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08자)

주석단 한가운데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4월 25일 화요일 밤 여덟 시 이십 분⁠, 김인철은 김일성광장 오른편 관람석 귀빈 칸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무릎에 담요를 덮었다⁠. 광장 바닥에 흰 선이 수백 줄 그어져 있었다⁠. 선마다 군인들이 대오를 맞춰 서 있었다⁠. 광장 맞은편 인민대학습당 앞 높은 단이 주석단이었다⁠. 주석단 위 건물 벽에 붉은 현수막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백두혈통 만세⁠」⁠. 현수막 양옆에 붉은 당기 둘이 조명을 받아 펄럭였다⁠. 망치와 낫과 붓이 겹쳐진 노동당 깃발이었다⁠.

혜림이 인철의 오른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군복 외투 깃을 세웠다⁠. 4월 밤바람이 대동강에서 불어왔다⁠.

“⁠슬리퍼는 안 신으시는 겁니까⁠?⁠”

“⁠열병식이오⁠.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으로 보신다 했소⁠. 손자가 슬리퍼 신고 나오면 할아버지가 창피하시오⁠.⁠”

혜림이 입술을 안으로 물었다⁠. 관람석 계단으로 털모자 쓴 노인이 내려왔다⁠. 박정천이었다⁠. 정복 가슴에 훈장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김덕수가 두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귀빈 칸의 사람들이 일어났다⁠. 박정천은 손을 내저어 앉으라 하고 인철 곁 빈 의자에 앉았다⁠.

“⁠오늘 밤 1면은 사진 한 장이오⁠. 사진 속 자리가 내일의 나라요⁠.⁠”

“⁠1월에 만경대에서도 사진을 찍었소⁠.⁠”

“⁠만경대는 초가 앞마당이었소⁠. 오늘은 주석단이오⁠. 주석단 왼편 끝⁠, 군 원로들 곁에 자리 하나를 비워 두었소⁠. 사열 때 오르면 되오⁠.⁠”

인철은 주석단을 보았다⁠. 아직 아무도 오르지 않았다⁠. 단 한가운데에 의자 하나만 조명을 받고 있었다⁠. 금테 두른 붉은 벨벳 의자였다⁠.

“⁠빈자리를 보면 앉고 싶은 게 전차 운전사 버릇이라고 조사실에서 말했소⁠. 나는 한 번도 안 앉았소⁠. 운전석이 따로 있으니까⁠.⁠”

“⁠앉으라는 게 아니오⁠. 서 있으라는 거요⁠. 서 있는 것만으로 되오⁠.⁠”

“⁠할아버지는 1970년대에 주석단에 한 번도 못 오르셨다 들었소⁠.⁠”

“⁠그래서 손자가 오르는 거요⁠.⁠”

“⁠그래서 손자가 안 오르는 거요⁠. 할아버지는 안 오르고 마흔 해를 살아 돌아오셨소⁠.⁠”

박정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갑 낀 손으로 무릎을 한 번 짚고 일어났다⁠. 일어나며 혜림을 보았다⁠.

“⁠대위 동무는 오늘 밤 손님 곁에만 있으면 되오⁠.⁠”

“⁠안내원은 손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박정천이 주석단 계단으로 걸어갔다⁠. 김덕수는 따라가지 않고 관람석 끝 통로에 남았다⁠.

여덟 시 반⁠, 광장의 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가 켜졌다⁠. 주석단에 사람들이 올랐다⁠. 관람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인철은 박수 소리 너머로 주석단 앞줄을 보았다⁠. 붉은 의자 왼편에 털깃 단 검은 가죽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혼자 서 있었다⁠. 김주애였다⁠. 의자 오른편은 비어 있었다⁠. 1월 신문 1면에서 남색 치마 정장이 서 있던 자리였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사 분⁠, 오혜림은 주석단 오른편 옆 계단 맨 아래 칸에 서 있었다⁠. 광장에서는 미사일 종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퀴가 스물두 개 달린 발사 차량이 한 대씩 주석단 앞을 지날 때마다 땅이 울렸다⁠. 사 분 전⁠, 김덕수가 관람석 통로에서 인철의 팔꿈치를 잡았다⁠. 부위원장 동지께서 부르시오⁠. 인철은 끌려 일어났고⁠, 혜림은 두 사람보다 먼저 계단 앞에 닿았다⁠.

“⁠손님은 관람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위 동무⁠, 비키시오⁠. 오늘 밤은 보위성 허가서도 있소⁠.⁠”

김덕수가 외투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국가보위성 외국인 출입 허가서⁠, 대좌 장명길의 서명⁠, 끝 획이 왼편으로 꺾인 서명이었다⁠. 혜림은 종이를 받아 조명에 비췄다⁠. 장소 줄에 타자로 쳐 있었다⁠. 「⁠김일성광장 관람석⁠」⁠.

“⁠허가서의 장소는 관람석입니다⁠. 주석단 계단은 허가서에 없습니다⁠.⁠”

김덕수의 얼굴이 굳었다⁠. 인철은 김덕수와 혜림 사이에 서서 발사 차량의 바퀴를 세고 있었다⁠.

“⁠스물두 개요⁠. 내 전차 번호하고 같소⁠.⁠”

“⁠동무는 조용히 하시오⁠.⁠”

김덕수와 혜림이 동시에 말했다⁠. 인철이 입을 다물었다⁠.

계단 위에서 군화 소리가 내려왔다⁠. 호위사령부 군관 하나가 계단 중간에 멈춰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무전기를 쥐고 있었다⁠.

“⁠여기는 주석단 계단이오⁠. 누구요⁠?⁠”

김덕수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손님이라고 하면 손님이 누구냐는 질문이 따라올 것이었다⁠. 혜림이 먼저 말했다⁠.

“⁠국가보위성 안내원과 외국 거주 손님입니다⁠. 중앙군사위원회 김덕수 중좌가 관람석까지 길을 안내하는 중입니다⁠. 관람석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군관은 혜림의 군복 견장을 보고⁠, 김덕수의 견장을 보고⁠, 마지막으로 인철의 회색 울 코트를 보았다⁠. 무전기에 짧게 무엇을 말했다⁠. 그러고는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김덕수는 혜림에게서 허가서를 도로 받아 외투 안에 넣었다⁠. 혜림을 오래 보았다⁠.

“⁠대위 동무가 오늘 나를 살렸는지 죽였는지 모르겠소⁠.⁠”

“⁠관람석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제 보고서에는 그렇게 씁니다⁠.⁠”

“⁠중좌 동무⁠.⁠”

인철이 말했다⁠.

“⁠나는 계단을 안 오르오⁠. 감자는 고맙소⁠. 부위원장 동지께 그렇게 전하시오⁠.⁠”

김덕수는 대답하지 않고 관람석 통로로 걸어갔다⁠. 혜림은 계단 맨 아래 칸에서 내려오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계단 끝에 주석단 앞줄이 비스듬히 보였다⁠. 한가운데 금테 두른 붉은 의자는 비어 있었다⁠. 의자 왼편에 털깃 코트의 김주애가 광장을 보고 있었다⁠. 의자 오른편은 비어 있었다⁠. 남색 치마 정장은 둘째 줄 맨 오른편 끝⁠, 상무위원 한 사람의 어깨 뒤에 반쯤 가려 있었다⁠. 남색 치마 정장의 얼굴은 광장을 보지 않고 붉은 의자를 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백두혈통 만세⁠」 현수막이 바람에 한 번 크게 부풀었다⁠.

*

4월 26일 수요일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리학철은 부엌 식탁에서 노동신문 1면을 펼쳤다⁠. 김선희가 시래깃국 대신 쑥국을 끓였다⁠. 4월이었다⁠.

1면 사진은 하나였다⁠. 주석단 한가운데 금테 두른 붉은 의자⁠, 의자 왼편에 털깃 코트의 김주애⁠. 의자 오른편은 사진 가장자리에서 잘려 있었다⁠. 학철은 서랍 속 12월 1일 자 1면을 떠올렸다⁠. 같은 의자⁠, 같은 털깃 코트⁠. 남색 치마 정장만 사진에서 사라졌다⁠. 배치도 두 번째 장 귀퉁이의 연필 글씨가 떠올랐다⁠. 「⁠1면 사진은 향도 동지 단독 구도⁠」⁠.

“⁠정훈이한테서 전화 왔어요⁠?⁠”

“⁠안 왔소⁠.⁠”

“⁠혜산 가는 기차는 하루 반이 걸린다던데⁠. 내렸으면 전화하겠지요⁠.⁠”

김선희는 쑥국을 그릇에 덜며 말했다⁠. 정훈이 떠난 지 열이틀이 지났다⁠.

오전 열 시⁠, 간부과 사무실 문을 연 사람은 문정숙이 아니었다⁠. 진경훈이었다⁠. 진경훈은 외투를 벗지 않고 책상 앞에 서서 서류철 하나를 내려놓았다⁠.

“⁠결정문 새 초안입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임으로 선전선동부가 다시 썼습니다⁠. 6월 전원회의에 올립니다⁠.⁠”

학철은 서류철을 폈다⁠. 부록은 없었다⁠. 보위성 자료 사본 세 장도⁠, 혜산 사진도⁠, 접촉자 목록도 없었다⁠. 세 번째 장 마지막 줄은 그대로였다⁠. 「⁠백두의 혈통을 흐리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며⁠, 김평일 일가의 곁가지는 친다⁠」⁠. 바로 위에 한 문장이 새로 들어가 있었다⁠.

「⁠백두의 직계 정통은 하나이며⁠, 직계가 아닌 모든 가지는 곁가지이다⁠」

“⁠총무부는 이 초안을 봤습니까⁠?⁠”

“⁠총무부는 이번 초안에서 빠졌습니다⁠. 부록을 고친 부서가 결정문을 쓸 수는 없지요⁠. 과장 동지 의견 덕분입니다⁠.⁠”

진경훈이 웃었다⁠. 1월 말 같은 책상 앞에서 웃던 웃음이었다⁠. 웃음이 짧게 끊겼다⁠.

“⁠조직지도부 검토 의견을 5월 말까지 붙여 주십시오⁠. 이번에는 먼저 온 순서가 하나뿐입니다⁠.⁠”

진경훈이 나갔다⁠. 학철은 새로 들어간 문장을 다시 읽었다⁠. 직계가 아닌 모든 가지⁠. 2월 26일 박정천이 연단에서 한 말이 선전선동부의 타자 글씨가 되어 결정문에 들어와 있었다⁠. 학철은 서랍에서 비닐에 싼 12월 1일 자 신문을 꺼내 오늘 자 1면 옆에 놓았다⁠. 두 장의 사진에서 붉은 의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한 장에는 의자 곁에 세 사람이 있었고⁠, 한 장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열한 시⁠, 책상 전화가 울렸다⁠. 부부장 강성호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찻잔 뚜껑 소리가 먼저 들렸다⁠.

“⁠호위사령부 간부부에서 연락이 왔다⁠. 리정훈 중위 이동 문건을 받았다더군⁠. 비준 자리에 자네 이름이 있었다고⁠.⁠”

“⁠예⁠. 제가 썼습니다⁠.⁠”

“⁠받았다는 게 놀랍다⁠. 비준 없는 문건을 호위사령부가 받았어⁠. 1월에 내가 이름 없이도 짐을 싸게 하는 말을 찾으라 했지⁠. 자네는 말 대신 자기 이름을 썼고⁠, 사람이 짐을 쌌다⁠.⁠”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 뚜껑이 한 번 울렸다⁠.

“⁠6월 전원회의가 끝나면 자네 이름이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른다⁠. 비준 자리에 한 번 오른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알았습니다⁠.⁠”

“⁠알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 자네는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고 하기 전에 먼저 썼어⁠.⁠”

전화가 끊겼다⁠. 학철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1면 두 장 옆에⁠, 혜산으로 간 아들의 문건 사본이 서랍 맨 위에 있었다⁠. 비준 자리의 볼펜 자국이 뒷면까지 배어 있었다⁠.

*

4월 26일 수요일 저녁 여덟 시⁠, 윤설향은 돈주 한경희의 집 윗방에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 어젯밤 열병식을 녹화로 내보냈다⁠. 전기는 경희의 집 지붕에 얹은 중국산 태양광판에서 들어왔다⁠. 화면이 두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화면에 주석단 앞줄이 잡혔다⁠. 붉은 의자 곁에 털깃 코트가 서 있었다⁠. 경희가 무릎을 쳤다⁠.

“⁠봐라⁠, 또 그 코트다⁠. 값이 또 오른다⁠.⁠”

“⁠털깃이 더 길어졌슴다⁠.⁠”

“⁠그럼 장백 재단사한테 털깃 한 치 더 달라고 해야지⁠. 오백 벌 날은 잡혔다⁠. 5월 첫 주 밤⁠, 배로 건넌다⁠. 초소장이 새로 왔는데 아직 돈 냄새를 모른다⁠.⁠”

설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털깃 코트는 소매가 손목에 꼭 맞았다⁠. 궤짝 속 성민의 코트는 소매가 손가락 끝까지 내려왔다⁠. 같은 공장⁠, 같은 본이었다⁠. 키가 달랐다⁠.

경희가 텔레비전 단추를 손가락으로 눌러 소리를 키웠다⁠. 해설원이 「⁠백두의 혈통을 이으신⁠」을 세 번째로 말할 때 경희가 하품을 했다⁠.

“⁠이 해설원은 해마다 같은 말만 한다⁠. 목소리는 좋다⁠. 저 목소리로 코트 광고를 하면 천 벌은 판다⁠.⁠”

“⁠형님⁠, 그런 말 밖에서 하지 마시라요⁠.⁠”

“⁠밖에서는 안 한다⁠. 집 안에서도 니 앞에서만 한다⁠. 니는 동생 일로 입이 무거워졌으니까⁠.⁠”

설향은 웃지 않았다⁠. 경희가 해바라기씨 한 줌을 설향 손바닥에 쏟아 주었다⁠. 화면에서 바퀴 스물두 개짜리 발사 차량이 지나갔다⁠. 경희는 씨를 까며 바퀴를 셌다가⁠, 열몇 개에서 그만두었다⁠.

“⁠성민이 면회는 갔다 왔니⁠?⁠”

“⁠다음 주임다⁠. 콩기름 두 병 넣을 검다⁠.⁠”

“⁠세 병 넣어라⁠. 한 병은 내가 낸다⁠.⁠”

설향이 경희를 보았다⁠. 경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백 벌 다 팔면 갚아라⁠. 이자는 안 받는다⁠. 니 할머니 사탕 외상 갚는 거다⁠.⁠”

화면이 다시 끊겼다⁠. 태양광판 전기가 밤이 되어 바닥나고 있었다⁠. 검은 화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가⁠, 화면이 이어지자 사라졌다⁠. 주석단 앞줄 붉은 의자의 오른편은 녹화 방송에서도 비어 있었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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