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47자)
매의 목
학 권법을 만든 학의 응징 · 마하솔
석로는 동이 트기 전 비각에 앉아 오동나무 함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잤다. 등잔 심지를 두 번 갈았다. 함을 열고 비급을 꺼내 맨 뒤 봉한 장을 등잔 가까이 대 보았다. 삼베 실은 종이보다 희었다. 종이는 삼백 년 묵은 누런빛인데 실은 기껏해야 예순 해쯤 묵은 빛이었다. 실이 지나간 바늘구멍 옆에 구멍이 한 줄 더 있었다. 한 번 꿰맸던 자리를 끊고 다시 꿰맨 자국이었다.
석로는 손톱으로 바늘구멍을 세다가 문간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막료가 비단 신을 벗어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발소리를 줄이려고 벗은 신이었다.
“집사 어른, 일찍 일어나셨소.”
“늙으면 잠이 먼저 일어납니다.”
막료는 문지방을 넘어 석로 앞에 앉았다. 소매에서 은덩이 하나를 꺼내 함 옆에 놓았다. 손바닥만 한 덩이였다.
“강남 막부에 문서고가 있소. 따뜻한 방에 앉아 서책을 지키는 자리요. 방바닥에 불을 넣으면 무릎이 덜 시리실 거요. 집 한 채도 딸려 있소. 어른이 건넬 곳만 정해 주시면 되오.”
석로는 은덩이를 집어 들었다. 젊을 때 장터에서 배운 버릇대로 은덩이 귀퉁이를 어금니로 깨물어 보았다. 진짜 은이었다. 어금니가 시큰했다. 석로는 은덩이를 함 옆에 도로 내려놓았다.
“이가 시려서 못 받겠습니다.”
“은이 시리면 금으로 바꿔 드리리다.”
“금은 더 시리지요.”
막료는 웃었다. 웃는 얼굴로 은덩이를 소매에 다시 넣었다.
“어른이 건네지 않으면 장문인이 건넬 방법을 찾으실 거요. 장문인은 방법을 찾는 분이오. 어른도 아시지요.”
막료가 나간 뒤 석로는 어금니를 혀로 문질렀다. 시큰한 것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
단학은 같은 시각 학봉 샘가에 있었다. 위소청이 오르는 바위에서 비탈 하나 아래였다. 샘은 바위틈에서 솟아 손바닥 두 개만 한 웅덩이를 이루었다가 갈대 사이로 흘러내렸다. 삼백 년 동안 샘의 자리는 그대로였다. 갈대는 몇백 번 새로 났다.
하늘 높은 데서 매 한 마리가 원을 그렸다. 단학의 목이 저절로 어깨 사이로 내려갔다. 몸이 먼저 한 일이었다. 매는 학봉 위를 두 바퀴 돌고 서쪽 골짜기로 사라졌다. 단학은 목을 다시 폈다. 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각운이 비탈을 올라왔다. 숨이 찼는데도 샘가에 닿자마자 왼발을 들었다. 한 숨, 두 숨, 다섯 숨이 지나 각운의 숨이 발목에 닿았다.
“어르신이 오늘 아침 마당에서 비급을 편대요. 장문인이 봉한 장까지 열라고 했대요. 봉한 장에 뭐가 있어요?”
단학은 샘물을 보았다. 웅덩이 위로 단학의 붉은 정수리가 비쳤다.
“내가 있다.”
“네?”
“가서 보아라.”
각운은 더 물으려다 들었던 발을 내렸다. 단학은 샘가에 남았다. 열 번째 장에 무엇이 그려졌는지 단학은 알았다. 마당에 내려가 비급을 덮어 버릴 수도 있었다. 날개 하나로도 탁자 위의 종이는 날릴 수 있었다. 단학은 날개를 펴지 않았다. 빚을 받으러 온 새가 제 빚을 감출 수는 없었다.
*
위소청은 이날 새벽에도 학봉에 올랐다. 바위에 한 다리로 서서 산 아래를 보았다. 한수를 따라 역참 말 한 필이 북쪽에서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말 위의 깃발이 붉었다. 어제 저녁 같은 깃발의 말이 지나가며 금나라 군사가 회수를 건넜다는 소식을 나루에 떨구고 갔다. 오늘 아침 말은 무슨 소식을 들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단학은 오지 않았다. 위소청은 혼자 서서 숨을 내렸다. 들리는 것은 바람뿐이었다. 서른 해 동안 새벽은 대부분 이랬다. 단학이 내려온 뒤로는 바람만 들리는 새벽이 다르게 들렸다.
봉한 장을 여는 것은 위소청이 밤새 정한 일이었다. 제자 백 명이 두루미의 춤을 보고 있었다. 춤만 보면 살수는 문파가 지어낸 손이 된다. 지어낸 손이라고 믿는 순간 제자들은 둘로 갈라진다. 마당에 남는 제자와 계곡에 내려가는 제자로. 봉한 장을 열면 백 명이 알게 된다. 살수도 조사의 붓끝에서 나왔다는 것을. 두루미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을. 위소청은 봉한 장 하나로 문파를 하나로 묶으려 했다.
계산은 맞았다. 위소청은 계산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고, 맞는 계산 하나 때문에 발바닥이 차가웠다.
*
단학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긴 탁자를 보았다. 아침 해가 현판의 금칠을 지나 탁자 위로 내려왔다. 탁자 둘레에 백 명이 모였다. 전공 장로와 막료가 앞줄에 앉았고, 아랫마을 촌장과 숯막골 사람들, 갈대골 노파가 뒤에 섰다. 숯막골 사람들은 어젯밤 일로 눈 밑이 검었다.
석로가 함을 들고 왔다. 함을 탁자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비급을 꺼내 한 장씩 넘겨 탁자에 펼쳤다. 붓으로 그린 두루미가 한 장에 하나씩 있었다.
첫 장은 한 다리로 서 있었다. 두 번째 장은 날개를 접어 앞으로 모았다. 세 번째 장은 목을 어깨 사이로 감추었다. 네 번째 장은 무릎을 배까지 들어 물을 건넜다. 다섯 번째 장은 몸을 옆으로 누였다. 여섯 번째 장은 부리 끝으로 무언가의 마디를 쪼았다. 일곱 번째 장은 날개를 다 폈다. 여덟 번째 장은 땅에서 발을 뗐다. 아홉 번째 장에는 두루미가 둘이었다. 둘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단학은 아홉 번째 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짝이 있었다. 조사의 붓은 짝의 정수리를 단학의 정수리보다 조금 더 붉게 칠했다. 삼백 년 전 조사는 학봉 샘가에 숨어서 둘을 그렸다. 단학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 두었다.
제자들이 탁자 앞으로 몰려들었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거, 물독에 처박을 때 그거잖아.”
“계곡에서 하던 거다. 무릎을 배까지.”
“새가 하던 게 다 여기 있네.”
둘째 사형이 세 번째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대사형이 목을 쥐려던 손이 허공을 쥐었던 아침을 모두가 기억했다. 셋째 사형은 네 번째 장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탁자 끝에서 각운이 여섯 번째 장을 오래 보았다. 아직 열지 않은 장이었다.
*
위소청은 웅성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탁자 앞으로 나갔다.
“어른, 마지막 장을 여시오.”
석로는 봉한 장 위에 손을 얹었다. 손등의 검버섯이 삼베 실 위에 놓였다.
“조사께서 봉하셨습니다.”
“제 사부의 사부가 이 실을 한 번 끊었소. 어른이 학권에 들던 무렵이오. 살수는 거기서 나왔소. 다시 꿰맨 것은 사부의 사부였고, 조사가 아니오.”
마당이 조용해졌다. 석로는 손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봉한 장입니다. 봉한 사람이 누구든.”
“어른, 백 명이 알아야 하오. 살수가 문파가 지어낸 손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면 문파가 둘로 갈라지오.”
“알면 하나가 됩니까?”
위소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리춤의 작은 칼을 꺼냈다. 칼날이 석로의 손가락 옆으로 내려갔다. 석로의 새끼손가락과 칼날 사이에 머리카락 한 올이 지나갈 만한 틈이 있었다. 위소청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실이 끊어졌다. 석로는 손을 거두지 않았지만, 위소청은 석로의 손바닥 아래에서 봉한 장을 빼냈다. 장이 펼쳐졌다.
*
단학은 열 번째 장을 보았다.
학봉 샘가였다. 샘 옆 갈대숲 아래에 새끼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새끼 위에 두루미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두루미의 부리가 매 한 마리의 목을 물고 있었다. 매의 목은 새의 목이 꺾일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림 아래에 조사의 글씨가 있었다.
「열 번째. 학이 매의 목을 꺾었다. 가르치지 않는다.」
단학의 몸이 먼저 기억했다. 삼백 년 전 봄이었다. 매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려왔다. 단학은 목을 감추었다가 폈다. 펴는 힘에 부리를 실었다. 매의 목을 물고, 디딘 다리 위에서 몸을 반 바퀴 돌렸다. 매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새끼는 살았다. 조사는 갈대숲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단학은 조사를 보았고, 조사는 단학을 보았다.
위소청이 한 다리로 섰다. 마당의 백 명이 장문인을 보았다.
“목을 감추었다 펴는 힘으로 쥐고, 디딘 다리 위에서 반 바퀴 돌리는 손이오. 학취수 끝에 손목을 반 바퀴 돌리는 것과 같소. 살수의 뿌리는 당신이오.”
단학은 열 번째 장을 내려다보았다. 탁자 둘레의 얼굴들이 단학을 보았다. 단학은 위소청에게 말했다.
“내가 했다.”
위소청이 단학의 말을 마당에 옮겼다. 계곡에 내려갔던 젊은 제자 둘이 탁자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둘째 사형은 물러나지 않았지만 세 번째 장에 짚었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각운은 여섯 번째 장 앞에 그대로 있었다. 갈대골 노파가 손자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
위소청은 마당의 얼굴들을 하나씩 보았다. 전공 장로가 먼저 소리를 냈다.
“보아라. 살수도 정본이다. 조사께서 그리신 손이다. 새도 꺾었다.”
살수를 익힌 제자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랫마을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숯막골 사람들은 열 번째 장의 매를 보다가 어젯밤 비탈에서 구른 산적을 떠올린 얼굴이 되었다. 위소청의 계산은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제자들이 하나로 모이는 소리가 났다.
갈대골 노파만 열 번째 장을 보지 않았다. 노파는 아홉 번째 장 앞에 서 있었다. 마주 보는 두루미 둘을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가 거두었다.
“늪에서 이거 봤어. 둘이 이렇게 마주 서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했어. 물이 무릎까지 오는 데서. 아버지가 보면 운이 좋다고 했어.”
노파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말했다. 위소청은 노파의 손가락이 짚었던 자리를 보았다. 두루미 둘 가운데 하나는 정수리가 조금 더 붉었다. 위소청은 사부에게서 아홉 번째 초식의 이름만 들었다. 마주 춤. 혼자서는 출 수 없는 초식이라 사부도 춘 적이 없었다. 위소청은 한 다리로 선 채 단학을 보았다. 단학은 아홉 번째 장을 등지고 열 번째 장에만 눈을 두고 있었다.
*
석로는 막료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막료는 탁자로 걸어와 열 번째 장을 내려다보았다. 부채를 접어 장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 장이면 되오. 나머지 아홉은 춤이고, 이 한 장이 학권이오. 동지까지 기다릴 것도 없소. 장문인, 이 장 하나만 떼어 주시오. 정본 약조는 이것으로 다 지킨 걸로 하리다.”
마당 둘레에서 숨소리가 났다. 위소청은 열 번째 장을 내려다보았다. 위소청의 손이 장의 가장자리로 갔다. 꿰맨 실이 끊어진 자리였다. 종이는 삼백 년 묵어 손가락 힘에도 찢어질 것이었다.
석로는 비급의 표지를 집어 들었다. 두꺼운 오동나무 판에 삼베를 바른 표지였다. 석로는 표지를 덮었다. 덮이는 표지 아래에 위소청의 손등이 있었다. 나무판이 손등을 눌렀다. 위소청은 손을 빼지 않았다. 막료의 부채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나무판 아래에서 장문인의 손등이 따뜻했다. 석로는 등에 업혀 조르던 아이가 두 팔로 제 목덜미를 감던 무게를 기억했다. 손바닥 아래의 손은 업혀 있던 시절보다 무거웠고, 무거운 만큼 오래 버텼다. 석로는 장문인의 눈을 보지 않았다. 표지에 바른 삼베의 올을 보았다. 올 사이로 오동나무 결이 비쳤다. 석로는 표지 위에 제 손바닥을 얹고 눌렀다. 무릎이 소리를 냈고, 석로는 처음으로 무릎 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비급은 집사가 건넵니다, 장문인.”