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625자)

곁가지는 친다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6월 14일 수요일 오전 열한 시 이십 분⁠, 리학철은 본부청사 회의장 2층 방청석 맨 끝 줄에서 공책을 덮었다⁠. 덮은 공책 위에 볼펜을 가로로 놓았다⁠. 2월에 주석단 끝자리의 김여정이 자료철 위에 펜을 놓던 모양과 같았다는 것을⁠, 학철은 펜을 놓고 나서야 알았다⁠.

주석단 한가운데 금테 두른 붉은 벨벳 의자는 비어 있었다⁠. 2월과 같았다⁠. 달라진 것은 의자 왼편이었다⁠. 검은 가죽 의자 하나가 더 놓였고⁠, 김주애가 앉아 있었다⁠. 6월이라 털깃 코트가 아니었다⁠. 검은 여름 정장이었다⁠. 주석단 맨 오른편 끝자리에는 남색 치마 정장의 김여정이 앉아 있었다⁠. 2월과 같은 자리였다⁠.

조용원이 결정문을 읽었다⁠. 이번에는 선전선동부가 쓴 초안에 조직지도부 의견이 붙은 결정문이었다⁠.

“⁠조직 문제에 대하여⁠. 하나⁠. 백두의 직계 정통은 하나이며⁠, 직계가 아닌 모든 가지는 곁가지이다⁠. 백두의 혈통을 흐리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며⁠, 곁가지는 친다⁠.⁠”

학철은 「⁠곁가지는 친다⁠」 앞에 아무 이름도 없는 것을 귀로 들었다⁠. 5월 10일 학철이 자를 대고 그은 볼펜 두 줄이 회의장 확성기를 지나는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둘⁠. 향도 김주애 동지를 백두의 직계 정통으로 높이 받든다⁠. 셋⁠. 비상시 간부 비준은 정치국 상무위원회 합의로 하며⁠, 간부 사업은 조직지도부가 맡는다⁠. 넷⁠. 호위사령부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지휘를 받는다⁠. 다섯⁠. 총무부장 김여정 동지를 소환한다⁠.⁠”

회의장 맨 앞줄과 주석단 맨 끝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맨 앞줄의 박정천은 탁자 위 군모에 손을 얹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주석단 끝의 김여정은 고개를 들고 회의장 정면을 보았다⁠. 결정문 셋째 조항이 1월 18일 4층 회의실에서 부부장 강성호가 간부과에 쓰라고 한 세 번째 안이라는 것을⁠, 회의장에서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름 없이도 짐을 싸게 하는 말⁠. 학철이 넉 달 동안 고쳐 쓴 말은 「⁠합의⁠」 두 글자였다⁠.

“⁠찬성하는 동지는 손을 드십시오⁠.⁠”

아래층의 손들이 올라갔다⁠. 학철은 맨 앞줄을 보았다⁠. 박정천의 손은 맨 마지막에 올라갔다⁠. 군모에 얹었던 손이었다⁠. 주석단 끝의 김여정도 손을 들었다⁠. 소환되는 사람이 자기 소환에 손을 드는 것을 학철은 처음 보았다⁠.

김주애가 붉은 의자 왼편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박수가 오래 이어졌다⁠. 방청석의 최영남이 박수를 치다가 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모자 안에 대고 하지 않았다⁠. 박수 소리가 충분히 컸다⁠.

박수가 끝나고 다음 의정으로 넘어가는 사이⁠, 두 자리 건너의 진경훈이 무릎 위의 공책을 펴 보였다⁠. 2월에 「⁠형제도 곁가지⁠」 밑에 두 번 그었던 밑줄 아래로 오늘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향도 동지께서는 정통이 되셨습니다⁠. 간부는 조직지도부가⁠, 경호는 상무위원회가 쥐었고요⁠.⁠”

진경훈이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래도 인민은 사진을 봅니다⁠. 사진은 우리 부가 쥐었습니다⁠. 사진이 남으면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학철은 2월처럼 듣지 못한 사람 흉내를 내지 않았다⁠. 진경훈을 보았다⁠.

“⁠사진 한가운데 의자는 비어 있습니다⁠.⁠”

진경훈은 공책을 덮었다⁠. 덮은 공책 위에 손바닥을 얹고⁠, 한참 주석단의 붉은 의자를 보았다⁠.

*

6월 15일 목요일 오후 세 시⁠, 리학철은 간부과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문정숙이 아니었다⁠. 김여정이 혼자 들어왔다⁠. 남색 치마 정장이었다⁠. 1월 특각 앞방에서 창가에 서 있던 옷이었다⁠.

“⁠앉으시오⁠, 리 과장⁠.⁠”

“⁠서서 말씀 듣겠습니다⁠.⁠”

“⁠1월에도 그러더니⁠.⁠”

김여정은 학철의 책상 앞 의자에 앉지 않았다⁠. 책상 왼편으로 걸어가 회색 문건철 열두 개를 보았다⁠. 열두 장 맨 아래 비준 자리마다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합의⁠」⁠. 오늘 아침 열 시에 찍혀 돌아온 도장이었다⁠. 맨 위 문건은 양강도 국경 군단장이었다⁠. 백아흔일곱 날 만에 비준 자리가 찼다⁠.

열두 장 옆에 흰 표지 하나가 따로 놓여 있었다⁠. 「⁠체스꼬 주재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함⁠」⁠. 같은 붉은 도장이었다⁠. 새 절차의 첫 번째 쓰임이었다⁠.

“⁠과장의 세 번째 안이오⁠. 이름 없이도 짐을 싸게 하는 말⁠.⁠”

“⁠예⁠.⁠”

“⁠나는 짐을 싸겠소⁠. 다음 주 수요일 베이징행이오⁠. 프라하 공항에는 대사관 사람이 마중을 나올 거요⁠. 삼촌이 처음 불가리아에 내렸을 때는 한 사람도 안 나왔다지⁠.⁠”

김여정은 흰 표지를 손바닥으로 덮지 않았다⁠. 1월에는 문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곁가지는 친다⁠. 내가 쓴 줄이오⁠. 과장이 이름을 지웠고⁠, 이름이 지워지니 내가 곁가지가 됐소⁠. 2월에 박 부위원장이 한 말 그대로요⁠.⁠”

“⁠총무부장 동지⁠. 이름을 지운 것은 전례가 없어서입니다⁠.⁠”

“⁠알고 있소⁠. 과장은 전례로 일을 하오⁠. 그래서 과장 책상에 문건이 오는 거요⁠.⁠”

김여정은 창가로 갔다⁠. 본부청사 마당의 버드나무가 6월 잎으로 덮여 있었다⁠.

“⁠스물한 살을 앞에 세우면 군이 아이 뒤에 서고⁠, 보위성이 아이 옆에 서서 나라를 썬다고 1월에 말했소⁠. 결정문 셋째와 넷째를 보시오⁠. 간부는 조직지도부가 쥐고⁠, 경호는 상무위원회가 쥐고⁠, 향도는 사진을 쥐었소⁠. 셋이 서로 쥔 것을 놓지 않으면 나라는 한동안 안 썰리오⁠. 내가 바란 게 그거였소⁠. 내 이름으로 하려 했을 뿐이오⁠.⁠”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여정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김정은 동지는 오늘도 펜을 쥐지 못하오⁠. 이 말은 과장한테만 하는 말이 아니오⁠. 체스꼬로 가는 사람이 남기고 가는 말이오⁠.⁠”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알았다고 하는구먼⁠.⁠”

김여정이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구두 굽 소리가 났다⁠. 2월 회의장 연단으로 걸어가던 소리와 같은 간격이었다⁠. 학철은 앉지 않은 채 열두 장을 품에 안았다⁠. 회색 문건철이 이백 날 가까이 쌓여 있던 책상 왼편에 먼지 없는 네모 자리가 드러났다⁠. 학철은 문건철을 최영남에게 넘겼다⁠.

“⁠도당마다 오늘 안으로⁠.⁠”

“⁠알았습니다⁠.⁠”

최영남이 문건철을 안고 나갔다⁠. 학철은 서랍을 열어 비닐에 싼 12월 1일 자 신문을 꺼냈다⁠. 붉은 의자 뒤의 김정은⁠, 왼편의 김주애⁠, 오른편의 김여정⁠, 가장자리에 잘린 아들의 어깨⁠. 학철은 신문을 다시 비닐에 싸서 서랍 맨 아래에 넣었다⁠.

*

6월 16일 금요일 오후 세 시⁠, 윤설향은 혜산 장마당 매대 앞에서 시장관리원 박옥순 대신 다른 손님을 맞았다⁠. 국경 군단 군복의 중위였다⁠. 어깨가 넓고 키가 컸다⁠. 등 뒤에 최광수가 서 있었다⁠. 최광수는 털깃 코트를 팔에 걸고 있었다⁠.

“⁠이 동무가 코트 장사요⁠.⁠”

최광수가 말했다⁠. 중위는 매대를 보지 않고 매대 기둥을 보았다⁠. 비닐에 싼 12월 1일 자 노동신문 1면 사진이 여섯 달째 붙어 있었다⁠. 중위가 사진의 왼편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털깃 코트 뒤에⁠, 잘린 어깨 하나와 귀 끝이 있었다⁠.

“⁠이 어깨가 내 어깨요⁠.⁠”

“⁠어깨만 나와서 본을 못 떴슴다⁠.⁠”

최광수가 웃음을 참느라 기침을 했다⁠. 중위는 웃지 않았다⁠. 리정훈 중위라고 최광수가 덧붙였다⁠. 사격을 다섯 발에 마흔여덟 점 쏜다는 말은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최광수 지도원이 이 코트를 돌려주겠다 하오⁠. 값을 낸 적이 없다고⁠. 증거물 정리가 끝났소⁠.⁠”

최광수가 코트를 매대 위에 내려놓았다⁠. 1월에 철사 옷걸이에서 벗겨 간 코트였다⁠. 털깃이 다섯 달 동안 눌려 납작했다⁠.

“⁠돌려받은 코트는 다시 팔 거요⁠?⁠”

“⁠이게 마지막 코트임다⁠. 오늘 아침 신문 1면에 향도 동지가 여름 정장 입으셨슴다⁠. 털깃은 이제 안 팔림다⁠. 가을까지는⁠.⁠”

“⁠그럼 내가 사겠소⁠.⁠”

정훈이 말했다⁠. 설향과 최광수가 동시에 중위를 보았다⁠.

“⁠어머니 드릴 거요⁠. 평양 집에⁠. 어머니는 마지막 김장김치를 1월에 다 드셨소⁠. 겨울 오면 이거라도 입으시라고⁠.⁠”

“⁠육백오십 위안임다⁠. 털깃 눌린 거 감안하면 육백⁠.⁠”

“⁠육백오십 내겠소⁠.⁠”

“⁠흥정 안 하는 손님은 처음임다⁠.⁠”

“⁠흥정하면 또 무슨 목록에 오르오⁠.⁠”

정훈이 돈을 세어 매대 위에 놓았다⁠. 설향은 코트를 개어 비닐에 쌌다⁠. 궤짝 속에는 성민의 코트가 한 벌 남아 있었다⁠. 팔지 않는 코트였다⁠. 이제 장마당에서 팔 수 있는 털깃 코트는 한 벌도 없었다⁠. 정훈이 비닐 꾸러미를 겨드랑이에 끼고 몸을 돌렸다가⁠, 기둥의 사진을 한 번 더 보았다⁠.

“⁠사진 떼지 마오⁠. 본은 못 떠도⁠.⁠”

설향은 사진을 떼지 않았다⁠. 비닐에 싼 1면이 강바람에 한 번 펄럭였다⁠. 붉은 의자 곁의 세 사람과⁠, 가장자리의 잘린 어깨가 함께 흔들렸다⁠.

*

6월 18일 일요일 아침 일곱 시⁠, 오혜림은 외교단 숙소 앞에서 군용 지프의 시동을 걸어 둔 채 기다렸다⁠. 200일째 아침이었다⁠. 청진에서 밤기차로 올라왔다⁠. 장명길이 하루 휴가를 주었다⁠. 떠나는 날이 있으면⁠, 이라던 장명길은 발령장 아래 서명하듯 휴가증에도 끝 획을 왼편으로 꺾었다⁠.

인철이 현관을 나왔다⁠. 짙은 회색 울 코트를 팔에 걸었고⁠, 남색 목도리는 가방 손잡이에 감았다⁠. 손에 낡은 갈색 가죽 가방 하나였다⁠. 1월 10일 순안공항 도착장에서 처음 본 가방이었다⁠. 인철은 지프에 오르기 전에 숙소 마당 구석으로 갔다⁠. 5월에 심은 버들가지가 무릎 높이로 자라 잎을 달고 있었다⁠. 인철이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다⁠.

“⁠다음 안내원한테 물 주라고 해 주시오⁠.⁠”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비가 주겠지⁠.⁠”

지프가 숙소를 떠났다⁠. 보통강을 건너 순안으로 가는 길가에 버드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3월 8일 인부들이 사다리를 대고 쳐낸 나무들이었다⁠. 잘린 자리마다 새 가지가 팔 길이로 뻗어 바람에 흔들렸다⁠.

“⁠할아버지는 안 나오신다 하셨소⁠. 어제 크네들리키 세 개 잡수시고⁠.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이 없던 사람은 배웅도 안 한다고⁠.⁠”

“⁠김평일 동지 이름은 결정문에 없습니다⁠.⁠”

“⁠알고 있소⁠. 이름이 빠져서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됐소⁠. 아무것도 아닌 노인은 평양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했소⁠. 이번에는 믿겠소⁠.⁠”

순안공항 출발장 앞에서 혜림은 차를 세우고 내렸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 둘을 꺼냈다⁠. 하나에는 공화국 려권과 체코 영주권과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보위성 금고에서 장명길이 꺼내 준 것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외투 주머니의 비닐봉지에서 꺼낸 것이 들어 있었다⁠. 손잡이 끝에 짧은 솔이 달린 접이칼이었다⁠.

“⁠버섯 칼입니다⁠. 검색대를 못 지나갑니다⁠. 고려항공 승무원에게 맡기면 베이징에서 돌려줍니다⁠.⁠”

인철이 봉투를 받아 칼을 꺼내 보았다⁠. 접혔던 날을 펴고⁠, 손잡이 끝의 솔을 엄지로 한 번 쓸고⁠, 다시 접었다⁠.

“⁠다섯 달 동안 대위 동무 주머니에 있었소⁠?⁠”

“⁠버드나무 가지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안 상했구먼⁠.⁠”

혜림이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인철은 칼을 봉투에 도로 넣어 승무원에게 맡길 손에 따로 쥐었다⁠. 출발장 유리문 앞에서 인철이 돌아보았다⁠.

“⁠대위 동무⁠. 동무⁠, 수고하였소⁠.⁠”

혜림은 경례를 붙였다⁠. 1월 10일 도착장 유리벽 앞에서 국경 경비병이 받던 인사였다⁠.

*

같은 날 오전 열 시 사십 분⁠, 김인철은 고려항공 베이징행 창가 자리에서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기울어지자 창밖으로 순안 들판과 길가의 버드나무 줄이 보였다⁠. 잘린 자리마다 돋은 새 가지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연두색 줄을 이루었다⁠. 인철은 가방을 열었다⁠. 털 슬리퍼 한 켤레⁠, 신문 귀퉁이에 연필로 쓴 「⁠가거라⁠」⁠, 그리고 비행기 표 한 장⁠. 평양⁠, 베이징⁠, 프라하⁠. 김평일⁠. 날짜 칸은 비어 있었다⁠. 쓰지 않은 표가 슬리퍼 위에 반듯하게 놓였고⁠, 창밖의 버드나무 줄은 구름 밑으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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