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72자)

석로의 무릎

학 권법을 만든 학의 응징 · 마하솔

위소청은 낮에 둔전 말뚝을 따라 개펄 동쪽 끝까지 걸었다⁠. 어제 진영에서 무릎을 꿇었던 교두가 뒤를 따랐다⁠. 다섯 해 전 학포로 보낸 아이였다⁠. 학권문에 있을 때는 허수아비 목을 꺾고 나면 꼭 짚 부스러기를 털어 주던 아이였다⁠. 지금은 손등이 터 있었고⁠, 말을 아꼈다⁠.

“⁠지난겨울 일을 말해 보게⁠.⁠”

교두는 한참 걷기만 했다⁠. 도랑 하나를 건너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병들 손이 늘지 않아서 대사형이 보여 주겠다고 했습니다⁠. 갈대숲에서 두 마리를 몰아냈습니다⁠. 한 마리가 날개를 다쳐 못 떴고⁠, 다른 한 마리가 다친 놈 앞을 막았습니다⁠. 막은 놈을 대사형이 잡았습니다⁠. 목을 감추었다 펴는 힘을 쥐고 반 바퀴⁠. 사병 삼백이 보는 앞에서요⁠.⁠”

교두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위소청은 기다렸다⁠.

“⁠교두 몇이 그 자리에서 속이 불편해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사형은 그날 저녁 깃을 뽑아 깃대에 달았습니다⁠. 이튿날부터 사병들이 짚 두루미를 엮었습니다⁠.⁠”

위소청은 걸음을 멈추었다⁠. 날개를 다친 놈⁠. 앞을 막은 놈⁠. 위소청은 학봉 샘가에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나는 갈대 속에 있었다⁠. 날개를 다친 채로⁠. 단학은 숨어 있지 않았다⁠. 단학은 먼저 몰려 나왔다가 짝의 등 뒤에 남은 새였다⁠.

“⁠은은 사병들에게 가는가⁠?⁠”

“⁠사병들은 쌀을 받습니다⁠. 하루 두 되요⁠. 은은 막부로 갑니다⁠. 저희 교두들은 이제 저희를 막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학권문 사람이라고 하면 사병들이 웃어서요⁠.⁠”

위소청은 말뚝 하나 앞에 섰다⁠. 말뚝 머리에 새겨진 표식이 관부의 것이 아니었다⁠. 위소청은 손톱으로 표식의 홈을 쓸어 보았다⁠. 홈 안에 아직 나뭇진이 남아 있었다⁠.

*

석로는 움막 문간에 앉아 오동나무 함을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팔을 맞춰 준 갈대 베는 사내가 빈 움막 하나를 내주었다⁠. 갈대 지붕 틈으로 별이 보였고⁠, 바닥에서 짠물 냄새가 올라왔다⁠. 각운과 둘째 사형은 움막 앞에 마른 갈대를 깔고 누웠다⁠. 둘째 사형은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각운은 누운 채로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었다⁠.

달이 개펄 위로 오를 무렵 단학이 움막 앞으로 걸어왔다⁠. 발을 높이 들어 진흙을 건너왔다⁠. 진흙에서 발을 뽑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단학은 문간에서 세 걸음 떨어져 한 다리로 섰다⁠.

석로는 함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문설주가 손 닿는 데 있었다⁠. 석로는 문설주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손을 허리 뒤로 돌려 깍지를 꼈다⁠. 왼발을 들었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한 숨⁠, 두 숨⁠, 세 숨⁠. 오늘은 숨이 빨리 내려갔다⁠. 배에서 열흘 동안 흔들린 무릎이 오히려 땅을 반겼다⁠.

“⁠우물가에서 아침 내내 넘어지던 아이가 너였구나⁠.⁠”

석로의 숨이 흔들렸다⁠. 석로는 숨을 붙잡았다⁠.

“⁠넘어질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셨지요⁠.⁠”

“⁠웃었다⁠. 두루미는 웃을 때 고개를 기울인다⁠.⁠”

석로는 웃었다⁠. 웃느라 숨이 흔들려 다음 말을 놓쳤다⁠. 다시 숨을 내렸다⁠.

“⁠예순 해 동안 그게 꾸지람인 줄 알았습니다⁠.⁠”

“⁠꾸지람도 조금 있었다⁠. 아이가 무릎을 굽히고 섰다⁠.⁠”

“⁠지금도 굽힙니다⁠. 펴면 소리가 나서요⁠.⁠”

석로의 무릎이 마침 소리를 냈다⁠. 단학이 고개를 기울였다⁠. 석로는 이번에는 꾸지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른 무릎 소리가 어르신 목소리보다 큽니다⁠. 송구합니다⁠.⁠”

단학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더 기울였다⁠. 석로는 발밑의 함을 내려다보았다⁠.

“⁠비급을 누구에게 건넬지 아직 못 정했습니다⁠. 어르신께 여쭈어도 됩니까⁠?⁠”

“⁠내게 묻지 마라⁠. 집사가 건넨다⁠. 네 조사가 그렇게 정한 데는 까닭이 있다⁠. 장문인도 새도 아닌 손이 건네라고⁠.⁠”

석로의 무릎이 꺾였다⁠. 석로는 문간에 주저앉았다⁠. 단학은 주저앉은 석로를 내려다보다가 개펄로 돌아갔다⁠. 석로는 함을 다시 무릎 위에 올렸다⁠. 오동나무가 차가웠다⁠.

*

위소청은 같은 밤 막료의 막사에 들어갔다⁠. 막료는 화로 곁에서 술을 데우고 있었다⁠. 위소청은 막료가 권하는 잔을 받지 않았다⁠.

“⁠오늘 낮에 둔전 말뚝을 따라 걸었소⁠. 동쪽 도랑 셋 가에 박힌 말뚝 머리마다 표식이 새겨져 있었소⁠. 관부의 붉은 표식이 아니었소⁠. 당신 집안의 표식이었소⁠.⁠”

막료는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내려놓았다⁠.

“⁠배에서 말씀드렸지요⁠. 가는 길에 조금씩 준다고⁠. 내 몫이 그 조금이오⁠. 삼천 섬 가운데 천 섬이오⁠. 이천 섬은 북쪽으로 가오⁠. 이천 섬이면 병사 한 무리가 겨울을 나오⁠.⁠”

“⁠천 섬 때문에 움막 쉰 채를 걷소⁠?⁠”

“⁠천 섬이 없으면 이천 섬도 없소⁠. 나 같은 사람이 제 몫을 보고 움직이니 둔전이 생기는 거요⁠. 몫이 없으면 누가 개펄에 말뚝을 박겠소⁠? 안무사께서 직접 박으시겠소⁠?⁠”

위소청은 화로의 불을 보았다⁠. 막료의 말은 더러웠고⁠, 더러운 만큼 맞았다⁠. 학권문도 몫을 보고 움직였다⁠. 마을 셋의 세금과 곳간의 쌀이 학권문의 몫이었다⁠.

“⁠동지를 미루시오⁠. 봄까지⁠.⁠”

“⁠못 미루오⁠. 안무사의 명이오⁠. 봄에 모를 내려면 겨울에 도랑을 다 파야 하오⁠. 장문인⁠, 정본만 넘기시오⁠. 넘기시면 학권문은 무사하고⁠, 마을 셋도 무사하오⁠. 학포의 학은 남쪽 소금밭 너머로 가면 되오⁠. 학은 날개가 있잖소⁠.⁠”

위소청은 일어났다⁠. 막사 문을 나서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막료가 등 뒤에서 술잔을 다시 채우는 소리가 났다⁠.

*

단학은 개펄 한가운데 도랑을 따라 걸었다⁠. 썰물이 빠진 개펄은 달빛에 젖어 번들거렸다⁠. 단학은 디딜 때마다 진흙의 무른 정도를 발가락으로 더듬었다⁠. 지난겨울에는 이 자리가 갈대숲이었다⁠. 지금은 도랑이 갈대숲을 둘로 갈랐고⁠, 도랑 가에 말뚝이 줄지어 있었다⁠.

단학은 말뚝 하나 앞에서 멈추었다⁠. 짝이 쓰러진 자리였다⁠. 지난겨울 단학은 날개를 다친 채 이 자리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갈대 속에 있었다⁠. 갈대가 사라진 지금 다섯 걸음 떨어진 자리는 맨 진흙이었다⁠. 숨을 데가 없었다⁠. 단학은 말뚝 옆에 한 다리로 섰다⁠. 말뚝 머리에 막료 집안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단학은 표식을 읽을 줄 몰랐다⁠. 사람이 박은 나무라는 것만 알았다⁠. 나무에서 아직 송진 냄새가 났다⁠. 짝의 냄새는 걷어 낸 갈대와 함께 실려 나가고 없었다⁠. 진흙에는 사병들의 맨발 자국만 겹겹이 찍혀 있었다⁠.

장강에서 함께 내려온 다섯이 남쪽 하늘에서 내려와 단학 곁에 섰다⁠. 늙은 수컷이 말뚝을 보았다⁠.

“⁠여기다⁠.⁠”

“⁠안다⁠.⁠”

“⁠동지 새벽에 무리가 더 온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무리가 학포를 마지막으로 내려앉을 데로 안다⁠. 이 자리를 모르고 내려앉는다⁠.⁠”

단학은 말뚝을 보았다⁠. 동지 새벽⁠, 물이 가장 낮게 빠지는 때였다⁠. 대사형의 편지가 정한 때였다⁠.

“⁠내려앉게 해라⁠. 개펄은 아직 개펄이다⁠.⁠”

*

석로는 자정이 넘어 갈대 밟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여럿이었다⁠. 걸음이 고르지 않았다⁠. 사병들의 걸음이었다⁠. 석로는 함을 무명 띠로 가슴에 동여맸다⁠. 각운이 먼저 일어나 문간으로 갔고⁠, 둘째 사형이 코 골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횃불 하나가 움막 앞에 멈추었다⁠. 대사형이었다⁠. 뒤에 사병 다섯이 있었다⁠.

“⁠집사 어른⁠, 비급을 주십시오⁠. 장문인께서 막부에 넘기신다니 제가 대신 들고 가겠습니다⁠. 어른 무릎으로 막부 계단은 높습니다⁠.⁠”

“⁠장문인이 시키셨느냐⁠?⁠”

대사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째 사형이 대사형 앞을 막아섰다⁠. 대사형의 손이 둘째 사형의 팔을 품었다⁠. 팔 접기였다⁠. 대사형은 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둘째 사형의 어깨에서 뼈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둘째 사형이 무릎을 꿇었다⁠. 각운이 들어갔다⁠. 대사형의 발이 각운의 디딘 다리를 쓸었다⁠. 각운은 무릎을 들어 넘었다⁠. 넘은 발을 내리려는 순간 사병 하나가 각운의 등을 밀었다⁠. 더듬지 않은 자리였다⁠. 각운은 진흙에 얼굴을 박았다⁠.

석로는 문간에 섰다⁠. 함이 가슴에 묶여 있었다⁠. 석로는 왼발을 들었다⁠. 오른 다리 하나로 문간을 막았다⁠. 예순 해 전 우물가에서 처음 배운 자세였다⁠. 대사형이 웃었다⁠.

“⁠어른⁠, 비키십시오⁠.⁠”

대사형의 손이 함으로 왔다⁠. 석로는 두 팔을 앞으로 모아 접었다⁠. 대사형의 손목이 석로의 팔 안으로 들어왔다⁠. 석로는 디딘 다리 위에서 몸을 사분의 일 바퀴 돌렸다⁠. 마당에서 단학이 둘째 사형을 물독에 보낼 때 쓰던 돌림이었다⁠. 대사형의 몸이 석로 옆을 비껴 지나갔다⁠. 문설주에 어깨를 부딪쳤다⁠.

대사형이 돌아섰다⁠. 웃음이 없었다⁠. 대사형은 함을 보지 않고 석로의 디딘 다리를 보았다⁠. 발이 날아왔다⁠. 발등이 아니라 발뒤꿈치였다⁠. 학권문에서 무릎 꺾기라고 부르는 살수였다⁠. 발뒤꿈치가 석로의 오른 무릎 옆을 쳤다⁠.

석로는 무릎이 꺾이는 소리를 들었다⁠. 예순 해 동안 무릎이 낸 어느 소리와도 달랐다⁠.

*

단학은 움막에서 오는 소리를 듣고 개펄을 건너 뛰었다⁠. 날개를 펴 반은 날고 반은 달렸다⁠. 움막 앞에 닿았을 때 석로가 문간에 쓰러져 있었다⁠. 대사형이 석로 가슴의 함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단학은 날개를 폈다⁠. 펴진 날개가 횃불을 가렸다⁠. 사병 다섯이 뒤로 물러났다⁠. 대사형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사형의 손이 함의 띠를 쥐었다⁠. 단학은 부리를 내리쳤다⁠. 부리 끝이 대사형의 팔뚝 안쪽 마디를 쪼았다⁠. 대사형의 손가락이 펴졌다⁠. 띠를 놓쳤다⁠.

“⁠각운아⁠.⁠”

석로가 쓰러진 채 불렀다⁠. 각운이 진흙투성이 얼굴로 기어 왔다⁠. 석로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의 띠를 풀어 함을 각운의 품에 밀어 넣었다⁠.

“⁠갈대숲으로⁠. 더듬은 자리로만 밟아라⁠.⁠”

각운은 함을 안고 일어나 갈대숲으로 뛰었다⁠. 대사형이 쫓으려다 단학의 펴진 날개 앞에서 멈추었다⁠. 개펄 너머 둑 위로 횃불 여럿이 움직였다⁠. 위소청의 목소리가 났다⁠. 대사형은 펴진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사병들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

위소청은 움막 문간에 무릎을 꿇었다⁠. 석로의 오른 무릎이 옆으로 꺾여 있었다⁠. 위소청은 손바닥을 무릎에 얹었다가 떼었다⁠. 둘째 사형이 빠진 어깨를 붙잡고 신음했고⁠, 갈대 베는 사내가 등잔을 들고 왔다⁠. 사내는 막대에 묶인 팔로 등잔을 높이 들어 석로의 무릎을 비추었다⁠.

“⁠학권문 집사요⁠, 부러진 건 집사가 맞춘다더니⁠.⁠”

“⁠내 것은 남이 맞추는 거다⁠.⁠”

석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위소청이 둘째 사형의 빠진 어깨를 먼저 끼워 넣었다⁠. 둘째 사형이 소리를 질렀다가 멈추었다⁠. 위소청은 석로의 무릎 앞으로 돌아왔다⁠. 석로의 무릎은 끼워 넣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어른⁠.⁠”

석로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려 했다⁠. 위소청이 붙잡았다⁠. 석로는 위소청의 팔을 뿌리쳤다⁠. 왼 다리를 땅에 디디고⁠, 오른 다리를 들려 했다⁠. 오른 다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다⁠. 석로는 꺾인 오른 다리로 땅을 짚고 왼 다리로 서려 했다⁠. 꺾인 무릎이 몸을 받지 못했다⁠. 석로는 문간에 도로 주저앉았다⁠.

단학이 석로 앞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위소청은 숨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단학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개가 석로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석로의 귀에는 두루미 울음만 들어갔다⁠. 석로는 울음을 오래 들었다⁠. 울음이 그치자 석로는 위소청을 올려다보았다⁠.

“⁠장문인⁠, 저 새가 지금 뭐라고 합니까⁠? 저는 이제 안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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