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26자)

아들의 문건

곁가지는 친다 · 윤서각

4월 3일 월요일 오전 열한 시⁠, 리학철은 본부청사 3층 끝 검토실에서 문정숙과 마주 앉았다⁠. 1월에 성에로 덮였던 검토실 창문이 맑았다⁠. 창밖 본부청사 마당의 버드나무는 가지를 친 자리마다 연두색 눈을 내밀고 있었다⁠.

문정숙은 서류철 둘을 탁자에 올렸다⁠. 하나는 학철이 아침 아홉 시에 총무부로 보낸 조직지도부 검토 의견이었고⁠, 하나는 주석단 배치도 세 장이었다⁠.

“⁠배치도는 고맙습니다⁠. 총무부 안을 맨 위에 올려 주셨더군요⁠.⁠”

“⁠먼저 온 순서입니다⁠. 총무부 안이 3월 27일⁠, 선전선동부 안이 28일 아침⁠, 중앙군사위원회 안이 28일 오후에 왔습니다⁠.⁠”

“⁠과장 동지는 순서로 의견을 내시는군요⁠.⁠”

“⁠순서는 의견이 아닙니다⁠.⁠”

문정숙이 은 줄 달린 안경을 코끝에 걸고 두 번째 서류철을 폈다⁠. 학철이 쓴 검토 의견 두 장 뒤에 먹지 여섯 장을 복사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먹지를 뒤집어 찍은 것이라 글씨가 바로 읽혔다⁠.

「⁠결정문 부록의 보위성 자료 사본 세 장은 작성자가 같은 날 쓴 원본 먹지와 내용이 다르다⁠. 사본 세 장은 뒷면에 볼펜 자국이 없다⁠. 조직지도부는 사본 세 장을 부록에서 뺄 것을 의견으로 붙인다⁠.⁠」

“⁠총무부는 사본을 고친 적이 없습니다⁠. 사본은 받은 대로 붙였습니다⁠.⁠”

“⁠받은 대로 붙이셨으면⁠, 받은 사본이 다른 손에서 고쳐졌다는 말이 됩니다⁠. 어느 손인지는 조직지도부가 묻지 않겠습니다⁠. 의견에도 쓰지 않았습니다⁠.⁠”

문정숙은 안경을 벗지 않았다⁠. 먹지 사진의 맨 마지막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2월 3일 장이었다⁠. 거꾸로 찍혔다가 바로 뒤집힌 글씨 끝에 「⁠호위사령부 중위 리정훈⁠」이 있었다⁠.

“⁠과장 동지⁠. 이 의견을 거두시면⁠, 목록 맨 아래 줄을 빼 드리겠습니다⁠. 총무부장 동지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 버드나무에서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가 날아갔다⁠.

“⁠목록은 부록입니다⁠. 부록의 줄 하나는 과장 동지가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빠질 수 있습니다⁠. 의견 한 장만 거두시면 됩니다⁠. 아드님이 다치지 않습니다⁠.⁠”

“⁠의견은 오늘 아침 아홉 시에 나갔습니다⁠. 나간 의견은 거두지 않습니다⁠. 조직지도부 절차입니다⁠.⁠”

“⁠절차 뒤에 숨으시는 겁니까⁠, 아드님 앞에 서시는 겁니까⁠?⁠”

“⁠총무부 과장 동무⁠.⁠”

학철이 처음으로 문정숙의 직함을 끝까지 불렀다⁠.

“⁠부록에 고친 사본 세 장이 붙은 채 결정문이 나가면⁠, 김평일 일가는 하지 않은 말 때문에 칩니다⁠. 그다음 해에는 누가 또 하지 않은 말 때문에 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1월에 과장 동무가 말했습니다⁠. 이름을 밝히고 치는 것이 더 바르다고⁠. 밝히는 이름이 고친 이름이면 바르지 않습니다⁠.⁠”

문정숙은 서류철 둘을 겹쳐 들고 일어났다⁠. 안경을 벗어 목에 늘어뜨렸다⁠.

“⁠곁가지 손자가 4월 25일 주석단 끝에 서면 다음 날 1면에 사진이 납니다⁠. 사진 한 장이면 군이 나뉩니다⁠. 부록은 그것을 막는 종이였습니다⁠.⁠”

“⁠막는 종이가 거짓말이면 군은 종이를 보지 않고 사람을 봅니다⁠.⁠”

문정숙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힌 뒤 학철은 탁자 위에 남은 연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문정숙이 두고 간 연필이었다⁠. 끝이 뭉툭하게 닳아 있었다⁠.

*

4월 5일 수요일 오후 세 시⁠, 윤설향은 혜산 장마당 매대에서 시장관리원 박옥순이 오기를 기다렸다⁠. 철사 옷걸이에 걸린 것은 봄 점퍼 다섯 벌과⁠, 기둥의 신문 사진 아래 소매 긴 털깃 코트 한 벌뿐이었다⁠. 압록강 얼음은 다 녹았다⁠. 강물 소리가 장마당 지붕 너머까지 들렸다⁠.

옥순보다 조영수가 먼저 왔다⁠. 사복 차림이었다⁠. 매대 앞에 서서 코트를 한 번 보고 설향을 보았다⁠.

“⁠평양 답이 내려왔소⁠.⁠”

설향은 손에 쥐고 있던 옷걸이를 내려놓았다⁠.

“⁠결정문 부록에서 혜산 사진이 빠졌소⁠. 사진이 빠지니 동무 진술서는 쓸데가 없어졌소⁠. 동무 동생은 노동단련대로 가오⁠.⁠”

“⁠쓸데가 없어졌으면 동생은 왜 안 내보냄까⁠?⁠”

“⁠잡아 온 사람은 쓸데가 없어도 어디로든 보내야 하오⁠. 그냥 내보내면 잡은 사람이 틀린 게 되오⁠.⁠”

설향은 조영수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조영수가 먼저 눈을 돌렸다⁠.

“⁠어느 단련대임까⁠?⁠”

“⁠혜산 단련대요⁠. 멀리 안 가오⁠.⁠”

“⁠얼마나 있슴까⁠?⁠”

“⁠그건 단련대가 정하오⁠.⁠”

“⁠면회는⁠?⁠”

“⁠한 달에 한 번⁠. 먹을 걸 넣을 수 있소⁠.⁠”

조영수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서 가려다⁠, 기둥의 코트를 한 번 더 보았다⁠.

“⁠동무가 평양에서 한 진술이 사진을 뺐다고들 하오⁠. 동무 입으로 동생 일을 연 거요⁠.⁠”

“⁠본 대로 말했슴다⁠.⁠”

“⁠본 대로 말하면 그렇게 되오⁠.⁠”

조영수가 장마당 통로 끝으로 사라졌다⁠. 오후 세 시 십 분⁠, 박옥순이 장세 공책을 들고 매대 앞에 왔다⁠. 간부 집 아내답게 털 목도리를 둘렀다⁠. 옥순이 걸린 옷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점퍼 다섯⁠, 코트 하나⁠. 코트는 육백오십 위안이니까 육십오⁠.⁠”

“⁠코트는 안 파는 거임다⁠.⁠”

“⁠걸어 놨으면 파는 거다⁠.⁠”

“⁠기럼 내리겠슴다⁠.⁠”

설향은 기둥에서 코트를 내렸다⁠. 소매가 설향의 팔 위로 길게 늘어졌다⁠. 옥순이 공책에 점퍼 다섯 벌만 적고 연필을 귀에 꽂았다⁠.

“⁠동생 일은 들었다⁠. 단련대 밥은 강냉이다⁠. 콩기름 한 병 넣어 주라⁠. 단련대 지도원이 반은 먹고 반은 넘겨준다⁠.⁠”

“⁠반이면 두 병 넣어야겠슴다⁠.⁠”

옥순이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향은 코트를 개어 비닐에 싸서 매대 밑 궤짝에 넣었다⁠. 궤짝 뚜껑을 닫고 뚜껑 위에 걸터앉았다⁠. 매대 기둥의 신문 사진 속 털깃 코트만 남아 강바람에 비닐째 흔들렸다⁠.

*

4월 10일 월요일 저녁 일곱 시⁠, 리학철은 호위사령부 정문 맞은편 가로수 아래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정문 보초 둘이 학철을 세 번 쳐다보았다⁠. 정훈이 근무를 마치고 나온 것은 일곱 시 이십 분이었다⁠. 아버지를 보고 걸음을 늦추었다⁠.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집에 안 오니까⁠.⁠”

“⁠바빴습니다⁠.⁠”

두 사람은 가로수 길을 따라 걸었다⁠. 정훈은 아버지보다 반 걸음 앞서 걸었다⁠.

“⁠결정문 부록에 목록이 있다⁠. 곁가지와 접촉한 사람들⁠. 맨 아래 줄에 네 이름이 있다⁠. 2월 3일 외교단 숙소⁠.⁠”

정훈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목록을 아버지가 만드셨습니까⁠?⁠”

“⁠목록은 총무부가 만들었다⁠. 출처는 보위성 대위 보고서다⁠. 대위가 처음 쓴 보고서를 증거로 붙인 건 나다⁠.⁠”

“⁠아버지 손으로 제 이름을 증거에 붙이셨습니까⁠?⁠”

“⁠고친 보고서를 떼어 내려면 고치지 않은 보고서를 다 붙여야 한다⁠. 한 장만 빼면 나머지가 다 증거가 못 된다⁠.⁠”

정훈은 웃었다⁠. 웃음이 짧게 끊겼다⁠. 1월 말 간부과 사무실에서 진경훈이 웃던 웃음과 같았다⁠.

“⁠진 부부장 동지께서 저더러 당분간 향도 동지 곁 사람들 모임에 나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목록에 이름 오른 사람은 곁에 둘 수 없다고⁠. 사격 표창 받은 사람도 목록에 오르면 소용없다고⁠.⁠”

“⁠알았다⁠.⁠”

“⁠아버지는 또 알았다고 하십니다⁠.⁠”

정훈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문 보초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정훈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향도 동지 곁 사람들은 아버지를 곁가지 편으로 봅니다⁠. 총무부는 아버지를 원로 편으로 봅니다⁠. 원로들은 아버지가 누구 편인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아무 편도 아니시니까 아무도 아버지를 안 지킵니다⁠. 저도 못 지킵니다⁠.⁠”

“⁠너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 다음 주에 양강도 국경 군단으로 간다⁠. 정치부 군관 자리다⁠.⁠”

정훈이 아버지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정훈의 귀 끝이 보였다⁠. 어머니를 닮아 조금 접힌 귀였다⁠.

“⁠누가 정했습니까⁠?⁠”

“⁠내가⁠.⁠”

“⁠호위사령부 군관 이동은 김정은 동지 비준 사항입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입니다⁠. 비준 없는 문건은 한 장도 안 내보낸다고⁠.⁠”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보내십니까⁠?⁠”

학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훈이 경례 비슷한 것을 하다 말고 손을 내렸다⁠. 정훈이 돌아서 정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초가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

4월 11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오혜림은 외교단 숙소 안내원 방 책상 앞에서 물병을 들어 올렸다⁠. 3월 8일에 꽂아 둔 버들가지 밑동에서 하얀 뿌리가 실처럼 여러 가닥 나와 있었다⁠. 버들개지는 지고⁠, 껍질 마디마다 연두색 잎눈이 터졌다⁠. 혜림은 물병의 물을 갈았다⁠.

책상 전화가 울렸다⁠. 장명길이었다⁠.

“⁠조직지도부 의견이 총무부로 갔다⁠. 네 먹지가 붙었다⁠.⁠”

“⁠예⁠.⁠”

“⁠오늘부터 네 보고서는 한 부만 쓴다⁠. 나한테만⁠.⁠”

“⁠총무부 사본은 누가 씁니까⁠?⁠”

“⁠이제 아무도 안 쓴다⁠. 총무부가 보위성 보고서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전화가 끊겼다⁠. 혜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서랍의 먹지를 꺼내지 않았다⁠. 한 부만 쓰는 보고서에는 먹지가 필요 없었다⁠. 복도에서 털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나더니 인철이 문을 두드렸다⁠. 인철이 문틈으로 물병을 보았다⁠.

“⁠곁가지가 뿌리를 내렸소⁠.⁠”

“⁠버드나무는 꺾어서 꽂아도 삽니다⁠.⁠”

“⁠프라하에 가져가도 살겠소⁠?⁠”

“⁠세관에서 빼앗깁니다⁠. 버섯 칼처럼⁠.⁠”

인철이 웃었다⁠. 혜림은 이번에도 입술을 물지 않았다⁠.

*

4월 12일 수요일 오전 아홉 시⁠, 리학철은 간부과 사무실 책상 위에 문건 한 장을 펼쳤다⁠. 회색 문건철 열두 개와는 다른 흰 표지였다⁠.

「⁠호위사령부 중위 리정훈을 양강도 국경 경비 군단 정치부 군관으로 이동함⁠」

호위사령부는 김정은을 지키는 부대였다⁠. 부대 군관 하나하나의 이동을 김정은이 직접 비준했다⁠. 문건 아래 비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열두 장의 비준 자리처럼 133일째 비어 있었다⁠.

부과장 최영남이 노동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늘 하던 대로 사설을 보고 말투로 읽으려다⁠, 과장 책상 위의 흰 표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과장 동지⁠, 그 문건은⁠…⁠.⁠”

“⁠사설 읽으시오⁠.⁠”

최영남은 신문을 펼쳤다⁠. 「⁠온 나라가 하나의 대오가 되어⁠」로 시작하는 첫 줄을 읽었다⁠. 읽는 동안 눈이 신문과 과장 책상 사이를 세 번 오갔다⁠. 둘째 문장에서 최영남은 「⁠대오⁠」를 「⁠대리⁠」로 잘못 읽고 얼굴이 붉어졌다⁠. 학철은 고쳐 주지 않았다⁠.

학철은 볼펜을 들었다⁠. 비준 자리 위에 볼펜 끝을 대었다가 떼었다⁠. 1월 10일 특각 앞방에서 연필로 그린 네모 안의 「⁠대리⁠」 두 글자가 떠올랐다⁠. 학철은 앞방에서 대리 비준은 지방에서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름이 바뀌면 다음 이름부터 묻는다고 말했다⁠.

학철은 비준 자리에 썼다⁠.

「⁠조직지도부 간부과장 리학철⁠」

이름 석 자 뒤에 서명을 했다⁠. 볼펜을 세게 눌렀다⁠. 종이 뒷면까지 자국이 배었다⁠. 비준 없이 나가는 첫 문건이었고⁠, 비준 자리에 과장의 이름이 오른 첫 문건이었다⁠. 학철은 문건을 봉투에 넣어 최영남에게 건넸다⁠.

“⁠호위사령부 간부부로⁠. 오늘 안에⁠.⁠”

“⁠알았습니다⁠.⁠”

최영남이 봉투를 받아 들고 나갔다⁠. 문간에서 한 번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훈이 탈 혜산행 열차는 4월 14일 금요일 저녁 여덟 시 평양역 출발이었다⁠. 학철은 금요일 저녁 여덟 시에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여덟 시 십 분에도 울리지 않았다⁠. 학철은 수화기를 들어 신호가 오는지 들어 보고 내려놓았다⁠. 신호는 왔다⁠. 책상 왼편의 회색 문건철 열두 개 곁에⁠, 아들의 문건을 담았던 빈 흰 표지가 접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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