. 받으면 자기 이름이 또 어디 목록에 오른다고⁠.⁠”

“⁠오백 벌은 어떻게 됨까⁠?⁠”

“⁠증거물이다⁠. 군단 창고로 갔다⁠. 아마 반은 군관 아내들이 입고 다닐 거다⁠.⁠”

경희는 매대 기둥에 기대어 있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설향은 매대 밑 궤짝에서 보리차 병을 꺼내 한 잔 따라 주었다⁠.

“⁠선금 없다고 하셨으니 제 빚은 없슴다⁠.⁠”

“⁠없지⁠. 니 몫 이자도 없고⁠. 할머니 사탕 외상도 못 갚았다⁠.⁠”

통로 끝에서 최광수가 걸어왔다⁠. 국경 초소 근무복 위에 털깃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5월인데도 벗지 않았다⁠.

“⁠새로 온 중위 동지 이야기 들었소⁠? 평양 호위사령부에서 왔다오⁠. 사격을 다섯 발에 마흔여덟 점 쏜다오⁠. 리정훈 중위라고⁠.⁠”

“⁠지도원 동지는 그 코트 언제 벗슴까⁠? 5월임다⁠.⁠”

“⁠이 코트는 증거물이오⁠. 증거물은 몸에 지니고 있어야 안 없어지오⁠.⁠”

경희가 보리차를 뿜었다⁠. 설향도 처음으로 웃었다⁠. 최광수는 털깃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통로 끝으로 사라졌다⁠. 설향은 궤짝 뚜껑을 열고 비닐에 싼 성민의 코트를 한 번 쓰다듬었다⁠. 장마당에 남은 털깃 코트는 이제 두 벌이었다⁠. 궤짝 속 한 벌⁠, 최광수의 등 위 한 벌⁠.

*

5월 5일 금요일 오전 열 시⁠, 리학철은 간부과 사무실 책상에 흰 표지 문건 하나를 받아 놓았다⁠. 부부장 강성호가 직접 가지고 내려왔다⁠. 강성호는 찻잔 없이 왔다⁠. 손이 빈 강성호를 학철은 처음 보았다⁠.

「⁠당중앙위원회 총무부장 김여정을 체스꼬 주재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함⁠」

체스꼬는 체코를 부르는 공화국의 이름이었다⁠. 문건 아래 비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열두 장처럼⁠, 156일째 비어 있었다⁠.

“⁠상무위원회 합의안이다⁠. 6월 전원회의에서 새 비준 절차가 채택되면 그 절차로 첫 번째 비준을 받는다⁠. 조직지도부 검토는 형식이다⁠.⁠”

학철은 「⁠체스꼬⁠」 세 글자를 보았다⁠. 김평일이 2015년부터 네 해 넘게 대사로 있던 나라였다⁠. 마흔 해 동안 유럽을 떠돈 곁가지가 마지막으로 머문 대사관이었다⁠.

“⁠부부장 동지⁠. 1970년대 말 김평일을 나라 밖으로 보낸 것도 이런 문건이었습니까⁠?⁠”

“⁠그때는 문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있다⁠. 그게 다르다⁠.⁠”

강성호가 문간에서 돌아보았다⁠.

“⁠2월에 박정천 부위원장이 형제도 곁가지라고 했지⁠. 곁가지는 치는 거다⁠. 1970년대 사람들은 곁가지를 칠 때 톱을 안 들었다⁠. 나라 밖 발령장을 들었다⁠.⁠”

문이 닫혔다⁠. 학철은 흰 표지를 회색 문건철 열두 개 위에 올려놓았다⁠. 열세 번째 문건이었다⁠. 비준 자리가 빈 문건 위에⁠, 비준 자리가 빈 문건이 하나 더 얹혔다⁠. 학철은 볼펜을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조직지도부 검토 의견 자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형식이라는 말을 들은 문건에 형식대로 「⁠검토함⁠」을 쓰면⁠, 그것으로 형식이 끝났다⁠.

*

같은 날 저녁 아홉 시⁠, 학철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 김선희가 부엌에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수화기가 아직 따뜻했다⁠.

“⁠정훈이예요⁠. 일곱 시에 걸려 왔어요⁠. 혜산이래요⁠. 밥 잘 먹는대요⁠.⁠”

“⁠다른 말은⁠?⁠”

“⁠강가에서 사람들이 돈 봉투를 내밀더래요⁠. 안 받았대요⁠. 받으면 또 무슨 목록에 오른다고⁠.⁠”

학철은 외투를 벗어 걸었다⁠. 김선희가 국을 데우며 덧붙였다⁠.

“⁠아버지 바꿔 달라는 말은 안 했어요⁠. 나도 안 물어봤어요⁠.⁠”

“⁠잘했소⁠.⁠”

학철은 식탁에 앉았다⁠. 김선희가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학철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부엌 벽에 붙은 전화기를 보았다⁠. 까만 수화기가 받침에 반듯하게 얹혀 있었다⁠. 전화기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나온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책상 위에는 열세 번째 문건이 있었고⁠, 서랍 속 12월 1일 자 1면에서 붉은 의자 오른편에 서 있던 남색 치마 정장은 체코행 문건 한 장의 이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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